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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의 꽃(終)

* 창작공간/단편 - 반도의 꽃

by 여강 최재효 2007. 12. 29. 17:11

본문

 

 

 






 

                                          

 

 

 

 

  

 

                   반도의  꽃


                                                         - 여강 최재효


                                終

                                                                                                                                 

 

 

 

 


 삐익 -
 대문 열리는 소리가 천둥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소근비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으나 곧 진정하고 밖으로 빠져 나왔다. 비가 올 듯 날

씨는 무척덥지근했다. 조선의 쇄환사들이 묶고 있는 관아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있는 힘을 다해 소근비는 뛰자 빗방울이 떨어지

기 시작했다. 밤길을 달리사람은 소근비 혼자 뿐이었다. 천둥소리

에 교토는 잔뜩 움츠러들었다.


 간간이 비치는 파란 번갯불 빛이 소근비의 다급한 발걸음을 인도했고

그녀는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서 시아버지 니시하라 겐죠가 칼을

빼들고 쫓아올 것만 같았다. 관아 정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보이지 않았

고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소근비가 을 두드려도 문을 열어주는 사람

은 없었다.

 

 “쓰미마셍,  문 좀 열어주세요.”
 왜와 조선말을 섞어서 외쳐보았지만 천둥소리에 묻혀 소근비의 부르짖

는 소리는 아무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소근비는 비에 젖어 물에 빠진

새앙쥐 몰골이었다. 몸에서 온기가 모두 빠져 나가 으슬으슬 몸이 떨리고

너무 추워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할 수없이 관아 담장 뒤쪽으로 돌아서서

낮은 곳을 찾아냈다.


 소근비는 간신히 미끈거리는 담장을 넘어 관아 안으로 뛰어 내렸다. 담장

안에 여러 채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었지만 불이 켜진 곳이 보이지 않았

다. 그녀는 혹시 누가 볼까 두려워 건물 벽에 붙어 천천히 살펴 보았다. 자

세히 살펴보니 맨 뒤쪽의 건물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소근

는 반사적으로 그곳을 향해 뛰었다.


 그러나 그곳이 조선에서 온 쇄환사들이 묶고 있는 방인지 왜병들의 숙

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움켜잡고 문 앞에 놓인

신발을 자세히 보니 눈에 익었다. 조선의 관리들이 신는 신발이 분명했

다.

 
  “여보세요. 안에 누가 계세요?”
 두서너 번 방안을 향해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방안에서는 아무 인기척

이 없었다. 모기 소리만한 그녀의 목소리가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

다. 두번, 세번 외쳐도 안에서 인기척이 없었다.   


 “여보세요. 조선 사람입니다. 문 좀 열어보세요.”
 소근비가 문을 두드리며 크게 외치자 그제야 안에서 움직임이 포착되

더니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얼굴을 내밀었다. 


 “누구요?”
 분명 조선말이었다. 사내가 비가 쏟아지는 바깥을 내다보았다.


 ‘아, 다행이다. 조선 사람이구나.’

 “저어-,”

 사내는 깜짝놀라며, 소근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가 뭐라고 하는

지 사내는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안으로 기어들어

가고있었다.


 “누구요?”

 “조선에서 오신 쇄환사 나리님 맞죠? 저는 조선에서 포로로 잡혀온 사람

입니다.”
 소근비는 어둠 속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사내는 촛불을 들고 방안에

나와 소근비 얼굴을 비췄다.


 “앗, 다, 당신은 니시하라상 처가 아니요?”
 이틀 전 소근비가 이곳을 찾아왔을 때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 남자

관리였다. 소근비는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맞습니다. 그제 나리를 찾아왔던 여인입니다.”

 “그런데 이 야심한 밤에 어인일입니까?”

 소근비가 비록 남장을 하였지만 비에 젖어 농익은 여체가 얇은 옷을 통

해 훤히 드러났다. 사내는 당황하여 어쩔줄 몰라하면서도 혹시나  누가 볼

까 소근비를 얼른 방안으로 들게 했다. 


