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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X(9)

* 창작공간/장편 - 엑스

by 여강 최재효 2008. 12. 10.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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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엑스X(9)

 

 

                                                                                                                                                                                 - 여강 최재효

 

 

 


 택시를 타자 나는 태산보다 무거운 눈꺼풀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만 기성이의

어깨에 기대어 가물가물한 의식을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택시가 좌우로 약간 

회전할 때면 나는 거의 기성이의 가슴팍에 안기곤 했다. 내가 아무렇게나 행동을

한다면 기성이 나를 헤픈 여자로 여길 것 같아 두 눈을 부릅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늦은 밤이지만 환락가가 밀집한 곳이라 그런지 무단 횡단하는 취객들로 도로는

위험해 보였다. 내 판단에 택시가 한남대교를 건너 강남의 물 좋은 호텔로 가야

했는데 정반대의 방향으로 차는 달리는 것 같았다.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거의 누운 자세로 기성이의 무릎을 베고 택시가 흔들리는 대로 몸을 맡겼다.

내가 기성이의 무릎을 베고 있는 상태에서 기성이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기성이 나의 귀에다 무어라고 속삭였지만 나는 무슨 말인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

었다. 대충 택시가 10여분 정도 달렸다고 판단했을 때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세요. H호텔입니다.
 H호텔?
 호텔현관 수위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수십 년 동안 남산에 괴물처럼
버티

고 서서 서울의 자존심을 짓밟은 그 공룡 같은 호텔의 입구에 도착한 것이었다.

 

 나는 거의 의식이 희미한 상태에서 내렸다. 기성이 나를 부축하여 호텔에 들어

가더니 안내인에게 나이트클럽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바보, 바보, 난 나이트클럽에 가려고 호텔에 가자고 한 것이 아닌데…….
 

 기성이 나를 부축하고 맨 위층에 있는 나이트클럽으로 데리고 갔다. 나이트

클럽에 들어서자 고막을 도려낼 듯한 굉음이 우리를 맞았다. 어렴풋이 무대에서

춤추는 수백의 남녀들이 시야에 들어왔지만 또렷하게 볼 수 없었다. 웨이터의

 안내를 받으며 기성이 무대 우측에 있는 테이블로 데리고 갔다.


 웨이터, 여기 기본 하나 주세요.
 바보, 바보. 당신은 바보야. 진정으로 내 마음을 모른단 말이야?
 나는 소파에 안자 머리를 뒤로 젖히고 혼미한 상태에서 기성이의 행동을 눈여


겨보았다.


 정미야, 정미야, 정신 차려.
 기성이 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나는 모르는 척 하며 소파에 기대어 잠이 든

것처럼 우측으로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정미야, 나 좀 봐. 나 기성이야.
 “…….
 아아, 이런 바보를 보았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그리 마셔대더니…….


 기성은 웨이터를 부르더니 주문한 기본세트를 취소하였다. 나는 몸이 내 의지대로

되지 않을 뿐 정신은 술을 마시지 않을 때 보다 더 맑은 것 같았다. 기성이 나를 다시




 부축하여 나이트클럽을 나섰다.


 어쩌나, 정미를 두고 나 혼자 갈 수도 없고. 어찌해야 하나?
 기성이는 나를 부축하고 나오면서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기성씨, 나 쉬고 싶어요. 쉬면서 그대와 혼연일체가 되고 싶다고요. 당신은 바보

에요. 지금까지 살면서 이 세상에서 당신처럼 바보 같은 사람은 처음 봐요. 20년전

그날의 첫 키스가 그립단 말이예요.


 정미야, 정미야 정신 차려. 집에 가야지. ?
 기성이 나를 부축하고 나오면서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른 말을 중얼거렸다. 엘리

베이터가 3층 쯤 왔을 때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 것이다. 다행히 엘리베이터 안에는 나와 기성이 뿐이

었다.


 정미야, 정미야, 정신 차려. 왜 이러니? 술을 얼마나 마셨다고 이러는 거야? ?
 기성이는 거의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는 의식이 있었지만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기성이는 나를 업다시피 하여 프런트로 갔다.


