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처(2)
- 여강 최재효
“동수씨, 참 이상해요. 난 아직 인연이니, 숙연이니 하는 말은 절에 다니
는 사람들이나 즐겨 사용하는, 그 분들만의 언어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요즘 들어 어렴풋하게 알 것도 같아요. 나도 사람들
사이에서 어깨를 부딪기며 사는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이렇게 선주를 다시 보니 꿈만 같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주말 저녁 동수는 선주와 소래포구에서 그간의
오해를 풀며 행복한 시간을 만들고 있었다. 아침에 만난 두 사람은 취향
도 비슷하여 동수의 승용차로 강화도 전등사에 들려 여러 부처님들께
공양하고 강화도를 한 바퀴 휘휘 돌고 동수의 제안에 소래포구를 찾았
다. 동수는 시간이 나면 소래포구를 찾았다.
근처에 해양생태공원이 자리하고 있어서 사진을 찍거나 홀로 유유자적
한 시간을 보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뒤늦게 사진에 취미를 붙인 탓도
있겠지만 동수의 정서에 어촌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필이면 많고 많은 볼거리가 서울 근처에 넘쳐나는 데 굳이 소래포구
에 동수가 선주를 데리고 온 것은 비 내리는 날 포구에 앉아 뿌연 물안개
에 젖은 바다를 바라 보면서 먼 추억을 끄집어내는 데 이만한 장소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한폭의 수채화 처럼 소래포구는 바닷가에 납작 엎드린 채 육지와 바다
의 사연들을 이어주고 있었다. 월곳과 소래포구를 이어주는 철교가 가을
비를 맞아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보슬비가 내리는 날이면 많은 주당들이
찾는 곳이기도 했다.
동수는 탁주잔을 만지작거리며 애꿎은 담배만 축내고 있었다. 20년이 거
짓말 처럼 흐르는 동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 같았으나 둘은 말을 아
끼고 있었다. 하루에 풀어 놓기에는 너무 많고 그렇다고 두서없이 아무
렇게나 풀기도 어려웠다.
“나, 한 가지 물어봐도 돼?”
반쯤 피우다 만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동수가 선주의 고운 눈매를 바
라보았다.
잔주름 하나 없는 눈가에 행복한 미소가 물들어 있었다. 소녀시절에도 유
난히 고운 피부와 반듯한 이목구비로 남학생들의 가슴을 울렁이게 했던 선
주였다. 선주는 동수의 질문에 눈웃음으로 대답했다. 동수는 선주의 고운
미소가 어떤 질문도 가능하다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매장에 함께 있는 호랑나비의 정체가 궁금해서......”
동수는 선주를 만나기 전부터 그 나비의 존재가 무척 궁급했다.
선주가 배꼽을 잡았다. 옆 테이블 젊은 남녀들이 일제히 선주를 돌아보
았다.
도 하얀 나비. 그러나 너무 진한향이나 악취가 나는 꽃에는 안 앉아요.”
“저는 꽃이 피어있는 곳이라면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는 나비에요. 그것
‘그럼, 난 어디에 속하나?’
알쏭달쏭한 선주의 답변에 동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선문답(禪門答)
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말보다 느낌을 중요시하는 것 같았다. 예전에도
두 사람의 감정 전달은 주로 지면을 이용했다. 남의 시선을 꺼려한 탓도
있겠지만 천성이 조용하여 참새처럼 입방아 찧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
았다. 텁텁한 탁주잔을 비우고 선주가 조용히 동수에게 잔을 건넸다.
“이곳은 처음인데, 너무 좋아요. 적당히 비릿한 냄새와 온갖 부류의 사람
들이 토해내는 땀 냄새 밴 소리, 갈매기 우는 소리, 통통배 소리, 매캐한
고기 굽는 냄새, 육지와 바다에서 나는 모든 잡음은 여기 다 모여 있는 거
같아요. 동수씬, 이런 곳을 좋아하나 봐요?”
와보였다. 만약 비가 내리지 않았더라면 선창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어서 낙조의 기운을 받으면 정말로 환상적일 것 같았다. 무엇인가 말 할 듯 하 면서도 선주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첫 데이트에서 꼭 알맹이만 토해내고
선주의 양쪽 볼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늦가을 단풍나무 잎 보다 더고
싶었다.
“지금은 전어가 제철이라 밤낮으로 전어들이 승천하는 곳이기도 하지.
나도 이맘때면 자주 이곳을 찾아 전어가 되고싶은 마음이 들곤해. 사람이
든 물고기든 인기가 있어야 찾지 매력을 잃으면 살아있는 송장이나 마찬
가지라고."
“승천? 그러네요. 탐욕스런 인간들이 떼로 몰려와 전어를 승천시키고
있네요. 전어들의 통곡이 가을 내내 이 포구를 살찌우는 것 같네요. 참
아이러니 하죠? 사람들은 물고기의 통곡을 듣지 못하나 봐요. 언젠가
사진에서 본 갠지스 강가에서 피맇게 피어오르는 매케한 연기가 연상
되네요. 무엇이든 인기가 많으면 금방 사라지나봐요."
