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6)
- 여강 최재효
내가 잠자리에서 일어나 시계를 보니 오후 2시 30분을 막 지나고 있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냉수를 들이켜고 다시 운동장 보다 넓은 침대에 누워
간밤의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기성이를 만나 인사동에서 전통주를
마시고 택시를 타고 한강 고수부지를 걷고 근처 카페에 들려 기성이 만들어 준
다양한 칵테일을 마시고 나중에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퍼마시고 택시에 오른 것
까지 희미하게 생각이 났다. 거기까지 였다. 영사기에서 필름이 돌아가다 딱 멈
춘 것처럼 그 이후는 아무 것도 뇌리에 기록된 것이 없었다.
옷차림은 보라색 원피스 차림 그대로 였다. 기성이에게 전화를 걸어 어젯밤
카페에서 나온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휴대폰을 열어보니 기성
이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발신 시간이 새벽 5시30분경이었다.
[난, 이제 집에 도착했어. 정미, 집에 잘 들어간 거지? 사랑해......]
비몽사몽간에 아이들 아침을 챙겨주고 다시 잠이든 것이 어렴풋이 생각났다.
그렇다면 나와 기성이가 밤 10시경 카페에 들어가 두세 시간 정도 있다 나왔는
데 그 이후의 행적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새벽 1시경부터 5시까지
도대체 어디 있었는지 도무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희뿌연 무성영화를 본 것처럼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멋진 방에서 어떤 남
자의 누드 영상이 회상되었다. 마르크 샤갈의 그림 같은 뒤 엉켜버린 이미지에
나체의 여인이 보이기도 하고 수직으로 하늘에 맞닿은 마천루 같은 침대가 환영
으로 보이기도 하면서 하늘과 땅이 뒤집혔다 바로 서고 빙빙 돌기도 하는 이상
한 이미지가 연속적으로 내 뇌리를 스쳤다.
‘도대체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새벽 5시까지. 아무 일도 없었을 거야. 괜
한 망상이 떠오른 것이 분명해.’
혼자 중얼거리며 억지로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머릿속에서 뇌수가 곧 흘러
내릴 것 같았다. 온 힘을 다해 천천히 화장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발자국을 옮
길 때마다 하체가 약간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침인지 점심인지 모를 식사를 대충하고 샤워를 했다. 몸 전체에서 알코올이
빠져 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샤워를 하고나니 한결 맑은 정신이 들었다. 사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전대화가 한번 진동했다. 문자가 온 것 같다. 기성이가 보낸
문자였다.
[오늘 저녁에 스케줄 없으면 저녁이나 할까? 술은 마시지 말고 - 기성]
[네에. 알았어요. 몇 시에 어디로 갈까요? - 정미]
즉시 답신을 보내고 30초도 안 되어 휴대전화가 부르르 떨었다.
[4시30분 어제 그곳에서 봐요. - 기성]
시간은 충분했다. 얼른 피부 마사지실에 다녀오며 헤어숍에 들렸다. 거울 속에
평소의 내가 아닌 웬 요염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저 자세에 담배 한 대 꼬나물면
남자들은 나를 영락없는 룸살롱 마담정도로 볼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와 알몸으로 거울 앞에 섰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오랜 기간 마사지
수영 등 땀의 결실이 거울 앞에서 요염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여인의 시선이
아닌 남자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얼마나 외설적인지 알 것도 같다. 보티첼
리의 ‘비너스의 탄생’이 생각났다. 남자를 유혹하는 아프로디테의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았다.
