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영가(靈歌) - 3
- 저자 : 여강 최재효
3
"이놈아, 네가 그 애하고 살고 싶으면 정정당당하게 결혼식을 올려달라고 할
것이지 왜 그 애를 숨겨놓고 부모형제 속을 태우는 거야? 당장 그 애를 데려다
놔, 안 그러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
인영의 어머니는 거품을 물고 있었다. 재연은 여름방학이라 고향 여주에 내려
가 있다가 형수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재연의 형수는 인영과 요즘 무슨일이 있
느냐고 물었다. 큰형은 한술 더 떠 인영이와 일을 솔직히 말하라고 으름장을 놓
기도 했다.
여름방학이라 고향에 내려와 친구들과 잠시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재연은
도대체 인천에서 자신이 없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무척 궁금했다. 갑자기
형과 형수가 인영에 대하여 물어오고 큰형은 재연에게 인영을 어디다 감추어 놓
았느냐고 다그치는 것이 생경하면서도 호기심이 일었다. 영문도 모르고 재연은
인천으로 올라왔다.
형수는 인영의 어머니로 부터 수십 차례 전화를 받았는데, ‘당신네 시동생이 우
리 인영이를 십여 일이 넘도록 숨겨두고 집에 돌려 보내지 않는다’며 빨리 돌려보
내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다. 형수는 재연을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
보았다.
‘요즘 한동안 인영이한테서 전화 한 통도 없었고, 인영이를 만난 적 조차 없었는
데, 내가 인영이를 숨겨 두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자다가 날벼락 맞을 소리란 말
인가?’
재연은 지난 한 달간의 전후 사정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재연은 회사에 다니
면서 부터 관계가 소원해진 인영이 늘 보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아 애를 태
우고 있었다.
이달 들어서도 재연은 인영과 단 한 번의 전화 통화로 만족해야 했다. 인영은 예
전의 인영이 아닌 듯 했다. 목소리도 착 가라앉아 있었고, 뭔가 불만에 가득한 듯
재연에게 뜻 모를 이야기를 늘어놓아 재연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바보야, 난, 난 이제 내가 아니란 말이야. 나도 내가 누구인지 몰라.’
인영이 재연에게 남긴 묘한 뉘앙스가 풍기는 말이었다. 그리고 한 달이 다 되도록
인영에게서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재연은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부모님의 일손을
거들기도 하고 그 동안 만나지 못했던 불알친구들과 만나 신륵사 앞 여강(驪江)에
서 텐트를 쳐놓고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재연은 인영이 자신에게 뭔가 불만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잠시 서로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인영이 마음이 편
해지면 만나서 자신에게 말한 내용에 대하여 물어 볼 참이었다.
‘인영이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해. 인영이가 집에 없다면 도대체 어딜
간 걸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보름씩이나......’
재연은 큰형에게 자신도 인영에 대하여 최근 보름사이에 만난 적이 없다고 해명하
고, 인영네 집에 찾아가 인영이 부모님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변명하리라 마음먹었
다.
어둠이 짙게 깔린 인영네 집은 초상을 치룬 집처럼 조용했다. 불쑥 찾아온 손님에
잠을 자던 개가 정적을 깨웠다. 인영의 남동생이 재연을 안방으로 안내하였다. 인
영의 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인영의 어머니는 이마에 하얀 천으로 싸매고 누워 있
다가 재연을 보고 얼른 일어나 앉았다.
“이놈, 어서, 어서 내 딸을 데려와. 네놈이 아직 학생의 신분으로 남의 귀한 딸을
숨겨 놓다니. 네놈이 정말로 대학 공부하는 놈이 맞아?”
인영의 어머니는 재연을 보자 펄펄 뛰었다.
처음 재연이 인영네 집을 방문했을 때 자상하던 인영이 어머니가 아니었다. 재연
은 두 모습의 인영의 어머니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살기가 느껴질 정도로 인영의
어머니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재연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입안에 침이
마르고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못했어요. 정말입니다. 저도 불안해 죽겠어요. 믿어주세요.” 재연의 말은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인영의 어머니는 재연이 왼쪽 뺨을 후려갈겼다. 찰싹 소리와 함께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재연은 태어나 처음 으로 뺨을 맞았다. 정신이 아득하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떻게 하다가 이런 상 황이 되었는지 재연은 주마등처럼 스치는 인영과의 지나간 추억을 잠시 곱씹어 보았다.
“어머님, 저도 인영이가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거의 한달 동안 전화 한통화도
“네놈이 뻔뻔스럽게도 내 앞에서 그런 거짓말을 늘어놔? 내가 네놈말에 속을 거
같니? 어서, 어서 우리 인영이를 데리고 오라 말이야. 어서, 이놈아. 인영이를 데
리고오면 너희들이 원하는대로 해줄테니까, 당장 데리고 오란 말이야. 당장."
인영의 어머니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금방이라도 인영의 어머니는 피를
토하고 쓰러질 것 같았다. 재연은 생전 처음 접하는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했다.
