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X(최종회)
- 여강 최재효
낙엽이 막 지기 시작할 무렵 나는 기성이와 도봉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산에는 우리 두 사람말고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우리 두 사람의
행복한 등산을 위하여 산 사람들이 오늘 하루는 도봉산에 오르지 않기로 약속한
듯했다. 하늘은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고 해는 빨간 빛을 내며 서천(西天)으로 달려
가고 있었다.
예전에 한번도 본적 없는 해였다. 우리가 도봉산에 중턱 쯤 올랐을 때 수 만마리
의 까마귀 떼가 산 전체를 뒤덮고 있었는데 까마귀 우는 소리에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기성이 나의 팔을 잡고 빨리 더 높은 곳으로 오르자고 하였다.
숨을 헐떡거리며 만장대를 향해 뛰다시피 하였지만 늘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기성이 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안심하였다. 힘이들어 잠시 바위에
앉아 쉬려고 하면 까마귀들이 우리에게 달려들어 심장을 쪼았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일어나 만장봉 정상을 향해 뛰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방이 컴컴해지더니 길이 없어져 버렸다. 기성이 내 팔을 잡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 갔으나 어디가 어딘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다행히 까마귀
들이 달려 들지않았지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미끄러운 산
길을 걸어야 했다.
만장봉에 거의 다 도착할 무렵이었다. 기성이 나를 업어주겠다면서 등에 업히라고
하였다. 하늘에는 해도 없었고 달도 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기성이 나를 업고
조심조심 만장봉 위로 올라갔다. 서울 시내를 내려다 보았으나 파란 구름이 자욱
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기성이가 힘들 것 같아서 이번에는 내가 기성이를 업어주겠다고 했다. 기성이를
업고 일어났는데 내 등에는 아무 것도 없는 듯 했다. 그때 갑자기 강한 바람이 나를
향해 불어왔다. 내 등에 업혀있던 종이 조각 보다 더 가벼운 기성이 만장봉 아래로
떨어졌다.
“기성씨, 안돼, 안돼 -“
내가 헛소리를 지르며 눈을 떴을 때 형광등이 너무 부셔 다시 눈을 감았다. 분명
낯선 곳이었다. 다시 가늘게 눈을 떠 좌우를 살펴 보았다. 병원 응급실이었다. 간호
사와 의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어쩌다 병원에 누워
있어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 기성씨.”
나는 그제서야 경찰관과 함께 미시령에서 기성이 탄 차가 전복되었던 장면과 피투
성이가 된 기성이를 생각해 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나는 크게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겨우 쉰 목소리 밖에 나오지 않았다. 있는 힘을 다
하여 소리를 지르자 간호사가 다가왔다.
“이제, 정신이 드시나봐요.”
“여기가, 여기가 어디죠?”
“여기는 속초 **병원입니다.”
“지금이 몇시지요? 그리고 나와 함께 온 남자는 어디있어요?”
“지금 오전 아홉시에요. 그리고 환자님과 함께 온 남자분은 중상에 출혈이 심하여
위태로운 상태였어요. 지금 수술을 받고 있어요.”
‘수술?’
“지금 수술이라고 하셨나요?”
“네에.”
‘아, 다행히 기성씨가 살아있구나. 아, 하나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속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리면서 기성이 꼭 살아나기를 빌고 빌었다.
“아가씨, 수술은 언제쯤 끝나나요?”
“지금 쯤 거의 끝나가고 있을거에요.”
“나 이제 괜찮으니 나를 수술실로 데려다 줄 수 있어요?”
“안돼요. 사모님도 몸이 안 좋은 상태고 수술이 끝나야 회복실로 가 보실 수 있어요.”
“그럼 아가씨, 그 사람 수술 끝나면 나에게 즉시 알려주세요.”
“네에.”
‘아아, 그 이가 꼭 살아나야 할텐데.’
내가 의식을 회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나와 함께 미시령으로 달려갔던 경찰관과
소방서에서 나온 직원이 찾아오더니 나와 기성이에 관한 인적사항 및 사고가 나게
된 경위 등을 상세히 조사하고 돌아갔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 간호사가 헐레벌
떡 뛰어오더니 기성이를 서울로 급히 후송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곳 병원의 의사들
이 최선을 다해 수술을 하였지만 뇌수술에는 한계가 있어 서울에 있는 K병원으로
후송하여 다시 수술을 할 예정이라고 하였다.
“아가씨, 이 링거주사바늘 빼고 나 좀 일으켜주세요. 내가 그 사람과 같이 가야합
니다.”