나의 뇌리 남자를 유혹하는 특별한 물질이 생성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해본다. 하얀 브라 팬티 세트를 입고 하늘색에 하얀 물방울무늬가 점점
묻어있는 원피스를 입어 보았다. 풍만한 육신이 간신히 가려졌지만 라인을 강조한
디자인 때문에 힙이 더욱 더 강조 된 것처럼 보였다. 페르몬 성분이 든 피오라사
의 러브 포이즌 향수를 속옷에 살짝 뿌렸다.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나의 행동에 나는 정신이 몽롱해 지면서 잠시 소파에
앉아 나의 정체성을 생각해 보았다. 한 남자의 아내이며 두 아이의 엄마로 20년이
지난 옛 애인을 찾아 나서는 내가 과연 객관적 기준으로 볼 때 제3자들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해 해 줄까? 이성과 감성의 혼란 속에서 나는 감성의 손을 먼저
들어주기로 했다. 머릿속에서 이성이 승리했지만 가슴은 이미 기성이에게 달려
가고 있었다. 창밖을 보니 곧 비가 올 것 같았다. 빨간 레인코트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아파트를 나서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얼른 택시를 타고 종로로 향했지만
괜히 우울했다. 가슴에 천근 바위가 들어 있는 듯 했다. 내가 남편이 아닌 옛 연인을
만나러 간다는 것이 도덕적 해이(解弛)라던가 본래 화냥기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맹목적으로 기성이라는 알 수 없는 강력한 자력(磁力)에 이끌려 가는 쇳조각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 자력은 이미 20년 전 나를 강력하게 끌어 당겼던 그 것이었고, 이제는 다시
한 번 마치 낚시 바늘에 달린 먹이를 물다 바늘에 코가 꿴 물고기 신세처럼 기성
이의 의중에 따라 움직이는 나 자신이 미우면서도 한편으로 가슴 설레는 일이
분명했다. 내가 택시에서 내리려고 하자 기성이 우산을 펴들고 달려왔다.
“어머, 벌써 도착한 거예요?”
“아냐, 나도 방금 도착했어. 내리지 말고 다시 택시에 타요.”
“기사님, **동 S호텔로 가주세요. 택시요금은 새로 계산할게요.”
“네에 알겠습니다.”
“어머나, 대 낮부터 호텔에는 왜요?”
“응, 호텔 옆에 잘 아는 한식당인데 음식점도 깔끔하고 맛도 괜찮고 해서.
미안해, 그대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다시 택시를 타게 해서.”
“아니에요. 괜찮아요. 비도 오는데.......”
“그런데 이게 무슨 향내일까? 음-, 너무 향긋해. 생전 처음 맡아보는 향기인데.”
“향수를 약간 뿌렸어요. 기성씨 향수냄새 싫어하지 않으시니 다행이에요.”
“향기도 향기지만 정미 오늘 다시 보니 너무 곱다. 세련된 도시의 여인상은
바로 그대를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몰라. 너무 상큼하고 아름다워. 특히 빨간 레인
코트와 하늘색 원피스 그리고 하얀 핸드백이 서로 묘한 대조를 이루어 더욱
남정네 가슴을 뛰게 만드는데…….”
“어머? 놀리면 싫어요.”
“아냐, 정말이야. 기사님, 우리 애인 예쁘죠?”
“예쁜 정도가 아니라 전 영화배우가 촬영장에 가는 줄 알았어요. 택시 운전
이십년 넘겨 했지만 여사님처럼 멋지고 아름다운 분을 처음 승객으로 모시는 겁
니다. 아까 올 때도 계속 백미러로 여사님 얼굴만 보면서 왔는걸요.”
“거봐? 나만 그렇게 보는 게 아니잖아.”
“어머나, 두 분이 짜고 그러시는 같아요.”
“아니, 난 기사님을 오늘 처음 뵙는데?”
기성이 내 손을 꼭 잡더니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기성이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우리는 조용히 택시가 가는 방향의 창밖을 내다보았다. 20여분 달려 서
울서 꽤 알아준다는 호텔에 도착하였다. 호텔 정문 옆에 있는 한정식 집으로 기성
이 나를 안내했다.
“어서 오세요.”
예쁜 아가씨들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한식당 치고는 꽤 멋있게 실내 장식이 되어
있고 종업원들도 비교적 상냥해 보였다. 네 사람이 들어 갈 수 있는 방으로 들어가자
기성이 나에게 메뉴판을 내보였다.
“기성씨가 알아서 시키세요. 난 아무거나 다 좋으니까.”
“아가씨, 아무거나 두 개 주세요.”
“네? 아무거나라는 음식은 없는데…….”
“아, 그렇지.”
기성이 메뉴판 음식이름을 가리키며 주문하자 아가씨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탕과 찜을 시키는 것 같았다.
