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눈부처(4)

* 창작공간/단편 - 눈부처

by 여강 최재효 2010. 1. 29. 01:28

본문

 

 

 

 

 

 

 

 

                

 

 

 

         

 

 

 

 

 

 

           눈부처(4)

 

 


                                                                                                                                                                                  - 여강 최재


 

 

 동수와 선주가 첫 만남을 가진 이후에도 학력고사를 치루기 전까지 남들의

눈을 피해 수시로 만나 사랑을 싹 틔웠다. 선주와 동수는 대학진학 학력고사

시간이 부족하자 주로 편지를 통한 마음이 오고갔다. 두 사람 사이에 사랑

전령사는 영태였다. 평균 일주일에 두 세 차례의 편지 교환이 이루어 졌다.

두 사람의 편지 교환은 많은 희생을 각오해야 했다.


 선주는 학력고사를 앞두고도 자주 동수의 생각에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거

딴청을 부렸다. 눈에 보이게 성적이 하락하자 K여고 교장과 담임선생은

애가 탔다. 상황은 H남고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교장은 동수의 담임선생을

자주 집실로 불러 동수의 점수 하락에 대여 추궁하였고 담임은 동수의 행

동을 예의 주시하면서 동수의 동태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수업시간 중에도 자주 창밖을 응시하거나 전에 없이 자주 졸기도 하여 담

선생뿐만 아니라 동수에게 기대를 걸고 있던 다른 선생님들 까지 안타깝

게 했다. 담임은 동수의 그러한 이상 행동에 분명 무슨 연유가 있을 거라고

판단하고 동수와 잘 어울리는 학생들을 불러서 동수의 근황을 캐기도 하였

지만 친구들도 별로 아는 바가 없었다.


 늘 모의고사는 이과 문과 합쳐 전교에서 1등을 달리던 선주가 2등 또는

3,4등으로 떨어지자 K여고 교장은 선주의 부모를 학교로 불러 선주의 학력

저하에 대하여 물었지만 특이한 사항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두 학교 선두

를 달리던 학생이 갑자기 동반 학력 저하 현상을 놓고 말들이 많았다.

 

 선주와 동수의 능력이 한계에 부딪쳤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두 사람이

지나친 주위의 기대에 큰 부담을 느껴 학업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점수

가 오르지 않는 다고 하였다. 그런 와중에도 두 사람은 주위의 우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핑크빛 사연을 영태를 통해 주고받고 있었다.

 

 영태도 소문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동수와 선주에게 학력고사 끝난 뒤

편지주고받으라고 하였지만 선주는 고집을 꺾지 않고 동수에게 편지

를 보냈고 동수는 선주의 마음에 화답해야 했다.

 

 우려와 기대 속에 학력고사가 치러졌다. 다행히 동수는 목표를 달성하

였지만 선주는 주위 사람들의 가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재수(再修)를 결

심하게 되었다.


 서울 고모네 집에서 기거하며 재수를 준비하는 선주는 학교 다닐 때 보

훨씬 자유스러운 분위기에 만족하며 재기를 다짐하였다. 아침 일찍 학

원에 가서 밤늦게 집으로 오는 고된 시간이 이어졌다. 재수생과 대학생의

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동수는 신입생이 되면서 학과 선배들이 주체하는 각종 행사와 MT 미팅

등에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자주 보지 않으면

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틀리지 않은 것인지 선주는 자신에게 자주 연락

하지 않는 동수에게 서운한 감정을 품기 시작했다.


 자신이 재수생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신분이어서 아무리 애틋한 사랑을

나누는 사이라하더라도 선뜻 다가가기 어려웠다. 자주는 아니지만 선주는

동수에게 편지를 썼고 동수는 답장을 하였는데 예전의 느낌보다 상당히

멀어진 듯 했다.

