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半島)의 꽃
- 여강 최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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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조선 조정과 토요토미히데요시 막부(幕
府)간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양측의 요구조건이 맞지 않아 협상은 결렬
되었다. 풍신수길은 1597년 정월에 14만여 명의 왜병을 동원하여 재
차 조선을 침략하게 했다. 이에 명나라도 5만여 명의 병력을 조선에 파
견 하였다. 조선 조정은 가동병력 3만여 명을 권율 등 전선의 지휘관
부대에 배치했다.
왜의 주력군은 고바야가와를 총사령관으로, 우군은 모리, 좌군은
우키다 등으로 편성한 뒤 하삼도(下三道)를 점령하기 위해서 공격을
감행했다. 왜군은 남해, 하동 등을 점령한 뒤 전라도 남원을 총공격
했다. 조선군의 수적 열세로 인하여 결국 남원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후 왜군은 전주에 집결한 군세를 정비한 후에 충청도로 북진했다.
그렇지만 조선군의 강력한 항전에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전라도
순천과 경상도 울산으로 후퇴하여 농성했다. 왜군의 거짓 정보와 서
인(西人)들의 모함에 의해 파직되었던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
사에 복귀하여 12척의 함선을 이끌고 출동하여 서해로 향하는 300
여 척의 왜의 전선들을 명량(鳴梁)에서 대파했다.
왜군의 수륙병진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조선수군은 제해권을 장
악했다. 이에 힘입어 조선군은 각 지역에서 왜군 잔당들을 섬멸했다.
1598년 8월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노량에서 왜의 전
선(戰船) 300여 척과 해전을 벌여 적선 대부분을 격침시키는 등 최
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 해전을 마지막으로 7년에 걸친 지루
한 전쟁은 끝나게 되었다.
7년 전쟁에서 10만 여명의 조선 백성이 왜군에 의해 포로로 잡혀갔
다. 포로로 끌려간 조선 백성들의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10여만 명의 조선 포로들 대부분은 서양의 인신매매 상인들에 의해 전
세계로 팔려 나갔다. 포로들 중 기술자, 젊은 여자. 지식인 등은 왜에
머물 수 있었다.
“슈진(主人), 제발, 제발 소첩을 조선으로 보내주세요. 제발요. 조선
에 저를 기다리고 있을 부모 형제들을 생각하면 이제는 하루도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제발 보내주세요. 니시하라(西原)님, 소첩의 소원입
니다.”
“허허. 내 아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소. 아버님이 아시면 크게 노할
것이니 더는 그런 말을 하지 마오.”
“소첩, 영원히 조선에 계신 부모님을 만나지 못하고 이곳에서 살다가
죽어야 한단 말씀이세요? 이제는 놓아 줄 때도 되었잖아요.”
사내는 소근비(小斤非)의 간청을 못들은 체 하고 방에서 나가 버렸다.
왜인의 처가 된 소근비는 며칠 전부터 들려 온 소문이 사실임을 직
감하고 어제부터 남편인 니시하라에게 눈물로 간청하였으나, 그는
아내의 조선 귀환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듯 했다. 버성긴 기모노가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