“이 집은 홍어회와 아구탕이 맛있어. 어제 속이 놀랐을 테니. 새콤하고 약간
매콤한 음식도 괜찮을 거야.”
기성이는 해산물 음식에 조예가 있는 듯 자신 만만했다. 주문한 음식이 모두
술 안줏감 같은데 기성이는 술을 주문하지 않았다.
“해장 안 할 거예요?”
“응? 해장. 거 좋지. 아까 내가 한 말이 있어 서리.”
“하루 종일 속이 불편했을 텐데…….”
“역시, 정미가 내 속을 훤히 꿰뚫고 있구먼. 그럼, 오가피주나 복분자술이
어때?”
“알아서 시키세요. 술에 대하여는 기성씨가 입신(入神)의 경지에 든 것 같은데.”
“입신? 맞아 입신의 경지가 맞을 거야. 내가 종종 기업체에 초빙되어가서 회사원
들을 상대로 술 강의도 하지.”
“어머나, 술 강의도 다 있어요?”
“그럼, 전 세계에서 유통되는 유명 술에 대하여 강의를 하지. 예를 들어 세계
오대 양주라고 하는 위스키, 브랜디, 럼, 진, 보드카에 대하여 그 술의 기원과
만드는 과정 그리고 마시는 방법 등 비교적 상세하게 파워포인트로 작성하여
내가 직접 설명을 하지. 그리고 기분이 좋으면 칵테일에 대하여도 강의도 해주
고.”
“존경스러워요. 어떻게 회사의 오너가 그런 강의를 다 해요?”
“부단히 공부한 결과지 뭐. 좀 엉뚱한 내용이지만.”
“아니에요. 그런 강의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기성씨가 어제 나에게
섹스 온더 비치와 보드카 선셋을 만들어 줄 때 기성씨 기술을 알아 봤어요.”
“괜히 술 이야기를 꺼냈네.”
“아니예요. 난, 지금까지 살면서 칵테일이라면 핑크레이디 밖에 몰랐어요. 양주
하면 위스키만 있는 줄 알았어요. 남편이 하도 위스키, 위스키 노래를 불러서요.
정말 대단해요.”
우리가 술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여종업원이 커다란 쟁반에 주문한 음식과
술을 가져왔다.
“자, 먼저 한잔 받아요.”
“…….”
“왜 그래요?”
“기성씨, 전 오늘 안 마실래요.”
“…….”
“어젯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실수를 한 것 같아요. 내가 너무 술에 취해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지만…….”
“아, 나도. 아침에 어떻게 집에는 왔는데. 정오까지 잠을 잤어. 그리고 일어나
생각해보니 간밤의 일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거야. 그래서 그대에게 어젯밤
내가 무슨 실수를 했는지 알아보려던 참이었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고? 그럼,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된 거야?’
니까 종종 필름이 끊겨. 어떤 날은 차를 어디다 두고 왔는지 몰라서 같이 술 마신
“정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응, 나도 나이가 먹었나봐. 요즘 들어서 사업상 자주 독주(毒酒)를 마시다보
사람들에게 물어서 차를 찾아왔다니까.”
“그래요? 하긴 커티샥인가 뭔가 하는 양주를 우리 둘이 네 병을 마셨으니까요.
거기다가 칵테일과 전통주까지. 우리는 어젯밤 술에 원한이 맺힌 사람들 같았
어요. 나나 기성씨나 알코올성 치매증세가 있는 거 같아요. 앞으로 조심해야 해요.
잘못하면 큰일 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나하고 카페를 나와서 어딜 들린 것 같기도 해. 하얀 집같은데, 아담
하고 아주 조용한 곳 같았어.”
“아담하고 조용한 곳이라고?”
“응, 그런데 당최 거기가 어딘지 생각이 전혀 안 나.”
‘아담하고 조용한 곳이 어딜까?’
당초에 합의를 깨고 우리는 다시 주선(酒仙)이 되었다. 도대체 우리사회는 술이
없으면 되는 일이 없는 것 같다. 옛님하고 마시는 술은 꿀맛 같았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나는 술독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얼큰한 탕이 제법 내 입맛을 당겼
다.
