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강 최재효
제1부
기원전 37년 부여계의 주몽(朱蒙) 집단인 계루부(桂婁部)가
기존의 졸본지역의 토착 세력인 소노부(消奴部)를 축출하고 새
나라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그러나 졸본 지역은 후한(後漢)의 현토군(玄菟郡)과 부여(夫餘), 낙랑국(樂浪郡), 옥저(沃沮), 황 룡국(黃龍國), 송양국(松讓國) 등 주변의 많은 나라로부터 견 제를 받아왔다.
주몽의 아들로 고구려 제2대 태왕이 된 유리왕(琉璃王)은 나
라가 건국된 지 40년 만에 졸본(卒本)을 떠나 압록수 주변인
위나암(尉那巖)으로 도읍지를 옮기고 성을 쌓았다. 이곳이 고
구려의 두 번째 왕도인 국내성(國內城)이 되는 곳이다.
국도인 졸본은 멀지 않은 곳에 후한의 지방 정부인 여러 군
현(郡縣)들과 마주하고 있어서 고구려에게 늘 위협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태왕은 계루부 왕권을 강화하고 이웃나라의 군
사적인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왕도(王都)의 건
설이 필요하였다
동부여의 망명자이면서 고구려 건국자 추모왕(鄒牟王) 주
몽은 졸본 지역 토착세력인 소서노(召西弩)와 정략결혼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녀에게는 이미 전 남편인 우태(優台) 사이
에 두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있었다.
나라의 기틀을 공고히 하는데 20여년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동부여에서 한 여인이 청년과 함께 추모왕을 찾아왔다. 추모
왕은 그들이 내민 부러진 칼과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나머지
한쪽 칼을 맞춰보았다.
녹슨 두 조각 쇳덩이가 혈육의 정과 부부의 정을 이어주는
순간이었다. 눈물겨운 부자와 부부의 상봉이었다. 주몽은 동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 성을 가진 처녀와 혼인한 상태였
으나 금와왕(金蛙王)의 아들 대소(帶素)에게 살해 협박을 당
하고 있었다.
주몽은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등 생사를 함께 할
친구들과 동부여를 탈출하여 졸본으로 들어왔다. 고구려가 탄
생되는 역사적 대탈주 였다. 졸본의 호족 연타발의 호의와 환대
속에 주몽은 그의 딸 소서노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한다. 소서
노는 주몽 보다 10년 연상이었다. 주몽은 여러 부족을 아우르고
추모왕이 되었고 나라를 고구려라 선포하였다.
추모왕은 일 년 내내 밖에 나가 주변국 정복에 여념이 없었고,
속절없이 나이만 먹어 가는 소서노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녀 보다 더 속이 타는 사람은 그의 두 아들들이었다. 그때 추
모왕의 첫째 부인과 유리가 찾아왔고 유리는 곧 고구려 태자
에 봉해진다.
뒤늦게 지아비 추모왕의 속내를 눈치 챈 소서노는 자신의 충
복(忠僕)과 가노(家奴)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지분을 찾으려 하
였지만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추모왕을 대적할 수 없었다.
소서노는 뒤늦게 가슴을 쳤다.
기원전 42년 큰 아들 비류가 추모왕의 왕위를 물려받을 수 없
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두 아들과 엣 고조선의 진번(辰番) 땅
이었던 패대(浿帶) 지역으로 이주하여 어하라(於蝦羅)라는 나라
를 세웠다. 그러나 주몽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유리의 위협과 주
변국들의 끊임없는 침입으로 위협을 느낀 소서노는 무리들을 이
끌고 황해를 건넜다.
당시 남삼한은 마한, 진한, 변한 등 3개 국가집단들이 있었다.
각 집단은 여러 소국(小國)들의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중 마한이 가장 많은 소국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소국들 중 한
반도의 중앙 서쪽에 우체모탁국(優體牟涿國)이 있었는데 소서노
의 집단은 이곳을 공략하여 미추홀(彌鄒忽)을 얻었고 이곳에 비
류국(沸流國)을 세우고 다시 아리수로 진출하여 백제(百濟)의
전신인 십제(十濟)를 건국하였다.
유리는 추모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제2대 태왕으로 등극하지
만 그는 주변국들과 가급적 전쟁 보다 화친을 원했다. 동부여,
북부여, 한나라, 낙랑국, 해인국, 북옥저, 현토군 등 주변국들에
게 국토의 여러 지역을 할양한 유리 태왕은 백성들의 들끓는 원
성을 잠재우지 못했다.
졸본 지역은 아버지 주몽 때부터 태왕에게 비협조적인 인사
들이 많았다. 그곳 지역의 유럭자들은 소서노에게 충성을 받
쳤던 인사들로 주몽의 소서노 배신 행위에 염증을 느끼고 유
리태왕에게 등을 돌린 상태였다. 유리태왕은 졸본지역에서 통
치자로서 지도력과 영향력을 상당부분 상실하였다.