“어머니, 저는 정말로 인영를 감추지 않았어요. 믿어세요. 제발 믿어주세요. 어
머니.....”
재연이 아무리 변명을 해보았지만 인영의 어머니는 믿으려 들지 않았다. 인영의
어머니가 펄펄 뛰자 인영의 남동생도 가세하여 재연에게 협박성 발언을 하였다.
남동생에 이어 여동생까지 두눈에 불을 켜고 재연을 노려 보았다.
재연은 그 자리에 더 앉아 있다가 그들에게 잡혀 먹힐 것 같다고 생각하였다. 온
몸에서 식은 땀이 흐르고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당장 우리 누나를 집에 데려다 놓지 않으면 당신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 당신 아니면 누가 우리 누나를 숨겨놨겠어?”
재연은 숨이 막혔다.
고등학고 3학년에 재학 중인 인영의 남동생은 기계체조 선수라 몸집이 단단하고
근육으로 단련된 우람한 육질을 자랑하고 있었다. 재연은 인영의 두 동생들에게도
인영의 가출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하소연하였지만 인영의 동생들은 막무
가내로 인영을 데려오라고 하였다.
재연은 다리에 힘이 빠지며 하늘이 노랗게 보이기 시작했다. 인영이네 집에 오면
무엇인가 인영이 가출한 단서나 실마리가 나올 줄 알았는데 오히려 궁지에 몰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외출에서 돌아온 인영의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재연은 험한 꼴을
당할 뻔 하였다. 인영의 아버지는 재연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합리적으로 결론을 내
렸다. 합심해서 인영을 빨리 찾아보자고 하였다. 재연이 자신의 딸이 가출한 것과
지금 현재로서는 상관이 없다며 재연을 안심시키기도 하였다.
간신히 인영네 집을 나온 재연은 인영네 집 근처 포장마차를 찾았다. 곧 비가 내릴
듯 천지가 암흑 같았다. 밤늦게 인영이를 집에 바래다주는 길에 인영과 함께 들리던
주점이었다. 재연을 알아보는 아주머니가 반색을 하였다. 순식간에 소주 두병을
비운 재연은 다시 한 병을 더 주문하였다.
재연이 고개를 푹 숙이고 인영의 이름을 부르며 울다, 웃다를 반복하자 뭔가 이상
낌새를 눈치 챈 포장마차 여주인이 재연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였다. 잘 피우지도
못하는 담배 한 갑을 꽁초로 만들어 버리고도 재연은 여인에게 담배를 사다 달라
고 요청하였다. 하얀 도넛이 연속 적으로 포장마차 안을 날아 다녔다.
소주 네 병을 변변한 안주도 없이 마신 재연은 거의 인사불성이었다. 재연 다시
한 병을 더 주문하였을 때 포장마차 여인은 술을 팔지 않겠다고 하였다. 재연은
꼭 한 병만 더 마시고 집에 갈 테니 달라며 미리 술값을 게산하기도 하였지만, 여
인은 안 된다고 하였다. 포장마차 밖에는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타려고 하였지만 칠흑 같은 밤 택시도 다니지 않았다. 갈 짓
자 걸음으로 재연은 우산도 없이 동인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밤 12시가
넘은 도심의 골목길은 거대한 뱀의 아가리 같았다. 재연은 발길이 가는 대로 걷
고 또 걸었다.
“인영아, 인영아-. 어디 있는 거야. 도대체 지금 어디 있는 거냐고? 왜 나를 이렇
게 궁지에 몰리게 하는거야. 죽은거야, 살아 있는거야? 대답 좀 해봐. 인영아, 지금
네가 나를 상대로 술래잡기하고 있는거지? 네가 너희 부모형제와 짜고 나를 놀려
주기 위하여 나를 놀리고 있는거지? 그렇지?”
재연이 얼마를 걸었는지, 현재 서 있는 곳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재연은 계속 빗
속을 걸었다.
얼마를 더 걷다 보니 부두가 보였다. 커다란 중장비가 빗속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빗속에 밝은 조명이 마치 우주에 떠 있는 신성(新星) 처럼 반짝거렸다. 거의
눈은 감다시피 한 재연은 희미한 불빛을 향해 걸었다. 왼쪽 구두가 벗겨져도 재연
의 발은 무감각했다. 비는 금방 해풍의 기세를 타고 해안을 집어 삼킬 듯 했다.
재연이 불빛이 희미한 어느 공장 정문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이봐요. 이봐요 젊은이. 일어나요. 여기 이렇게 누워있다간 큰일 나요.”
재연을 발견한 공장 수위는 지나가는 택시를 간신히 불러 세웠다. 수위가 계속
재연을 흔들자 겨우 눈을 뜬 재연이 어렴풋하게 집 주소를 댔다. 입만 살아서 움
직일 뿐이었다.
비에 젖은 몸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수위는 재연이 어찌될까 불안하여 전등을
들고 밖에 나가 택시가 오기를 기다렸다. 한참만에 택시가 나타났다. 수위는 얼른
택시를 가로막아 섰다.