“이상하게 난, 어제이후로 정미가 마치 내 아내가 된 느낌이야. 나만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나도 그래요.”
“우리 동창끼리인데 그냥 말 놓고 이야기 하자. 정미야.”
“그게 안돼요. 기성씨, 그냥 내 스타일대로 놔두세요. 언젠가는 고쳐지겠죠 뭐.”
“정미, 디자인공부하고 있다고 했지?”
“네에.”
“어떤 종류 디자인이야. 요즘 디자인 분야가 워낙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서 말이야.”
“인테리어디자인 분야.”
“인테리어?”
“네에. 나는 대학에서 미술은 전공했어요. 결혼하고도 잠시 서울의 유명 건축
설계사무소에서 경험을 쌓기도 했고요. 그런데 결혼한 이후 아이들 키우다 언젠가
부터 내가 너무 세상에 뒤쳐져 산다는 느낌을 받고 공부를 다시 시작했어요. 미래성
이 있어서 지난 3년간 남몰래 학원도 다니고 전문가를 만나서 경험담도 들어봤어요.
처음에는 다른 디자인 분야에 관심도 있었지만 경제성 및 미래성을 판단해 보았
을 때 시각디자인을 가미한 인테리어 디자인이 나에게 맞았어요.”
“그거 실력 없으면 남자들도 성공하기 힘들다고 하던데?”
“뒤 늦게 내가 이분야로 진출하여 떼돈을 벌어보겠다는 건 아니예요. 남성들 사이
에서 살아있는 나를 보고 싶은 거예요. 요즘 CAD, 3D MAX, 포트폴리오 등 전문
기술연마에 더욱 나 자신을 닥달하고 있어요. 건축사자격증도 저 지난달 땄어요.”
바뀌네. 그거 정말로 힘든데. 우리 회사에도 직원들이 CAD정도는 할 줄 아는데 어느 정도 수준으로 올라가면 전문 디자인회사에 외주를 주거든.”
“이야, 그러고 보니. 내가 그동안 생각해 왔던 가정주부의 이미지가 한 순간에
기성이는 정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굉장한 호기심이 발동한 듯 정미의 이야기에
빠져 있는 모습이다.
“디자인은 첫째 미술적 감각이 있어야 해요. 컴퓨터가 아닌 손으로 세상을 그려
내는 기초실력 없이는 한계에 부닥쳐요. 사물이나 참신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즉석에서 손으로 스케치해내는 실력 없이는 절대 성공할 수 없어요. 컴퓨터는 다
음이고 손으로 스케치 한 것을 컴퓨터를 이용해 제도하면 되거든요. 말이 쉽지 피
나는 노력 없이는 절대 할 수없는 일이예요.”
“정미, 정말로 대단해. 집에만 있던 것은 아니네 뭐? 난, 정미가 집에서 빨래나
하고 솥뚜껑 운전이나 하는 여인인 줄 알았는데.”
“…….”
“당장 우리 회사에서 설계쪽 일을 해도 되겠어.”
“아직은 아니예요.”
“아냐, 내가 판단하기에는 그대는 지금 실전에 투입해도 얼마든지 인테리어분야
에서 큰일을 해낼 수 있겠어. 정말이야.”
“기성씨가 나를 부사장으로 임명한다면 몰라도…….”
델링 사업도 하고 있어. 정미가 내 일을 도와준다면 나는 금방 최고의 기업을 만들 수 있을 거 같은데. 혹시 정미가 최근에 만든 포트폴리오 가지고 있어? 작품집 말 이야.”
“그러지 뭐. 우리 회사는 호텔, 병원, 미술 전시관 등 실내 인테리어도 하지만 리모
“네에. 몇 작품 만들어 보긴 했는데 마음에 안 들어서요.”
“그럼 다음에 보여줘 한번 감상해 보게.”
“더 노력해야되요. 아직은 자신 있게 누구에게 보여주기가 좀…….”
“괜찮아 친구에게 보여주는 건데 뭐?”
“알았어요. 다음에 보면 보여드릴게요 그럼.”
두 사람 이야기는 자연스레 인테리어디자인에 집중되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오가피 술 빈병이 벌써 세병째 상위에 진열되어 있었다.