 객실 있죠?
 객실을 찾는 기성이의 말에 나는 속으로 안도하며 잠이 든 척하였다.
 기성은 나를

업고 객실로 들어갔다.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기성은 만취한 나를 침대에

눕히고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 컵에 따라 내 입에 대보았지만 나는 시체처럼 옆

으로 누워 꼼짝하지 않았다. 기성이 나의 투피스 상의를 벗기고 에어컨을 틀었다.

 

 기성 역시 상당히 취했지만 제 정신이 들어 있는 상태였다. 기성이는 정미의 풍만

한 육신에 그만 눈이 시려 정미에게 손을 대지 못하고 탁자에 앉아 물끄러미 정미

의 누워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난 잠이 안 들었단 말이예요. 나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정미는 잠꼬대를 하듯 응얼거렸다.


 기성이 은은한 불빛에 드러난 정미의 황홀한 육신에 눈을 떼지 못했다. 음료수 한

병을 다 마신 기성이 냉장고에서 캔 맥주 한 개를 꺼내 마개를 땄다. 벌컥 벌컥 단숨

에 캔 맥주를 비운 기성이 정미 곁으로 다가와 오렌지 불빛 아래 찬란히 빛나고 있

는 정미의 육감적인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기성이 정미의 뺨에 살짝 키스를

하였다. 키스를 하면서 기성은 하체에서 꿈틀대는 욕망을 느꼈다.


 고마워요. 기성씨. , 당신 사랑하고 있는 거 알죠? 나 외롭단 말이예요. 어서

 나를 외롭지 않게 해주세요. 어서요.
 정미는 몸을 틀며 웅얼거렸다. 20년 만에 다시 한 번 기성이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지만 기성과 정미는 주저하였다.


 , 이런 하필 이때에…….
 기성이 은은한 불빛에 빛나는 정미의 손톱에 눈길이 갔다. 정미의 하얀 손톱

위에 까만 점들이 기성이 눈에는 하늘에 무수히 빛나고 있는 별들이라고 생각

했다. 그리고 뒤에 빨간 반달은 자신의 정미에게로 향한 일편단심 같아 보였다.


 안 돼. 안 돼. 사나이 어찌 술취한 여인을…….
 기성이는 냉장고에서 또 맥주를 꺼내 마시며 정미의 나신과도 같은 하체의

황홀한 곡선에 감탄하면서 한 모금 한 모금 맥주를 마셨다.

 
 내 어떻게 하다가 사랑하는 여인이 곁에 있어도 안아주지도 못한단 말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날 수 있단 말인가?


 기성은 감성을 죽여 가며 이성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기성은 곤히 잠든 정미의

 모습에 평안함을 느꼈다.


 바보, 내 너의 의도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우리는 사랑을 지켜야 해. 우리의

오랜 사랑과 우정이 한 순간 욕정의 노예가 된다면 우리의 지난 날 아름다운

추억은 단지 오욕의 시커먼 먼지에 휩싸여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거야. 정미야,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당장 너를 내 뜻대로라면 나의 동반자로 삼고 싶지만

나의 양심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니 어쩌겠니?


 사랑, 말이 사랑이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세상에서 하기 힘든 것이 바로

사랑이야. 나는 이제야 깨달을 것도 같아. 사랑풀기없는 사랑은 바보들이하는

기지. 한 순간의 객기가 자칫 나를 불태우고 곁에 있는 사람까지 태울 수 있는 강력

한 활화산이라는 것은 바보들은 모르지. 그저, 입발림 소리나하고 맛있는 것을 제

공해야 상대방이 자신을 사랑하는 줄로 착각하지.  


 기성은 정미 곁에서 차가운 시선을 잃어버리면 20년 이상 쌓아 온 형설지공이 한

순간 아지랑이로 피어오를 것 같았다. 그는 마른 침을 넘기며 탁자에 앉아 메모지

에 글을 적었다.


