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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X(10)

* 창작공간/장편 - 엑스

by 여강 최재효 2008. 12. 12.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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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엑스X(10)

 

                                                                                                                                                                                       - 여강 최재효

 

 

 


  남편은 알몸에 나의 망사로 된 팬티를 입고 머리에 고무로 된 빨간 수영모자를

쓰고서 손에 수갑을 든 채 나를 보고 야릇한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빨간 조명

아래서 있는 그 모습이 언젠가 괴기 영화에서 본 사이코패스와 거의 비슷했다.

 

 보험금을 노리고 가족을 한 사람씩 죽이는 그 사이코패스와 남편의 이미지가

딱 들어맞았다. 나는 남편이 무서워 다시 샤워실로 들어가려고 뒤로 주춤거리자

남편이 얼른 달려들면서 내 손목을 잡았다. 남편의 눈빛은 정상인의 그것이 아니

었다. 나는 소름이 쫙 끼치면서 옴 몸에 닭살이 돋았다.


 , 여보 왜 이래요?
 뭐가 왜이래? 이리와.
 여보, 무서워요. 저 불 끄고 환한 불로 켜요. 그리고 그 수갑은 뭐에요? 당신

다시는 안 그러신다고 했잖아요?


 시끄러. 빨리 침대로 올라가.
 안 돼요. 당신 또 이상한 행동하려고 그러는 거죠?
 시끄러워. 네 몸의 주인은 나야. 그러니 주인이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고 어서

침대로 올라가기나 해.


 아아. 남편을 믿고 여기 쫒아온 내가 바보로다. 내가 왜 이리 단순하단 말인가?
 여보, 이러지 말아요. 당신 나한테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요. 제발 여보, 이러지

 말아요.
 시끄러워. 빨리 주인의 명령에 복종해 안 그러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여보, 제발 이러지 마세요. 다른건 다 들어 드릴테니. 제발 그 수갑 좀 저리 치우고

 불 좀 밝게 하세요.
 허허, 주인 말이 말 같지 않은가?
 여보, 제발.


 나는 남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빌면서 애원하였다. 그러나 남편은 야수

같은 이빨을 드러내놓고 침대 위에 있던 가죽 채찍으로 나를 사정없이 내리치기 시작

했다.


 -. 남편이 휘두르는 가죽 채찍은 물기가 덜 마른 나의 육신에 뱀처럼 감기며 빨

자국을 남겼다. 나는 남편의 다리를 붙잡고 애원하였지만 그럴수록 남편은 더욱

기가 살아서 더욱 힘을 주어 내 등에 채찍을 내리쳤다.


 -.  -.
 여보, 제가 뭘 잘못했는데 이래요. 제발 그만두세요.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

든지 할 테니 제발 그 채찍 좀 치우세요.
 내가 일어나 남편의 손에 들린 가죽 채찍을 빼앗으려 하자 남편은 내 두 손에 수갑을

채우고 나를 침대 위로 집어 던졌다.


 네가 뭔데 내 재산의 반을 달라고 해? 다시 한 번 말해봐. 뭘 달라고?
 결혼해서 모은 재산의 반은 제몫이라고 했는데 뭐가 잘못되었어요?
 , 네 것 좋아하네. 절대로 못 줘. 너에게 줄 재산이 어디어?
   

 뭐라? 사회활동을 하시겠다고? 네년은 나에게 시집온 뒤로는 무조건 나의

뒷바라지만 하면 되는데 뭐 사회활동을 하겠다고? 웃기지마. 내가 죽기 전에는 너는

절대 밖에 못나가. 집에서 강아지처럼 집이나 지키고 아이들 밥이나 챙겨주면

되는데 왜 쓸데없이 나가겠다는 거야 응?


 그럼, 나는 집이나 지키고 아이들 밥이나 챙기려고 당신하고 결혼한 줄 아세요?
 뭐라고. 이게 주둥이가 달렸다고 함부로 씨부렁대.

 
 , 난 당신의 애완견이 아니란 말이에요. 나도 여자라고요. 그리고 아이들 어머니

이기도 하고 사회인이라고요. 당신만 이 세상 사는 줄 아세요?
 뭐라고? 너 말 다했어? 계집년이 못하는 말이 없네.
 