 

 선주는 비가 오는 초여름 날. 동수를 만나고 싶어 동수가 다니고 있는 대학

를 찾아갔다. 그러나 고등학교 정도의 캠퍼스를 예상했던 선주는 대학교

의 규모에 기가 죽었다. 한껏 멋을 내고 삼삼오오 남학생들과 어울려 젊음

을 만끽하는 여대생들의 모습에 선주는 가슴이 아렸다.


 선주가 동수를 찾기 위하여 경영학과 수업이 있다는 교실을 찾아 다녔지

만 어디가 어딘지 몰라 이리 저리 드넓은 캠퍼스만 헤매고 다녔다. 동수를

캠퍼스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물에 빠진 생쥐처럼 선주는 비를

맞고 우울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차창 밖으로 수많은 인파들이 휙휙 지나갔다. 선주는 혹시나 싶어 학생

차림의 남자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몸살 기운이 나면서 선주는 더욱

동수가 보고 싶었다.


 ‘나의 사랑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마는 것인가? 지난해 내가 좀 더

열심히 공부하였더라면 나도 지금쯤 여대생이 되어 당당하게 동수를 만

날 수 있었을 텐데. 내 처지가 너무나 딱하게 되었구나. 나를 이렇게 내 팽

개치고 혼자만 살 먹고 잘 살겠다는 것인가?

 

 이건 너무 불공평해. 지난 일 년간의 사랑이 한낱 꿈이었단 말인가?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동수씨가 바빠서 그럴 거야. 내일 다시 한 번 가보

는 거야. 동수씨 얼굴을 꼭 한번 만이라도 봐야 공부가 될 것 같아. 지금

은 모든 게 다 귀찮아. 내일 다시 한 번 더 가보는 거야.’


 다음날도 역시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학원에서 오전 수업만 마친 선주

는 다시 동수가 다니는 대학교로 향했다. 남들에게 재수생으로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선주는 화장도 진하게 하고 옷도 튀게 입고 여대생 티

를 냈다.

 

 경영학과 사무실에 가서 동수의 금일 수업 시간을 물었지만 오전에 경영

과 수업은 끝나고 오후의 학생 개개인의 수업시간은 잘 모른다고 하였

다. 경영학과 소속 학생이라고 하여도 교양과목이나 타 학부의 수업을 듣

는 경우알 수가 없었다.


 선주는 조금 늦게 온 것을 아쉬워하면서 학교를 나오다 네댓 명의 남녀

학생들이 우산을 바쳐 쓰고 길을 건너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우산 하나에 남자 여자 학생이 함께 쓰고 있기도 하고 남학생 끼리 쓰기

도 하면서 캠퍼스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여학생과 우산을 같이 쓰고 있는 남학생의 뒷모습이 동수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였다. 선주는 무엇에 홀린 것처럼 한 떼의 학생들을 일

한 간격을 유지하며 뒤 따랐다.


 학생들은 학교 주변 먹자골목에 있는 학사주점으로 들어갔다. 선주는

학사주점 앞에서 망설였다. 만일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갔다가 동수

와 마주치게 되면 동수는 크게 당황하여 곤란해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선주는 주변 골목길을 수십 번도 더 왔다 갔다 하면서 고민하였다.


 ‘아, 어쩌나? 분명 동수씨 모습인데......, 어쩌지? 그냥 갈 수도 없고.

고개를 푹 숙이고 살며시 들어가 보는 거야. 설마 내가 여기까지 왔으리

라고 상상도 못할 거야.’


 선주는 심호흡을 서너 번 하고 마음을 굳게 먹고 주점으로 들어갔다.

주점 안에는 이미 수많은 남녀 학생들로 북적였다. 남자 종업원이 선주에

게 자리를 안내하려고 하자 선주는 사람을 찾으러 왔다고 말하고 실내를

한 바퀴 돌았다.