“기성씨, 우리 여기서 이렇게 시간 보내고 있을 거예요?”
“그럼 안 되지. 이 아까운 시간을 최대로 경제적이고 효율적으로 소비해야 하
겠지. 정미, 무슨 좋은 계획이라도 있어?”
“기성씨, 우리 영화보러가요.”
“영화?”
“네에, 여기서 술만 마시니 좀이 쑤셔서요.”
“그럴까? 그런데 이렇게 많이 남은 안주는 어쩌지? 아까워서.”
“나중에 다시 와서 데워 먹으면 되죠?”
“그럴까 그럼.”
우리는 택시를 타고 다시 종로로 나왔다. 극장가에는 수많은 청춘남녀들로 북적
였다. 나는 이런 저런 영화를 고르다가 어제 개봉했다는 ‘황진이’를 보자고 했다.
중선 중기 양반가의 딸로 자란 진이는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자 가장 천한
`기생`의 신분을 스스로 선택한다. 인간으로서 가장 밑바닥으로 추락했으나
사대부조차 동경하는 최고의 여인이 된 황진이는 곁에 벗이었고 노비였으며,
첫 남자인 놈이가 있다.
시대의 격랑 속에 놈이는 반역자로 수배되고, 이제 진이는 자신의 전부를 건 운
명의 선택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예고한 것 보다 나의 감정을 몰입시키지 못해 좀
아쉬운 감은 있지만 그런대로 남녀의 사랑을 잘 묘사한 것 같았다. 기성이는 영화
상영 내내 졸고 있었고, 나는 다음 주 중 귀국할 남편에게 어떻게 내 의사를 전달
할지 고민하였다.
영화가 끝나니 시간이 밤 9시를 막 넘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그냥 헤어지기가
섭섭했는지 기성이 나에게 호프집을 가리키며 입가심으로 생맥주 한잔 하자고
했다. 못 이기는 척 따라가기로 했다. 호프집에는 젊은 층들로 만원이었다. 그런
장소에 우리들이 들어가 자리를 잡으면 눈총을 받을 것 같아 다시 나와 건물
지하에 있는 민속주점으로 향했다. 나이 탓인지 깔끔하고 환한 젊은이 취향의 현
대식 주점보다 약간 어둠이 상존해 있고 농기구같은 시골스런 이미지가 박물
관처럼 진열된 곳이 좋았다.
동동주와 녹두 해물파전에 두서너 잔 마시자 뱃속이 싸하게 알코올이 퍼지는 것
같았다. 이러다 나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는 거 아닌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첫사랑과 함께 한다면 아무 문제가 안 될 것 같았다. 영화 볼 때 골몰했던
남편에 대한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과연 내가 이 시점에서 아무리 준비를 철저히 하고 사회에 진출한다고 하더라
도 나의 사회진출을 달가워하지 않는 남편이 어느 정도로 반대의사를 표할 지 궁
금했다. 내가 계속해서 사회진출을 하겠다고 요구한다면 남편은 나에게 그 어떤
강력한 행동을 할지 한편으론 걱정스럽기도 했다.
“정미, 무슨 생각을 그리해?”
“응? 아무것도 아니예요.”
“무슨 고민이 있는 거 같은데 말해봐 내가 혹시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응, 실은 남편이 다음 주쯤 서울에 오면 나의 사회진출 건에 대하여 어떻게
말할까 고민하고 있었어.”
“그래? 아저씨가 반대한다면 어떻게 하려고?”
“어제도 이야기 했지만 난 나의 뜻을 굽히지 않을 거예요.”
“그러다, 가정해체로 이어지면 어찌하려고?”
“그렇게까지 가진 않을거예요. 아이들도 엄마의 뜻을 따라 줄 거라 믿어요. 이제
는 내가 가정에서 할 역할이 별로 없어요. 낮에 집 지키는 거 말고. 아이들 학교가
고 나면 그 무료한 시간동안 뭘하느냐고요? 어떤 날은 낮에 집지키는 강아지처럼
집에 멍하니 앉아 있다 보면 내가 살아있는 송장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살아있는 송장?”
“네.”