나는 병원에서 필요한 절차를 밟고 기성이와 함께 앰블런스에 올랐다. 붕대로 칭칭
감은 기성이를 본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두 눈만 빼꼼하게 내
놓은 상태에서 이동용 들것에 단단히 고정된 채 산소마스크를 쓰고 종류를 알 수 없는 약들이 주사바늘을 통해 기성이 몸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기성씨, 기성씨, 저에요. 저, 정미에요. 눈 좀 떠봐요."
나는 기성이의 두 손을 꼭 잡고 통곡하였다. 옆에 있던 간호사가 환자에게 안 좋으
니 울지 말라고 하였지만 나는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앰블런스는 비상 경광등과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다시 미시령을 넘어 서울로 바람처럼 달렸다. 어제 남편과 사이
좋게 넘어 온 고개를 오늘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랑하는 임과 넘고 있는 나는 죽
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 관대 이리도 사람의 운명을 순식간에 바꿔놓는 단 말인가 ?
사랑, 사랑 그놈에 사랑이 무엇이 관대…….”
“사모님, 진정하셔야 합니다.”
간호사는 나에게 자꾸 주의를 주며 조용히 하라고 하였다.
“간호사님, 환자의 상태 좀 체크해 보세요.”
“심장박동이 점점 약해지기는 하나 이 속도로 달리면 서울까지 가는 도중에는
큰일은 없을 거예요.”
“아, 하나님, 어째서 저에게 이 같은 고통을 주시나요? 제가 뭘 그리 잘못한 게 많아서 저에게 이런 고통을 안겨 주시냐고요? "
“사모님, 진정하세요. 환자에게 안 좋아요.”
속초를 떠난 지 2시간 30분 만에 앰블런스는 뇌 전문의가 있는 K병원에 도착하
였다.
도착하는 즉시 기성이 곧바로 수술실로 옮겨졌고 나 역시 응급실로 이송되어 링거
주사를 맞았다. 휴대폰을 꺼내 보니 남편에게서 수십 통의 문자가 와 있었는데 차
마 입에 올리기 민망한 내용이었다. 나는 미진이에게 전화를 걸어 빨리 K병원으로
오라고 하였다.
‘아, 하나님, 부처님, 알라님, 기성씨가 무사하도록 도와주세요. 저대로 가게 할 수
없어요. 제발, 제발 목숨을 구해주세요.‘
병상에 누워 나는 계속해서 신들을 부르며 기성이의 무사를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만약 기성이 저 대로 세상을 떠난다면 나 역시 세상을 뜨겠다고 다짐하였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비슷한 시기에 세상에 태어나 아침 이슬 같은 사랑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서로 가슴만 아파하다가 중간에 멈춘다면 훗날 저승에 들더라도 편치
못할 것 같았다. 나의 전화를 받고 미진이 금방 병원으로 달려왔다.
“정미야, 어떻게 된 거니? 왜 네가 병원에 누워있는 거야? 응?”
미진이에게 어제부터 있었던 일을 말해주자 미진이 충격을 받은 듯 한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이니? 이건 말도 안 돼. 정미야, 너 지금 나에게 거짓말하고 있는 거지? 그렇지?”
“…….”
“그럼, 기성이는 지금 수술 중이야?”
“응, 속초에서 올 때부터 심각한 상태였어. 제발 수술이 잘돼야 할 텐데.”
“정미야, 빨리 기성이 가족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하잖아.”
“기성이 가족이 어디 있니? 외아들에다가 부모님 다 돌아가시고 얼마 전 이혼하였
까지하였잖아. 자식들도 없고…….”
“아, 이 일을 어쩌면 좋니? 그럼 동창들에게라도 알려야 하잖아.”
미진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나와 기성이 이렇게 된 것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안 돼. 기성이 상태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 사실이 알려지면 나와
기성이를 두고 동창들은 입방아를 찧으며 우리를 비난할거야. 그러니 동창들에게
알리지 말고 일단 기다려보자.”
“정미야. 미안해. 너와 기정이 이렇게 된 것은 다 나 때문이야. 정말로 미안해.”
“아니야. 이게 나와 기성이의 운명인데 뭐. 너를 원망하거나 탓하고 싶지않아. 오히
려 너에게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난 너무 행복했어. 그 행복은 이 순간에도 지속되고 있는 중이야. 미영이가 나에게 큰 선물을 준거야. 만약 내가 20년 전에 기성이 편지를 받
고 훗날 부부로 맺어 졌더라도 오늘 같은 행복감을 과연 맛볼 수 있을지 의문이 들
곤 했었어. 기성이는 나의 첫 사랑이자 영원히 내 사랑이 될 거야.”