그는 권토중래를 위하여 남하하여 도읍지를 옮기고 국내성
을 쌓고 국가의 기강을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차남이
자 태자인 해명(解明)은 부왕 유리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해
명은 졸본 지역에서 왕이나 마찬가지였다. 유리태왕은 해명
의 그 같은 행동을 몹시 못마땅 해 했다.
“해명태자님, 태왕 폐하의 명을 전합니다. 속히 이곳 졸본을
떠나 국내성으로 가시지요.”
유리태왕의 특사가 해명태자에게 태왕의 뜻을 전했다.
“나는 이곳에서 머물며 우리 고구려를 침범하려는 외적들
에게 맞설 것입니다. 부왕께 잘 말씀드려주세요.”
“태자께서는 태왕 폐하 곁에서 국사를 보우하셔야 합니다.
또한 태왕폐하 유고시 뒤를 이어 국정을 운영해셔야 합니다.
이곳은 고구려 태자께서 게실 곳이 못됩니다.”
특사도 듯을 굽히지 않고 해명태자에게 직언을 하였다.
“부왕 곁에는 대대로(大對盧), 태대형(太大兄), 울절(鬱折) 등
기라성 같은 신하들이 보좌하고 있는데, 굳이 내가 국내서에 있
어야 할 필요가 없을 듯하오. 부왕께 그리 전하시오. 나는 이곳
에서 군병을 훈련시키면서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겠다고 말이
오.”
태왕의 특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국내성으로 돌
아가고 말았다. 유리태왕에게는 세 명의 부인이 있는데 첫 번째
왕후 송씨(松氏)는 다물후(多勿侯) 송양(松壤)의 큰딸이었다.
그녀는 왕자 도절(都切)을 낳고 요절하고 말았다.
송왕후가 죽고 유리태왕은 비슷한 시기에 두 명의 계비(繼妃)
를 두었다. 한 여인은 한나라 출신 여인 치희(雉姬)였으며, 또한
여인은 고구려 골천 지역 토호의 딸 화희(禾姬)였다. 그러나 두 왕
후들은 눈만 뜨면 싸움으로 소일하였다. 태왕이 사냥을 나간 틈을
타서 두 왕후는 대판 싸웠고, 더 이상 치욕을 참을 수 없었던 치희
는 그만 친정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화희는 불같은 성징의 소유자였다. 태자 해명은 바로 화희의
아들이었다. 사냥 나갔다 돌아온 유리태왕이 치희가 친정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치희를 뒤따라갔으나, 그녀는 유
리태왕을 냉정하게 뿌리치고 한나라로 돌아가고 말았다.
태왕은 크게 낙담하여 돌아오는 길에 잠시 쉬는데 고목 위에서
꾀꼬리 한 쌍이 정답게 노니는 것을 보고 즉석에서 시를 지어
읊었다. 감성이 풍부한 유리태왕의 황조가(黃鳥歌)는 당시 참담
했던 심정을 숨김 없이 묘사하였다.
翩翩黃鳥(편편황조) 雌雄相依(자웅상의)
훨훨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답구나.
念我之獨(염아지독) 誰其與歸(수기여귀)
외로운 이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태왕 폐하, 오늘밤은 화희 왕후 처소로 드셔야 합니다.”
내관이 밤늦도록 집무실에 앉아 있는 유리태왕에 아뢰었다.
“오늘은 웬일인지 몸이 무겁다. 짐은 오늘밤은 혼자 자고 싶
구나.”
치희가 친정으로 돌아간 뒤로 태왕은 노골적으로 화희를 미
워하였다. 화희가 아무리 태왕에게 접근해보려고 온갖 수단
을 동원하였으나 유리태왕은 점점 더 화희를 멀리하였다. 태
왕 부부가 소와 닭같이 지내면서 무료한 세월이 흐르고 있었
다.
이를 보다못한 중신들이 유리태왕에게 새로운 왕후를 들이
라고 간청하였다. 태왕은 중신들의 간청을 못이기는 체하고
새로 신부를 맞이하였다. 새로 들인 왕후는 이웃나라 다물후
송양의 둘째 딸이었다. 그녀는 상당한 미색이었다. 유리 태왕
은 첫 번째 부인의 친 여동생인 새 왕비에게 유독 많은 정을
쏟았고, 그녀는 이에 보답하듯 태왕에게 아들을 선물하였다.