“그럼, 이렇게 해. 일단 우리 회사에 나와서 미정이의 실력을 실무에 접속해봐.
시간은 아무 때고 좋아. 오후 한시 쯤 출근해서 여섯시 쯤 귀가해도 좋고.”
“오히려 내가 부담으로 작용할 텐데요?”
“아니야, 절대 그런 일 없을 거야. 난, 정미가 내 회사에 나와 주는 것만으로 만족
해. 대신 급여는 정미가 달라고 하는 대로 줄게. 왜 웃어?”
“실습생에게 무슨 봉급을 줘요?”
“실습생도 회사에 공헌하였으면 그에 상당하는 보상은 받을 권리가 있어.”
“아니에요. 만약 내가 기성씨 회사에 나간다면 무료 봉사차원에서 나갈거예요.”
“알았어. 그럼 내가 알아서 하지. 그럼, 다음 주부터 나올 수 있는 거지?”
“다음 주에 남편이 들어온다고 했어요. 남편의사를 다시 물어보고 결정한 뒤
시작할게요. 나름대로 생각할 것도 많고요.”
“그래 그럼. 어서 정미가 우리 회사 사원이 되는 걸 보고 싶어.”
우리는 어제의 일을 까맣게 잊고 다시 주선(酒仙)이 되었다. 기성이는 특유의
호탕한 웃음으로 주점 안 다른 손님들의 시선을 끌었다.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술자리는 나와 기성이의 20년 전 감정을 거의 되살아나게 했다. 동동주 두 동이
를 비우고 우리는 민속주점을 나왔다.
주점을 나와 새로이 복원된 청계천변을 걸었다. 다행히 비가 그쳐 많은 연인
들이 청계천 변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내가 기성이 팔짱을 끼자 기성이
내 등을 다독여 주었다.
“정미야.”
“응?”
“그때, 내가 너에게 청혼한 사실도 알았겠네?”
“응, 미영이 년이 알려줬어.”
“스무 살 밖에 안 된 나이에 무슨 청혼을 할 수 있겠느냐고 사람들은 말하겠지만
난 그때 정미가 내 청혼을 받아준다면 둘 만의 약혼식을 치루고 군대 갔다 와서 대
학졸업과 동시에 결혼할 생각이었어. 그런데 내 청혼서가 엉뚱하게 미영이가 받았
다니 참으로 충격적인 걸.”
“그때, 미영이도 기성씨를 좋아했어요. 먼발치에서 바라보면서 짝사랑을 한 거죠.
내가 기성씨와 공공연하게 연인사이라는 것을 알고 기성씨에게 접근하지 못한거
예요.”
“미영이가 나를 짝사랑했었다고?”
“최근에 미영이 만나서 그 애가 자기 입으로 한 말이예요. 기성씨를 너무너무
좋아했었다고요.”
“나는 염복이 많은가봐?”
“염복이 많다는 것은 어느 한 여자가 그 복을 다 차지하면 다른 여자들은 눈물을
흘려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남자들이 함부로 여자들을 유혹하여 마치 장신구 처럼
매달고 다니며 호기를 부리는 매 순간 여인들은 한탄할 테고요. 나는 한 순간에 꼬
인 일이 이십년이 지난 지금 다시 서서히 풀어지고 있다고 봐요. 그러나 조심스럽
게 풀어야 하며, 또 다른 눈물을 만들면 안 되겠지요.”
거야. 난, 이제 그 누구에게도 눈물을 흘리게 유도한다거나 강요하지 않을 거고. 그럴 자신도 없고. 난 이렇게 그대와 다정히 걷고 있는 사실만으로도 말 할 수 없 이 가슴이 벅차오르고 행복해.” 하게 서로를 철저히 살펴야 하고, 난 꼭 그렇게 하고 싶어.”
“그럼, 당연하지. 이제 눈물을 만든다면 약도 없을 것이고, 저승까지도 편치않을
“기성씨, 고마워요.”
“우리는 이제 저 청계천을 흐르는 물처럼 자유롭고 거침이 없어야 해. 물론 은밀
우리는 팔짱을 끼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한 시간 정도 청계천변을 걸었다.