 “고맙습니다. 나리.”
 “어떻게 비가 내리는 밤에 이곳을 오시었소?”
 “나리, 저는 목숨을 걸고 이곳으로 왔습니다. 오로지 저의 고향 전라도 순

천에 가고 싶은 일념 하나로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저를 받아주세

요.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가 그리워 견딜 수 없습니다.“

 남장을 한 소근비가 거의 울상이 되어 사정하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과

빗물이 섞여 흘러내렸다.

 
  “…….
 “나리, 저를 내 치지마세요.”

 소근비는 오돌오돌 떨면서 애면글면 사내에게 통사정하였다.


  “그대의 남편은 막부에서 일을 하고 있으며, 우리 쇄환사들에게도 얼굴

이 잘 알려 져 있습니다. 니시하라는 우리 조선 사람들에게 최대의 호의

를 베풀고 있어요. 그런 분의 부인인 그대를 우리가 조선까지 몰래 데리

고 갈수는 없어요. 먼저도 말했지만 니시하라상의 허락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대 때문에 포로송환 문제에 차질이 생긴다면 큰일입니다. 한사람

때문에 삼천 명이 넘는 조선인을 포기할 수 없어요. 날이 새면 집으로 돌

아가세요.“

 사내의 말에 소근비는 눈 앞이 캄캄하면서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그녀는 이대로 돌아가야 한다면 차라리 이 자리에 혀를 깨물고 죽

으리라 결심하였다.

 
  “안돼요. 제가 이대로 돌아가면 저는 죽은 목숨이나 같습니다. 이미 제

가 집에서 도망한 사실을 알고 시아버지와 가솔들이 저를 잡기 위하여 교

토시내를 이 잡듯 뒤지고 있을겁니다.”

 소근비의 사정에도 사내는 막무가내로 돌아가라는 말만 되풀이 했다. 


 ‘아아, 큰일이로다. 이 여인이 이곳에 있는 것이 알려지면 큰 소란이 일

텐데. 날이 새면 조선으로 떠나야 하는데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사내는 멋한 표정이었다. 왜의 사람들을 불러 소근비를 쫓아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고향으로 탈출하기 위하여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밤에

목숨을 걸고 도망쳐 온 여인을 차마 내칠 수 없었다.

 
  “나리, 저는 이대로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시아버지는 저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저를 조선으로 데리고 가주세요. 부탁입니다. 제발,

저를 데려가 주세요. 이렇게  빕니다. 저를 돌아가라 하심은 죽으라는 말

과 같습니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물겠습니다.“
  소근비는 사내에게 절을 하고 무릎을 꿇더니 간절히 빌고 빌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일어나세요.”
 “나리, 저는 칠년 동안 왜 땅에서 살아오면서 하루도 제 고향 순천을 잊

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번에  못가면 영영 고향을 갈 수 없을 것 같아요.

제발 저를 보내주세요.”


  사내는 난감했다. 조선으로 건너갈 조선의 포로들 숫자가 남녀노
소 별로

정확히 정해져 있기 때문에 소근비를 남장으로 위장하여 조선으로 데리고

가고 싶어도 어느 한 사람과 바꿔치기 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었다.


 ‘어떻게 한다? 이 여인으로 인해 외교적 분란이 일 텐데…….

 사내는 소근비의 몰골이 자닝하여 측은한 마음이 일었다.

 “우선 여기서 눈 좀 붙이세요. 날이 새려면 아직 한참 더 있어야 합니다.

다른 관리들과 상의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리. 조선에 가는 배에 오르는 순간까지 잠을 잘 수 없어

요.”

 소근비는 사내가 자신을 동정하는 시선을 보고 약간은 안심이 되었다. 그

러나 안심 할 수 없었다.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 사이에 어떤일이 벌어 질

지 알 수 없었다.  


 “포로들은 이곳을 떠나 걸어서 오사카 항까지 가야합니다. 그러나 그

대를 어찌해야 할지 걱정입니다. 우선 이걸로 갈아입고 있으세요.“


 사내는 비에 젖어 후줄근해진 소근비에게 조선의 사대부들이 입는

도포를 한벌 건넸다. 소근비는 시아버지가 금방이라도 이곳으로 들이  

닥칠 것만 같아 불안하였다. 조선의 옷으로 변장을 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소근비는 사내에게 부탁하여 머리를 대충 자르고 얼굴에 먹

칠을 하였다. 희미한 거울 속에 낯선 남정네의 슬픈 표정이 보였다.