 난 이 순간뿐만 아니라 내일, 모레, 글피 그리고 저승에 들더라도 그대를  절대

지 못할 거요.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해요 정미씨.

내가 훗날 억 만 번 다시 이승에 태어날지라도 나의 그대를 향한 마음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을 겁니다. 오늘 나는 20년 전의 그대를 보았어요. 비록 20년이지만 200

년 또는 2000년 보다 더 장구한 시간이었다고 봐요. 정미, 어쩌지요? 그대에게는

이미 또 다른 남자가 있으니. 이제 누구를 탓해본 들 무슨 소용 있을까요?

 혹시 내가 없으면 나를 용서해 줘요.


 기성이는 정미를 호텔에 재우고 호텔을 빠져 나오려고 했었다. 그러나 정미가 대

취하여 인사불성의 상태에서 기성은 도저히 그냥 혼자만 빠져 나올 수 없었다.

약 혼자만 빠져나온 다면 술이 깨 뒤 정미는 자신을 원망할 거라고 생각하였다.

무리 이성을 잃지 않은 상태의 기성이라고 하지만 그도 역시 혈기 왕성한 남자였

.

 

 눈앞에 펼쳐진 무릉도원 같은 황홀경에 기성의 시선은 자꾸만 싱싱한 인어처럼

 보이는 정미의 육신에 고정되었다. 기성이 다시 정미에게 바싹 다가가 침대

곁에 꿇어앉았다. 살며시 손을 들어 육감적인 정미의 둔부를 만져 보려고 하였다.


 기성은 가슴이 마구 방망이질 치는 것을 간신히 억제시키며 정미의 단단하며

싱싱한 육신을 촉감으로 느껴보려하였으나 차마 오탁악세에 심하게 오염된 손

으로 백설보다 더 흰 정미를 차마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차라리 눈에 보이지 않았

더라면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참기 어려운 유혹을 뿌리치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 안 돼. 안 돼.

 기성이 다시 테이블로 돌아 와 앉으며 담배 한 가치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자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욕망이 코앞에서 이글거리면서 하얀 몸을 태우고 있었다


 그래, 나나 정미나 이 담배처럼 한 세상 스스로를 태우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지. 맑고 향기로운 바람을 맞으며 자신의 혼과 육신을 한 점 부끄럼 없이

태워야 함에도 무엇이 어디서 어떻게 꼬였을까? 당초 마음먹은 대로 태울 수 없다

는 것에 답답하고 서러움이 복받치는 것을 더 이상 참는 다면 나는 이대로 다 타지

못한 채 꺼져가는 장작불이 될지도 몰라. 타다만 장작불은 처참하지.


 술에 취한 채 간신히 의식을 유지하던 정미는 쏟아지는 잠을 참지 못하고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深淵)의 잠속으로 서서히 가라앉는

정미의 모습은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모습이었다. 잠들기 전 억지로 의식을 차리고

 있을 때보다 편안한 모습이었다. 일정한 숨소리에 맞춰 어깨가 움직일 때마다 S라인

의 곡선도 따라서 상하로 포물선의 위치를 이동시켰다.


 다양한 종류의 술에 남자로서의 자부심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던 기성이도 정미

가 평안히 잠든 모습을 보자 졸음의 유혹을 떨쳐 내기 힘들었다.


 내 사랑이 내 눈 앞에서 평화로운 모습을 보니 나도 평안함을 느끼네. 매일 이렇게

내 눈앞에서 내 사랑의 평화로운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찌 세상은

 공평하지 못한 것일까?