“저, 정미야? 그럼, 아저씨는 어떻게 되는 거야?”
“남편은 이제 나와 인연이 다했어.”
“안 돼. 그럼 두 애들은 어떻게 되는 거니?”
“아이들은 내가 맡아야지.”
“안 돼, 정미야. 나는 너의 불행을 지켜볼 수 없어. 절대로 이혼만은 안 돼. 침착해
야 돼.”
“미진아, 너는 몰라. 내 속내에 있는 이야기를 너에게 모두 털어놓을 수도 있지만 차마 그리할 수 없는 것이 슬퍼.”
“그래. 네 말이 맞아. 부부문제는 당사자 부부만이 해결할 수 있겠지. 나는 네가 예
전의 상태로 돌아갔으면 좋겠어.”
“아니야, 이젠 틀렸어. 이번 일로 인하여 나는 남편의 본심을 알았고 나 자신이 그
동안 너무 바보처럼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나는 이제 당당한 나로 살아갈 거
야. 그러나 지금은 기성이만 생각하고 싶어. 빨리 깨어나기만을 신에게 빌 뿐이야.”
“그래, 네 심정 이해해. 그러나 만약 기성이가 깨어나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니?”
“무슨 소리야? 기성이는 일어날 거야. 훌훌 털고 일어나서 당당하게 다시 내 앞에
설 거야. 난 믿어.”
나는 미진이에게 희망적으로 말하였지만 만약 기성이가 잘못 될 경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점점 복잡하게 꼬여가는 내 운명이 얄밉기도 하였지만 우선은
기성이 수술이 잘 되어 빨리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수술시간이 너무 길다고 생각
될 때 간호사가 왔다.
“저어, 사모님 빨리 수술실로 가보셔야 겠어요.”
“네에? 뭐가 잘못되었나요?”
“어서 저를 따라 오세요. 급해요.”
“이봐요, 아가씨. 환자가 어떤 상황인데 그래요?”
미진이가 간호사에게 신경질적으로 묻자 간호사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간호사의 부축을 받으며 수술실로 올라갔다. 내가 수술실에 도착하자 수술을 집도
했던 의사들이 무거운 표정으로 서있었다.
“사모님 되십니까?”
“네에.”
“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선생님, 어떻게 된 거죠?”
“죄송합니다.”
나는 의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수술실로 들어가 보았다. 기성이 하얀 천으로 덮여
있었다. 피 묻은 수술 도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얼른 천을 걷어내자 기성이 뇌수술을 받던 중 숨을 거둔 것 같았다.
“아, 기성씨- 기성씨- 이게 어찌 된 거에요? 왜 누워있어요. 어서 일어나셔야죠. 어서요."
나는 싸늘하게 식은 기성이 손을 잡고 통곡하였다.
나는 그만 울다가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가물가물한 의식 상태에서 나는 응급실로 실려가고 미진이 울면서 나를 따라왔다.
“안 돼, 이대로 가면 안 돼. 나는, 나는 어떻게 하라고 안 돼. 안 돼…….”
“정미야, 저기, 저 것이 무엇인지 아니?”
“글쎄 저게 무엇일까?”
“바보, 그것도 몰라. 저건 천둥꽃이야. 천둥꽃.”
“어머나, 그런 꽃도 다 있어요?”
“그럼, 저 꽃은 마음이 수정같이 맑은 사람 눈에만 보이는 전설상의 꽃이야. 저기
저 곳을 잘 봐봐. 번개가 칠 때 천둥꽃이 저렇게 바위에 피어나지.”
“어머나. 정말이네. 저렇게 붉고 탐스러운 꽃은 처음 봐. 정말 탐나네.”
“그래? 그럼, 내가 저 바위에 올라가 저 꽃을 꺾어다 줄까?”
“정말? 그런데 엄청 높은데 저길 어떻게 올라가려고?”
“네가 좋아한다면 하늘 꼭대기라고 올라가서 꺾어올 수 있어.”
“안 돼. 너무 위험해요.”
나는 기성이와 금강산보다 더 아름답고 기암괴석으로 가득한 산속을 걷다가 높은 바위위에서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천둥꽃을 보았다. 내가 천둥꽃을 보며 박수치고
즐거워하자 기성이 바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하였다.
“안 돼. 기성씨 너무 위험해요.”
