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영가(靈歌) - 4
- 저자 : 여강 최재효
4
“절대로 그 아가씨는 너와 배필이 될 수 없어. 비록 네가 그 아가씨 아버지로
부터 어떤 도움을 받았더라도 이 어미는 그 아가씨를 우리 집안에 며느리로 들
일 수 없다. 네가 그 아가씨를 숨겨 놓은 것도 아닌데 너를 그 지경으로 만들다
니. 내일 인천에 갈 것이야. 내 이번일은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그 놈의 집
안을 찾아가 뒤집어 놓을 것이야.”
형수로 부터 막내 아들의 일에 대한 전말을 접한 재연 어머니는 펄쩍 뛰었다.
사흘만에 퇴원한 재연은 방안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재연은 다시는 인영이를 만나지 않겠다고 어머니에게 약속하여 간신히 일은 수습
하였지만 가슴 한쪽은 텅 비어 있었다. 재연은 충격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누워
만 있었다. 점심 무렵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들고, 잡지책이나 뒤적이다 팽개치고
낮잠을 청하곤 했다. 날이 어두워지면 밖으로 나갔다. 머리속에 아무 것도 들어오
지 않았다.
오직 인영이 생각 뿐이었다. 책을 펼쳐도 책장 속에 인영이가 웃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면 형수의 눈치를 보다 슬그머니 집을 나왔다. 걸어서 1시간 거리인 주안역
까지 가서 알코올을 뱃속에 들이 부었다.
지난번 사건으로 재연은 큰형으로 부터 아무리 늦어도 밤 11시 안으로 귀가하라
는 엄명을 받은 터라 소주 2병 정도면 그런대로 무정한 세상을 잊고 살만하였다.
길 잃은 사람처럼 얼큰한 상태에서 밤 거리를 쏘다니며 큰소리로 유행가를 부르기
도 하고, 괜히 지나가는 여인들을 보고 실실 웃기도 하였다. 행인들은 그런 재연이
를 실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술 취한 걸음 걸이는 맨 정신일 때보다 두배 이
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형의 엄명은 자주 위배되곤 했다.
"인영아, 도대체 어디있는거야? 어디에 꼭꼭 숨은 거냐고? 내가, 너에게 무엇을
잘못한 거니? 대답 좀 해봐.응? 인영아, 보고 싶어. 제발 어디에 있다고 말만해줘.
앞으로는 절대로 너를 힘들게 하지 않을게. 대답 좀 해봐. 어디 있는거냐고?
흑-."
길거리에 털썩 주저 앉아 울고 있는 재연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흘끔거리며 혀를 차기도 하고, 젊은 사람이 안 되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동정심을 나타내기도 하였 다. 그렇게 여름은 속절없이 흐르고 매미들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 고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울어 댔다.
"히야, 굉장한 미인이 오셨군요. 인영씨라고했나요? 마담한테 서울서 대학을 나
오고 대기업에 다니다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제주도에 오셨다고 들었는데. 자자, 이
것도 다 인연인데 우리 인연주나 한잔 하시지요?"
인영은 선배의 강요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단골이라고 하는 K와 동석했다. D 그룹
기획조정실에 근무 했을 때 자신을 못살게 했던 윤대리가 생각났다. 윤대리에게 강
제로 강간을 당한 뒤 인영은 남자에 대하여 기피증을 가지게 되었다.
"인영아, K사장님은 제주도에서 보기 드문 분이셔. 영화배우 뺨치는 외모에 옥스
포드에 유학갔다 오신 분이며, 이곳에 유명 호텔을 운영하시는 분이셔. 네가 집에
만 있으니 우울증에 빠질 거 같아 바에 나와 바람이라도 쐬라고 했는데, 이왕이면
K사장님 처럼 멋진 분과 대화를 나누며 뜻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을 것 같구
나. 사장님은 우리 바에 최고 고객이시고 화통하시단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너의
답답한 마음도 어느 정도 해소 될거야. 인영아, 그럼 사장님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
렴."
인영이 믿고 의지하는 대학 선배의 말이었다.
