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내 흐르는 밤
- 글. 최재효
유년시절 중년의 이웃 아저씨들을 보면서 나는 영원히 소년일 것만 같은 생각이 들곤했다. 적어도 나에게만은 시간이 정지되어 있는 것 같았고 하루하루가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알게 된 것은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 유년시절 금강역사처럼 단단한 근육을 자랑하던 중년의 이웃아저씨들은 대부분 한 줄기 바람이 되어 사라졌다. 이제는 내가 그 아저씨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어린 유년의 또 다른 내가 나를 올려다 보며 유년기의 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두 아이들은 오전 11시까지 늦잠을 잔다. 엄마.아빠는 회사에 출근을 하여도 아이들 걱정에 집으로 자주 전화를 한다. 아내는 그런 아이들을 위하여 식탁에 반찬과 찌개를 끓여놓고 출근을 하며 방학이 빨리 끝났으면 한다.
회색도시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후에는 이 학원 저 학원으로 순례를 하고 밤이면 인터넷에 매달려 새벽까지 앉아있는다. ‘방학 때 만큼은 해방시켜주자‘하는 나의 배려로 아이들은 밤 늦게 까지 잠을 잊는다.
농촌에서 촌놈으로 자란 나는 여름방학 때만 되면 추억쌓기에 바빴다. 밤이면 주훈이, 덕화, 상운이 등. 불알친구들을 꾀어내 참외서리, 자두서리에 밤 이슬을 맞고 다녔다. 한번은 읍내로 가는 모돌기고개 아래 과수원으로 자두서리를 하러 갔다.
두 녀석이 망을 보고 모험심이 많은 나와 상운이가 철조망을 넘어 살금살금 기어들었다.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주먹만한 자두가 손아귀에 만져지자 입에 침이 고이고, 가슴이 뿌듯했다. 하늘에는 손을 뻗으면 만져질 것 같은 은하수가 서녘으로 길게 흐르고, 과수원안에는 반디불이 떼를 지어 날며 한창 연애하기 바빴다.
두 녀석이 윗도리를 벗어 자루를 만들고 충분하다싶을 정도로 자두를 따 담았다. 자두서리를 마치고 막 나오려고 하는데 저쪽에서 인기척과 함께 후레쉬불빛이 우리쪽으로 다가왔다. 얼른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려 숨을 죽이고 눈알만 굴렸다. 손과 등에 식은 땀이 흘렀다. 속으로 하나님과 부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그 후레시불은 우리를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마치 저승사자처럼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5미터 전방쯤 다가왔을 때 나와 친구 녀석은 동시에 각자 다른방향으로 도망을 쳤다. 물론 자두는 모두 내버리고 말이다.
“이놈들 게 섰지못해?” 과수원 주인 아저씨의 목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지고 개 짓는 소리가 귓전에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겁에 질린 네 녀석들이 모두 다른 방향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다시 만난 것은 새벽3시가 훨씬 넘어서였다.
행동대원이었던 나와 상운이는 팬티바람에 윗도리도 없었고, 가슴. 얼굴.팔.다리는 자랑스런 생채기로 벌겋게 얼룩져 있다. 망을보던 두 녀석도 혼비백산 도망치다 오물을 뒤집어 쓰고 운동화 한 짝씩 잃어버리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네 녀석들은 동네어귀 개울에서 미역을 감으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각자의 무용담을 들려주느라 날 새는 줄 몰랐다. 명절 때나 부부동반 동창회에서 그때 개구쟁이들이 만나면 무슨 전설이나 되는 양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각자의 배우자들은 “한 여름밤의 전설”을 상상해가며 배꼽을 잡는다.
나는 여름방학 때면 일부러 아이들을 내가 자란 시골고향으로 데리고 가거나 고향 분위기와 비슷한 친척을 찾는다. 낮에는 뭉게구름 이 호수같은 하늘 가운데로 날고 전원풍경이 물씬 풍기는 원두막에 앉아 자연이 주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수박이나 참외를 맛보고 여우비 한 차례 다녀간 뒤 개울로나가 붕어, 송사리,피라미,미꾸라지를 잡아보지만 전 같지 않다.
겨우 송사리 몇 마리 잡고나면 마음이 허탈해 진다. 그러나 아이들은 재미있는 모양이다. 자꾸 옛 생각이 난다. 붕어, 미꾸라지 , 물방개가 우리 곁을 떠나 것은 우리들이 자초(自招) 환경오염 탓이리라. 밤에는 마당한가운데 모깃불을 피워놓고 옛날 이야기를 해보지만 이미 초등학교 때 모두 읽어버린 아이들은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다. 컴퓨터가 그리운 눈치다.
“아빠, 우리 낼 집에 가자. 여긴 너무 심심해.”
전원(田園)의 풍경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기를 바라는 아빠의 마음을 몰라주는 딸 아이에게 섭섭함을 느낀다. 아파트촌, 빌딩숲, 학원, 공부, 컴퓨터, 게임...... 매미소리보다 윙윙 대는 기계소음과 귀청을 찢을 듯한 비트음악을 자장가 삼는 아이들. 톱니바퀴처럼 꽉 짜여진 아이들의 인생 시간표. 과연 그 아이들 가슴속에 개구리와 메뚜기가 뛰어 놀 초록의 여유가 있을까?
점점 사막의 모래알처럼 메말라가는 도시의 인심, 갈 수록 잔인해져 가는 각종 대형 사건들. 매스컴을 통해 전해지는 몸서리치는 사건들 영상물. 나는 아이들의 미래와 그 아이들이 살아 갈 미래사회가 불안하다.
주말이나 연휴 때면 아이들을 데리고 가 볼만한 장소를 찾느라 바쁘다. 아이들은 롯데월드나 에버랜드 같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장소를 선호하는 반면 나는 인공적인 냄새나 소음이 나지 않는, 천연의 환경과 자연의 아름다운 하모니를 들려 줄 수 있는 수목원이나 농장을 찾는다.
어쩌면 이것도 아이들에게 강요가 아닌지. 그렇다하더라도 나는 아이들이 기계소음와 편리함에 익숙해 지기전에 그 애들이 오랫동안 가슴에 간직 할 수 있는 동화(童話)를 만들어 주고 싶다.
언젠가 내가 한점 바람이 되고, 그 애들이 오늘 나 같은 중년이 되면 반추(反芻)해 볼 수 있는 은하수가 흐르는 한 여름밤의 아름다운 추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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