달빛 소나타(2)
- 여강 최재효
“미안하네, 이번에 같이 진급이 됐어야 하는데.......”
나와 동기생으로 늘 나와 단짝처럼 생활하던 김 부장이 오후에 나를 찾아왔다.
소장에게 진급 인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고 하면서 내 앞에서 애써 기쁨을
감추었다.
“진심으로 축하하네, 역시 사람은 진급을 하고 봐야 돼......”
나는 진심으로 동료이며 오랜 세월 동고동락한 김 부장의 승진을 축하해 주었다.
거울 속에 패배자의 얼굴이 우울하게 비치고 있었다. 나는 컨디션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 반가(半暇)를 내고 월미도를 찾았다. 바닷바람이 케케묵은 번뇌를 훑고 지나갔다.
차만 타면 20분 정도의 거리였지만 혼자서 바다를 찾은 것은 처음 같았다. 20년 넘게
제2의 고향인 인천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 왔지만 늘 나는 이방인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간의 객지생활이 영상처럼 스쳤다. 갑자기 내 자신이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 건너에 있는 횟집을 들어갔다.
“아주머니 여기 소주 한 병하고 안주 적당한 것으로 주세요.”
“네에……”
소주가 쓴맛이 있어 늘 막걸리를 마셨지만 횟집에 와서 막걸리를 찾는 다는 것이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이대로 직장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아니지, 평생 농사일을 해본 적이 없는 내가 이대로 내려간다면 혼자 계신 노모는 반길지 모르지만 네 아이들과 아내를 어떻게 설득 한단 말인가? 네 아이들은 한창 배울 시기이니 시골로 내려 간다면 대학진학이나 나중에 취업 문제도 문제가 될 것 같고 어쩐다? 그럼, 직장을 그만 두고 명예퇴직 신청을 내고 퇴직금으로 장사를 해봐? 그런데 장사를 해본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농사 보다는 장사가 낫지. 그래 그럼 전에 내가 생각 했던 쌀장사를 해봐?‘
“처음 오신 분 같은데? 서비스 잘 해드릴 테니 자주 오세요.”
40중반 아주머니가 우럭 회를 내 앞에 내려놓으면서 배시시 웃었다.
‘그래, 여주 쌀이 전국에서 최고로 쳐 주니까 차떼기로 실어 와서 한번 일을
벌려봐?‘
내가 혼자 소주잔을 비우면서 중얼거리자 옆에서 술을 마시던 중년 여인들이
뻔히 쳐다보면서 안 되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큰일을 당해서 낙심천만
하게 보였던 것 같다.
‘염병, 대낮에 혼자 술 마시는 것도 부담스럽군.’
나는 조 영진이 근처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우님, 날세. 뭐하고 있나? 난 머리가 아프고 심신이 시원치 않아 혼자서 월미도
에 왔다네. 시간 되면 이리로 오지.“
나는 횟집의 위치와 상호만 알려주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조 영진은
20분도 안 돼 내 앞에 나타났다.
“아니, 형님, 미리 연락을 주시면 모시러 갈 텐데요? 무슨 일 있으세요?
대낮부터 약주를 하시니 좀 이상합니다?“
“무슨 일 없어. 그냥 술이 마시고 싶어 왔네. 그런데 술은 혼자마시면 청승을
떤다고 할 까봐 남의 시선이 영 부담스럽구먼.“
조 영진의 잔에 소주를 따르며 자세히 보니 조 영진도 이미 전주(前酒)가 있는
것 같았다.
“자네도 한잔 하고 있었던 모양일세?”
“아, 네. 오랜만에 여자동창생들이 찾아와서 한잔 지리고 있었어요. 형님.”
“내가 눈치도 없이 괜히 전화를 했나보네?”
“아닙니다. 계집애들하고 마셔봐야. 요상시런 이야기나 하려고하지 뭐, 건전한 대
화가 돼야지요?“
조 영진은 담배를 빼 물며 연기를 천정으로 뿜어냈다.
“나도 한 개비 주게.”
“아니, 형님 담배 안 피시잖아요?”
“오늘은 왠지 담배가 고소할 것 같네.”
아내와 아이들의 성화 그리고 직장의 금연 분위기에 항복해 담배를 끊은 지
몇 년 되었지만 담배연기가 한 모금 폐부깊이 들어가자 기분이 붕 뜬 것 같았다.
“자네 말이야. 전에 나한테 제2의 인생을 가꿔보라고 했지?”
“아, 네네. 형님에게 그런 말씀드린 적 있지요.”
“자네가 보기에 내가 만약 직장을 그만 두고 사업을 한 다면 어떤 분야가 내
적성에 맞을 것 같나?“
조 영진이 나에게 잔을 건네면서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 해보였다.
