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의 꽃
- 여강 최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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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소문 들으셨어요?”
“무슨 소문?”
아침 식사를 마치고 녹차를 달여 마시고 있을 때 언년이가 소근비에
게 다가와 귓속말로 속삭였다.
“언니, 조선에서 왜에 전쟁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을 조선으로 데려가
기 위하여 사명대사께서 쇄환사(刷還使)로 교토에 왔대요. 조만간 왜에
잡혀온 조선 포로들을 조선으로 데려갈 거래요.”
“너는 그런 소식을 어떻게 알게 되었니?”
“언니, 우리처럼 조선에서 무지렁이로 살다가 잡혀온 사람들 끼리 보름
달이 뜨는 날이면 교토 이조성(二條城) 근처에 만나는 장소가 있어요. 그
곳에 가면 조선에서 들려오는 별의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교토에 그런 곳이 있었니?”
소근비는 언년이의 말이 신기했다.
“소문에는 왜나라 왕이 조선에서 잡혀 온 포로들을 조사하여 원하는 사
람에 한해서 조선으로 돌려 보낸데요.”
“언년이는 좋겠다.”
“뭐가요?"
" 나는 이곳에 피붙이를 만들었으니 함부로 떠날 수도 없으니 말이다.
나는 한시도 고향을 잊어 본적이 없었단다. 지금도 주인이 허락을 한다
면 당장 조선으로 달려가고 싶어. 넌 어떠니?”
소근비가 언년이의 눈치를 살폈다.
“싫어요. 전 이곳 왜나라가 좋아요. 종년이 조선에 돌아간다 한들 무엇
이 달라지겠어요?”
“싫다니? 너의 부모형제가 살고 있는 조선으로 돌아가는 게 당연하지?”
“저는 이곳이 더 편하고 살기 좋아요. 조선에서 평생 종으로 구박받으
며 사나 이곳에서 눈치보며 사나 매한가지인걸요. 차라리 이곳 왜 땅에
남아 살고 싶어요.“
‘아-. 다 같은 마음이 아니로구나. 그럴 테지 이곳에 사나 조선 땅에
사나 종의 신세는 면할 수 없을 테니. 그런데 왜 이리 가슴이 뛰는 것인
지. 또한 아버님 어머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르는구나. 지금이라도
조선으로 돌아갈 수 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꼬.‘
1607년 선조는 사명당(泗溟堂) 유정(惟政)을 쇄환사로 임명하고 오백
여명의 사절단을 도쿠가와 막부에 파견하였다.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은
사명당은 임진, 정유 두 전란 때 왜병에게 포로로 잡혀간 무고한 조선의
백성들을 조선으로 데려가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다.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명당 일행을 융숭히 대접하였고, 전국에 명을 내려 조선
에서 잡혀 온 포로를 수소문하여 조선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인 포로를 사서 종으로 부리고 있는 왜인들은 조선 사람
들을 숨기고 내주지 않았다. 또한 상당수 많은 조선 포로들이 서양 노
예상인들에 의해 이미 제3국으로 팔려갔기 때문에 교토에는 조선인
포로가 그리 많지 않았다.
도쿠가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달리 조선 침범을 원치 않았기 때문
에 두 번의 길고 긴 전쟁에서도 피동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눈치
를 보며, 적극적인 전쟁 개입은 피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막
부의 쇼군(將軍)이 된 도쿠가와는 조선과 교역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쇄환사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그는 전국에 펴져있는 조선인 포로들이 좀처럼 모여지지 않자 우선
교토에 거주하는 관리들이 소유하고 있던 조선인 포로들을 모집하여 조
선에 송환하려고 했다. 니시하라 가문에도 서너 명의 조선인 포로들이
종으로 일하고 있었다.
니시하라겐죠는 쇼군의 명을 어길 수 없어 자신의 집안에 있던 조선인
포로 두세 명을 막부로 보내어 조선에서 온 쇄환사에게 넘겨야 했다.
며느리가 된 소근비 역시 조선에서 잡혀 온 전쟁포로였지만 자신의 손
자와 손녀를 낳았기 때문에 돌려보낼 수 없었다. 대신 언년이와 다른 조
선인 포로를 넘기기로 했다. 주인의 결정을 전해들은 언년이는 울며 불
며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발버둥 쳤다.
“주인님, 저는 이곳이 좋아요.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겠어요. 저를 이
곳에 살도록 해주세요. 네에?”