 

 시골 원두막처럼 꾸민 테이블에 보통 다서 여섯 명의 학생들이 앉아서

을 마시고 있었는데 담배를 얼마나 피웠던지 안개처럼 연기가 자욱했

다. 웃고 떠드는 소리에 귀가 아플 정도였다. 선주가 이십 여개나 되는 주

안의 테이블을 대충 훑어보아도 동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잘못 본걸까? 동수씨 뒷모습이 틀림없는 것 같은데......’
 선주는 다시 한 번 더 돌아보고 나가려고 주점 안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남자 종업원은 이상한 눈으로 선주를 아래위로 쳐다보면서 묘한 표정을

지었다. 선주가 중간 정도 지나 구석 테이블을 지나갈 때 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동수씨, 동수씨 목소리다.’
 선주는 고개를 반쯤 들고 목소리가 나는 곳을 슬쩍 살펴보았다.

 ‘도, 동수씨가, 동수씨가 여학생과 키스를......’


 선주는 머리가 띵해오면서 그만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하였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주점 밖으로 뛰쳐나온 선주는 뛰는 가슴을 진정 시키고 골

목길을 걸었다. 비가 다시 세차게 내리기 시작하였다. 선주는 가방에 우산

이 들어 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무작정 걸었다.

 

 다시 학사주점으로 들어가 동수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대고 싶었다. 그러

나 재수생의 신분으로 감히 명문대학에 다니고 있는 동수에게 해코지 할

수 없었다.


 ‘아냐. 아냐, 내가 잘 못 본 걸 거야. 아냐,’
 선주는 지난 일 년간 동수와 보냈던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흐느

꼈다. 재수생이라는 입장이 가득이나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고 있는 터에

보고 싶은 사람이 다른 여학생을 껴안고 있는 모습에 선주는 가슴이 무너

내렸다.

 

 우산도 쓰지 않고 울면서 걷는 선주의 모습에 지나가던 사람들은 선주를

이상한 여자로 바라 보았다. 선주는 비에 흠뻑 젖어 얼마를 걸었는지 모르

지만 어느덧 날씨가 어둑해져 있었다. 한강 철교를 건너 한참을 더 걸어

유흥가가 밀집된 지역으로 접어들었다.

 

 골목마다 식당, 레스토랑, 호프집, 바(Bar), 카페, 나이트클럽, 당구장, 볼

링장, 탁구장, 미용실, 이발소, 다방, 액세서리점, 빵집, 여성 옷가게, 양복

점, 구두점, 편의점, 모텔, 여관 등이 빽빽하게 들어차서 마치 불야성을 방

불케 하였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선주는 흐느적거리며 골목길을 걷다가

호프집을 들어갔다. 유흥가 호프집은 대학가 주변 주점과 달리 불량배들

도 상당히 많아 매우 위험하기도 했다.


 지난해 동수를 만나면서 부터 선주는 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는 맥주 한 두컵 정도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졌지만 여고를 졸업하고 대

학교에 낙방하면서 자주 동수와 술집을 드나들었다. 동수가 서울로 올라

가기 전까지 두 사람은 Y읍이 아닌 B시(市)로 가서 데이트를 즐겼다.

 

 대학입시에 고배를 마신 선주의 마음을 달래주려 동수는 무척 애를 먹었

다. B시는 아는 사람들이 없어서 두 사름은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었다.

술에 만취한 어느 날은 Y읍 가는 막차를 놓쳐 모텔에 들어 성인 흉내도 내

보았다.


 “여기여, 여기, 생맥주 1000씨씨짜리 하나 하고 마른안주 주세요.”
 뚱뚱한 40초반의 여인은 초저녁부터 초췌한 몰골의 선주가 반가운 척 하

면서도 입을 삐쭉거렸다. 


 ‘아니 첫손님이 어째서 저런 실연당한 처녀람. 염병 재수가 없을라니.

원......’
 욕심이 양 볼에 덕지덕지 붙은 주인여자는 마지못해 생맥주와 안주를

갖다 주었다. 비가 내리고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호프집은 습기가

축축하면서 음침하기 까지 했다.


