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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의 꽃(2)

* 창작공간/단편 - 반도의 꽃

by 여강 최재효 2007. 12. 22.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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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도의 꽃

 

 

 


                                                                                                                                                       - 여강 최재효

 

                                                                                                                                 

 

                                            2

 

 나고야 항구는 간밤에 비가 왔는지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해변은 해

무로 뒤 덮여 사방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바닷바람이 이따금 갑판위

로 불어왔다. 참으로 오랜만에 맡아보는 바다의 싱싱한 냄새였다. 앞

서가던 뇌꼴스런 사내는 자꾸 뒤를 돌아보며 소근비와 눈이 마주치면

씨익 웃곤했다. 사내는 소근비가 걸으면서도 바다를 응시하는 눈빛이

수상해 보였는지 소근비의 행동을 주시하였다. 행여 그녀가 신세를

한탄하여 바다로 몸을 던질 수도 있다고 판단했는지 그는 소근비의

손을 잡으려했다. 


  “이거 놔요.”

  소근비가 사내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눈을 흘겼다. 사내는 멋쩍

은 표정을 지으며 다시 앞장서서 걸었다. 그녀는 배에서 내려 해변에

지어진 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현관에 왜국의 글자와 생전

보는 이상한 글자가 쓰여있는데, 소근비는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건물안으로 들어서자 방금 전 배에서 봤던 그 왜인(倭人)이 소근비

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소근비상,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나를 왜?’
  “자, 이쪽으로 오세요.”


  왜인은 정중한 자세로 소근비를 안으로 안내하였다. 그는 마치 윗사

을 영접하듯 소근비를 깍듯하게 대했다. 열평 남짓한 사무소는 하급

관리인 듯한 왜인 남자 두명이 책상에 앉아 있다가 남자와 소근비를 보

벌떡 일어나 군호(軍號)를 외치며 그 남자를 맞이했다. 


  “너희들은 잠시 밖에 나가 있거라.”
  하이-
  남자는 소근비를 의자에 앉게하고 차를 탁자에 올려 놓으며, 소근비

에게 손짓을 했다.


  “이 차는 조선 전라도 지방에서 가져온 녹차입니다. 들어보시지요.”
  “…….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소근비는 고향에서 온

차라는 왜인의 말에 먼데서 가족이라도 만난 듯 반가웠다. 남자는 소

근비가 조선의 전라도 지역에서 잡혀왔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전라

도에서 생산된 차를 대접하려고 한 듯 했다. 찻잔도 모양과 색상으로

보아 조선의 도공이 빗은 것 같았다.


 차를 마시는 소리만 중간 중간 정적을 깰 뿐이다. 소근비는 조선에 있

을 때 관아에 다니는 아버지를 위하여 자주 찻물을 끓였었다. 찻잔을

잡은 소근비는 잠시 고향의 추억을 기억해내고 눈물를 흘렸다. 왜국에

잡혀온 뒤로 고향을 잊고 있었다. 오직 목숨 하나 부지하기 위한 사투

에 정신이 집중되 있었던  탓이기도 했다.


  “소근비상, 왜 눈물을 흘리세요? 차가 맛이 없나요? 아니면?”
 …….

 소근비가 대답대신 고개를 가로 저었다.


  “소근비상, 나는 니시하라유키나가(西原行長)라고 합니다. 막부(幕府)

에서 외교 관련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소근비상을 보고 다시한

번 소근비상에 대한 기록을 자세히 살펴 보았습니다. 그리고 소근비상을

이리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앞으로 저를 니시하라상이라 불러주세요.“


  “니-시-하-라-상, 왜 저를 이리로 오게하셨는지요?”
  “그건…….


  또 한번의 고요가 두 사람 사이에 무겁게 깔렸다. 소근비는 니시하라

를 천천히 뜯어보았다. 오독한 콧날과 뽀얀 피부,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

굴, 적당한 체구. 소근비가 그동안 보아왔던 왜인들과는 달랐다. 막부에

서 일을 하는 벼슬아치라고 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약간 귀티가 흐르고

경조부박(輕佻浮薄)해 보이지는 않았다. 비단 옷과 허리에 찬 려한 문

양의 장도(長刀)가 남자의 사회적 신분을 암시하는 듯 했다.