 시간은 새벽 4시 반을 막 넘어 가고 있었다. 밤은 캄캄한 어둠속으로 세상의 모든

 형상들을 삼키고 되새김질을 하는 듯 했다. 기성은 침대 밑에서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정미가 계속 켜놓은 에어컨 때문에 한기(寒氣)를 느끼고 눈을 떴을 때 호텔의

리 창문마다 끈적끈적한 여명(黎明)이 달라붙어서 하루의 시작을 알리려 몸부림

 치고 있었다. 머리가 무겁고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간신히 눈을 떴을 때 정미는

여기가 이승인지 아니면 저승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두 눈을 꼭 감고 내가 누구이며 어떻게 내가 어딘지 모르는 곳에 누워 있는지 알아

내려고 하였지만 막이 내려진 연극의 무대 뒤 같아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30여 분을 침대에 누워 있다가 어렵게 몸을 뒤틀어 반쯤 몸을 일으켰을 때 침대

 아래에서 숨 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감지 할 수 있었다.


 누구지? 혹시?
 정미는 그때 어렴풋하게 지난밤 자신이 기성이와 카페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호텔에 온 것 까지 생각해 냈다.


 그래, 맞아 그렇다면 침대 아래 있는 사람은 기성일거야. 이 시각 호텔 객실에

나와 있을 사람은 기성씨 밖에 없어야 해. 만일 타인이라면 난 나의 지난 밤 행위에

대해 나는 죽을 때가지 후회하거나 속죄해야 할 거야.
 

 정미는 몸을 틀어 침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얀 반팔 와이셔츠만 보일 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 온 정미는 여명의

희미한 빛 아래 침대 밑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남자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 기성씨.
 정미는 그 남자가 기성이라는 사실에 안도(安堵)의 한숨과 동시에 안타까운 탄식

소리를 내었다. 몸이 싸늘하게 식어 기성은 새우처럼 몸을 움츠리고 잠에 빠져


 있었다.


 아아, 기성씨. 나 때문에. 나의 못된 욕망 때문에 당신이…….
 정미는 눈물이 핑 돌면서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다.
 기성씨, 미안해요. 괜히 나 때문에.
 정미는 탁자에 놓여 있던 기성이의 편지를 읽었다.



 내가 죽일 년이예요. 사랑해요. 기성씨. 나 역시 이 세상
다하는 그 순간까지 당

신을 사랑할거예요. 나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하지만 당신에 대한 내 진심은 어떻게

할 수 없어요. 사랑해요 기성씨.

 
 정미는 에어컨을 끄고 깊은 잠에 빠진 기성을 꼭 끌어안았다. 몸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기성은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기성이 어떻게 될까 갑자기 겁이

덜컥 난 정미는 침대 위에 있는 이불을 내려 기성이를 덮어주고 알몸으로 그를

안았다. 빨리 몸을 덥혀주지 않은 면 심장의 기능이 곧 정지할 것 같은 불길한 느

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기성이 눈을 떴을 때 창문이 환히 빛나고 있었다. 기성이 자신의 품에서 알몸 상

태로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는 정미를 발견하고 숨이 멎을 뻔 했다.


 아니, 이게, 이제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분명히 정미가 침대위에서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는 깜빡했는데, 어떻게 정미가 알몸으로 내 품에?


 기성은 정미를 꼭 안아 주었다. 홀로 북극을 여행했다 돌아와 갑자기 남국의

열정에 가슴이 떨려 어쩔 줄 모르던 기성은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20년 전의

열정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서 밀려드는 행복감을 주체할 수 없었다. 기성이는

20년 전 늦은 밤 정미와 산길을 걷다가 길옆에 있던 원두막 안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때의 정미와 숨 막히던 첫 밤이의 추억이 생각났다.

 
 정미야, 우리 내년에 대학가면 너와 키스할 수 있을까? 아직은 미성년자라서

 키스할 수 없고.
 '치이~, 바보같애. 여기 나랑 키스하고 싶어 들어 온 거 아니예요?'
 ', 아냐. 그냥 다리도 아프고 밤이슬도 잠시 피하려고 들어 온 거야.'


 '알았어요. 그럼 우리 밤새 이렇게 앉아서 저 하늘에서 반짝거리는 별 구경
이나

해요 그럼.'


 후후후훗, 그때 나도 참으로 순수했어. 아니지. 순진한거지.
 기성은 정미의 심장고동을 넓적한 가슴으로 느끼며 점점 더
옛 생각에 빠져 들었다.
 