 -.  아악 -.


 네가 나에게 시집와서 해준 게 뭐있어?
 뭐가 있느냐고요?
 그래. 나에게 뭘 해주었는데?


 난 당신에게 두 딸아이를 안겨주었어요. 그리고 내 인생을 전부 당신에게 주었고요.

당신이 외국에 나가있는 동안 집안 일 잘하고 아이들 잘 키웠으면 되었지요? 그 만큼

큰 선물이 또 어디 있단 말이에요?
 그건 이 여자야, 이 땅에 태어난 여자는 누구나 다 하는 의무사항이야 알아?


 딩동 -. 그때 객실 현관 차임벨이 울렸다. 남편은 잽싸게 잠옷으로 갈아입고 현관

으로 났다.


 손님, 이 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린다고 신고가 들어와서 그럽니다.
 신고요?
 네에.


 우리는 지금 잠을 자고 있었는데요?
 그래요. 그럼 죄송합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남편은 호텔 직원을 돌려보내고 다시 채찍을 들었다.


 -. -
 서러움과 통증으로 나는 통곡하였다. 남편은 침대에 알몸으로 앉아있는 나에게

채찍 세례를 퍼부었다. 채찍을 맞으면서 나는 이렇게 당하다가는 호텔에서 남편의

손에 맞아 죽을 것 같았다. 우선은 이 위기를 모면해야 했다.


 남편은 누워있는 나에게 계속 채찍을 휘둘러 댔다. 나는 지금 이 순간 남편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피와 살점을 먹고 산다는 지옥에서 온 나찰(羅刹)이라고 생각했다. 빨간 불빛아래 희한한 모습의 남편은 분명 이승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분노와 욕망

화신 같았다.


 나의 등은 이미 채찍 세례로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통증이 온 몸으로 퍼지

면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마치 200볼트 전류가 몸 전체를 휘감고 있는 것 같

았다. 남편은 혼자 큰 소리로 떠들기도 하다가 웃기도 하면서 나의 엉덩이를 집중적

으로 채찍세례를 퍼부었다.


 -. -. 나는 더 이상 신음소리도 낼 수 없었다. 남편은 인정사정없이 나를 마

치 노예나 되는 것처럼 마구 채찍을 휘둘러 댔다. 나의 자존심을 세우다가는 이 대

로 죽으 것 같았다.


 , 여보. 미안해요. 당신한테 보낸 편지를 취소 아니 없던 걸로 할게요. 죄송해요.

내가 당신에게 잘못을 저질렀으니 당신에게 맞는 것도 싸요. 내가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여보, 정말 내가 잘못했어요.


 정말이지? 네가 분명히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거지?
 네에. 알고말고요. 잘못했어요.
 좋아, 그럼, 각서 써.
 네에?


 네가 한 말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지. 백날 말로 한 것은 아무 소용이 없어. 그러니

나에게 각서를 쓰라고.


 네에, 알았어요. 쓸게요. 이 수갑을 풀어줘야 쓰지요.
 좋아, 풀어주지.
 고마워요.


 , 앞으로는 나에게 요구한 세 가지를 절대로 입에 올리지 않겠다고 각서를 쓰고

사인해. 어서.
 네에. 알았어요.


 빨리 쓰란 말이야.
 지금 쓰잖아요.


 나는 남편이 내민 종이에 남편의 요구대로 써서 남편에게 주었다. 나의 각서를 받아

본 남편은 흐뭇한 표정이었다.


 그래. 이렇게 당신이 내 말대로 따라주면 얼마나 좋아.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단

말이야. 이 세상에서 나만큼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봐.


 알아요. 세상에서 당신만큼 나를 아끼고 위해주는 남자는 당신뿐이라는 거 잘 알

아요. 고마워요 여보.


 그래. 그래 진작에 그렇게 남편 말을 고분고분하게 들어야지. 미안해 여보. 많이

아프지. 내 약 발라줄게.
 “…….
 남편은 가장에서 연고를 꺼내더니 내 등과 엉덩이에 연고를 바르며 입김을 호호

불어주었다.

