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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처(5)

* 창작공간/단편 - 눈부처

by 여강 최재효 2010. 1. 29.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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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부처(5)

 

 

                                
                                                                                                                                                                                  - 여강 최재효

 

 


 

 선주는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이를 악물고 재수생활을 견뎌냈다. 다행히 신

체에 큰 변화는 없었으나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지울 수 없었다. 동수에게

편지도 쓰지 않았다. 동수에게서 안부를 묻는 편지가 여러 통 왔지만 선주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학원에서 보는 모의고사도 작년보다 별반 신통한 점수를 얻지 못했다. 한바

탕 폭풍우가 지나간 뒤 선주는 동수에 대한 마음을 잠시 접기로 하였다. 공부

다가도 종종 동수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하였지만 선주는 독하게 마음을

추스렸다.


 학력고사 점수는 지난해와 비슷하였다. 선주는 서울이 두려웠다. 서울이

마치 악마의 소굴처럼 느껴졌다. 대학진학 안내서를 놓고 여러 날을 고민한

끝에 선주는 지방대학교를 선택하고 원서를 넣었다. 선주의 점수는 서울에

서도 명문대는 아니지만 중위권 대학에는 얼마든지 합격이 가능했다.

 

 지난해 여름의 악몽을 하루 빨리 잊기 위한 선주의 몸부림이었다. D시에

있는 지방 유명대학 영문과에 진학한 선주는 악몽을 씻기 위하여 입학하자

마자 동아활동에 참가하여 활발하게 대학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문득 문득 동수 생각에 선주는 밤새 울어야 했고, 독하게 마음먹고

앞으로는 절대로 동수를 생각하지 않겠다고 맹서하였지만 잘 지지지 않

다. 하숙을 하고 있는 선주는 방학 때가 되어도 어머니에게 공부를 한다

핑게로 고향에도 가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집안의 딸로 태어난 덕분에 선주는 별 어려움 없이 지

수 있었지만, 사람의 정이 그리워 자주 울기도 하였다. 혼자 있을 때 선

주는 술을 마시는 버릇이 생겼다. 고독, 뜻하지 않은 이별, 가슴에 운동장만

하게 난 상처, 동수의 배신 등 모든 것들이 선주를 편히 있게 하지 않았다.

 

 혼자 배낭을 메고 남도의 이름난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악몽을 잊기 위해

부림을 쳤다. 유명한 산사에 들러 스님들로부터 법문도 듣고 산천경계

에서 자연의 이치도 터득하였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늘 텅 비어 있었다.

 

 고향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면 동수에게 편지가 왔는데 어떻게 하면

냐고 하였다. 그때마다 선주는 편지를 반송시키라고 하였다. 어쩌다

향에 가면 영태가 어떻게 알고 찾아와서 동수의 소식을 전해주었지만 선주

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다음해 설날 선주는 영태에게 동수가 보냈다는 편지와 함께 동수가 군대

에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주는 동수의 편지를 찢어버릴까 하다가 한번

읽고 버리기로 하였다.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선주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

이  고였다.


 보고 싶은 선주씨에게......!

 그대에게 소식이 끊기지 벌써 2년이 다 되어가네요. 영태를 통해 자주

그대에 대한 소식을 들었어요. 지난 2년은 나에게 너무나 큰 고통이었

요. 어느 날 그대가 저 멀리 날아가고 난 뒤부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었답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몸이 아파 자주 병원신세를 져야했어요.

병상에 누워 그대를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거의 회복이 되었지만 지난해

에는 거의 약에 의존하다 시피 했어요.

 

 선주씨, 내 사랑하는 여인. 윤선주, 이제 당신의 이름은 내 가슴에 새

평생을 살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 이 편지가 그대에게 보내는 마

지막 편지가 될 것 같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그대가 나를 멀리하는지 모

지만 신은 너무 가혹한 것 같습니다. 이제는 혼자 있는 일이 습처럼

었어요. 혼자서 휘파람부는 일이 일상이 되었답니다.

 

 오늘도 윤선주라는 이름을 수백, 수천 번도 더 불러봅니다. 군복을 입고

총을 들고 북녘을 응시하며 철책선 근무를 임하면서 저 하얀 구름이 그대

있는 곳으로 흘러가서 나의 연인인 윤선주에게 내 심정을 전해주기 간

절히 빌고 빈답니다.

 

 언제 어디서 내가 그대를 다시 만날지 모르지만, 나는 그대의 모습을 내

동자에 넣고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잊지 않을 것입니다. 항상 몸 건강

하고 뜻 한바 꼭 이루어지길 빌어요. ‘내 생명과도 같았던, 사랑하는 윤선

주’ 다시 한 큰 소리로 그대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안녕히......!