 
  “나리, 이 방안에 어디 숨을 곳 없어요? 금방이라도 저의 시아버지가

이곳으로 들이 닥칠 것만 같아 불안해요. 시아버지는 사무라이입니다.

그의 성정이 불같아서 누구도 말릴 수 없답니다.

 소근비는 말을 하면서도 문 밖에 신경을 집중하였다.

 
  “저기, 저 궤짝 말고 몸을 숨길 곳은 없습니다.”  

 사내가 서류를 넣어두거나 기타 물품을 보관하는 궤짝을 가리켰다.
  “고맙습니다. 그럼, 저는 저 궤짝 안에 숨어있을게요.”

  소근비는 궤짝 안에 숨고 나서야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듯 하였다.


  니시하라겐죠는 이상한 예감이 자다가 일어나 들어 대문을 살펴보았

다. 대문이 열려있었다. 그는 부인 하루꼬를 시켜 별채를 다녀오게 했다.

술에 취한 니시하라는 잠을 자고 있었고, 며느리 소근비는 보이지 않았

다. 잠자는 아들 니시하라를 깨워 안채로 든 하루꼬는 사색이 되었다.


 “뭐라, 그 애가 없다고? 너는 어제 네 처와 함께 있지 않았느냐?”   
  “아버님, 분명 소자와 함께 잠을 잤습니다만, 일어나 보니…….

 니시하라는 아직 술이 덜 깬 상태였다. 

 
  “빠가야로 -, 어서 네 처를 찾아와라. 어서.”
 집안에 불이 밝혀지고 니시하라겐죠는 집안 단속을 소홀히 한 하인들

에게 몽둥이를 휘둘렀다. 하루꼬는 혼비백산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겐죠의 집안은 갑자기 부산해졌다. 집안팎으로 불을 밝히고 잠자고 있

던 모든 가솔들이 일어났다.


 “슈진, 하인들에게 그만하세요. 모든 게 저의 불찰입니다. 그러나

며늘애가 이렇게 비가 내는 밤에 어디를  갔겠어요. 좀 기다려 보세요.

잠시 어디 볼 일 보러 갔겠지요.”

 하루꼬는 며느리가 도망쳤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손자, 손녀를 낳은

소근비가 비가 억수같이 내리 퍼붓는 밤에 갈 데가 없었다.


 “이렇게 비가 억수로 내리는 새벽에 어디를 간단 말이요?”
 “혹시 모르니 날이 샐 때까지 기다려 보세요. 무슨 급한 용무가 있어

잠시 나갔을 수도 있잖아요.”

 하루꼬는 소근비를 믿고 싶었다.

 

 “니시하라, 너는 지금 즉시 하인들을 데리고 조선의 쇄환사들이 묶고

있는 관아로 달려가 네 처를 찾아보거라. 내 짐작에 네 처는 분명 그

곳에 있을 거야. 어서 가라. 그리고, 당신도 하인들과 평소 그 애가 다니

던 혼노지(本能寺)로 가보세요. 그리고 나머지는 나를 따르거라.”


 겐죠는 아들과 처에게 엄명을 내렸다. 니시하라 집안 사람들은 횃불을

들고 비오는 밤길을 나섰다. 니시하라는 간밤에 소근비와 나눴던 운우

(雲雨)를 생각했다. 


 ‘어제밤이 마지막 부부의 정이었단 말인가? 내가 그녀를 만나지 말았

어야 했나? 두 아이들은 어찌해야 하나.’
 니시하라는 남매의 눈물어린 모습과 아내의 울부짖는 소리가 환청으로

들렸다. 그의 눈에서도 뜨거운 액체가 빗물과 섞여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니시하라가 조선의 쇄환사들이 묶고 있는 관아에 도착하였지만 문이 굳

게 닫힌 채 적막했다. 여자의 몸으로 새벽에 관아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화가 잔뜩 난 아버지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여봐라. 문을 열어라. 난 외교부 관리 니시하라다.”
 “이 밤에 나리께서 어인 일로?”
 정문 옆 쪽방에서 눈을 붙이고 있던 왜병이  놀라서 얼른 문을 열었다.