“저 정도쯤은 얼마든지 올라갈 수 있어. 정미야, 여기 가만히 있어. 내가 얼른 올라 가서 저 꽃을 꺾어올테니.”
“기성씨, 올라가지 말아요. 너무 위험해요.”
“괜찮다니까.”
“아아, 안 돼 는데......”
“정미야, 다 올라왔어.”
그만 발을 헛디뎌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말았다. 놀랐다.
었다. 나는 미영이 얼굴을 보는 순간 미영이 얼굴에 침을 뱉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하여 미영이를 탓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조심하세요.”
기성이 천둥꽃을 한 아름 꺾어 다시 바위 아래로 내려왔다. 기성이 반쯤 내려왔을 때
“앗, 기성씨, 안돼 안돼 - ”
내가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질러댔던지 꿈결에 나의 목소리를 듣고 나 자신도 깜짝
“정미야, 정미야, 정신 차려.”
“…….”
“정미야, 나 미진이야.”
“정미야, 정신 차려. 나 미영이야. 미진이한테 네 소식 듣고 달려왔어.”
내가 겨우 눈을 떴을 때 미진이와 미영이 나를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
“미진아, 기성씨는 어딨어?”
“……..”
“미진아, 기성씨는 어디에 있느냐고?”
“…….”
“왜 말이없는거야? 기성씨, 기성씨 어디 있느냐고?”
“정미야, 진정해. 너 안정을 취해야 해.”
“빨리 말해. 기성씨 어디있어? 응?”
“기성이는 여, 영안실에…….”
“안 돼, 안 돼. 기성이가 금방 나에게 꽃을 꺾어 준다고 그랬어. 아냐, 아직 산 아래 있을 거야. 나 빨리 기성이에게 가봐야돼. 천 길 낭떠러지로 덜어졌단 말이야. 어서
가봐야 한다고.”
나는 침상에서 일어나 응급실을 나가려고 하였지만 미진이와 미영이 나를 붙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이거 놔. 나 기성이 떨어진 계곡으로 가봐야 해.”
“정미야, 정미야, 정신 차려. 너까지 이러면 어떻게 해."
미진이 병실을 나가겠다고 발버둥치는 나를 붙잡고 흐느꼈다.
“정미야, 미안해. 이 모든 것이 다 나 때문이야. 용서해 정미야.”
미영이 무엇인가 쫒기는 듯 겁에 질린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내 손을 꼭 잡았다. 이제 와서 20년 만의 사과가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미진아. 너 방금 기성씨가 어디 있다고 그랬니?”
“기성이, 영안실에 안치되었어.”
“아, 기성씨. 기성씨이 - "
“정미야, 진정해. 너만이라도 진정해야 해.” 따라서 흐느꼈다.
“안 돼. 이건 꿈이야. 지금 내가 악몽을 꾸고 있는 거라고. 그렇지? 미진아 나, 나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 맞지?”
“저, 정미야.”
“안 돼, 기성씨가 빨리 깨어나야 돼.”
나는 대성통곡하면서 기성이 이름을 불렀다. 내가 통곡을 하자 미진이와 미영이도
저녁때가 되자. 동창들이 병원으로 몰려들었다. 상주도 없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기성이 영정사진을 보는 동창들의 가슴은 무너져 내렸다. 일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하여
동창들은 20년 전 한 남자를 두고 미영이와 나의 치정에 얽힌 가슴 아픈 이야기를 전해 듣고 모두 침울해 했다. 나는 검정색 상복(喪服)으로 갈아입었다. 비록 법적으로 나와 기성이 아무런 관계가 아니지만 마지막 가는 길에 내가 상복으로 갈아입고 빈
소를 지켜야 기성이 안심할 것 같았다.
가족이 없는 기성이의 빈소는 너무 쓸쓸하였다. 동창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 동창
들은 무겁게 입을 다물고 빈소를 지킬 뿐이었다. 동창 회장이 기성이 아버지와 먼 친척 되는 분을 수소문 끝에 찾아내 장례절차를 논의했다. 피붙이도 없는 상태에서 매
장은 큰 의미가 없다며 화장을 결정하였다. 간신히 빈소에 앉아 울고 있는 나에게
동창들은 따뜻한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그중에서도 미영이 유독 내 곁을 지키면서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정미야, 용서해. 내가 잘못했어.”
“…….”
“그때, 내가 기성이 편지를 너에게 전해주었어야 하는 건데......”
“…….”