인영에게 대학선배 S의 말이라면 곧 하나님 말씀과 같았다. 인영은 어떤일로 제주
도에 내려왔는지 말하지 않고 집에만 박혀 있었지만 수돗물을 마시고, 네온사인을
늘 마주하던 인영에게 혼자 있는 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제주도
에는 선배 S 말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인영은 마음의 안정
을 찾아가면서 집과 재연이 그리웠다. 지금 쯤 집에서는 자신의 갑작스러운 가출로
한바탕 홍역을 치루고 있을 것이라 예상을 하고 있었다.
'아빠에게 전화를 드릴까? 재연씨는 여름 방학이라 여주에 내려가 있을 것이고.
아니야. 이왕 내려 왔으니 한달만 푹 쉬다가 올라가는 거야. 아빠, 엄마는 딸의 이런
행동을 이해해 주실거야. 한달 후에 올라가 재연씨를 만나면 어떤 반응일까? 아직은
내가 집에서 가출한 사실을 모르고 있겠지. 내 심신의 치유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
지만 한달 정도면 충분할거야. 내가 그 엉큼한 윤대리에게 능욕을 당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재연씨와 강원도나 서해안 해수욕장으로 피서를 갔을 텐데......'
인영은 멍하니 홀의 천정에서 영롱하게 빛을 발산하는 샹들리에를 바라보고 있었
다.
"얘, 인영아, 무얼 그리 생각하는거야? 재연씨 생각하니? 이곳에 내려 왔으면 잠
시지만 모든 걸 다 잊고 바닷 바람과 해조음을 음미하며 잠시 비바리가 되어봐.
언제 또 이렇게 홀가분하게 여행을 할 수 있겠니? 여자는 결혼하면 평생 한 남자와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갖히게 된다고. 이왕 내려온 거니까 다 잊고 홀가분한 마음
으로 여유를 만끽해봐."
다시 룸으로 들어 온 S는 인영이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처럼 멍하니 앉아 있자
K사장에게 미안해 했다.
"자, 인영씨, 제 잔 한잔 받으세요. 이 술은 제가 이 바에 오면 늘 마시는 술이랍니
다. 다른 술보다도 이 길버트 꼬냑은 엑스오(XO) 급으로 아주 명품은 아니지만 내
취향에 맞기 때문이지요. 자, 한잔 받으세요."
인영은 핸섬하면서도 지적인 외모의 K사장에게 끌렸다.
상대방의 권주를 물리칠 만한 명분이 없었다. 인영이 처음부터 술을 입에 대지도
못할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새벽에 집에 돌아오는 선배 S와 스카치 위스키 서너잔
은 비우고 잠자는 습관을 선배가 잘 알고있기 때문이었다. 인영은 무의식적으로
선배의 눈치를 보았다.
"자, 아름다운 인영씨와 그 선배이신 S마담의 아름다운 우정을 위하여."
K는 정치, 경제, 역사, 문학 등 두루 해박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K의 유머
스러우면서 재치있는 이야기에 인영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문을 열고 있었다.
K와의 첫 만남은 그동안 재연이라는 남자만 알고있던 인영에게 큰 혼란을 일으키
게 하였다.
K는 염색행각에 있어 자타가 공인하는 고수 중에 고수였다. 인영은 K의 입담에
자신도 모르게 빨려들어 가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블랙홀에 아무런 저항도 없이
빨려들어가는 작은 별 같았다. 어떤의도로 선배는 인영을 K에게 소개했는지 누구
도 알 수 없었다.
K는 인영에게 정성을 쏟았다. 인영이 곧 인천으로 돌아갈 거라는 사실에 K는 소기
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목숨을 거는, 수컷의 본능을 숨기고 달려드는 발정난
수캐같아 보였다. 오후가 되면 으레 K는 S가 운영하는 바에 나타났다. 그리고 S를
통해 인영을 바로 나오게 하여 함께 시내 유명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였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 인영은 집과 재연을 까맣게 잊어가고 있었다. 오로지 K가
자신을 공주처럼 받드는 것에 만족 할 뿐이었다. 인영의 선배 S는 처음 제주도에
내려왔을 우울했던 모습이 사라지고 늘 웃음을 머금은 인영을 보자 속으로 은근히
인영을 질투하기도 했다.