 
  “혹시 밤에 웬 여인이 이곳을 찾지 않았느냐?”
 “예? 웬 여인이라뇨? 어제 밤부터 쥐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습

니다요.”
 “정말이더냐?”
 “하이-.”

 
  니시하라는 왜병과 함께 관아 곳곳을 돌면서 조선 쇄환사들이 잠자고

있는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소근비가 숨어 있는 방에도 니시하라가 다

녀갔지만 소근비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니시하라는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 하루꼬가 달려갔을 혼노지(本能寺)로

했다.


 비가 서서히 그쳐가고 있었다. 소근비의 예쁜 얼굴이 자꾸 환영

으로 보였다. 지난 칠년간 수없는 밤을 함께 보냈고 두 아이까지 낳아

준 소근비를 이제 영영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자 니시하라는 목이

메어왔다.


 ‘아아, 이대로 그녀와 나의 인연이 끝나고 말 것인가?’

 니시하라가 혼노지에 거의 다다랐을 때 어머니와 하인들이 막 절에

서 나오고 있었다.
 “어머니, 이곳에도 안 왔죠?”


 “아녀자의 몸으로 비 내리는 새벽에 혼자서 어떻게 여길 올 수 있겠니?

네 아버니의 명이라 내 이곳에 오긴 왔지만, 그 애는 분명 혼노지에 오지

않았어.“


 “그럼, 소근비가 어딜 갔단 말인가요? 평소에 제 처가 잘 다니던 곳을 아

세요?”
 “네 처는 밖으로 나가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어쩌다 나와 시장에 가는

일 말고는…….

 
  니시하라와 하루꼬 일행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가고 있을 때

소근비의 시아버지 니시하라겐죠는 조선포로들이 자주 모인다는 이조성

(二條城) 근처를 이 잡듯 뒤졌지만 소근비를 찾을 수 없었다.


 “얘들아,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내 아들이 그 계집을 데려왔을지도 모

른다.”
 ‘이 계집을 잡으면 가만두지 않을 터, 비록 내 핏줄을 낳았다하여도

가문에 먹칠을 하고 내 자존심을 건드린 이상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이제 부터는 그 아이는 내 며느리가 아니야.‘ 


 니시하라겐죠 역시 집으로 돌아오는 발길이 무거웠다. 날이 밝으면

소문이 교토 시내에 퍼질 것이고, 그리하면 니시하라 가문의 원로들은

자신을 비난 할 것이 분명 했다. 그는 애초부터 소근비를 며느리로 들

이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뭐라고, 조선의 쇄환사들이 묶고 있는 곳에도 그 계집이 없다고?”
 “슈진, 날이 밝으면 돌아올지도 모르니 기다려 봅시다.”

 하루꼬가 남편을 달랬으나 불같은 성격의 겐조는 쉽게 화를 가라앉

히지 못했다.

 
  “니시하라, 너는 날이 밝으면 나하고 다시 조선의 쇄환사들이 묶고

있는 관아로 가보자.”
 “아버님, 그곳에는 없습니다. 제가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찾을 수 없

었습니다.”

 

 “이 교토에 그 계집이 갈 곳이 그 곳 말고 어디 있겠느냐? 분명 그곳

어딘가에 숨어있는 게 분명해.“
 니시하라 집안은 다시 조용해 졌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하늘도 맑게 개었고 서서히 동녘이 밝아오고 있

었다. 니시하라겐죠는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 아들과 하인들에게 칼

을 차게 하고 조선 쇄환사들이 있는 관아로 달려갔다. 이른 아침부터

관아 안팎으로 조선에서 잡혀 온 포로들로 북적거렸다.