 

도대체 이 남자가 나의 남편이 맞는단 말인가? 아냐, 아냐 남편은 지금 제 정신이

아니. 분명히 미쳤어.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내가 이런 짐승 같은 인간을 믿고 어

떻게 한평생을 살아간단 말인가? 이제는 남편의 진심을 확인하였으니 이후로 모든

것을 끝낼 거야. 난 이렇게 병신처럼 남편에게 끌려 다니지 않을 거야.


 남편은 나는 집 보는 강아지 취급을 하고 있어. 그리고 언제든지 자신의 변태적 성

행위의 일시적 소모품 쯤으로 여기는 것이 분명해. 내가 이런 남자를 믿고 어떻게

평생을 살아간단 말인가? 나는 도저히 더는 못 참아.


 여보 많이 아프지? 정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앞으로는 당신에게 진짜로 잘

할게. 나를 이해해 줘. 다 우리 아이들과 당신을 위해서 그런 거야. 내가 10년 넘게

외국 건설현장에 나가 있는 것도 우리 가정을 지키기 위한거야. 그러니 당신은 나의

이런 감정을 이해 해 줘야 돼. 알았지?


 네에. 알았어요. 미안해요.
 그래, 그래. 고마워. 역시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섹시하고 멋진 여자야. 나는 정말로 장가 하나는 잘 들었어.

 


 우리 이제 그만 자자. 당신 여기까지 오느라고 피곤할 텐데.
 여보.
 ?
 , 나 갑자기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요.


 아이스크림?
 네에.
 그래? 그럼 프런트에 전화해서 가져다달라고 해볼까?
 남편은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보더니 성질을 냈다.


 아니, 이렇게 큰 호텔에 아이스크림 서비스도 안 된단 말이야. 빌어먹을…….
 그럼, 내가 슈퍼에 가서 사올게요.


 아냐, 아냐. 이런 산골에 당신 같은 아름다운 미시가 나다니면 큰일 나. 누가 당신

납치라도 하면 어쩌게? 여기 있어요. 내가 얼른 가서 사올 테니.


 그러실래요? 고마워요.
 당신이 원한다면 내가 무엇을 못하겠어, 내 얼른 다녀올 테니 잠시만 누워 있어요.

우리 아이스크림 먹고 환상의 밤을 보내자고. 내 얼른 다녀올게.
 고마워요. 여보.


 남편이 밖으로 나가자 나는 각서를 꺼내들고 간편한 옷을 걸치고 핸드백 하나 달랑

들고 객실을 빠져 나왔다. 만약 남편과 엘리베이터나 로비에서 마주칠까봐 비상계단을 이용해 1층으로 내려왔다. 다행히 1층에서도 남편과 마주치지 않았다. 12시가 훨씬 넘은 시각이었다. 속초 시내로 나가는 택시도 없었다.


 아아, 어찌해야 하나? 여기 서 있다가 남편에게 잡힐 텐데…….
 나는 무작정 호텔을 나와 밤길을 걷기 시작했다. 캄캄한 산길을 걷자니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멀리서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이 보이면 혹시 남편이 내 뒤를 쫒아

오는 것 같아 도로 옆 하천 아래로 숨거나 얼른 산으로 올라가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20분 정도를 정신없이 달렸다.


 ‘기성씨를 불러야겠어. 그런데 이 밤에 내 전화를 받으면 놀랄 텐데…….
 여보세요? 정미? 정미 왜 그래? 어디야? 왜 울고 있는 거야?
 휴대전화 버튼을 누르자 기성이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기성씨, 나 좀 구해줘요. 여기 설악산이에요. 오늘 남편과 왔는데 남편이 나를 죽

일 것 같아요. 지금 호텔을 빠져나와 혼자 속초 시내를 향해 걷고 있어요.
 나는 기성이 목소리를 듣자 울음부터 터트렸다.


 , 그래? 알았어. 지금 막 집에 들어왔는데 내가 그리로 갈 테니. 아저씨에게 잡

히지 않도록 조심해요. 내 지금 내 차를 몰고 갈게요. 우선 속초 시내로 가서 주점이

나 찜질방 같은데 숨어 있어요.“ 


 네에. 알았어요. 빨리 오세요.
 걱정하지 말아요. 밤길 조심해요. 차가 오면 길 옆으로 숨어요. 알았죠?
 네에.