청계천변 가로등과 양쪽 건물에서 나오는 다양한 불빛들은 마치 우리 두 사람의
해후를 축하해 주기위하여 일부러 켜놓은 불꽃같았다. 비온 뒤라 희뿌연 안개가
불빛을 산란시켜 몽롱해 보일 지경이었다. 청계천 아래로 내려가니 사람들이
뜸했다. 어떤 다리 밑을 지날 때 기성이 나를 꼭 안아주었다.
“정미야, 나, 나 좀 잠깐 받아줘.”
“…….”
순식간에 기성이 내 입술을 훔쳤다. 20년만의 다시 맛보는 짜릿함이었다. 나는
기성의 키스세례를 받으면서 좌우를 살폈다. 다행이 우리를 향해 오는 사람은 없
었다. 20년 전 기성이와 황새울 밤길을 걸을 때 이후 다시 맛본 키스에 나는 활화
산이 되어갔다.
“기, 기성씨 여긴 서울 한복판이에요. 저쪽에서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어요. 기성
씨.”
“정미, 사랑해.”
‘저도 사랑해요. 그러나…….’
내 입술을 훔쳐간 기성이 미안한지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정신 몽롱했다. 가슴이 콩닥거려 걷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정신을 가다듬었다. 우리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숙이고 청계천을 빠져 택시를
잡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뒷좌석에서도 기성이는 내 볼에 슬쩍슬쩍 키스세
례를 퍼부었다. 택시 기사가 백미러로 우리를 보고 빙그레 미소를 짓기도 했다.
기성이는 내가 사는 아파트 앞까지 태워다 주고 돌아갔다.
‘아, 조금만 더 길게 했어야 하는 건데. 너무 아쉬워. 이십 년 만에 다시해 본 키
스였는데…….’
시간은 아무렇게 지나가고 우리는 하루에 10번 이상 문자로 서로의 안부를 주고
받으며 꿈을 꾸듯 서로에게 감사해 했다. 마치 연애시절로 되돌아간 기분이 들었
다. 아침 해가 뜨고 석양이 되어 서산에 질 때까지 내 머릿속에는 기성이 생각 밖
에 없었다. 이틀에 한번 만나 우리는 선을 넘지 않는 성숙한 연애를 했다. 만날 때
마다 나는 주체할 수 없는 행복감에 만끽했다.
주말 쯤 도착한다고 했던 남편이 하루 앞당겨 귀국하였다. 검게 그을린 남편의
얼굴을 보니 측은하면서도 건강해 보였다. 아이들은 오랜만에 보는 남편에게 응
석을 떠느라 정신이 없는 듯 했다. 시어머니와 시아주버니 그리고 큰동서가 남편
이 왔다는 연락을 받고 저녁때쯤 집으로 모여들었다.
“얘야, 어디 아픈 덴 없는 겨?”
“너 건강해 보여서 기분 좋다. 외국생활 어디 불편한데는 없는 거니?”
“서방님, 별탈 없는 거죠?”
시어머니와 시아주버니 그리고 큰동서는 남편에게 쉴 틈도 주지 않고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어머니, 제가 누굽니까? 이래 뵈도 대한민국의 귀신 잡는 해병대출신 아닙
니까?”
남편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집안은 웃음소리에 파 묻혔다. 남편은 오랜만에
외식을 하자며 집 근처 대형 식당으로 온 가족을 데리고 갔다.
남편이 외국에서 돌아 올 때마다 시어머와 큰동서에게 선물을 꼭 사왔다. 물론
나에게는 가장 크고 값진 것을 선물로 안겨 주었다. 남편으로서 오랜 시간 나와
함께 하지 못한 보상 차원의 선물일 것이다.
지박 만해 졌다.
“어머니, 이건 호박 반지인데 한번 껴보세요.”
남편이 반지 케이스를 시어머니 앞으로 내밀자 사치가 심한 시어머니 입이 함
“네가 먼젓번에 사다준 진주 목걸이를 차고 경로당엘 가면 늙은이들이 모두
부러워 어쩔 줄 모르더라. 고맙다 얘야.”
“그리고 이건 형수님거에요.”
“어머, 고마워요 서방님. 지난번에 주신 향수가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
“아, 그건. 진주로 만든 귀걸이에요.”