 쇄환사들은 짐을 챙기고 각자 맡은 조선의 포로들을 오열로 길게 세

우고 숫자를 세고 있었다. 어디선지 계속해서 관아 앞 마당으로 조선

포로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니시하라겐죠는 위협을 느끼기 시작

했다. 수년 동안 포로로 잡혀와 온갖 고통을 감내하며 조선으로 돌아

갈 날을 손꼽아 기다려 온 조선의 포로들이었다.


 분노에 찬 그들에게 만약 조금이라도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였다

가 폭동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다. 또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에

게 매우 우호적이기 때문에 조선 관리들에게도 함부로 대할 수도

었다. 무사 복장으로 말을 타고 칼을 찬 하인들을 거느린 채 관아

으로 든다는 것은 조선 쇄환사들이나 조선의 포로들에게 위압감을 느

끼게 할 수 있었다.

 


 “너희들은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어라.”
 니시하라 겐죠는 아들만 대동하고 관아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직접 수 많은 조선의 포로들을 일일이 얼굴을 살펴보았지만, 소근비를

찾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조선의 포로들을 조사할 때마다 조선의 백

성들은 두 눈을 부라리며 뒤에서 욕설을 해댔다.


 “염병할 쪽발이 새끼들, 뭘 또 조사하는 거여?”

 “에이 퉤, 개자식들…….
 “빌어먹을 새끼들…….
 차차 분위기가 험악하게 변해가자 부자(父子)는 소근비 찾기를 포기했다.


 계속해서 포로들 사이를 휘젓고 다니다가 잔뜩 흥분해 있는 그들과 어떤

예기치 못한 불상사가 일어 날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이 조선의 군중 속에서

막 걸어 나올 때였다. 어설프게 패랭이를 쓰고 큰 도포를 입은 채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소근비와 니시하라가 눈이 맞았다. 순간 니시하라의 발길이

멈추었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마주보며 무언의 대화를 나누

었다. 소근비는 다리가 후둘거리고 아뜩하여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슈진, 그냥 모른 척 지나가세요. 어서요. 훗날 다시 올게요. 제발 저를

조선으로 돌아가게 해 주세요. 제발요.’
 남장을 하고 얼굴에 먹칠까지 한 소근비를 본 니시하라의 두 눈에 금방

눈물 방울이 맺혔다. 니시하라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측은한 눈길로 소근

비를 바라보았다.


 ‘잘가요. 이 것이 나와 그대의 마지막 인사이구려. 그 동안 나와 혼인하여

고생만 하였소. 당신을 이렇게 바라만 봐야하는 내 처지가 참으로 한심합

니다. 부디, 조선으로 돌아가 부모 형제 만난뵙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여

인의 몸으로 다시 왜로 돌아올 수 있을지는 모르나 어쩌면 이것이 당신과

내가 이승에서 마지막일 것 같구려. 잘가요. 두 아이들은 내가 알아서 잘 

건사할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소근비. 내 사랑.'

니시하라는 눈물을 훔치면서 소근비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슈진, 고마워요. 훗날 좋은 때가 오면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조선에

갔다 부모 형제 만나뵙고 꼭 다시 돌아올 겁니다. 저를 기다려 주세요.

고마워요.'

 소근비 역시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면서 지아비인 니시하라

에게 미소로 응답하였다. 뒤 따르던 아들이 보이지 않자 니시하라 겐죠

는 아들이 있는 곳으로 왔다.


 “너 울고 있구나?”
 순간적으로 무엇인가를 직감한 니시하라 겐죠는 아들이 있는 주변을 다

시 뒤져보기로 하였다. 그는 조선인 포로들을 한 사람씩 살펴보기 시작했

다. 소근비는 시아버지 니시하라 겐죠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 앉

았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다른 곳으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녀는 고개

를 푹 숙이고 가슴을 졸이며 시아버지에게 들키지 않기를 속으로 빌었다.


 “네가, 여기 숨어있었구나. 이년, 어서 일어나지 못할까.”

 용케도 니시하라 겐죠는 소근비를 알아 보았다. 머리를 자르고 엉성한

도포 차림이었지만 그는 소근비를 한 눈에 알아 봤다. 시아버지와 시선

이 마주친 소근비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시아버지 겐조가 남장한 소

근비를 잡고 뭐라고 소리치자 무장한 하인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쪽바리놈들이 조선인을 빼가려한다.”