“언년아, 부모 형제가 있는 조선으로 돌아가. 왜 안 가려고 하는 거니?”
“이년은 이곳에서 살다가 죽고 싶어요. 이년이 조선에 돌아간들 천덕꾸
러기 종 신세를 면하지 못할 바에 차리리 왜 땅에서 한 평생 자유롭게 살
고 싶어요. 언니, 제발 저를 이곳에 남게 해주세요. 언니 수발을 거들면서
언니와 함께 이곳에서 살고 싶어요. 이렇게 부탁해요. 언니. 니시하라님
께 잘 말씀드려 주세요. 네에?”
‘아아, 무슨 이런 일이다 있단 말이냐? 제 나라를 가기 싫어하다니. 정
녕 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갈 수 없고, 돌아가기 싫어하는 자를 억지로 데
려가다니.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날 수 있단 말인가? 언년이가
조선으로 돌아가고 나면 나는 누구를 의지하며 살아간단 말인가?‘
니시하라겐죠는 언년이와 다른 두 조선인 남자와 함께 막부로 넘겼다.
교토에서는 전국에서 주인 몰래 도망쳐 온 조선인 포로들이 쇄환사들이
머물고 있는 관아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도망 친 조선인 포로들을 잡으러
왜인 무사들과 쇄환사로 온 조선 관리들과 일대 혈전이 벌어지기도 하
는 등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쇄환사들은 도망쳐 온 동포들을 숨겨 주기도 하고 임시로 다른 곳으
로 피신시켜 조선으로 돌아 갈 때 합류할 지점을 알려 주는 등 최대한
많은 조선 사람들을 데리고 가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다. 도쿠가와 막
부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 하는 것 같았다. 소근비
는 사람들을 통해 쇄환사들이 어디에 묵고 있는지, 그리고 언제 조선으
로 떠나는지 상세히 알고 있었다.
‘이달 중순경 떠난다고? 아아, 고향에 계신 부모님들은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살아 생전에 아버지 어머님을 한번 만이라도 뵐 수 있다면 천추
의 한이 없으련만. 슈진에게 말해 보는 거야. 내 요청에 거절하지는 않을
거야. 이번에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나는 이곳 왜의 땅에서 살다 늙
어 죽을거야.‘
조선에서 쇄환사가 온 이후로 소근비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지난
7년간 왜인의 처로 살아 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고향에 가고 싶
은 일념에 남편이나 자식은 점차 관심 밖의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슈진, 소첩이 이런 말 드리면 어떠실지 모르지만 요즘 조선에서 쇄환
사가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향에 계신 부모형제가 보고 싶어요.
소첩을 조선에 보내 주실 수 있겠는지요?“
“뭐라고요? 조, 조선으로 돌아간다구요?”
니시하라는 소근비의 말에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네에.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어요. 만나 뵙고 다시 오겠습니다.”
“아니 되오. 그대는 나의 아내이고 두 아이의 어머니입니다. 설령 보
내준다고 하여도 고향의 부모를 만나면 이곳으로 다시 돌아 올 수 있겠
소? 불가한 일이 될 거요. 당신이 돌아온다고 하여도 무엇을 타고 어떻
게 돌아온단 말이오?“
“슈진, 꼭 돌아올게요. 소첩은 이곳에서 두 아이를 낳았습니다. 어미
가 자식을 버리는 일은 없습니다. 반드시 돌아 올 테니 소첩을 믿고 한
번만 부모님을 만나 뵙고 오게 해 주세요. 네에? 슈진.“
“아니되오. 내가 허락한다고 하여도 아버님은 절대로 당신을 조선으
로 건너가도록 허락
하실 분이 아닙니다.“
‘어쩌나, 이달 중순이라고 해야 이틀밖에 시간이 없는데…….’
소근비는 시아버지에게 달려가 자신의 사정을 말하고 싶었지만 남편
니시하라 말대로 절대로 자신을 조선으로 돌려보낼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왜의 무사신분으로 자존심은 그 누구보다 세고 욕심이 많은 남자였
다.
밤새도록 뜬 눈으로 지샌 소근비는 아침 일찍 집안 사람의 시선을 피해
쇄환사들이 머물고 있는 장소로 가보았다. 쇄환사들이 묵고 있는 관아
에는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조선인 행색의 남녀들이 몰려들었다. 대부
분 남루한 차림으로 보아 전쟁 통에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이 분명했다.