 엉덩이와 등이 따끔거렸다. 가죽 채찍으로 맞은 자리가 욱신거리면서 진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멀리서 자동차 불빛이 보였다. 길 왼쪽은 산이고 오른쪽은 하천이었다.


 나는 얼른 하천으로 내려가 몸을 숨겼다. 지나가는 차를 보니 내가 빠져 나온 **호텔

업무용 차량 같았다. 분명 남편 때문에 호텔에 비상이 걸려 나를 찾기 위하여 온 차가

분명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하여 뛰다시피 산길을 달렸다. 운동화를 신었기 망정

이지 하이힐이나 구두를 신고 왔다면 난감할 뻔 했다.


 아무리 빨리 걸어도 그 자리 같았다. 그때 동쪽에서 조각달이 떠올랐다. 거의 이지러진 달이 나의 참담한 모습을 보고 슬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달님, 어서 저를 이 길고 긴 산길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러나 곧장 뻗어있는 아스팔트길은 지옥으로부터 빠져나가는 길 같았고 너무

멀고 지루해서 나는 그만 길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내 휴대 전화가

진동했다. 남편의 전화였다. 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남편은 계속해서 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나는 받지 않고 걸음을 재촉하였다. 또 전화가 진동했다. 이번에는

기성이 전화였다.


 정미야, 어디니? 지금 어디쯤 나왔어?
 모르겠어요. 택시도 없어요. 무서워 죽겠어요. 금방이라도 남편이 나를 잡으러 올

것만 같아요. 기성씨, 빨리 와요.
 지금 양평에 접어들었어. 시속 150킬로로 달리고 있어. 한 시간 반 정도면 설악산에

도착할 것 같아.


 알았어요. 고마워요. 기성씨.
 정미야, 길을 걷지 말고 근처 하천이 있으면 다리가 있을 거야. 다리 아래로 들어가

있어. 걷다가 잘못하면 나쁜 놈들에게 납치당할 수 있어. 내 말대로 해. 내가 도착하면

다시 전화할게.
 알았어요.
 

 10여분 정도 걸어가다 다리가 나타났다. 나는 기성이 말대로 다리 아래로 몸을 숨겼

. 다행히 하천에 물이 약간 흐르고 있었다. 다리 밑에 쭈그리고 앉아 기성이 어서

오기만을 기다렸다. 다리 밑에 앉아 있으려니 모기떼들이 사정없이 달려들어 공격을

해왔다. 나는 차라리 모기들에게 뜯기는 것이 남편의 해괴한 섹스에 시달리는 것 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끔찍한 남편의 성도착증에 나의 영혼까지 서서히 멍들어가

가고 있었다.


 나는 기성이에게 보고 싶으니 빨리 오라고 문자를 넣었다. 운전 중에도 기성이는

걱정하지 말고 꼼짝하지 말고 있으라고 했다. 호텔에서 빠져나와 세 번째 다리 정도

 되는 것 같다고 기성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기성이 대충 어디쯤인지 감이 잡힌다고

했다. 나는 안전 운전하라고 문자를 보내놓고 기성이 나에게 처음 보내 준 연시를

생각해 냈다.






  



  그대여! 내가 세상에 온 이유는 바로 당신 때문입니다.

   당신이 세상에 온 이유도 나 때문이라면 좋겠습니다.

   별들이 반짝이는 사연과 저 초승달이 매양  슬픈 얼굴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저 별과 달이 그대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소년은 별바라기가 되거나 혹은 달바라기 되어 

   밤을 지새우다 바위가 되어도 누구를 탓하지 않습니다. 





   나의 생명은 그대를 위하여 존재 하는 것이랍니다. 

   비록 세월이 흘러 한 점 티끌 된다 할지라도 나는

   그대 이름을 지울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이게 무슨 꼴이람. 세상 여자 중에 나처럼 이럼 비참한 경우를 당하고 있는 여자가

또 있을까?


 다리 아래에서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는 내 머리 위로 희미한 달빛이 하얀 눈처럼

쌓여만 갔다. 나를 위하여 지어준 기성이의 시를 읊고 또 읊으며 모기와 전쟁을

치르고 있을 즈음 휴대 전화가 울렸다.

