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시계
-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을 보며 -
- 여강 최재효
시간의 지렛대로 하늘을 굴리며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든
창공에 북두칠성을 흠모하여
붕새의 날개를 달고 밤마다 유영遊泳하든
누가 감히 이유를 달 수 있을까
아, 눈 감으면 떠오르는 통한의 역사여
굽힐 줄 모르는 백의白衣의 넋이여
부질없던 광기狂氣의 세월이여
지워도 다시 돋아 부활할 인동초忍冬草여
사비성泗泌城 무너지던 참담한 날
고운 여인들은 슬픈 낙화로 흩날리고
싸울아비 목은 추풍낙엽 되었더니
패악한 병정兵丁 소정방은 아이들처럼
불탑에 ‘대당평백제국비명’이라 낙서하였구나
무도한 자들 죽음의 시간을 재기 위하여
임무가 바뀐 지 일천사백 성상星霜
스스로 파놓은 허명虛名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역異域의 눈 먼 무리들
용서라는 말은 생각 조차할 수 없으리
인간이 무명無明임을 알았을 때
제 욕망의 무게에 눌려 압사壓死될 때
천지신명은 바람을 거꾸로 불게 하여
지금까지 쓰인 모든 인간의 흔적을 한순간
포말泡沫로 바꿀 수도 있음이니
- 창작일 : 2012.2.23. 14:20
[주] 大唐平百濟國碑銘 - AD 660년 나. 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사비성 중심에 있던 정림사지
5층 석탑에 자신의 백제 평정 공적을 기록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