 

 

                                                      윤선주를 사랑하는 권동수

 

 


 선주는 편지를 다 읽고 영태를 불러냈다.


 “영태야, 하나만 물어볼게.”
 “......”


 “동수씨가, 작년에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몹시 아팠다는데 어떻게 된 것

지 자세하게 이야기 해 줄래?”


 “몰랐니? 동수 병원에 입원했던 거? 작년 5월 중순경에 갑자기 공부하다

러져 병원에 실려 가서 거의 두 달 가까이 있다가 퇴원했어.”
 영태는 오히려 선주에게 이상하다는 반응이었다.


 ‘작년 5월? 작년 5월 중순......, 내가 동수씨 대학교에 찾아간 시기가 작년

6월 이었는데.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내 두 눈으로 분명히 동수씨가 학

주점어떤 여학생하고 키스하고 있는 장면을 분명히 봤어. 그리고

만약 동수가 병원에 입원하였다면 나에게 한마디 말도 없을 수 있어?

 

 이건 말도 안 돼. 나에게 무언가 숨기기 위해 작전을 피는 거야. 분명해.

내가 그 학교에 갔다가 그날 내 인생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어. 난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나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아픔도 함께 해야 하는 거

아냐? 병원 입원한 사실을 알리지 않다니?’


 “영태야, 진실을 말해 줘. 정말로 동수씨가 작년 5월 중순경에 병원에

원했었어? 어느 병원이었어?”


 “응, 동수가 뇌수막염인가 뭔가로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동수가 다니는

학병원에 입원했었어. 나도 나중에 알았어. 집에서는 주변사람들에게 이

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 같아. 별로 좋은 일이 아니라고 동수 아버님이 쉬쉬

하며 가족들에게 함구령을 내렸던 모양이야.”


 “정말이니? 동수씨가 뇌수막염으로 쓰러져 병원에 두 달 가까이 있었다는

정말이야? 똑바로 말해줘 영태야.”
 “선주야, 넌 속아서만 살아왔니? 내가 너한테 왜 거짓말을 해? 정 못 믿겠

으면 나하고 동수 어머니한테 가서 물어보자고.”


 “아냐, 아냐,”
 “왜 그래 갑자기? 왜 우는 거야? 선주야, 왜 그래?”
 선주는 영태와 이야기를 하다말고 울면서 집을 향해 뛰어갔다.


 “허, 거참 이상한 일일세. 그렇게 똑똑했던 선주가 마치 바보가 된 것

아.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알다가도 모르겠네?”


 영태는 담배 한 개비를 빼물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선주네 집과 동수

집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두 집 부모님들 간에 왕래는 없었다. 선주는 동수

네와 가까이 사는 K여고 후배들에게 지난해 여름 동수의 일에 대하여 물었

지만 잘 알지 못했다.

 

 선주가 동수의 지난해 병원에 입원했던 사실을 확인하는 방법은 동수

님이나 가족들에게 직접 알아보거나 동수가 입원했던 병원의 진료기

록을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선주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일이 꼬인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알

가 없었다. 머리가 아파왔다. 선주는 영태에게 부탁해 동수가 근무하고

있다는 부대의 주소를 알아냈다. 선주는 동수에게 편지를 쓸까 말까 며칠

을 고민하였다.

 

 2년 가까이 편지 한 장 보내지 않다가 갑자기 편지를 쓰려니 마음이 내

않았다. 여자의 몸으로 동수가 근무하는 군부대로 면회 갈 생각도 해 보

았으나 그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 어찌해야 하나? 내가, 내가 뭔가를 착각했었나? 분명히 학사

주점에서 동수씨를 보았어. 여대생과 키스하는 장면을 분명히 보았다고.

그런데 그 남자가 동수씨가 아니었다니......, 이대로 있으면 내가 죽을

까지 의문이 꼬리를 물거야. 내가 직접 확인해야 해.

 

 가는 거야. 군부대가 미국에 있는 것도 아니고 달나라에 있는 것도 아니니,

내 두발로 가서 확인하는 거야. 영태보고 같이 가자고 해 볼까? 아냐 나 혼자

가는 게 좋겠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잖아. 영태도 역시 남자고. 난 남

자들이 무서워.’


 선주는 고향에서 설을 쇠고 하숙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방학 중이라 딱히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는 일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집에서 오는 내내 선주는

영태의 말을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면서도 자신이 직접 확인 해 보고 싶었다.

