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처(1)
- 여강 최재효
“아, 어째야 하나? 오늘도 이렇게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한 숨 한번 쉬고
돌아서야 하나? 더 이상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것인가?”
동수는 흐릿해 지는 눈을 손수건으로 천천히 닦으며 한번이라도 더 선주
를 보기 위하여 그녀의 가게 건너 인도 위에 멍하니 장승처럼 서 있었다.
방송에서 비에 대한 일기예보를 하는 날이나 실제로 비가 내리는 날이면
동수는 손에 일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 담배만 피워댔다. 고급 여성 속옷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매장에 하루 종일 여자 같은 남자가 그녀 옆에 버티고
있어 동수는 가슴이 아렸다.
6개월 전 동수는 우연히 선주를 만났다.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악수를 하거나 포옹을 한 것이 아니라 동수가 지나가다 선주를 본
것이었다. 그 날은 동수가 아침부터 속이 쓰리고 신물이 올라와 참고
있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회사에서 가까운 의원을 가던 길이었다.
오래전부터 위장병을 가지고 있던 동수는 늘 위장약을 입에 달고 다녔
다. 일 년에 두세 번 위장이 발작을 일으키기도 하고 괜히 속이 묵직해
일주일 정도 고생을 하곤 했다.
그 날도 비가 내렸다. 동수가 회사에서 나올 때는 하늘이 꾸물거려 금방
비가 내릴 것 같지 않았다. 시장 근처에 왔을 때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
하자 동수는 가까운 편의점에서 우산이라도 살 생각으로 이리저리 뛰어
다녔지만 편의점은 금방 눈에 띄지 않았다.
쇼윈도에 물기가 번져 불투명해진 여성 속옷 매장 안은 얼핏 보면 편의
점과 비슷하게 보였다. 동수는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가 우산을 파느냐고
점원 아가씨에게 물었다. 옆에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여인이 동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저희 매장에서는 우산을 팔지 않습니다.” 여인은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감칠 맛 나는 목소리로 동수에게 말했다.
“아, 그래요? 죄송합니다.”
매장에 들어 간 것이 더욱 창피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동수는 얼른 매장을 나서려고 하다가 다시 한 번 주인으로 보이는 여인의 얼굴을 흘낏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5초 정도 서로의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동수는 죄 짓고 쫓기는 사람처럼 얼른 밖으로 나와 매장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새로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듯 간판이 제법 세련되면서 최근에 인기 몰이를
동수는 우산이 없다는 사실보다 남자가 여성 속옷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하는 연예인의 얼굴이 디자인 되어 있었다.
‘아리비안 나이트? 이름 한번 예쁘군.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인데. 어디서 보았을까? 그래, 선주, 선주를 닮았어. 그 여인이 선
주를 닮은 건지, 아니면 선주가 그 여인을 닮은 건 지 모르지만 하여간
선주를 닮았어. 세상에 참으로 희한한 일이 다있군. 선주는 결혼해서
부산에 산다고 들었는데......’
동수는 의원에 다녀온 뒤 일상에 빠져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고, 우연히
마주친 여인은 걷 잊혀졌다.
동수가 세상에 우연(偶然)이 없다는 말이 맞는다고 수긍하게 된 것은
6개월이 지난 얼마 전 일이었다. 늘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장통은 나이
에 상관없이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면서도 괜히 설레게 하여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자 동료들은 얼큰한 것이 생각난 듯 이구동성으로
외식을 하자고 의견일치를 보았다. 회사 구내식당의 메뉴는 다양하게
나오지만 한 달 정도 단골이 되다보면 늘 보던 음식 같아 사원들이 금방
싫증을 냈다.
동수는 회사생활 20년이 넘어서면서 100여명 밖에 안 되는 사원 중에
서 가장 한 곳에 오래 근무하는 고참 사원이 되어있었다. 처음 함께 입사
한 동료들 중 대부분이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떠나거나 혹은 건강
상의 이유로 물 맑고 공기 좋은 지방으로 원해서 내려가는 바람에 터줏
대감이라는 별명이 얻기도 하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체 몇 군데 입사원서를 제출하였지만 집안에
그럴 듯한 배경이 없는 탓으로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다. 자포자기
상태에서 동수에게 손을 내민 회사에 동수는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박 부장님, 시장통에 얼마 전에 개업한 순댓국밥집이 맛이 괜찮다고
하는데요?”
얼마 전 들어 온 경력사원이 어디를 갈지 정하지 못하고 있는 동수에게
방향을 제시하였다. 부하직원들은 점심때면 동수의 눈치를 보았다.
동수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어서 그의 비위를 거스르거나 상하게 하면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았다. 12시가 되자 동수를 앞세운
부서 직원들은 시장통으로 향했다. 공교롭게도 순댓국밥집은 아라비안
나이트 앞을 지나가야 했다. 순댓국밥집을 가는 길은 다른 방향도 있었
지만 빙 돌아서 가야했다.
‘아, 아라비안나이트?’
동수는 봄에 우산을 사기 위하여 얼떨결에 아라비안나이트에 들렸던
기억을 떠올리고 씩 웃었다. 갑자기 내린 비 때문에 우산을 살 요량으로
어떤 매장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불쑥 들어갔다가 머쓱해서 나오던 일이
며칠 전 일 같았다.
가을비가 제법 내리고 있었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낙엽이 지고, 낙엽이
지면 우수(憂愁)를 즐기는 사람들은 옷깃을 세우고 홀로 공원을 산책하거
나 옛 사람을 추억하면서 고독을 씹으며 나름 인생을 의미를 분석할
것이다.