자욱한 푸른 연기로 포구는 가라앉고 있었고 해와 사람들의 발걸음도
빨라지면서 포구는 낮보다 한층 생기가 오르는 듯 했다. 해가 사라지고
달이 떠야 더 운치가 있어 보이는 곳이기도 했다. 물론 이곳만 그렇다
는 것은 아니다. 대개의 포구가 이런 날 발걸음으로 북적거리게 마련
이다.
“선주, 고마워. 다시 그때로 되돌아 간 느낌이야.”
“느낌이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꿈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피눈물이 필요할지도 몰라. 세상에
는 공짜가 없으니까.”
“그런데 동수씨, 어떻게 된 거에요? 저는 동수씨가 아내의 생일 선물을
사가고 며칠 후에 우리 매장에 전화를 걸어 왔을 때 반갑기도 하고, 무척
당황스럽기도 했어요. 저는 그때 역시 약간 변하기는 하였지만 동수씨를
확신하고 있었어요. 그날 저는 밤새 한 잠도 못 잤어요. 그렇게 며칠 가슴
앓이 하고 이렇게 동수씨를 보니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는 것을 실감 하
겠어요.”
동수는 여성의 팬티와 브라자 세트를 아내의 생일 선물로 사간 다음 날
동료직원들을 어제 점심 먹던 시장 통 순댓국밥집이 참 맛있다고 다시
그 집으로 유도하였다. 아라비안나이트가 가까워지자 동수는 휴대전화
를 꺼내 아라비안나이트 간판에 적혀있는 전화번호를 입력하였다.
동수는 아라비안나이트에 전화를 걸려고 수십 번도 더 시도하다가 말
았다. 세상에는 비슷한 사람이 많아 자칫 실 업는 사람이 될까 우려가
되기도 하였다. 하루가 지나고 동수는 용기를 냈다.
“아라비안나이트죠?”
“안녕하세요? 고객님, 맞습니다. 아라비아 나이트에요.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다행히 동수의 휴대전화에서 선주와 닮았다고 하는 여인이 전화를 받
았다. 동수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하였지만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금 전까지 선주를 닮은 여인이 전화를 받으면 ‘고향이 어디냐?’, ‘K여고
출신 아니냐?’, ‘H남자고등학교 다니던 동수라는 남학생을 아느냐?’ 등등
질문을 수십 번도 더 외면서 준비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 여인이 전화를
받자 혀가 굳어버리고 말았다. 첫 전화는 한마디도 못하고 끊어졌다.
“여보세요? 아라비안나이트 맞죠?”
“안녕하세요, 아라비안나이트입니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어......,”
을 쳤다. 분명히 수십 수백 번을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최면까지 걸었 었다. 질문할 사항까지 메모장에 꼼꼼히 적었지만 한마디도 못하고 말
“고객님, 말씀하세요. 고객님, 고객님, 말씀하세요. 고객님......”
두 번째 전화도 역시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동수는 전화를 끊고 가슴
았다.
동수는 커피 서너 한잔을 마시고 흥분을 가라앉히고 우황청심환을 복
용하였다. 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낙엽이 세차게 내리는 가을비에
하나 둘 떨어졌다. 천둥과 번개까지 동반한 가을비였다.
는 동수에게 축복이며 동시에 불행이기도 했다. 선주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 다시 솔솔 피어올랐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동수
는 다시 수화기를 들고 아라비안나이트 전화번호를 눌렀다. 7자리 숫자
를 누르는 순간이 백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아라비안나이트입니다.”
“저어......”
갑자기 상승하고 있는 것을 감지하였다. 숨이 막힐 것 같았지만 동수는 크게 심호흡하고 수화기를 꼭 쥐었다.
역시 그 여인이 동수의 전화를 받았다. 동수는 심장 박동(搏動) 수가
“고객님, 말씀하세요.”
“저어, 저는요. 며칠 전 거기서 여성 속옷을 산 사람입니다.”
“동수씨? 동수씨 맞죠? 그렇죠?”
‘앗, 어떻게 이 여자가 내 이름을, 그렇디면 선주가 틀림없는데......'
았다. 동수가 전화를 끊자마자 동수 책상 위에 있는 전화벨이 울렸다.
“......”
“여보세요? 여보세요? 동수씨......”
동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고 얼른 전화 수화기를 내려놓
동수가 전화를 못 받고 주저하자 미스 리가 전화를 받았다.
“부장님, 선주라는 여자 분이신데요?”
동수는 수화기를 들고 잠자고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질문은
주로 여인이 하는 것 같았고 동수는 ‘그렇다’ 혹은 ‘아니다’라는 말만
하였다.