“정미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니? 내가 어떻게 해야 기성이와 너에게 진 죗값을
치를 수 있겠니?”
“미영아, 아무 말도 하지 마. 너도 여자 나도 여자잖아.”
“미안해 정미야.”
“여자가 마음에 맞는 남자를 좋아하는 건 하늘의 이치야. 다만, 짝이 맞지 않을 때는
비극이 벌어지지. 지금 나는 그 비극의 한 가운데 있어. 하루 빨리 나는 그 비극에서 벗어나고 싶어.” 시신을 싣고 동창들은 인천에 있는 부평승화원으로 향했다. 새벽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겨우 친정어머니와 오빠들에게 나의 상태를 알리고 남편에게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두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내가 사랑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방황하면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방황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정미야, 정말로 미안해. 내 두고두고 너에게 사죄할게.”
다음날 아침 9시 동창회장의 주관으로 장례식이 치러졌다. 대형 버스에 기성이
‘지금 사랑하는 사람의 시신을 차에 싣고 화장장으로 향하는 나의 원통한 심정을
누가 알까? 달리는 이 차에서 뛰어 내리고 싶다. 사람들은 나를 미친년, 정신 나간 년
이라고 손가락질 할 테지. 그러나 누가 나에게 뭐라고 하던 나는 아무렇지 않아. 사랑
하는 사람을 잃은 상태에서 나는 호사가들의 말장난에 놀아나고 싶지않다고. 내 비록
기혼녀의 입장에서 기성이와 짧은 몇 번의 만남이 있었지만 그래도 난 행복했었어.
난, 이제 혼자야. 이 세상에 나는 아무도 없다고.’
내가 혼자서 중얼 거리자 미진이 나를 안아주며 내 등을 다독거렸다. 부평승화원에
버스가 도착하면서 기성이 시신이 승화원 안으로 운구 되었다. 내가 거의 걷지도 못할 지경이 되자 미진이와 미영이 나를 좌우에서 부축하였다.
“자, 동창 여러분! 우리의 귀한 친구 한명이 하늘의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기성이 친구의 명복을 빌어 줍시다. 비록 친구가 떠나가도 친구의 환한
미소가 나와 여러분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친구는 생전에 불우한 이웃에게 장학금을
전달하였으며, 매년 많은 금액의 돈을 고향의 모교에 기탁하였습니다. 또한 음으로
양으로 동창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소중한 친구를 보내
면서 친구의 따뜻한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친구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여러분 잠시 묵념을 올리겠습니다. 다 같이 묵념.”
동창회장의 제의에 다라 동창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잠시 묵념을 하였다. 찰나
같은 묵념이 끝나자 기성이 시신이 담긴 관이 화장로 안으로 들어갔다.
“안돼요, 안돼요. 기성씨. 안돼요. 나는 어떻게 하라고요. 안돼요 가지마세요.”
나는 화장로 안으로 들어가는 기성이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혼절하고 말았다.
“정미야, 정미야 정신 차려. 얘, 정미야. 정미야.”
무의식중에도 미진이 울부짖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아냐, 이건 아냐. 내가 지금 악몽을 꾸고 있는 거야. 이건 현실이 아냐. 어서 이 미몽
에서 깨어나야 해. 어서.’
나는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 모든 것이 하얗게 변해버리는 것을 보았다. 내가 한참
동안 혼절한 상태에서 있는 동안 기성이는 하늘로 승천하고 있었다. 하얀 정장 차림의 기성이 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정미야, 잘 있어. 미안해 너를 더 보호해주어야 하는데. 정말로 미안해.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천천히 와. 안녕, 내 사랑…….”
내가 눈을 떴을 때 나는 미진이 무릎을 베고 있었다. 곁에 여자 동창애들이 근심스
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미야, 깨어났구나.”
“정미야, 정신이드니?”
동창들이 하나 둘 나에게 다가와 나의 상태를 살폈다. 기성이의 유골을 수습하러
수습실로 오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동창회장과 몇몇 남자 동창들이 곧 유골함을 들고 나타났다.
“아, 기성씨 -, 기성씨 -”
나의 눈에서는 눈물도 말랐는지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미진이와 여자 동창들
의 부축을 받으며 산으로 올랐다. 다행히 비가 그치고 해가 나왔다. 온기가 남아 있는
기성이의 유골을 나는 하얀 장갑을 끼고 한줌 한줌 허공에 뿌렸다.
“기성씨, 다음 생에서 다시 만나요.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나는 진정으로 행복했었
어요. 곧 나도 당신 뒤를 따를게요."