 저기, 기성씨.
 ?
 나 추워요.


 여름인데 뭐가 춰요?
 몰라요. 나 너무 추워서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마구 떨려요.
 정미는 자꾸만 기성이 곁으로 바싹바싹 다가오면서 춥다고 하였으나 눈치 없는

기성이는 그런 정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여자들은 밤이슬만 맞아도 추위를 타나봐?
 그래요. 이슬만 맞아도 추워요. 왜 밤 이슬만 맞아도 춥겠어요?
 “…….


 난요. 무섭고 겁나요. 우리 비록 육년전에는 초등학교 동창이었지만 지금 내가

이렇게 그대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되어 앞으로 어떤 역경이 우리 앞에 등장할 지

정말로 무섭고 두려워요.


 정미야. 겁내지마. 나는 너의 분신(分身)이고 너 또한 나의 현신(現身)이야. 나는

 죽을 때 까지 너를 잊지 못할 거야. 잊어서도 안 되고. 정미야, 나는 네가 정말로

좋아서 죽을 거 같아.


 기성씨, 그 말 정말이죠? 믿어도 되는 거죠?
 이런 바보를 보았나? 세상 속아만 살았나?
 아뇨. 그러나 괜히 겁이 나요. 늘 이렇게 내가 기성씨와 함께 할 수 있다면 모르

지만 인생을 코앞에 일어나는 일을 예견하지 못하잖아요.


 "하긴 그렇기도 하지만 난, 난 절대로 너를 내 인생의 반려로 삼을 거야.
 기성씨, 고마워요.
 그땐 우리가 꽤나 어린 나이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어른 같은 행동을 한 것 같

.



  정미야.
 네에?
 잠깐 눈 좀 감아봐.



 원두막 안 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그래도, 눈 좀 감아봐. 난 어두운 원두막 안 이라도 다 보인단 말이야.
 왜요?
 바보, 눈 감으라면 감을 것이지.
 

 알았어요.
 정미야, 나는, 나는 정말로 네가 좋아. 이 순간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사랑

스러운 존재는 바로 너야.
 고마워요. 기성씨.


 나는 그때 처음으로 복숭아 꽃같던 여자의 입술에 키스를 했었다. 정미는 나의

키스에 당황해 하면서도 나의 키스를 받아 주었고,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한 몸으로 원두막 안에서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었다.



 기성씨, , 나 이제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하다니?
 기성씨가 방금 내 인생의 전부를 훔쳐갔잖아요. 내 마음을 가져가 버렸으니
난 이

그 어떤 남자에게도 줄 것이 없어졌어요.


 고마워 정미.” 
 몰라요. 기성씨, 나빠요. 내 승낙도 없이 내 마음을 훔쳐가다니.


 , 미안해 정미야. 대신 내가 내 목숨을 너에게 줄게. 이 순간 이후부터 나의

목숨은 너의 것이야. 알았지?
 어떻게 내가 기성씨 목숨을 가질 수 있어요? 그건 말도 안 돼요.


 아니야. 이제부터 나는 이 한 목숨 너를 위해 살 거야. 너도 내 마음을 알아


주면 좋겠어. 영원히 너 하나만을 위하여 살 거야. 맹세해.


 안 돼요. 내가 무슨 권리로 기성씨의 목숨을 소유한단 말이예요. 다시는 그런

이야기 하지 말아요. 알았죠암튼 나는 오늘 밤 기분 좋아요. 기성씨가 내세(來世)

에도 나와 인연이 이어질 거라 믿고 싶어요. 그래서, 더욱 기쁘면서도 슬퍼요.


 슬프다니 왜?
 사랑하면 할수록 더욱 슬퍼지는 거래요. 어떤 시인이 한 말이 생각나요.
 그놈의 시인은 사랑이란 것을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하지. 시인 나부랭이가


뭘 알겠어. 정미야, 그런 말에 신경 쓰지 마. 알았지?