 조선인 남자가 소리쳤다. 

 “쪽바리놈들을 죽여라.”

 조선으로 소환되는 포로들도 소근비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녀를 에

워쌌다.


  “저리비켜라, 이년은 조선여자가 아니다. 나의 며느리인데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조선으로 도망치려하여 잡으러 왔을 뿐이다. 어서 비켜서라.

 니시하라겐죠가 칼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거짓말이다. 저 여인은 조선 전라도에서 잡혀온 포로가 맞다. 우리들이

저 여인을 구해서 같이 조선으로 돌아가야 한다.”

 조선 사내들과 왜인들이 혈투가 벌어졌다. 니시하라겐조는 차마 칼을

쓰지 못하고 칼집으로 조선사내들과 접전을 벌였다.


 “이놈들, 나의 일을 방해하면 칼을 쓸것이다. 어서 비켜서라.”

 니시하라 겐죠와 그의 수하들이 모두 칼을 뽑아들고 위협하자 맨손의

조선 사내들은 더 이상 그들과 맞붙어 싸울 수 없었다. 급히 조선 쇄환사

와 왜인 관리가 싸움에 껴들어 간신히 싸움을 말렸다. 그틈을 이용해

왜인들이 소근비를 압박하여 끌고 가려하였다. 























 “여봐라. 이년을 데리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하이 -

  하인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소근비를 좌우에서 잡고 군중 속을 빠져

나가려고 하였다. 그때 니시하라가 달려 들어 아버지 겐죠에게 울면서

매달렸다.


  “아버지, 안 됩니다. 그냥 보내주세요. 소근비를 조선으로 돌려보내세요.”
  “이놈아, 정신 차려. 저 계집은 네 처이기 전에 내 손에 저년에 대한 모든

권한이 있어. 어서 데리고 집으로 가지 못해?“
  “아버지, 안 됩니다. 훗날 제가 조선으로 건너가 되리고 오겠습니다.” 

 
  아들이 애원에도 불구하고 니시하라겐죠는 소근비를 강제로 끌어냈다.

머리를 삭발하고 조선의 옷으로 갈아입은 소근비의 모습은 몹시 초췌했다.

니시하라겐죠는 안 뜰에 소근비를 꿇어 앉히고 집안의 모든 사람들을 모이

게 했다. 어린 두 아이들 조차 이상한 복장을 한 어머니를 호기심 어린 눈

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네년이, 내 허락도 없이 감히 조선으로 건너가려하다니.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 네 스스로 자결하던지, 아니면 종의 신세가 되어 노예시장에 나가

던지 하라.“
  니시하라겐죠는 단도(短刀)를 소근비 앞으로 내 던졌다. 사무라이들이

할복할 때 사용하는 칼이었다.

 
  “슈진, 할복은 무사들에나 적용해야지 저 애에게 안 됩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으니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시어머니 하루꼬가 앞으로 나서며 말려보았지만 니시하라겐죠는 눈썹 하

나 깜작하지 않았다.


  “아버지, 한번만 소근비를 살려주세요. 앞으로는 절대로 이런 일이 없도록  

단단히 타 이르겠습니다. 제발 이번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이번에는 니시하라가 아버지 겐조에게 달려들어 사정을 해보았지만 역

소용 없었다.


  “안 된다. 니시하라 가문의 수장으로서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저 계집

은 우리 니시하라 가문에 먹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내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나의 명령은 변함이 없다. 반나절의 시간을 주겠다. 네 스스로

결정하여라.“


  “아버님…….”  
 굳게 입을 다물고 있던 소근비가 입을 열었다.


  “소근비, 어서 아버님께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하세요.”  
  니시하라가 소근비 채근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뜨고 시

아버지 니시하라 겐죠를 노려보았다.  