사무실 여직원들은 묘령의 여인에게 걸려온 전화에 동수가 얼굴이 벌겋
게 달아올라 전화를 받는 모습에 자기들 끼리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상사
의 대화 내용을 궁금해 하였다. 전화 통화가 끝났을 때 동수는 여인의
휴대전화 번호를 자신의 휴대전화에 입력하였다.
Y읍에 K여고와 H남고가 있었다. 동갑나기인 동수와 선주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생면부지였다. 규모가 작은 소도시이다 보니 두 학교의
교장을 비롯한 고등학교 진학반 담임선생들은 길 건너 학교의 모의고사
성적 득점사항이나 전년도 수도권지역 대학교 진학률로 은근히 경쟁
하고 있었다.
서울 유명대학교에 진학한 비율은 H고와 K여고가 6:4 혹은 5:5여서
두 학교의 자존심을 건 대결은 날로 치열했고 그 와중에 고등학교 3학
년 학생들만 죽을 맛이었다.
선주는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동수 역시 마
찬가지여서 두 사람은 고등학교 3학년 올라가면서 서로의 장단점을
대충 파악하고 있었다.
모의고사에서 이과를 택한 동수는 수학과 국어에서 두드러졌고, 문
과의 선주는 영어와 국어 그리고 기타과목에서 골고루 우수한 점수를
얻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남고와 여고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고 말았다.
두 학교의 교장선생과 선주와 동수의 담임은 대학진학보다 서로 상대
방 학교를 점수로 누르는 것이 급선무였다.
모의고사 점수 결과는 Y읍내의 큰 관심사였다. Y읍내에서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두 학교의 선배들 역시 모의고사에 일희일비하는 처지
였다. 어떤 부부는 서로 자신의 모교를 자랑하다 부부싸움으로 번지
기도 하는 촌극을 만들어 내기도 할 정도였다.
차라리 K여고나 H남고 중에 어느 학교가 월등히 수준이 높으면 갈등
은 없었을 것이었다. 지난해 H고에서 명문대 진입하는 경사가 있으면
다음해에 어김없이 K여고에서도 명문대에 진학하였다.
동수는 목표는 서울에 있는 명문대 경영학과에 진학이었고, 선주
역시 수도권에 있는 명문에 영문과가 목표였다. 그해 여름 H고등학교
는 떡잎이 파란 싹들을 별도로 특수반을 구성하여 스파르타식 공부를
시켰다. 싹수가 누렇게 뜬 기타 아이들은 교장의 관심 밖에 있었다.
스파르타 반은 보통 아침 10시에 시작하여 밤12시에 끝났다. 많은 학
생이 명문대학 진학만이 두 학교의 사활을 건 지상과제였다. 8월 중순
세상이 무더위에 지쳐 있을 때 였다. 스파르타 학생들 역시 더위에 자
유롭지 못했다. 공부에 지처 갈 즈음 동수의 친구 영태가 이상한 제안
을 했다.
“뭐? 우리가 지금 여학생을 만날 때냐?”
“이렇게 지쳐 있을 때 여학생을 만나 잠시 머리를 식히는 것도 괜찮지.
그 애들도 무척 지쳐있을 텐데......”
선주는 영태와 초등학교 동창이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소꿉장난 친구 처럼 지내던 사이라 스스럼없이 지낸다고 하였다. 영태는 동수에게 선 주를 만나게 해줄 테니 서로 부족한 과목을 상의해 보면 도움이 될 거
영태는 자기 집 아래 K여고에서 1등을 달리는 선주가 산다고 하였다.
라고 했다.
영태의 제안은 동수에게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동수는 지난해부터
K여고에서 가장 모의고사 점수가 우수하다는 여학생이 누구인지 몹시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 여학생을 만나 볼 의향은 없었다. 영태의 제안에
동수는 잠시 고민하였지만 그 여학생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영태는 학교에서 일찍 오는 일요일 밤에 선주를 공원으로 불러냈다.
소읍(小邑)의 공원은 규모가 꽤 큰 편이었고 한적해서 젊은 연인들이
남몰래 만나 데이트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열대야로 노인들이
손자들을 데리고 나와 공원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서 별을 세거나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동수야, 저기 선주가 온다. K여고 인기스타야. 아니지 Y읍에서 최고
인기스타지. 너도 스타니까 별끼리 오늘 한번 진지한 대화를 나눠봐라.
난, 선주를 모시고 온 무수리와 놀가 들어갈테니까.”
로 나왔다. 어스름한 저편에서 두 명의 소녀가 동수의 시야에 들어왔다. 동수는 크게 심호흡을 몇 번하고 나자 영태가 선주를 코앞에 데리고 왔 다. 양 갈래로 머리를 묶고 하얀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선주의 모습에
선주는 소꿉장난 친구의 간청을 차마 뿌리칠 수 없어 늦은 밤 공원으
공부 밖에 모르던 동수는 정신이 몽롱해졌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