 
 정미야, 나야. 조금만 더 가면 미시령 고개야. 조금만 더 참아. 알았지. 사랑해.
 알았어요. 기성씨, 사랑해요.
 빨리 갈게.
 운전 조심하세요.


 알았어. 걱정하지 마. 절대로 겁먹지 말고 다리 아래에 가만히 있어. 알았지?
 네에. 알았어요.
 정미야, 사랑해.
 기성씨, 사랑해요.


 ,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된 걸까? 맞아. 그년 때문이야. 그년이 기성씨 편지만

제대로 전달해 주었다면 내가 이 밤에 설악산에서 울고 있어야할 이유가 없을텐데.

나쁜 년. 네년이 마음을 그리 사악하게 쓰니 네년이 오늘날 혼자 살면서 이 남자 저

남자에게 사랑을 구걸하지 나쁜 년.


 시간은 새벽 3시 가까이 되었다. 산에서 짐승소리라도 들리면 나는 몸을 움츠리고

덜덜 떨어야 했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소리라도 들릴 때면 나는 온몸에

닭살이 돋으면서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 나올 것 같았다.


 이건 지옥이야. 지옥이 분명해. 지금쯤 사랑하는 임의 팔베개를 하고 단잠에 빠져

있어야 할 시간에 첩첩산중에 홀로 앉아 산 짐승소리를 들어야 하다니, 도대체

인생이 왜 이리 된 거야?
 

 혹시 내 울음소리를 산 짐승들이 듣고 달려 들까봐 함부로 소리 내어 울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무수한 세월 보다 다리 아래 쭈그리고 앉아있는 시간이 더 긴 것

같았다.


 기성씨, 어서 오세요. 빨리 와서 나를 구해주세요. 춥고 무서워요. 이러다가 산짐

승에게 잡혀 먹을 것 같다고요.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남편의 일그러진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쯤

길길이 날 뛰면서 호텔을 벌컥 뒤집어 놓았을 것이고 남편의 불같은 성질에 호텔

직원들은 혼이 나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대여! 내가 세상에 온 이유는 바로 당신 때문입니다.

  당신이 세상에 온 이유도 나 때문이라면 좋겠습니다.

   별들이 반짝이는 사연과 저 초승달이 매양  슬픈 얼굴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저 별과 달이 그대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기성이의 시를 수십 번도 더 암송하였다. 한 여름인데도 설악산의 산골바람은

으슬으슬 몸을 떨리게 했다. 이 삼십분 간격으로 차들이 왔다 갔다 했다. 지금쯤 남

편의 신고로 경찰들이 호텔 주변을 샅샅이 뒤지거나 시내로 나가는 길을 달리며 나

를 찾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기성이에게 다시 문자를 넣었다.



 - 기성씨, 보고 싶어요. 그러나 안전운전 하셔야 해요. 전 아침까지 다리 밑에 있어

   도 좋으니 안전하게 오셔 야해요.
 - 오케이, 지금 미시령 올라가고 있어. 한 삼사십 분만 참아 내 애마가 당신을 향

   해 달려가고 있으니까.
 - 기성씨, 고마워요. 사랑해요.
 - 나도 사랑해.


 '아아, 왜 이리도 시간이 안 가는 거야? 저 달님은 뭐가 좋아서 나를 빤히 내려다보

거야?


 내가 한참 달을 바라보며 명상에 빠져 있을 때 차 한 대가 다리 이에 멈추어 섰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다리 옆에 무성하게 자란 잡목 속으로 몸을 숨겼다.

서너 명의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더 자세를 낮추고 그들의 동태를 살폈다.


 어이, 김 대리, 저 다리 아래 좀 후레쉬로 비춰봐봐.
 에이, 부장님. 그 여자 걸어서 여기까지 왔을 리도 없어요. 제 생각에는 벌써 택시

타고 속초시내로 빠져 나갔을 거에요.


 혹시 모르니 한번 살펴봐.
 네에-


 잘 봐봐.
 부장님, 아무것도 없는데요. 그 여자가 여기까지 왔다면 기적이죠. 남자 걸음으로

도 여기까지는 못 와요.