"인영씨, 이 거 마음에 들어요?"
K는 인영을 보석상점에 데리고 갔다.
"그거는 결혼하는 사람들이 예물로 주고 받는 반지 잖아요?"
"곧 인천으로 올라가신다는 말씀에 섭섭해서 제가 마음의 선물을 하고 싶습니다."
"네에? 마음의 선물이라고요? 금방 가지는 않아요, 한달 정도 있을 거에요. 마음이
편하면 좀 더 있다가 갈 수도 있고요."
"네에, 내가 인영씨에게 드리는 마음의 선물."
K는 다이아가 박힌 반지를 집어 들고 인영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아니에요. 사장님, 제가 이렇게 비싼 반지를 받을 자격이 없어요. 그냥 구경하는 것
으로 만족할게요."
K는 사양하는 인영에게 억지로 반지를 사서 건네주었다. 처음에 인영은 완강하게
거절하였지만 인영의 거절 못지않게 K의 강요도 만만치 않았다.
할 수없이 K로 부터 반지 선물을 받은 인영은 당황스러웠지만 제주도를 떠나면서
S를 통해 돌려주리라고 마음 먹었다. K는 인영이 자신의 호의를 받아 들이자 매우
흥분하여 자신이 자주 가는 단골집이 있다며, 손수 BMW를 운전하여 인영을 데리
고 갔다. 식당에 들러 오랜 시간 많은 이야기와 핑크빛 그림이 오고 갔다.
인영이 다리에 힘이 빠져 식당을 나온 시각은 밤 11시가 넘어서 였고, K의 기막힌
비법으로 두 사람이 조용한 곳을 찼았다. K는 자신이 의도한 대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남자라는 존재에 대하여 의구심을 갖게 된 인영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였다.
K는 수시로 인영을 불러냈고 마치 10년을 사귄 연인처럼 행동했다. K의 완력은
보통 남자들 보다 강해 인영은 그 완력에 주눅이 들곤 했다. 인영은 마법에 걸리
사람처럼 K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아, 내가 악마의 소굴에 떨어졌구나. 제주도에 온 목적이 이게 아닌데. 어찌해
야 한단 말인가? 재연씨, 나 좀 구해주세요. 지금 당장이라도 비행기를 타면 당신
곁으로 달려 갈 수 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아요. 제가 함정에 빠진 거 같아
요. 믿었던 선배도 나를 자신의 단골 손님을 잡기 위하여 이용하고 있어요. 어
쩌죠?'
인영은 난감했다.
K사장은 인영을 더 잡아 두기 위하여 은근히 협박성 말언을 하였다. 자신은
인영이 마음에 드니 집에 가지말고 이곳에서 살면서 자신과 결혼하자고 하였
다. 그렇지 않으면 인천까지 쫓아가 인영의 부모에게 결혼하게 해달라고 청을
넣겠다고 하였다.
여름방학이 다 끝나가도록 인영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재연이 인영이네 집을
방문한 뒤로 두 서너번의 전화가 재연의 큰형님네 집으로 걸려왔었다. 재연의
형수는 참았던 이야기를 불만 섞인 말투로 인영의 어머니에게 퍼부었다. 인영의
어머니는 재연이 자신의 집을 방문했던 날 밤 자칫 목숨을 잃을 뻔 했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며 재연의 안부를 묻기도 하였다.
재연의 형수는 그런 인영이 어머니에게 쌀쌀맞게 대했다. 인영의 아버지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재연이 인영을 감추어 두고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재연
이를 만나 려고 하였지만 형수는 재연이 인영이를 잊으려고 애쓰고 있다며, 두번
다시 만날 생각 하지 말라고 하였다. 두 집안은 우울한 시간을 보내며 어서 일이
해결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 계속 -
가을 영가(靈歌) - 최종회 (0) | 2010.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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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영가(3) (0) | 2010.10.04 |
가을 영가(2) (1) | 2010.09.15 |
가을 영가(1) (0) | 2010.09.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