동수는 아라비안나이트를 지나가면서 마치 오랜 친구를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한번 흘낏 쳐다보았다. 주변의 다른 의류매장이나
가전제품 등 시민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상점들 쇼윈도는 온통 갈색
으로 치장하여 행인들의 시선을 잡기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라비안나이트는 온통 분홍색과 노란색 등 젊은 여인들에게
어울릴 법한 색으로 치장되어 남자들은 강심장이 아니면 감히 들어갈
수 조차 없었다.
‘아, 그 여인, 아니 내 첫사랑 선주를 닮은 그 여인이 있구나. 그런데
옆에 있는 남자는 누구일까? 처음에 내가 우산 사려고 얼떨결에 아라
비안나이트에 들어갔을 때 남자는 없었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비 오는
날 또 여길 지나게 되네. 나하고 저 매장하고 무슨 인연이라도 있는
걸까?’
맨 정신으로는 힘들죠?”
“박부장님, 왜요? 사모님, 속옷 사시게요? 남자들이 저기 들어가려면
장난기 많은 최대리가 아라비안나이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는 동수
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동수는 그만 얼굴이 빨개졌다.
아내 지영이의 생일 이틀 후였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면서
매년 아내의 생일날이면 두 사람이 외식을 하며 동수는 아내에 대한
사랑이 식지 않았음을 증명해왔다. 이번에도 동수는 언젠가 직장 동료
들과 저녁 식사를 했던 고급 레스토랑 기억해 내고 아내를 데리고 갈
계획을 세웠다.
식사만 하는 게 좀 성의가 없는 것처럼 보여 화장품 세트나 속옷을
선물했다. 이번에도 역시 그냥 식사만 하는 것은 아내의 기대를 저버
리는 행위여서 동수는 아내에게 고급 화장품 세트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여성 속옷으로 바꿔볼까?’
그러나 동수는 아내의 속옷 선물을 사기 위하여 여성 속옷매장에 갈
때면 괜히 얼굴이 화끈거려 맨 정신으로 들어가기 어려웠다.
처음 아내에게 야시시한 속옷을 선물하기 위하여 여성 속옷 매장에
갔을 때 동수는 젊은 점원 아가씨가 다양한 브랜드의 상품을 추천하는
바람에 엉뚱한 것을 사온 적이 있었다. 온통 아기자기하고 손바닥만 한
여인들의 속옷을 동수는 감히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볼 수 없었다.
비는 낮에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다 퇴근 시간이 되면서 다시 내렸다.
동수는 낮에 잠깐 보았던 아라비안나이트 간판과 쇼윈도를 다시 한 번
더 보기로 마음먹었다.
동수가 아라비안나이트로 가서 아내의 속옷을 사려고 마음먹은 것은
아내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아라비안나이트의 그 여인이 자꾸만 눈에 아
른 거렸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편이 정확했다. 아라비안나이트가 가까워
질 수록 동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썼다.
‘내가 왜 이럴까?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 매장엘 들어갔는데 이번
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어 가는데 내 가슴이 왜 이리 고동치는 거야?’
을 서너 번 하고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심장의 박동은 점점 더 빨라지기만 하였다. 매장을 향해 가는 발길이 천근만근 이었다. 동수는 속으로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돈 내고 왜 마음고생을 하는지 스스로도
저만치 아라비안나이트 간판이 동수의 시야에 들어왔다. 동수는 심호흡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어서 오세요.”
먼젓번 그 아가씨가 동수를 반갑게 맞이했다. 매장 안쪽에서 컴퓨터 모
니터를 보던 그 여인이 동수 쪽으로 다가왔다. 낮에 매장 안에 있던 남자
는 없었다.
한 편입니다. 바스트는 보통이고요. 허리는 26정도 그리고 히프는 35쯤 ......”
“아내의 생일이라 속옷을 보려고요. 나이는 30후반 키는 167 정도 날씬
“아네. 알겠습니다. 요즘 남자들 아내의 신체 사이즈를 알고 있는 분이
드믄데. 선생님은 부인을 무척 사랑하시나 봐요?”
동수는 아내의 신체 정보를 쏟아내고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여인은
동수에게 칭찬을 하고 환하게 웃었다. 동수는 간신히 곁눈질로 여인을
쳐다보았다.
여인의 입술을 요염하게 빛내고 있는 진한 핑크 계열의 립스틱이 인상
적이었다. 가을과 상반되는 색상을 여인은 입술에 바르고 있는 것 같아
무심하게 흐르는 세월을 잡고 싶어 하는 여인의 심정이 반영된 듯 했다.
동수는 괜히 주눅이 들어 그 여인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아가씨만
바라보았다. 점원 아가씨는 이태리와 불란서에 직수입한 상품 몇 종류를
꺼내어 동수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동수는 이것저것 보다가 가격이 제
일 비싼 것을 포장해 달라고 했다. 여인은 자꾸만 동수를 뚫어지게 바라
보았다.
“어머? 그러고 보니 선생님, 언젠가 저희 매장에 오신 적 있으시죠?
그때 우산을 사시러 오셨던 것 같은데......” 랐다. 아내의 속옷을 사기 위하여 10분 정도 매장에 있었던 시간이 마치 서너 시간 지난 듯 했다. 여인의 인사말을 뒤로 하고 동수는 매장을 나와
동수의 고개는 더욱 숙여졌다. 아가씨가 빨리 상품을 포장해 주기를 바
길게 한숨을 토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