 

하숙집에서 며칠간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선주는 두문불출하였다. 겨울방학도

얼마 남지 않았고 2학년 1학기 수강 신청과 등록금 납부 등 학사과정을 체크해

본 뒤 선주는 배낭을 꾸렸다.


 “아주머니, 한 삼일 정도 친구와 어디 좀 가기로 했거든요. 오늘이 금요일

니까 늦어도 일요일에는 돌아 올 거예요. 혹시 저희 집에서 전화가 오면, 갔다

와서 전화 드리겠다고 말씀 전해 주세요.”


 “알았어요. 잘 다녀와요. 날씨가 쌀쌀하니 단단히 입고가요.”
 선주는 아침 일찍 등산복 차림으로 시집, 카메라, 수첩, 속옷, 화장품 등을

챙기고 하숙집을 떠나 최전방 가까이 있는 강원도 C군으로 향했다. 서울서

차를 갈아탔다. C군으로 향하는 버스는 거의 텅 비다 시피 했다.


 선주가 하숙집을 떠난 C군에 도착 하였을 때 이미 날이 어둑어둑 했다.

9시를 넘기고 있었다. 시간이 너무 늦어 면회를 할 수 없는 시각이라 할 수

없이 여관에 들어 하룻밤 묵기로 하였다. 혼자 인근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있으려니 서러운 생각이 들었다.

 

 선주 곁에서 군인과 젊은 아가씨가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무척 다정해

다. 선주는 식사를 하면서 자꾸 옆 테이블을 쳐다보았다. 군인과 아가씨가

소주잔을 부딪치며 즐거워하였다.


 “아주머니, 여기 소주 한 병 주세요.”
 “혼자 드시게요?”
 “......”
 중년의 여인이 소주 한 병과 손님에게 인심을 쓰기 위해서 계란 부침
두개를

부쳐서 가져왔다. 인심이 좋아 보이는 여인이었다.


 “아가씨도 면회 왔나 봐요?”
 “네에, 그런데 시간이 너무 늦어서요.”
 “아이고, 딱해라. 저기처럼 애인을 만나 하룻밤 재미있게 보내면 좋을
텐데

......”


 선주는 소주 한 병을 다 마시고 식당을 나왔다. 여관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텔레비전 정규 방송이 끝 날 때까지도 잠이 오지 않아 앉았다 누웠

를 반복하면서 영태의 말의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내가 그날, 그 학사주점에서 헛것을 보았단 말인가? 내가 헛것을 보고 내

인생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스스로 만들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가 없어. 내 두 눈의 시력은 꽤 좋은 편인데. 그 여학생을 끌어안고

키스하는 남자는 분명 동수씨였어. 목소리도 분명 동수씨와 같았고.

 

 목소리 얼굴이 같다면 분명 동수씨 밖에 더 있겠냐고? 그런데 영태 말에

하면 그 당시 동수씨는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니......, 도대체 어느 것이 진실

이란 말인가? 아아 답답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시피 한 선주는 새벽녘에 잠깐 잠이 들었다. 해장

국으로 늦은 아침을 해결하고 군부대로 향했다. 아침인데도 눈이 내리기 시

작하였다. 사방이 온통 눈의 세상인데 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읍내에서 버스를 타고 30분가량 가니 육군 0000부대라고 쓴 대형 안내

가 나타났다. 부대 정문 좌우에 온통 살벌한 문구가 쓰인 구호가 붙어있어

가뜩이나 추운 날씨에 더욱 움츠리게 했다.


 정문 초소 옆에 면회 온 사람들을 위한 안내소가 있는데 이미 서너 명의 민

간인들이 서성대고있었다. 토요일이라 자식들 혹은 애인을 면회 온 사람들

같았다. 선주도 안내소 군인에게 동수의 소속을 대고 관계는 외사촌 동생이

라고 한뒤 면회를 신청하였다.

 

 차마 애인이라고 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외사촌 동생이라고 하여도

인들은 선주가 애인이라고 추측하고 있을 터였다. 면회를 하러 온 사

이 계속 몰려들었다. 선주는 동수를 만나면 처음에 어떻게 해야 할까를

민하였다.


 ‘동수씨, 미안해. 그동안 말 못할 사정이 있었어. 이것도 좀 우습고.’

‘동수씨, 오랜만이네. 잘 있었어?’ 이 말도 좀 어색해. 그렇다면 뭐라

해야 할까?‘


 선주가 고민하고 있을 때 부대에서 말쑥하게 군복을 입은 병사 한명

어오더니 애인인 듯한 아가씨를 덥석 끌어안았다. 아가씨는 깔깔 거리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군인은 주위의 눈치를 보면서도 아가씨를 안고

씩 웃으면서 뭐라고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나도 동수씨가 나오면 저렇게 할까? 그러나 이 년간 편지 한 장 교환

못했는데 저렇게 행동을 한다는 건 너무 우스워. 그렇다고 멀뚱멀뚱 바라

만 보고 있을 수도 없고.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 되겠지.’