 나이가 좀 어려 보이는 남자가 길옆에 서서 다리 아래를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행히 남자는 다리 아래로 내려오지 않고 몇 번 다리 아래를 비춰보더니 다시 차를

타고 사라졌다.


 그 호텔 직원이 여기 까지 나온 걸보니 아마도 남편이 머리끝까지 화가 난 모양이

로군. 안 되겠어. 여기 있다가는 아무래도 위험해.


 나는 다리 아래에서 나와 산길을 다시 뛰다시피 했다. 그렇게 30여분을 가다보니

길옆에 허름한 집 같은 것이 있었다. 얼른 다가가 보니 무슨 창고 같기도 한데 몸을

숨기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지금쯤이면 기성씨가 도착할 때가 되었는데.
 나는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아무리 신호가 가도 기성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야? 지금쯤이면 도착할 시간인데?
 이번에는 문자를 띄웠다.


 - 어디 쯤 오셨어요? 나 춥고 몸도 아파요. 빨리 와요.
   문자를 띄워도 아무런 답신이 없었다.


 차가 막히나? 아니지 이 새벽에 미시령이 막힐 리도 없지. 이 야심한 밤에 나 말고 또 누가 산길을 헤매고 있을까?
 기성이 삼사십 분만 기다리라고 하였지만 이미 한 시간이 넘었다. 나는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기성씨는 운전에 베테랑이니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
산세가 험하고 깊어서 전화가 잘 안 터질 뿐이야. 그렇다면 내가 좀 더 길을 걸어야겠어. 무선 전화 중계탑이 멀어서 그럴 수도 있어.


 나는 다시 아스팔트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발바닥이 아팠지만 이 대로 멈출 수는

없었다. 1킬로미터 쯤 와서 다시 기성이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신호만 가고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니야, 아니야 절대 그럴 리 없어. 아아, 기성씨 어찌 된 거에요? 왜 안 오시는 거

예요. 저 쓰러질 것 같아요. 어서 빨리 달려오세요. 도착하신다고 한 시간 보다 한

시간이나 더 지났어요.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다시 기성이에게 전화를 걸어보았

지만 신호만 갈 뿐이었다. 새벽 4시 반을 넘고 있었다. 달도 서산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칠흑 같은 밤이 되었다. 나는 울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내 뒤쪽에서 차 한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몸을 숨길 시간이 없었다.


 이러다 잡히면 어쩌나? 아냐 남편은 아닐 거야. 이제는 잡혀도 할 수 없어.
 나는 차를 세우려고 길 가운데로 나갔다. 서울넘버를 단 자가용 승용차였다. 차가

내 앞에 멈추더니 유리문이 열렸다.


 여보세요. 길을 막으면 어떻게 해요?
 흐릿한 자동차 불빛에 비친 남자는 나이 50이 훨씬 넘어 보이는 신사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쫒기고 있어요. 저 좀 속초시내까지 데려다 주세요. 차비는 드릴
게요.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남자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차에 타라고 했다.


 보아하니 이곳에 사니는 분은 아닌 것 같은데 어쩌다 이 새벽에 혼자 밤길을 걷게

되셨습니까?
 남편하고 싸워서 무작정 호텔을 나와 걷고 있던 참이에요.


 그래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위험한 산길을 혼자서 걷다니요?



 속초까지 가신다고 하셨나요?
 네에. 가시다가 경찰서나 소방서가 보이면 세워주세요.



 남편을 신고하시게요? 그냥 해본 말입니다.
 아니예요. 아무래도 내가 아는 분이 서울서 내려오다가 교통사고가 난 것 같아서요.
 네에? 어디서요?


 잘 모르겠어요.
 내가 올 때 아무런 사고도 없었는데요?


 “…….
 , 그럼 다른데서 일어난 사고 말씀이군요.
 “…….


 이곳은 길이 험해서 운전자들은 조심해야 해요. 특히 야간 운전은 특히 더 위험해

조심해야 합니다. 일 년이면 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든요.
 나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다는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냐, 아냐. 그럴 리 없어. 절대 그럴 리가 없어. 무슨 사정이 있어서 그럴 거야.

일도 없을 거야. 난 믿어.