 ‘나쁜 놈, 나에게 수백 번도 더 나를 사랑한다고 해놓고 다른 여자를 껴

안다니. 아아,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단 말인가?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분명 나를 사랑한다고 그랬어. 세상 무슨 일이 있어도 나 하나만을 좋아

할 거라고 그랬어. 그런데, 반년도 안돼서 다른 여자를 사귀다니.

 

 나쁜 놈. 동수, 동수, 너는 정말로 나쁜 놈이야. 내 가슴을 이리 아프게

하다니.’  
 선주는 금방 생맥주 하나를 다 마셔버렸다. 이상하게 맥주가 달다고
느낀

선주는 또 하나를 주문하였다.


 선주가 생맥주 네 개를 마시고 있을 때 손님들이 호프집에 들어오기 시

하였다. 장맛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 내렸다. 손님들은 주로 불량 끼가

있어 보이는 이십대 남자들과 중년 남자들이었는데 끼리끼리 앉아 선주

를 훔쳐보면서 자기들 끼리 쑥덕거렸다.

 

 어느덧 호프집 테이블은 꽉차버리자 호프집 여주인은 자꾸만 선주를 바

라보면서 선주가 어서 술을 마시고 나가기를 바라는 눈치가 역력했다.


 “아주머니, 여기 소주 한 병하고 골뱅이 주세요.”
 “학생, 벌써 생맥주 다섯 개를 마셨는데 괜찮겠어요?”
 “저 돈 있어요. 어서 주세요. 맥주는 밍밍해서 맛이 없는 거 같아요.”


 ‘아니, 누가 돈을 물어보았나? 술을 더 마실 수 있는지 물었지? 참으로

한심한 아가씨로군. 분명히 대학교 다니는 학생 같은 데......’
 선주는 소주를 물 마시 듯 마셨다. 금방 취기가 오르자 선주는 기분이

좋아졌다. 동수가 저 멀리서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것 같았다.

 

 선주가 벌떡 일어나 동수에게 뛰어가려고 일어나다가 그만 자리에 엎어

지고 말았다. 옆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남자들이 선주를 딱한 눈

으로 쳐다보면서 혀를 찼다. 선주는 비틀거리며 간신히 일어나 앉았다.

동수는 보이지 않고 뚱뚱한 호프집 여주인이 걱정스러운 듯 선주를 내려

다보았다.


 “학생, 이제 그만 마셔. 그만 마시고 집에 가는 게 좋겠어. 더 마시다가

큰일 나겠어. 이제 그만 마시라고......”
 “아주머니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 별로 안 취했어요. 아직도 소주

두병은 더 마실 수 있다고요.”


 “원, 별일도 다 보겠네. 여학생이 이리 술을 많이 마시면 어쩌누?”
 “아주머니, 조용히 마실 테니까.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네에?”
 호프집 주인은 할 수 없이 소주 한 병을 선주에게 가져다주었다.


 “흑-, 나쁜 놈. 이제 너하고 끝이야. 이제 모든 게 끝이라고.

아냐,  너 같이 이중인격자에게 한때 혹해서 내 모든 것을 주고 싶어

하던 내 자신이 너무 비참해. 하기야, 서울에 오니까 나 같은 촌년눈에

도 안 차겠지.

 

 너 아니면 내가 연애도 못 할 줄 알았니? 흥, 지금 당장이라도 공부고 뭐고

다 집어 치우고 얼마든지 연애할 수 있어. 너는 나쁜 놈이야. 위선자야, 도둑

놈, 늑대, 인간쓰레기, 구더기......“


 선주가 울다가 웃다가 마치 정신 이상자처럼 혼자 술에 취해 떠들자 이번

에는 불량 끼가 있어 보이는 젊은 나자 한명이 선주에게 다가왔다.


 “학생, 이 오빠가 같이 마셔줄까? 이 오빠도 오늘 실연당했거든. 실연당한

사람들끼리 술을 한번 진탕 마셔보면 어때?”
 “누구세요?”