 나는 다시 촉촉한 정미의 입술을 나의 뜨거운 입술로 지그시 눌렀다. 그렇게

 지그시 누르면서 아래에서 마치 수억만 톤의 물이 저장된 댐이 일시에 무너

지면서 수억만 톤의 물이 한꺼번에 분출하는 참을 수 없는 희열을 맛보았다.


 , 정미야. 나는, 나는 너를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야. 너도 알지, 내 마음?
 나는 부풀어 오르는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정미를 꼭 안아주면서 어른 흉내를


내려고 하였다.


 아아, 기성씨, 안 돼. 그만. 여기서 그만해요. , 기성씨이…….
 시커먼 하늘에서 갑자기 번개가 치더니 순식간에 산속은 무시무시한 지옥처럼

 변해 버렸다.


 꽈앙 -. 번개와 동시에 천둥이 사방을 집어 삼킬 것 같았다. 천둥소리에 정미는 겁

 질려 내 품을 파고들었다. 우리는 아직 소년, 소녀티를 벗지 못한 상태에서 서로

를 알게 되었고, 하늘마저 우리의 일심(一心)을 눈치 채고 돕고 있었다.


 그때의 그 정미가 지금 기성이의 품 안에서 단잠을 자고 있었다. 기성은 정미의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때의 그 감촉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기성이 차차 숨이 가빠져 오는 것을 느꼈다. 차가웠던 객실은 금방 열기로 휩싸이면

서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정미야, 입 안이 깔깔하지 않어?
 좀 그런 것 같아요.


 이제 우리 만나면 술은 마시지 말자. 술 때문에 많은 것을 잃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말이야.


 , 술이 좋은데요?
 그래?


 호텔에서 나 온 나는 기성이와 호텔 근처 해장국 집으로 들어가 얼큰한 북어국

으로 속을 달랬다. 정미의 얼굴에 화사하게 봄꽃이 만발해 보였다. 어제 보았을 때

우수에 가득 차있던 모습은 간데없고 방금 이슬을 맞은 듯한 백합 한 송이가 활짝

피어 무척 들떠있는 표정이 역력해 보였다.


 기성씨, 미안해요괜히 나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잤죠?
 아냐. 20년 만에 감로수보다 더 달콤한 잠을 잤거든. 욕심 같아서는 자주

맛보고 싶어.


 자긴, 늑대야.
 그대는 여우던데?
 기성씨, 회사에 빠져서 어떻게 해요?


 정미야 말로 아이들 어떻게 해?
 애들에게서 문자 왔는데 아침 잘 챙겨 먹고 학교 갔으니 걱정 말래요. 우리

 아이들 대견하죠?
 고등학생인데 참으로 엄마를 많이 이해해 주는 것 같네?


 미안하기도 해요. 아이들은 나와 제 아빠가 어찌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나하고


몹시 불안 해 하고 있어요.
 나도 정미 아이들한테 미안한데.


 나는 오늘 내 인생에 있어 중대한 결정을 내릴거예요.


 중대한 결정?
 네에.


 혹시, 혹시 아저씨랑 이혼을 한다거나 하는 이상한 일을 벌이면 안 돼. 알았지?
 걱정 마세요. 그런 일은 없을 테니.
 정미, 괜찮은 거지?


 뭐가요, 그거요? 걱정하지마세요. 그제 그거 끝났어요.

 미안해. 내가 큰일을 저질렀어.


 아뇨. 내가 저지른 일인걸요.
 정미가 만에 하나라도 잘못되면 내가 모든 걸 책임질게. 내가 한 일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질 거야.
 아니예요. 20년 전 주인을 만난 건데요
아무 일도 없을 테니 걱정하지마세요.
 , 알았어. 그래도 미안해.


 우리는 점심 같은 아침을 들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첫날밤을 치렀

다고 생각했다. 내가 비록 처녀의 몸은 아니지만 20년 만에 사랑하는 임을 만나 길

고 길었던 갈증에서 충분히 해갈한 기분이었다. 누가 나를 부정한 년, 화냥년이라

고 손가락질하여도 좋았다. 일부러 화냥년이고 바람난 년이고 싶었다.