 학자풍의 남자는 속도를 내더내 금방 속초시내에 도착하였다. 나는 차 안에서도 계속

기성이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만 갈 뿐이었다. 남자는 나를 가까운 경찰서에 내려

주었다. 내가 수고비를 주려고 하자 남자는 받지 않고 가버렸다. 나는 얼른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당직 경찰관인 듯한 남자가 새벽에 경찰서를 찾아 온 나를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

보았다.


 저어, 제 남편이 방금 미시령을 넘어오다가 사고가 난 것 같아요. 미시령 넘어오

기 전까지 통화가 되었었는데 지금은 신호는 가는데 받지를 않아요. 죄송하지만 저

와 미시령을 가주 실 수 있나요?
 사실입니까?


 경찰관은 신고대장에 나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후 여기 저기 전화를 걸더니 미시령

에서 교통사고가 없었느냐고 상대방에게 물었다.


 , 신고 들어온 것이 없다고요? 알았습니다. 그럼 계속 수고하세요.
 차대기 시켜주세요.

 경찰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금방 순찰차 한대가 현관 문앞에 대기하였다.


 자 사모님저 차에 타시죠. 저희와 함께 미시령으로 가보시자고요.
 고맙습니다.
 나는 경찰차를 타고 미시령으로 향했다. 나는 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 저를 찾아오다 어린 양이 실종되었습니다. 부디 그 어린양이 무사하도록

도와주세요. 이렇게 비나이다. 
 나는 차안에서도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만 울음을 터트렸다.
 
 사모님, 우리지마세요. 무슨 일이 있을 라고요?

 고마워요.
 김 순경 빨리 가자고.


 네에.
 아무래도 거기가 의심스러워…….
 조수석에 타고 있던 경찰관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경찰차는 바람을 가르면서 금방 미시령에 도착하였다. 미시령이 터널이 뚫리면서

예전보다 서울에서 속초방면으로 가는 시간이 20여분 단축되었다. 터널을 지나 경찰차가 다시 하행선 속초 방면으로 방향을 잡더니 달리기 시작하였다.


 김 순경 저기, 저기 뭐가 있어.
 , 저 긴급제동시설 말입니까?


 그래. 저기 뭔가 뒤집어 진 것이 보이잖아.
 네에. 그러네요. , 차네요. 승용차가 전복된 것 같은데요? 


 제발, 제발 기성씨가 아니길…….
 나는 차가 전복된 것을 보지 않으려고 두 눈을 꼭 감았다.


 “사모님. 내려 보세요. 나가셔서 차량을 확인해야 합니다.
 “…….


 경찰관 두 명이 앞서고 나는 뒤따라 걸었다. 희미한 불빛에 승용차가 노란색 바리

케이드를 걷어내고 벽의 측면을 들이받은 뒤 뒤집어져 있었다. 자동차 후미 등이 켜

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사고난지 얼마 안 되는 것 같았다.


 저 차 혹시 부군 소유 차량 아닙니까?


 경찰관이 차 번호판을 비추자 눈에 익은 번호가 하얗게 반짝거리며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순간 캄캄한 하늘이 하얗다고 생각하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온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면서 손가락도 까딱할 수 없었다.


 , 기성씨. 기성씨. 기성씨이-
 나는 소리 내어 외쳤지만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사모님, 정신 차리세요. 정신 차리세요 사모님. 김 순경 빨리 구급차 불러 빨리.

 경찰관의 부축을 받고 기다시피 자동차 곁으로 다가갔다. 경찰관이 차 안으로 후레

쉬를 비추자 차안에 기성이 거꾸로 몸이 구부려진 상태로 마치 죽은 사람처럼 비스

듬히누워 있었다.


 기성씨, 기성씨, 이게 어찌된 일이에요. 어쩌다가 이런 곳에 거꾸로 누워있는 거예요. 빨리 나오세요. 기성씨, 기성씨, 기성씨이 -.
 자세히 보니 기성이 얼굴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만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계속 -
 

 
 
 
 

             _()_  다음에 최종 대단원의 막을 내리려고 합니다. 혹시 오탈자 있으면 이해해 주시고

                    부디 좋은 시간 되소서.

 

                                              소래포구에서  여강 최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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