지갑을 보니 대학생인데 연락처는 안 보이네요. 지갑에 돈 이만 원 정도 있으니 이 돈으로 이 학생을 집까지 데려다 주시구려.” 재연은 희미하게 두 남자가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택시는 비가 억수 처럼 쏟아지는 도심의 밤거리를 질주하였다. 채 30분도 안되어 택시는 재연을 집 근처 길가에 내려놓고 사라졌다. 산 아래있는 S아파트는 재연이 내린 곳과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다.
“가사양반, 이 청년 집이 주안동 예비군 교육장 가는 길에 있는 아파트 인가보오.
“집에 가야해. 집에. 형수가 나를 기다릴 텐데.......”
재연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S아파트와 정 반대 방향을 향해 걸었다. 비는 여전히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인천에 거주하는 예비군들이 교육을 받는 군부대 쪽으로 재연은 가고 있었다. 어
렴풋하게 보이는 불빛이 자꾸만 멀어져 갔다. 재연은 두 눈을 부릅뜨고 집으로 향
했지만 발길은 엉뚱하게 점점 더 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가려고 발버둥 쳤지만 그 자리만 빙빙 돌고 있을 뿐이
었다. 천둥 번개가 칠 때마다 숲속이 파랗게 보였다. 금방이라도 산에서 도깨비가
튀어 나올 것 같았다. 재연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S아파트 쪽을 응시했다. 하늘
과 땅이 빙빙 돌았다. 속에서 역한 냄새와 함께 소화가 덜 된 음식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아, 이러다가 내가 잘못하면 이 산에서 죽겠구나.’
재연은 몇 번을 일어나다 넘어졌다. 겨우 일어나 빗속을 뚫고 다시 걷기 시작하였
다. 사방에 보이는 것은 저 멀리 희미한 불빛 뿐이었다.
재연의 의지와 반대로 발은 다시 산으로 향했다. 몸이 사시떨리듯 했다. 곧이어
쿵 소리와 함께 재연의 의식은 꺼져 버리고 말았다. 재연은 1m 깊이의 구덩이에
처박히고 말았다. 다행히 구덩이 안에 사람들이 갖다 버린 쓰레기 더미가 있어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리고 얼마 쯤 지나서 비는 그쳤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재연이 학생네 집이죠?”
이른 아침에 파출소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재연이 큰형수는 깜짝 놀랐다.
“네에? 벼, 병원이라고요? 우리 도련님이 병원에요?”
재연은 밤새 구덩이에 쳐박혀 있다가 이른 아침 등산하는 인주 주민에게 발견
되어 파출소에 신고 되었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은 의식이 희미해진 재연
을 긴급히 인천시내 대형병원으로 후송하였다.
외견으로는 다행히 왼쪽 발목이 삐고 찰과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병원으로 달려온
재연이 큰형 내외는 얼굴이 퉁퉁 부은 채 응급실에 누워있는 재연을 보고 가슴을 쓸
어 내렸다. 의사는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다. 몸
에서 오물 냄새가 풀풀 나는 동생을 바라보던 재연의 형은 가슴이 아려왔다.
“아이고, 이 녀석이 밤새 집에 안 들어와 걱정을 하였더니, 어떻게 산에서 발견이
되었단 말이야. 아이고, 이 사실을 고향에 아버지, 어머니가 아시면 큰일 날 텐데.”
경찰로부터 산에서 발견되어 병원까지 오게 된 경위를 전해들은 재연이 큰형은
어째서 동생이 산에서 발견되어 병원에 실려 오게 되었는지 답답했다.
깊이 잠들어 있는 동생을 깨울 수 없어 회사 출근도 미룬 채 재연의 곁에서 앉아
있었다. 하마터면 자신이 데리고 있는 막내 동생이 산에서 목숨을 잃을 뻔 한 것
에 대하여 고향에 계신 부모에게 죄송해 했다. 동생 건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 큰
사고라도 났더라면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부모형제들에게 안겨 주었을 것이며,
그 모든 책임을 자신이 져야 했다. 만약 지금이 한 겨울이라면 동생은 동사했을
것이며, 난리가 났을 것이다.
점심때가 되어서 재연이 눈을 떴다. 머리가 터질 듯 했다. 가만히 눈을 떠 천정과
주변의 웅성거림, 간호사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으로 미루어 병원이 분명했다.
재연은 눈을 감고 어젯밤의 일을 생각했다. 인영이네 집에서 나와 포장마차에 들
어 간 것 까지는 생각이 희미하게 떠올랐으나 그 이후부터 아무 것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몇 번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도저히 어젯밤 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형의
말대로 자신이 산에서 발견된 것에 대하여 재연 자신도 깊은 의구심이 일었다.
- 계속 -
가을 영가(靈歌) - 최종회 (0) | 2010.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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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영가(4) (0) | 2010.10.05 |
가을 영가(2) (1) | 2010.09.15 |
가을 영가(1) (0) | 2010.09.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