 “윤선주씨, 윤선주씨.”
 선주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즐거운 상상을 하고 있을 때 면회 접수

하는 병사가 선주를 불렀다.


 “네에, 제가 윤선준데요?”
 “아, 이거 어떻게 하죠?”


 “왜요?”
 “면회 오시기 전에 연락을 받지 못하셨나봅니다?”


 “......”
 “권동수 일병은 지금 지피(GP) 근무 중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지피가 어디에요?”
 “지피란 가드포스트(Guard Post), 즉, 군사분계선에 설치된 소초(所哨)를

합니다.” 


 “아, 그래요? 그럼, 거긴 어떻게 가야해요? 여기서 얼마나 떨어졌어요?”
 “죄송합니다. 지피는 민간인들이 갈 수 없는 곳으로 병사들이 한번 지피

들어가면 6개월 후에 나옵니다. 권일병은 여름이나 돼야 지피에서 나옵니

다.”


 “아아, 이럴 수가.”
 선주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흐느꼈다. 선주가 울고 있자 군인들과
면회

온 사람들은 선주에게 딱하다는 눈길을 주면서도 면회 오기 전에 알아보지도

않았느냐는 눈치였다.

 

 선주는 한참 서럽게 흐느끼고 나서 부대를 나왔다. 부대를 나와 집으로 되

아가는 발걸음은 천근만근이었다. 하숙집으로 돌아 온 선주는 동수에게 수십

수백 장의 편지를 쓰고 찢고를 반복하다가 여름에 다시 한 번 더 면회 가기로

마음먹었다.


 일상의 캠퍼스 생활로 돌아온 선주는 일 년 전의 악몽에서 탈피하기 위하

공부에 전력하였다. 1학기 성적을 올 A를 받아 장학생에 선발 되면서 담당 교

수로부터 여름방학기간에 카나다로 가는 영어 어학연수 대상자로 뽑혔으

연수 갈 준비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선주는 여름방학 때 동수를 면회 가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

대로 되지 않았다. 선주는 어학연수를 다녀온 뒤 시간이 날 때 동수에게 면회

가기로 계획을 수정하였다.


 “저어 손님, 이제 가게 문 닫을 시간입니다.”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여인이 동수와 선주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에서

졸고 있다가 슬며시 다가와 영업 종료시간을 알렸다.


 “아, 그래요? 가만, 아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어요?”
 시간은 밤 11시를 넘어 가고 있었다. 손님들은 동수와 선주 단 둘 뿐이었다.

밖에는 아직도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초록색 플라스틱으로

된 빈 탁주 병이 즐비했다. 


 “선주씨, 그만, 그만해요. 오늘은 거기까지만 해요. 오늘 너무 늦은 거 같

요. 이제 서울로 올라가야죠?”
 “동수씨, 아직 이야기 다 안 끝났어요.”


 “그럼, 우리 서울 가서 이야기 마주해요. 이 식당은 이제 문을 닫아야 한다고

하잖아요. 여기서 내 차를 대리 운전해서 가면 돼요.”
 “그래요. 오늘, 밤을 새더라도 난 이야기를 마주 해야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거예요.”


 두 사람은 차 안에서 다정하게 손을 잡고 서로 좌우 방향의 차창 밖을 바라

보았다. 늦가을 비는 차갑고 금방 겨울을 불러 올 것 같았다. 동수의 승용

부천, 오류동, 영등포, 여의도를 거쳐 강변 북로를 달렸다. 무거운 침묵이

차안에 흘렀다. 두 사람의 숨소리만 차안을 가득 채웠다.

 

 한남동으로 빠져 나온 차는 도심으로 접어들었다. 동수가 대리기사에게 목

적지를 알려주며 지름길 방향을 알려주었다. 남산 쪽으로 차가 접어들고 곧

휘황 찬란한 건물 앞에 섰다.


 “동수씨, 호텔이잖아요?”
 “응, 내가 자주 이용하는 호텔이야.”
 ‘자주 이용하는 호텔?’


 “호텔이라고 해서. 꼭 잠만 자는 곳은 아니야. 물론 주 기능은 잠자는 곳이

지만 도시인들에게 필요한 편익시설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해. 내가 잘

는 바가 있는데 거기 가서 선주가 다 못한 이야기를 마저 들으려고 하는

......”