그 아들이 유리태왕의 세 번째 아들 무휼(無恤)이었다. 애첩
(愛妾)이었던 치희를 친정으로 돌아가게 한 화희에 대한 태왕
의 미움은 자연히 그 아들 해명에게 옮겨갔다. 해명은 큰형 도
절 태자가 3년 전 18살의 나이로 죽은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태왕은 천신만고 끝에 아버지 추모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태
왕이 된 인물이었다. 그는 유년시절 동부여에 있을 때 온갖 수
모와 냉대를 견디 며 살아왔기에 싸움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태왕이 되어서도 그는 주변국의 도전이나 도발에 대하여 똑
같이 전쟁으로 맞서기보다는 화해와 조정으로 마무리 하는 것
을 원하고 있었다. 해명이 졸본 지역에서 눌러 있으면서 세력을
키우자 유리태왕의 통치에 불만이 많은 졸본 지역 백성들은 해
명에게 희망을 걸고 있었다.
“태자님, 우리 졸본에는 국내성 못지않게 군사와 물자가 많습
니다. 외적이 침입했을 때 명령만 내리신다면 소인들은 목숨을
내놓고 적을 막겠습니다.”
해명태자의 가장 가까운 수하인 비장 모달(眸達)은 밤낮으로
해명의 그림자 노릇을 하였다.
“내가 아무리 태자의 지위에 있다고는 하나 아버님의 허락 없
이는 군사를 움직일 수 없다. 지금은 외침이 없으니 힘을 기르
고 때를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너희들의 용기를 보일 시기가
반드시 올것이다. 서두르지 말거라.”
졸본 지역의 백성들 상당수는 아직도 소서노와 그의 아버지
연타발을 그리워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유리태왕이 자신들
의 새로운 주인이 될 소서노의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내쫓고
왕위를 탈취하였다 하여 태왕의 각종 정책에 비판적이었다.
해명이 아버지의 뜻에 따르지 않고 졸본성에서 사병을 양성한
다는 소문이 이웃 나라 왕들의 심기를 불안하게 하였다. 그 중
황룡국(黃龍國)이 해명의 행동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고조선이 멸망하자 백성들은 각자 제 살길을 찾아 사방으로 뿔
뿔이 흩어지면서 많은 소국(小國)이 생겨났다. 황룡국 역시 그 중
한 나라였다. 단군의 후예들은 나라가 망한 후에도 여러 성씨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는데 그 중 호족인 선우씨(鮮于氏)의 우평(友
平)이 마한에 황룡국을 세웠다.
그러나 주변국들이 빈번하게 침범하자 그는 무리를 이끌고 마
한을 떠나 고구려 북동쪽 지역으로 이주하여 나라의 기틀을 새
로이 다졌다.
“아버님, 해명은 기골이 장대하고 무력 쓰기를 좋아한다고 들었
습니다. 그런 자는 대개 자신의 힘만 믿고 꾀가 없습니다. 소녀가
사술(邪術)로 제압하면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황룡국의 공주 모란(牡丹)은 선우왕의 장녀로 주변국 왕자들이
탐내는 경국지색이었다. 그녀는 부왕과 모후의 귀여움을 독차지
하고 있었다.
둘째딸 월희(月姬) 공주 역시 모란 공주에 버금가는 미모를 지니
고 있었다. 모란 공주가 외향적인 성격이라면 월희 공주는 내향적
인 성정의 소유자 였다.
고구려 태왕은 싸움을 좋아하지 않아 추모왕이 죽은 이후에 한동
안 나라가 평안하였다. 그러나 태자 해명은 야망이 커서 그의 할아
버지인 주몽을 능가한다는 소문이 퍼질 정도였다.
추모왕 주몽은 고구려의 건국자이면서 동시에 정복자 였다. 그는
평생 주변의 이름 없는 약소국이나 성읍국가들을 복속시켜 고구려
에 편입시키고 나라의 세력을 키웠다.
“모란아, 해명태자를 제거할 수 있는 묘책이라도 있느냐?”
“소녀를 고구려 태왕에게, 황룡국 강궁은 해명에게 각각 선물로
보내세요.”
“뭐라, 너를 고구려 태왕에게 선물하라?”
“소녀가 고구려 태왕의 후궁이 되겠습니다.”
모란 공주의 묘책을 선우왕은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모란 공주의 설명을 듣고 선우왕은 무릎을 쳤다. 고구려 태왕
에게 현재 두 명의 왕비가 있는데 화희 왕후는 해명의 생모이고,
다물후 송양의 둘째딸인 송후(松后)는 무휼의 모후였다.
두 왕후 모두 나이가 있는 편이며,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각
자 자기의 아들을 차기 태왕의 자리에 올리고자 암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화희의 아들 해명이 이미 태자로 책봉된 터라 송후는 조
바심 치고 있었다. 자신의 외모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모란
공주는 고구려로 가면 금방 고구려 태왕의 사랑을 독차지 할 것으
로 믿고 있었다.
“그리고 해명에게는 약한 강궁을 선물한다?”
모란 공주의 계략은 단순해 보이지만 무서운 것이었다. 해명은 완
력이 세다고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에 그는 황룡국에서 선물한 활을
시험 삼아 쏘아 보려 할 것이다. 해명이 활을 분지르거나 망가트리
면 일이 쉽게 풀리게 되는 것이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