“어머나, 우리 신랑도 안 사주는 진주 귀고리를 서방님에게 다 받네요. 여보,
보셨죠? 당신도 본받아봐요.”
“얘야, 에미거는 없니?”
“어머니, 집사람에게는 이미 다이아반지를 선물했어요.”
오랜만에 가족 파티였다. 시어머니와 시아주버니는 남편에게 공치사를 하면서
술잔을 수시로 건넸다. 시어머니는 무엇이 그리 좋은 지 연신 박수를 쳐대며 웃
었다. 어는 정도 파티가 무르익을 무렵 나는 내가 할 말을 해야 하겠다고 판단
했다.
“여보, 저 다음 주부터 회사 나가요.”
“…….”
“에미야, 너 방금 뭐라고 했니? 또 그놈의 취직 병이 도진거야?”
“어머니 취직 병이 아니라. 사회진출을 하고 싶은거예요. 어머니도 아시잖아요?
제가 그동안 인테리어디자인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요?”
“안 된다. 디자인 아니라 할아비라도 절대로 안 돼. 집안에 아이들이 있는데 어딜
다니겠다는 거니?”
시어머니는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펄쩍 뛰었다.
“그, 그래 여보. 집안에 아이들이 있는데…….”
“아이들은 이제 다 컸어요. 아침 일찍 학교가면 밤늦게 집에 들어온다고요.
저 혼자 하루 종일 집에서 뭘하라고요?”
“당신이 전부터 디자인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취직하려고
공부했는지 몰랐지. 집에서 살림하면서 꽃꽂이나 하면 되잖아 이제 뒤 늦게
사회 나가서 뭘 하겠다는 거야?”
“그래요 제수씨, 동생말대로 그냥 집에서 편안하게 취미생활이나 하세요.”
“동서, 이제 나이 먹고 사회 나가서 무얼하겠다는거야? 나처럼 남편 뒷바라
지나 하면 그냥 편하게 지내지?”
‘흥, 내 이럴 줄 알았지. 아주 온 가족이 벌떼처럼 일어나 법석을 떠는구먼.’
흥겨웠던 파티가 그만 나의 발언으로 인하여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나는
시어머니와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게 사회진출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머니, 저는 집지키는 강아지 신세랍니다. 집에서 하루 종일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정말이지 사람이 바보가 된다고요. 제가 제 실력을 타인들에게 인정받고
싶은데 그게 그렇게 잘못 된 건가요?”
“자로고 여자와 바가지는 내 돌리면 깨지게 되어 있어. 너같이 야시시한
여인네가 사회에 나가봐라 남자들이 그냥 두겠니?”
시어머니는 도끼눈을 떠가며 나의 의지를 꺾으려고 하였다. 곁에서 남편은
얼굴이 벌게져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여보, 어머니 말씀대로 절대로 나도 허락할 수 없으니 헛된 꿈 그만 접고
그냥 집에서 편안히 있어. 내가 외국에 나가 돈벌어와 당신하고 아이들 뒷바라지
하잖아. 뭐가 부족해서 취직을 하겠다는 거야? 사회가 당신한테 그리 만만하게
보이나 본데 절대로 아니야. 사회는 그저 남자들이 나가서 뛰어다녀야지 당신
같이 나약한 여인은 그저 국으로 집에 있는 게 좋아. 제발 내말대로 해.”
“여보, 나는 집 지키는 강아지가 아니에요. 당신이 한 달만 집안에 있어봐요.
그 심정이 어떤지.”
나를 상대로 한 온 가족의 언쟁으로 파티는 서둘러 끝나고 말았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남편은 피곤한지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비록 잠시전 남편과 언쟁을 벌이기는 했지만 잠자리까지 회피할 수 없었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침대에 오르자 잠든 줄 알았던 남편이 나를 와락 껴안았다.
“여보, 나 피곤해요. 오늘은 그냥자요.”
“뭐야,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데 그냥자라고?”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요?”
“시끄러워. 넌 내꺼야. 내거를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데 뭐가 잘못되었냐고?”
남편은 내 말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완력을 써가며 강제로 나의 의지를 꺾으려 들
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