 “그래요? 난 또?”
  동수가 선주의 손을 잡고 지하에 있는 바(Bar)로 들어갔다.


 “어머나! 이런 데가 다 있었네요?”
 “선주는 이런 데 처음이야?”


 “네에. 전 술을 잘 못해요. 그러다 보니 이런 장소는 처음이에요. 부산

살 때 고급 레스토랑이나 카페 같은 데는 가보았지만 이렇게 시설이 황홀한

바는 처음이에요. 정말이지 여기서는 저절로 술 맛이 나겠어요?


 “권 부장님, 오랜만에 오셨어요? 좀 자주 들리시지 않고요?”

 자극적인 옷을 입은 젊은 여성이 동수를 보자 눈웃음을 쳤다. 동수는 관련

협력 업체 간부 사원들과 자주 이곳을 찾았기 때문에 바텐 아가씨는 동수를

깍듯하게 대했다. 은은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오렌지 빛 조명이 어둠과 잘도

조화를 이루었다. 붉은색 바탕의 의자가 앙증맞게 보였다.

 

 어두우면서도 두 사람만이 앉은 곳만 조명이 비추도록 시설이 되어 있어

에서 누가 앉아 술을 마시는지 잘 알 수 없도록 시설이 되어있었다. 5단

으로 된 장식장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외국 술들이 보기 좋게 진열되어 조명

을 받아 영롱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는데 마치 무지개를 토해내는 것도 같고

새카만 밤하늘에 별들이 반짝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부장님, 마티니로 드릴까요?”
 “그래요. 드라이하게. 그리고 여기 숙녀 분에게는 페퍼민트로......”
 “어머? 저는 위스키 콕으로 할게요.”


 “선주도 양주를 잘 알고 있네. 언더락스 잔에 얼을 을 채우고 위스키 1 온스

에 콜라를 8부정도 채워 마시는 걸 나도 좋아해. 그럼 나도 그걸로 할까?

저기, 베이스는 조니워커 블랙으로 해줘요. 난 1.5 온스.”
 선주와 동수는 다시 잔을 부딪쳤다.


 “선주, 나는 소래포구에서 선주의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많이 울었어.

차마 눈물을 보이지 못해 자주 화장실을 드나들며 눈물을 닦았어. 이건 운명

의 장난이다. 아니 행운 여신이 나와 선주 사이를 갈라놓기 위하여 꾸민 계

획된 음모라고 생각하였어.

 

 아, 이제라도 내가 선주를 만나게 된 것이 이승에서 맺어진 인연의 고리를

역시 이승에서 풀어야 한다는 말이 떠오르더군. 결자해지(結者解之)란, 한자

숙어가 있지. 우리 둘이 맺은 매듭은 우리 둘이서 풀어야 하지. 그것이 선연이

었든 악연이었든 간에 말이야.

 

 만약 그 매듭을 풀지 못하고 저승에 든다면 마음이 편치 못할 거야. 이승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이 가슴 아픈 사연을 알게 된다면 그 영향은 오래

갈 것이고, 또한 이승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무척 힘들게 할 수도 있지. 사람

살아생전에 맺은 악연의 매듭을 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자들이 얼마나

많아.


 그들의 후손들은 대대손손 욕을 먹고 있지. 역사적인 예에서도 얼마든

예를 찾아 볼 수 있어. 한일합방을 주도한 을사오적(乙巳五賊)들의 후손

보면 잘 알 수 있지. 지금까지 장시간 선주의 이야기를 들었어. 이제는 나의

이야기를 할게.

 

 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선주가 나에게 그날 밤 들려주었던 시를 듣고 싶어.

미국의 여류시인인 G 밴더빌트의 ‘사랑은 조용히 오는 것’이란 시 말이야.

직 그 시를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동수씨, 우리 건배해요.”
 “그동안 많은 세월이 흘렀군. 우리의 해후를 위하여 건배.”
 선주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동수는 그 여름 날 밤의 추억을 떠올리며
지그

시 눈을 감았다.

 

 

 


     외로운 여름과 / 거짓 꽃이 시들고도
     기나긴 세월이 흐를 때 / 사랑은 천천히 오는 것
     얼어붙은 물속으로 파고드는 / 밤하늘의 총총한 별처럼
     지그시 송이송이 / 내려앉는 눈과도 같이
     조용히 천천히 / 땅 속에 뿌리박은 일
     사랑의 열은 더디고 조용한 것 / 내려왔다가 치솟는 눈처럼
     사랑은 살며시 뿌리로 스며드는 것 / 조용히 씨앗은
     싹을 틔운 / 달이 커지듯 천천히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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