 

어쩌면 예전부터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의 품이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질풍노도

같은 초야 아닌 초야를 치르고도 나는 이상하리 만큼 마음이 차분했다.


 지금 쯤 나의 비이성적인 행동에 가슴이 콩닥거리고 죄의식에 사로잡혀 몸이 떨려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어야 정상일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내 몸과 마음이 파도가 숨을 죽인 잔잔한 호수 같았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남편

에게 보낼 최후의 통첩을 작성하였다.

 

  당신 보세요.
 지난 15년은 나에게 있어서 길 없는 사막을 방랑하는 무의미한 시간이었답니다.

부부는 서로를 존중하며 어려울 때 도우며 고난을 극복해야 하는 인생의 동반자라

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나는 교차로처럼 처음부터 꼬인 것이 틀림없

습니다. 이 편지를 보시고 아래 3가지 제 요구에 대하여 일주일내로 답장을 주세

. 답장이 없다면 나는 당신이 나의 의견에 전적으로 찬성한 것으로 간주하고 다음

의 법적 수순(手順)을 밟겠습니다.


- 첫째 : 저번에 말한 나의 사회활동을 승낙해 주세요.
- 둘째 : 지금까지의 아내인 나에게 비정상적인 성적 행동에 대하여 깊은 
반성과

            함께 사과하세요.
- 셋째 : 나와 당신이 결혼 한 이후 취득한 모든 동산 / 부동산에 대한 공부상의
            소유권 지분 1/2을 저에게 증여해 주세요.


 3가지에 제 요구에 하나라도 반대가 있다면 나는 이제 로마황제처럼 나에게

군림하려드는 당신과의 모든 인연을 청산하겠습니다. 나는 이 편지를 쓰기 위하여

10년이 넘게 고민하고 괴로워하였습니다. 어쩌다가 이런 편지를 당신에게 쓰게

되었는지 나 자신도 참으로 참담하답니다.

  

                                                                - 당신의 처, 정미로부터 -

  
 나는 작성된 편지를 일고 또 읽으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인터넷

이메일을 통해 남편에게 최후의 통첩을 보내 놓고 나는 샤워를 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일주일 후 남편은 내가 보낸 편지를 읽고 휴가를 내어 귀국하였다. 귀국하자 마자

남편은 시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찾아왔다. 두 사람은 이미 부부의 관계를 넘어 길가

는 행인 보 듯 서로를 무덤덤한 자세로 대했다.


 , 너 이 애한테 이혼하자고 했다는 말이 사실이니?

 네에, 어머니 사실입니다.

 뭐야, 사실이라고?

 네에.


 어머니 들으셨죠? 저 여자가 나에게 자신이 사회활동 할 테니 반대하거나 내 명

의로 된 재산 절반을 주지 않으면 이혼을 하겠답니다.

 너 미쳤구나. 내 그리 알아듣게 이야기 했건만 네가 끝까지 이 시어미 말을

안 듣고 사회 활동하겠다니 사회가 너 얼마나 무서운지 알기나 하는 거니?

 에네. 어머니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아는 애가 사회 나가겠다고? 그럼, 아이들은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어머니 아이들 다 컸어요. 먼저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하루 종일 집에서 아무것도

하는 거 없이 빈둥거려요.

 왜 할일이 없니? 밥하고 빨래하고 집 안 청소하는 것만도 얼마나 힘든 일인데,

할일이 없다니?


 어머니, 매일 빨래하고 밥하나요? 어머님도 여자이니까 처음에는 저를 이해

해 주실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애 아빠보다 더 하시네요.

 시어머니와 정미는 설전을 벌이며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곁에서 두 사람의 말다

툼을 멀뚱히 바라보던 정미 남편은 헛기침만 해대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여보, 알았어. 알았다고 그만해요. 당신이 정 사회에 나가 일하고 싶다면 그렇

게 해. 그 정도는 내가 승낙하지. 그리고 내 명의 재산 반을 당신에게 줄게.