 “응, 나는 경준이라고 해. H대 졸업반이야. 마음씨 좋은 오빠이기도 하고.

또 오늘 사랑했던 여자에게 채인 바보같은 남자이기도 해. 비가 내리는 오늘

이 오빠도 보기 좋게 애인에게 채였니  우리 애인에게 버림받은 사람끼리

분한 마음을 풀어보자고. 응? 오늘 이 오빠가 살 테니......”


 “저는요. 선주라고 해요. 윤선주요.”
  사내가 선주에게 다정하게 굴었다. 마치 10년을 사귄 사이처럼 남자는

선주에게 고분고분하면서 목소리까지 따뜻하였다. 사내와 함께 온 남자

들은 연신 잔을 들어 선주 앞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눈을 찡끗하며 무언가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만취한 선주는 앞에 앉아 있는 남자가 갑자기 마음

에 들기 시작하면서 가슴속 이야기를 토해냈다.


 “저런, 저런 나쁜 놈을 보았나? 그놈 정말로 나쁜 놈이다. 나 같으면 그런

남자는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렇죠? 오빠도 제 같은 경우라면 그 남자 절대로 가만 놔두지 않을 거죠?”
 “그럼, 그럼. 그걸 말이라고 하니?”


 “경준 오빠, 우리 건배해요. 그리고요 부탁이 하나있어요. 나랑 그 남자있는

곳에 가서 그 남자를 혼내줘여. 오빠는 힘이 세게 겼으니까 내 대신 그 남자

혼내주세요.”


 “알았어. 내가 그 자식을 혼내주지. 자, 우리 건배하자고.”
 “정말 동수를 혼내 줄 거죠?”


 선주 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선주가 거의 인사불성 상태가 될 때까지 선주

에게 계속 건배를 유도하였다. 선주는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술이

선주를 마셔대고 있었다.

 

 사내는 속으로 킬킬거리며 선주의 상태를 주시하며 동료들에게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선주와 사내는 소주 2병을 더 마신 뒤 호프집을 나왔다. 사

내가 비틀거리는 선주를 부축하고 나오자 사내의 동료들 세 명이 뒤 따라

왔다.


 “경준 오빠, 우리 동수라는 애 혼내주러 가요.”
 “응, 그래 그 녀석을 혼내주러 가자.”  


 사내가 택시를 잡고 선주를 태웠다. 다른 택시를 타고 사내의 동료들도

선주가 탄 택시를 뒤 쫓아왔다. 두 대의 택시는 선주가 건너온 한강다리를

다시 건너 강변북로를 쏜살같이 달렸다.

 

 마치 경주를 하는 차량 같았다. 비는 그치지 않고 지겹게 쏟아졌다. 앞차

물이 고인 곧을 휙 지나가면 택시 좌우로 물보라 일었다. 뒤차에 탄 사

내들은 낄낄거리며 앞차에 탄 동료의 가기막힌 솜씨에 혀를 내둘렀다.


 ‘아, 머리아파. 여기가 어디지? 그리고 지금 몇 시나 된 거야?’
 선주는 간신히 눈을 떴으나 머리가 아파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조그만 방인 듯 한데 창에 검정색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 방안은 컴컴했다.

 

 선주가 죽을힘을 다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쓰자 하체가 아려

왔다. 선주는 느낌이 이상해 손으로 은밀한 부위를 더듬어 보았다. 하체는

알몸 상태였다. 거웃에 뭔가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았다. 상체로 손을 더듬어

보았다. 젖가슴이 만져졌다. 맨살이었다. 


 “내 몸이 왜 이러지?  이상하네. 그리고 하체에서 왜 통증이 전해질까?”
 선주는 기를 쓰고 일어나 방안을 더듬거리며 간신히 커튼을 걷었다. 걸음

을 걸을 때마다 하체가 쓰라렸다. 침대와 경대 그리고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

진 옷가지들이 나뒹굴었다.