 

  “조선반도는 오래전부터 열도에 온갖 은혜를 베풀어왔습니다. 그런 부

모와도 같은 조선 땅에 아버님은 야수와 같은 병사들 이끌고 침범하여

무고한 조선의 백성을 수도 없이 무참히 살육하였습니다. 저 또한 아버

님같은 왜병의 손에 의해 생면부지의 왜 땅에 포로로 잡혀 왔고요.


 이땅의 사람들은 그것도 모자라 조선 백성의 귀와 코를 베어와 이곳

교토에 코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조선여자라는 죄 아닌 죄

로 인하여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습니다. 비록 기모노를 걸치고 살

았지만 제 몸속에는 엄연히 조선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자식이 어

버이를 그리워하고 찾아가는 일이 무슨 죽을 죄를 지었다고 이리도 매

정하게 대하십니까? 저는 니시하라 가문에 들어와 저 두 아이를 낳고

온갖 정성을 다하여 키웠습니다.


 저를 진정으로 며느리라고 여기신다면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조선에는 노부모님께서 이 딸자식이 돌아오기

손꼽아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버님도 딸자식이 있지 않습니까?

어찌 저에게 이리도 매정하게 대하십니까?“

 소근비가 울면서 애원해 보았지만 니시하라겐죠는 고개를 외면 하였

다. 


  “네년이 입이 달렸다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더 이상 듣기 싫다. 스

스로 목숨을 끊던지 종의 신세가 되던지 결정하라.“
  니시하라 겐죠의 결단은 단호하여 아들과 처의 간청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별채로 돌아온 소근비는 통곡하였다.


  “칠년간의 헌신이 결국 이리 허무하게 끝난단 말이냐. 아버지, 어머니,

소녀 어찌해야 합니까? 종의 시세가 되어 머나먼 타국으로 팔려 가야

합니까? 아니면 소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옵니까? 대답 좀 해주세

요. 아버지, 어머니-,“

 
  별채 밖에는 남자 하인들이 만약을 위하여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

다. 소근비가 들어있는 별채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시어머니와

남편 니시하라조차도 별채로 들어가지 못했다. 숨 막히는 시간이 흐르

고 있었다. 아무리 울고 땅을 쳐도 누구하나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소근비에게 내려진 단도 한 자루가 소근비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 살아서 짐승만도 못한 백인에게 넘겨지느니 차라리 자진하리라.

그것만이 조선에 계신 부모님과 두 아이들을 위하여 바람직한 일일 것

이야. 그러나 어떻게 내 스스로 이 칼로 목숨을 끊는단 말인가? 차라리

저 대들보에 목을 매는 게 좋겠어. 저 대들보에…….

  소근비는 입고있던 옷을 찢어 길게 이어 천정 대들보에 걸면서 흐르

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아버지, 어머니, 소녀 이곳 왜 땅에서 한 많은 인생을 접습니다. 부디 

먼저 가는 이 불효자식을 용서하세요.“ 

 소근비는 마음을 굳게 먹고 조선 반도가 있는 북녘을 향해 절을 하였

다. 땅 거미가 막 지기 시작할 무렵 다 피지도 못한 조선의 꽃은 싸늘하

게 식은 채 천천히 시들어 가고 있었다. 반나절이 다되어 니시하라가 별

채로 들어왔다.


  “여보, 소근비-, 안돼요. 안돼-.”

 방으로 막 들어섰을 때 니시하라의 울부짖는 소리가 별채에 울려 퍼졌다.

 별채 주변에 활짝 피었던 봄꽃들도 주인을 잃자 금방 시들어 버리고 말

았다. 뒤늦게 별채로 달려온 소근비가 낳은 남매는 말없이 누워있는 어머

니를 부여 잡고 통곡하였다. 안채에서 며느리의 자결 소식을 들은 니시하

라겐죠는 연신 헛기침만 하면서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앉아 있었다. 
  
 

 




                                                                                                                     -끝-

 

 












 

 




     - 끝까지 읽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고개숙여 고마움을 전합니다. 무자년에도

      건강하시고 부디 하고자 하시는 일 형통하시길 두손모아 빌겠습니다. -

 

 

                                        2007. 12. 29. 18: 10

 

             인천 소래포구 뜨란채에서    여강  최재효 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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