 아니, 너 제 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사내놈이 한 번 한 말을 그리 쉽게 뒤집다니?

 어머니, 그까짓 재산이야 또 늘리면 되는 거고요. 이 사람이 그렇게 원하는데

사회활동도 하게 내버려 두자고요.

 

 난 모르겠다. 너희들 문제니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

 여보, 미안해. 내 당신에게 했던 모든 것을 용서해 줘 내가 잘못했어.

 시어머니도 아들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돌아가 버렸다.

 

 정미는 갑자기 태도가 돌변한 남편이 이상했다. 길길이 날뛸 줄 알았던 남편이 순한

양이 되어 자신이 요구한 것을 즉시 들어준다니 정미는 속으로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찜찜했다.


 고마워요 여보. 좀 진작 그렇게 해주시면 얼마나 좋았게요?

 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았어. 정말로 미안해.

 고마워요.


 아냐. 내가 미안하지 뭐.

 아니에요 제가 오히려 당신에게 미안해요. 앞으로 잘할게요.

 남편은 진실로 미안해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면서 사과하였다.


 여보 우리 그런 의미에서 제주도로 이박삼일 정도 여행이나 다녀올까? 우리 신혼

여행 다녀오고 당신하고 어디 다녀온 데가 없잖아.

 그래요. 그럼. 애들은 어떻게 하고요?


 내일이 토요일이니 오늘 형님네 집에 가서 이틀 정도 있다 오라고 하면 되잖아.
 “알았어요. 그런데 제주도에는 언제 가시게요?


 지금 당장 짐싸서 나가지 뭐?

 제주도 말고 설악산으로 가면 안돼요? 날씨도 더운데 시원한 계곡이 더 좋을 것

같아요. 우리 그냥 설악산으로 가요.

 그래 그럼.

 

 남편은 여행 가방을 급하게 챙겼다. 나는 간단한 화장도구와 옷을 챙기고 집을

나섰다. 남편은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약간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행히

평일오전이라 서울서 승용차 편으로 설악산까지 5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택시 편으로 속초시내로 나가 횟집을 찾았다. 남편은 여종업원에게 술부터 주문했다.


 여보, 무슨 술을 그리 마셔요?


 “…….

 오랜만에 당신하고 이런 곳에 오니 기분이 너무 좋아서 말이야.


 저도 한잔 주세요.

 , 그러지. 자 받아.

 여보, 고마워요. 오늘은 당신과 멋진 밤이 될 것 같아요.

 그래야지. 아주 아주 멋진 밤이 될 거야.


 남편은 술을 마시면서 약간 은 이상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진실로 오랜만에 대하는

남편의 얼굴에 생기가 도는지 오버 액션을 취해가며 외국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며

무척 즐거워했다. 나는 남편이 자꾸 술을 권해 금방 머리가 띵 할 정도로 취했다.

우리가 식당을 나왔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진짜 멋진 밤이 될 거야. 그렇지 여보?

 남편은 어린 아이처럼 들떠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나의 어깨를 안아주기도 하였다.

호텔 객실로 돌아오자 남편은 나 먼저 샤워를 하라고 하였다. 아무리 남편이지만

남편 앞에서 옷을 벗는 다는 것이 좀 꺼림칙했다.


 여보, 당신 먼저 씻으세요.

 아냐, 당신 먼저 샤워해. 당신 멋진 몸매가 보고 싶어서 그래.



 “…….

 나는 남편의 강요에 할 수 없이 남편이 보는 앞에서 나신(裸身)이 되어 얼른 샤워

실로 들어갔다. 5분 정도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 숨이 멎는 줄 았았다.






                                                           
 

 

                                                                                      - 계속 -

   

  
 

 

                             늦은 밤 올리다 보니 간혹 오탈자가 있을 수 있으니 깊이 이해있으소서

 

                                                                                _()_  여강 최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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