“제가 보기에 형님은 건설 건축이나 뭔가 크게 벌려놓는 사업 말고 조촐하면서 내
실 있는 직종이 어울릴 것 같은데요?“
“이 사람아, 어렵게 말하지 말고 쉽게 해봐. 술집이면 술집, 식당이면 식당
뭐 이렇게 구체적으로......“
“형님, 그럼 슈퍼마켓이나 편의점은 어떻세요?”
“아, 요즘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편의점 말인가?”
“슈퍼마켓도 괜찮을 것 같고요.”
조 영진의 입에서는 정작 내가 하고 싶었던 미곡상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만약 그의 입에서 쌀이라는 말만 나왔어요. 나는 바로 미곡상을 차리려고 당장
내일부터 준비에 착수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내 입으로 쌀장사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내 눈치를 살피던 조 영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님께서 울긋불긋한 아이들 과자류나 부식 종류를 파는 것이 성에 안 찰지
모르지만 구멍가게 하는 제 친구 이야기 들어 보면 장소만 잘 잡으면 그것도
꽤 재미가 쏠쏠하다고 하던데요.“
“글쎄......”
“그럼, 형님. 형님 고향이 쌀로 유명한 여주니까 여주에서 쌀을 직접 사다가
도매로 넘기는 장사를 해보시면 어떻세요?“
조 영진이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일부러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마치 내가 이미 다 계획하고 있던 일을 마치 자신이 권해서
쌀장사를 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글쎄, 나도 그런 방향이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긴 하는데 ......”
“그럼 형님,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만약 형님이 마음을 굳히셨다면 쌀장사를 해
보세요. 가만히 보니 그 아이템이 좋은 듯하네요.“
“하여튼 며칠 더 두고 생각해 봐야 겠어. 자 한잔 하자고?”
“형님, 제가 형님보다 인생을 많이 살지는 않았지만 어떤 아이디어가 떠 올랐
을 때 즉시 행동에 옮기지 못해서 그 동안 손해 본 적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제가 그동안 생각으로만 그쳤던 일이 만약 추진했다면 거의 다
성공했다고 장담합니다.
나중에 보면 이상하게 포기한 경우는 잘 풀리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반대로 되더
군요. 그리고 두고두고 저의 우둔함과 우유부단한 성격을 탓했습니다. 제가 보시기
에 지금이 형님이 새로운 인생을 그리기에 최적기라고 판단이 듭니다. 만약 형님께
서 미곡상에 뛰어 든다면 제도 돕겠습니다.“
“자네가?”
“네, 형님께서 저를 친동생 이상으로 잘 대해 주시니 저도 형님을 저와 피를
나눈 형제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업을 하시게 되면 저희를 모르는 체
하지 마시고 한번 기용해 보세요.“
“저희라?”
“아, 형님 있잖아요. 먼저 형님에게 인사 올린 제 친구들…….”
“아, 동철이하고 병수?”
“네네, 형님, 그 애들이 말이 없고 과묵한 성격이지만 무엇이든지 한번 일을
맡기면 끝까지 해 내는 악바리 같은 애들이에요. 그 애들이 요즘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는데......“
“그래?”
조 영진은 지나칠 정도로 나에게 박 동철과 윤 병수에 대하여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하면서 나에게 은근히 천거를 하였다.
“형님, 이 애들 한번 불러 볼까요?”
“아냐, 천천히 생각해 보고......”
“아이고, 형님도 뭘 그리 망설이세요. 내가 모른 척 하고 전화해서 오라고
할 테니 형님은 그 놈들 술 먹여 놓고 요모조모 뜯어보세요.“
조 영진은 나의 승낙이 떨어지기도 전에 박 동철과 윤 병수에게 전화를 걸어 빨
리 달려오라고 하였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것 아예 공개적으로 터놓고 이야기 해보자. 그게 좋겠
어, 나 혼자 고민하고 정보를 수집해 보는 것 보다 동생들과 의논하고 생각해
보는 게 훨씬 경제적이고 많은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지.‘
“형님, 제가 한 잔 올릴게요.”
조 영진이 기분이 좋은 듯 싱글벙글 하였다.
“자네 오늘 좋은 일 있나?”
“아니, 형님께서 제2의 인생에 대하여 결정하는 자리에 저 같이 무식한 놈을
불러 주시니 너무 감격스러워서 그렇습니다.“
“그래?”
10분도 안 되서 박 동철과 윤 병수가 번개처럼 나타났다.