 

 선주는 발가벗겨져 있었다. 낯선 방이었다. 아무리 간밤의 일을 생각해

내려고 머리를 쥐어짜 보아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선주는 다시 침

대에 누워 어제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제 동수씨 만나러 동수씨 대학교에 갔다가 동수씨가 친구들과 학사주

점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도 나중에 들어갔었지. 학사주점에서 동수씨

를 보았는데 술을 마시면서 어떤 여자를 끌어안고 있었어.

 

 나는 놀라서 뛰쳐나와 어디론지 몇 시간을 걸었어. 한간 다리를 건너 유흥

가가 밀집한 골목에서 호프집에 들어갔고, 그 집에서 나 혼자 술을 마셨지.

또 뭐더라. 아, 맞아. 어떤 남자와 술을 마셨어. 그리고 그리고......’  


 선주는 다시 기를 쓰고 일어나 전깃불을 켜자 방안의 어지러운 광경이 환

하게 들어왔다. 빈 소주병, 빈 맥주병, 종이컵, 과자 부스러기, 담배꽁초, 팬티,

브라자, 양말, 티셔츠, 청바지. 가방, 무엇인가 닦은 휴지들이 방바닥에 널려

있었다. 선주는 하체를 내려다보았다. 이물질이 은밀한 부위에 딱딱하게 굳은

채 달라 붙어 있었다. 


 “어머나? 이 곳은, 이 곳은 언젠가 동수씨와 가보았던 여관 같은데. 그렇다

면 내가 어제 그 호프집에서 만난 남자와 이 여관엘 왔단 말인가? 이건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돼는 일이야. 내가 어떻게 생전 처음 보는 남자와 여관엘

들어 올 수 있단 말인가? 아아, 이건 아냐. 이건 아니라고. 아냐?”


 어제 밤부터 지금까지 상황이 어느 정도 파악된 선주는 울부짖었다. 선주가

정신없이 통곡하고 있을 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학생, 학생, 방 좀 비워 주셔야 해요. 벌써 오후 한시에요.”
 “......”
 “학생, 그만 일어나시고 방 좀 빼주세요.”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주가 계속 통곡하자 여인은 문을 살짝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선주는 울음을 그치고 얼른 알몸을 이불로 가리

고 여인을 쳐다보았다.


 “아주머니, 제가 어제 몇 시에 누구하고 여기에 왔어요?”
 “아유, 학생, 어제 남학생들 네 명하고 밤 11시쯤 들어왔잖아요?”
 “남학생들이요?”


 “기억이 안 나나 봐요? 남녀 혼숙은 안 된다고 하니까 이 방에서 술 한

마시고 남학생들은 집에 갈 거라고 하여 손님으로 학생을 받았어요.

남학생들이 술을 사가지고 와서 떠들며 술을 마시고 새벽 세시쯤 모두

집에 간다고 나갔어요.

 

 같은 학교 친구들 아니었어요? 내가 남학생들에게 여학생하고 어떤 사이

냐고 물으니까 이 근처 D대학교 같은 과 학생들인데 학생집이 멀어 여관

에 재워야 한다고 했어요.”


 ‘아아, 어떻게,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아냐, 이건 꿈일 거야. 이런 일은

나에게 해당이 안 돼.’


 선주는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여관을 나왔다. 여인의 싸늘한 웃음이 비틀

리며 걸어가는 선주의 등 뒤에서 가늘게 들려왔다. 비가 추적 추적 내리 

있었다.

 

 

 

 


 

 

 


                                                                                                                                         - 계속 -

 

 











































'* 창작공간 > 단편 - 눈부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부처(6)  (0) 2010.01.30
눈부처(5)  (0) 2010.01.29
눈부처(3)  (0) 2010.01.26
눈부처(2)  (0) 2010.01.25
눈부처(1)  (0) 2010.01.24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