  ‘왜 이 남자가 나를 이곳으로 오게하였을까? 말씨나 행동으로 보아 노

상인들 처럼 나를 강제로 욕보이려는 사람같지는 않은데?‘
  “니시하라상, 왜 저를 부르시었는지요?”


  “그, 그건…….
  “…….
  사내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어둔한 표정으로 찻잔을 들고 눈만 깜

빡거렸다. 소근비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하다가 참고 있는 것 같

기도 했다. 


  “말씀하세요. 저는 희망이 없답니다. 미지의 어느 세상으로 팔려

지도 모르는 몸입니다. 이젠 조선으로 돌아간다는 기약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혹시, 저를 어디로 팔려고 하시는지요?”


  니시하라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빠져있었다. 소근비는 답답

했다. 왜인에게 포로로 잡혀 온 이상 편안한 일생을 보장받을 수도 없

고, 고향 산천을 다시는 밟을 수 도 없을 거라고 체념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터였다. 예측 불허의 미래가 어떻 펼쳐질지가 궁금할 뿐

이었다. 그는 눈을 뜨고 소근비를 빤히 처다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소근비상을 내가 사려고 합니다.”
  니시하라는 간신히 한 마디하고 소근비의 눈치를 살폈다.
  “니시하라상께서 저를 사시겠다고요?”

  소근비는 갑자기 묘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습니다. 내가 소근비상을 비싼 값을 주고 사려고 합니다.”

  헌거로워 보이는 니시하라의 얼굴에 기대와 근심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니시하라님, 왜 저를 사려고 하시는지요?”

  소근비의 말에 그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는 아직 미혼입니다.”

  소근비는 얼른 그 말뜻을 알아 차렸다.

  “왜에는 예쁜 여인들이 얼마든지 있을테고, 미장가이신 니시하라

님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 여인을 구하실 수 있을텐데, 어째서

저같이 전쟁에서 잡혀 온 조선의 여인을 구하시려고 하는지요?“



  “나는 오래전부터 조선의 문물을 존중해왔습니다. 조선에서 수입되

온 물건을 쓰고 조선말을 배우면서 조선이 우리 왜보다 문물이 훨씬 앞

서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왜에게 많은

혜택을 준, 아버지같은 나라를 침략하였다는 것에 대하여 토요토미 히

데요시를 미워하고 있습니다만, 나 역시 그자가 내리는 녹(祿)을 먹고
사는 관리인지라 속으로만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소근비는 니시하라의 말에 안도하면서 호감이 일었다.


  “소녀는 니시하라님의 뜻에 모든 걸 맡기겠습니다.”
  “고, 고맙습니다. 나는 소근비상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내 인생에 오랜

시간을 그대와 함께 보내고 싶습니다.“
  “…….


 소근비는 니시하라에게 넘겨졌고 며칠을 나고야에서 묶은 뒤 그를 따라

교토로 가게되었다. 니시하라의 집은 교토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집의 규모나 화려함으로 보아 그의 집안 위세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소

근비는 별채에 마련된 아담하고 작은 방에 머물게 되었다. 니시하라는

한 달간 소근비에게 아무일도 시키지 않고 왜의 문화를 익히도록 서책

주고 하녀를 붙여 왜의 글자와 풍습을 익히도록 하였다.


  소근비는 차차 마음의 안정을 찾아갔다. 니시하라는 틈만나면 별채에

들려 소근비에게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를 가르치며, 빨리 왜의 풍물을 익

히도록 독려하였다. 노예상인에게 당했던 심신의 상처가 거의 아물어

가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니시하라는 소근비를 데리고 안채로 갔다.

안채에는 니시하라 부모와 형제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는 한달간 왜의 기초적인 예절과 말을 익힌 소근비를 가족들에게

소개하고 싶어 했다. 대청마루 가운데 니시하라 부모가 앉아있고

좌우로 니시하라의 형제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반쯤 허리를 굽힌

세로 앉아있었다. 마루 가운데 다반(茶盤)이 정갈하게 놓여있었다.


  “아버님, 어머님. 소자가 그동안 별채에 머물게 하면서 우리의 말과

습을 가르치던 조선의 처자 소근비라 하옵니다.”