“아이고, 형님. 고맙습니다요. 저희들 같은 하찮은 것들을 불러 주셔서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요?“
박 동철은 호들갑을 떨면서 자리에 앉자마자 나에게 술잔을 건넸다.
“잘 하셨어요. 월급쟁이 평생하면 뭐합니까? 정년퇴직하면 겨우 손바닥만 한
아파트 한 채 남는 걸요. 제도 IMF 때 직장을 그만 두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크게 후회는 하지 않아요. 아니면 지금도 윗대가리 눈치나 보면서 밤이면 쓰디 쓴
소주로 위장을 적시고 있었을 겁니다.“
이번에는 말이 별로 없는 윤 병수가 나서더니 어울리지 않게 아부성 발언을
하면서 내 눈을 맞추려고 하였다.
“그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우선 술이나 듬세.”
“축하드립니다. 형님.”
“개업을 축하드립니다. 형님, 아니 사장님.”
“아니, 아 사람들이 김칫국부터 마시네 그려.”
“형님, 저는 부사장 자리 주실 거죠?”
조 영진이 내 잔에 술을 따르면서 눈웃음을 쳤다.
“그럼 저희 둘은 운전기사나 짐꾼자리 정도는 돌아오는 겁니까, 형님?”
“어, 그러지 뭐. 그래그래. 모르는 사람들 보다 아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게 낫겠지.“
“형님, 만약에 자금사정이 좋지 않을 경우 저희는 무임봉사도 각오 하고 있습
니다. 너무 걱정 하지 마세요.“
조 영진이 무임봉사까지 각오하고 있다는 말이 믿음직스럽게 들렀다.
“자, 그럼. 우리 형님의 창업과 앞으로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건배를 제의
하겠습니다. 그동안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헌신하시고 이제 제2의 인생을 개척
하시기 위하여 불철주야 노력 하시는 우리 형님과 가정의 안녕과 번영을 위하여
건배!“
조 영진이 일어나 거창하게 건배사를 하였다. 술자리는 밤 12시가 넘어서도
끝나지 않았다. 술이 센 조 영진은 나에게 집중 공세를 하였고 나는 거의 인사
불성이 되도록 술에 취하였다.
나는 사직서를 내기 전에 내가 대표이사로 조 영진과 박 동철 윤 병수를 각각
이사로 등록하여 법원에 법인설립 등기를 마쳤다. 내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자
금을 우선 투입해서 제법 활성화 된 시장에 10평 남짓 사무실을 얻어 놓고 간판을
내 걸었다.
조 영진과 박 동철 윤 병수도 체면치레로 약간의 자금을 투자하였다. (주)서해물
산. 상호는 그럴 듯했으나 쌀과 잡곡을 지방에서 도매로 사다 소매로 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나는 아내나 주변 친인척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우선 시험적으로 사업을 운영
하고 싶었다. 한 달 후 나는 25년간 몸담았던 공직을 미련 없이 버리고 새 인생을
출발하였다. 생각했던 것 보다 조 영진은 사업수완이 좋았다. 나와 윤 병수는 주로
사무실에 있으면서 인천지역 판매망 넓히는 일에 몰두하였고 조 영진과 박 동철은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을 다니며 현지에서 쌀 사오는 일을 맡았다.
퇴직금이 나왔다 2억원은 사업하는데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초창기 사업운영
자금을 대는데 충분했다. 창업한지 3개월 정도 흘렀다. 현지에서 물건을 차떼기로
사서 실어 오는데 거금이 필요했다. 쌀은 금방 환금이 되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조 영진은 소규모로 할 게 아니라 자금은 더 투입해서 좀 더 큰 수익을 보자며 각
자 얼마의 돈을 더 갹출하자고 하였다. 쌀은 사오는 즉시 팔려 나가기 때문에 환전
에 문제가 없었고 그 동안 열심히 뛴 결과 단골손님들도 많이 늘어났다. 나는 아내
몰래 지난해 고향 땅을 팔아 장만한 50평형 아파트를 담보로 은행에서 융자를 받
았다.
“형님, 처음 우려했던 것 보다 어렵지는 않죠?”
“모두가 자네와 두 아우들이 일심동체로 움직여 준 결과지 뭐. 자 수고 했어
오늘은 코가 비뚤어지도록 취해 보자고.“
“좋습지요.”
룸살롱의 나비 같은 아가씨들이 들어오고 밴드가 들어왔다.
“야, 이년들 너희 오늘 밤 우리 최 사장님, VIP로 특별히 신경 써서 모셔야한다.
알았냐?“
“걱정 마세요. 팁만 두둑이 주시면 귀신하고도 연애할 준비가 된 년들이라고요.“
도시의 밤은 질척거리며 시간이 정지된 듯 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