휘익 -. 만수산 정상에 서서 나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기성이를 보내고 있었다. 산 아래에서 동창들이 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몇몇 남자 동 창들은 술에 취한 채 울면서 ‘기성아‘, ’기성아‘를 외쳤다.
‘기성씨, 당신은 내 내 가슴속에 잠든 거예요. 영원히 내 가슴속에 남아서 나와 함께
하는 거에요. 나 이제 울지 않을게요. 나 이제부터 죽을 때까지 당신과 함께 할 거에요. 사랑해요 기성씨.’
기성이를 보내고 나는 미진이와 집으로 왔다. 남편은 회사일로 아침 일찍 지방에
갔다 온다고 하며 나갔다고 한다. 내 소식을 듣고 친정에서 어머니와 올케가 올라와 있었다. 나의 초췌해진 모습을 보더니 어머니는 울음을 터트렸다.
“정미야, 이게 어찌된 일이니? 꽃보다 더 곱던 네가 어찌된 거여? 응?”
“고모, 어떻게 된 거예요?”
친정어머니와 올케는 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엄마, 나 쉬고 싶어요. 나 잠 좀 잘게요.”
“그래, 그래. 에구. 미련한 것. 그놈의 옛정을 버리지 못하고…….”
“정미야, 이제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푹 쉬어. 너 건강이 아주 안 좋아 며칠 푹
쉬면 좋아 질 거야.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알았지? 나 갈게 그럼.”
미진이 나의 등을 다독거리며 나를 안정시키려고 애썼다.
“미진아, 고마워. 너도 집에 가서 쉬어야지. 어제부터 고생했잖아.”
“그래 그럼, 나간다. 몸조리 잘해.”
미진이가 간고 난 뒤 나는 그동안 모아 두었던 수면제를 몽땅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기성씨, 미안해요. 나만 아니었으면 당신이 그런 참변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요.
나 이제 어떻게 해야 되죠? 아까 당신을 내 가슴에 묻으며 결심했어요. 나도 당신
뒤를 따라가겠다고요.’
이틀 후 나는 병원에서 깨어났다. 친정어머니와 언니 그리고 큰 오빠와 두 아이
들도 나를 근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들던 나를 안타까운 시선들이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쯤 나는 저승 문턱을 넘어 기성이를 만나고 있어야 했다. 나는 다시 살아난 것 이 기성이에게 미안했다.
“정미야, 정신이드니?”
노모(老母)는 눈물을 흘리면서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엄마, 엄마…….”
큰 딸아이는 연신 나를 부르며 서서 눈물만 훔쳐내고 있었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
“오, 오빠.”
“응, 그래. 정미야. 말해보렴.”
“애 아빠는요?”
“응, 좀 전에 회사 간다며 나갔단다.”
“그래요.”
이틀 후 나는 병원을 퇴원하면서 큰 오빠와 이혼 전문변호사를 찾았다. 남편에게
이혼 청구와 함께 재산분할 청구도 동시 법원에 신청하였다. 친정어머니는 참고
살라고 애원을 하였지만 나는 남편을 용서할 수 없었다.
설령 남편을 용서하고 산다하여도 남편과 부부관계를 지속하는 동안 나는 기성
이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과 기성이를 죽게 만든 장본인이 나라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도저히 남편과 한 이불을 덮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남편이 두 아이들의 친권과 양육권을 주장한다하여도 나는 성도착증의 인격 파멸
자인 남편에게 맡길 수 없었다. 남자는 씨를 뿌렸다고 하지만 그 씨를 받아 생육시키고 자라게 한 여자의 소임과 의무가 더 막중하다고 판단했다. 물론 아이들은 남편보
다 나를 따르고 의지할 것이 분명하다.
나는 여자를 자신이 부속물쯤으로 여기는 남편에게 보기 좋게 복수해야 했다. 그렇
게 하는 것이 기성이 영혼을 위하고 내 영혼을 위하는 길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싶었다. 두 아이들도 내가 아빠에게 억압받고 있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나는 당당한
여자로, 사회인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끝-
_()_ 그동안 애독하여 주신 임에게 진심으로 고개 숙여 고마움을 전합니다.
본 작품은 탈고(脫稿)하기 전입니다. 전체적으로 약간의 수정을 한 뒤
작품집(소설집)에 실을 예정입니다. 고맙습니다.
행복한 연말연시 되시고 늘 건강하소서.
2008.12.14일 인천 소래 뜨란채에서
여강 최재효 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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