 니시하라가 눈짓으로 소근비에게 신호를 보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쩔 수 없었다.


  “하지메마시테. 와타시소근비데스. 조선카라기마시다. 도조요로시쿠

오네가이시마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소근비라고하며 조선에서 왔습니다. 잘 봐주

세요.)


  소근비는 정중하게 니시하라의 부모에게 절을 올렸다. 이마가 거의 마

루바닥에 닿을 정도로 절을 하자 니시하라 어머니는 약간 고개를 숙여

소근비의 첫 인사를 받아들였으나, 니시하라의 아버지는 거만한 자세로

헛기침만 해댔다. 


  “오오, 소근비상, 오겡끼데스까? 다이죠부데스까?” 

  (소근비, 건강하죠?)
  “하이. 오가케사마데…….

  (네, 배려해주신 덕분에…….)


  니시하라의 어머니 하루꼬는 소근비 손을 잡아주며 다정하게 소근비

의 건강을 물었다. 상당히 따뜻한 성격의 소유자같아 보였다. 같은 여

자로서의 연민이 정을 느낀 듯 하루꼬는 소근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

고 측은한 듯 바라보았다. 이어서 니시하라의 형제들에게도 소근비는

반절로 첫 인사를 하였다. 형제들은 기모노를 입고 화려하게 단장한

조선의 아름다운 처녀를 보자 신기한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메마시테.”
  “하지메마시테. 도죠요로시쿠.”


  니시하라의 가족들에게 인사를 마친 소근비는 손수 차를 타서 니시

하라의 가족들 앞에 놓았다. 니시하라의 아버지 니시하라겐죠는 멋한

표정으로 앉아서 소근비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적국의 여인

이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집에 들어온 사실이 믿기지 않았었다. 한동

말없이 소근비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간품하던 니시하라겐죠가 

을 열었다.


  “나는 게이조노에키(慶長の役)가 일어나 조선반도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에 출전하였다가 두 달전에 돌아왔다. 우리 가문이 너를 받아 들이

것은 내 아들 유키나가가 너를 평생의 반려자로 삼겠다고 한달 동안

끈질기게 나에게 사정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앞으로

네가 우리가문에 어떤 공을 쌓는지를 두고 볼 것이다. 나는 그동안 전

장에 나가 수많은 조선 사람들을 죽였다.


  네가 삿되보이지는 않으나 나의 눈 밖에 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

다. 너에 대하여 조선에 나가있는 우리 병사들에게 알아보게 한 결과

너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집안 교육도 잘받고 네 아비 또한 조선의

관리로서 성실하게 일하고 있다는 보고를 접하였다. 비록 지금은 조선

인과 우리 왜인들이 원수의 관계이지만 네가 하는 행동에 따라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명심해라. 나는 우리 가문을 욕보이는 어떤 행동에

대하여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단 너 뿐만 아니라 내 식솔들

모두에게 해당된다.“


  무장(武將)인 니시하라 겐죠의 소근비에 대한 첫 인사말은 일종의 경

고였다. 가족들은 찬비를 맞은 것 처럼 모두가 입을 굳게 다문 채 니시

하라겐죠의 다음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남편의 말에 딱딱해진 분위

기를 하루꼬는 얼른 화기애애하게 돌려야 했다. 하루꼬를 제외한 그의

자식들은 버성긴 태도로 겐죠의 말을 듣고 있어야 했다. 


  “소근비, 너무 어려워말아요. 소근비가 우리 왜에 자의로 온 것이 아

니니 앞으로는 나 하루꼬를 믿고 의지해요. 너희들도 소근비를 한 가족

으로 깍듯하게 대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내 너희들을 크게

혼내줄 것이니라“


  남편 될 사람 가족과의 첫 대면은 어색했지만 무난하게 끝났다. 벚꽃

이 피기 시작할 무렵 소근비는 니시하라유키나가의 아내가 되었다. 니시

하라 가문의 많은 친족들이 대거 몰려와 조선의 소녀와 왜의 총각이 혼

례를 올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 계속 -

 

 

 

 

 

 

       [주] 게이조노에키(慶長の役) - 1597년 선조30년에 일어난 왜의 재침인 정유재란을

              일본인들은 이렇게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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