“여보세요. 조선에서 온 쇄환사 관리들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요?”
“보아하니. 왜녀 같은데 조선말을 하네…….”
기모노 차림의 소근비를 보자 조선 사람들은 키득거리며 자기들 끼리
뭐라고 속삭였다.
“제가 비록 왜인들 옷을 입었지만 저도 조선에서 정유년 전쟁 때 잡혀
왔답니다. 어떻게 하면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려주세요.“
“그럼, 저 관아에 가서 조선에서 온 관리들을 만나보세요.”
“그럼, 조선에 갈 수 있나요?”
“어서 가서 만나보슈.”
관아를 지키는 왜병 수문장에게 돈 몇 푼 집어주며 일이 있어 왔노라고
하니 왜녀로 착각한 수문장은 소근비를 얼른 들여보냈다. 명나라, 포르투
갈, 이탈리아 등 외빈들이 오면 묶는 관아였다. 관아 마당은 조선에서 파
견된 관리들이 아침부터 분주하게 오가며 사무를 보고 있었다. 소근비는
그중 한 젊은 관리에게 다가갔다.
“저어, 나으리. 저는 전라도에서 정유년 때 포로로 잡혀 온 사람입니다.
지금은 이곳에서 왜인과 혼인하여 살고 있지만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습
니다. 어떻게 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나요?“
진한 화장에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조선말로 이야기를 걸어오자 젊은
관리는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그가 소근비를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외
양은 왜녀가 맞는데 조선말을 하는 투로 봐서 분명히 조선에서 온 여자
가 맞았다.
“정말 조선에서 오시었소?”
“네에. 정유년 전란 통에 전라도 순천에서 왜병에게 포로로 잡혀왔습
니다. 이름은 소근비라고 합니다.”
젊은 관리는 소근비를 방으로 들게 하여 소근비에 대하여 자세히 물으며
기록하였다.
“다행입니다. 조선에서 잡혀 온 젊은 처자들은 대부분 멀리 서양오랑캐
에게 헐값에 팔려 나갔는데. 이곳에 왜인과 혼인을 올리고 자식까지 낳고
살다니 천만 다행입니다.“
“나으리, 저를 조선으로 보내 주실 수 있는지요?”
“그런데, 남편께서 막부에서 외교관련 일을 보시고 계시니. 먼저 남편
되시는 니시하라상의 허락이 있어야 조선에 가실 수 있습니다. 자칫 잘
못하면 큰 외교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먼저 니시하리상의
허락을 받고 오세요. 아직 이틀의 시간이 있습니다.“
‘어떻게 남편과 시아버지의 허락을 받아낸단 말인가?’
집으로 돌아온 소근비 다시 남편 니시하라에게 고향으로 가게 해 달라
고 애원하였으나 남편으로부터 절대로 안 된다는 말만 되풀이하였다.
크게 낙심한 소근비는 식음을 전폐한 채 깊은 생각에 빠졌다. 시어머니
하루꼬가 달려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도 소근비는 죽은 듯 누워서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니시하라는 며칠 전부터 소근비가 조선으로 가게
해달라는 청을 했었다고 하루꼬에게 말했다.
“뭐라고? 네 처가 조선으로 가겠다고?”
“네에, 어머니.”
“네 아버지가 아시는 날이면 네 처는 살아남기 힘들다. 네가 잘 타일러
서 네 처가 조선으로 가겠다는 생각을 단념토록해라. 잘못하다가는 우리
집안에 평지풍파가 일겠구나.”
니시하라의 설득에도 소근비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니시하라
에게 제발 고향으로 갈수 있게 해달라고 울면서 애원을 하며 매달렸다.
“슈진, 제발, 부탁입니다. 저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
푸세요. 저는 이 가문에 들어와 두 아이를 낳고 모든 정성을 다해 시부
모님을 받들었잖아요. 이제 저를 놔주세요. 조선에 계신 부모형제들을
꼭 만나봐야겠어요. 약속할게요. 반드시 돌아올 테니 제발, 제가 조선으
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세요. 이렇게 빌고 빕니다.“
“이보시오. 부인, 우리 왜와 조선은 전쟁이 끝났다하나 아직은 자유로
이 왕래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오. 그대가 조선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어
쩜 영원한 이별일 수도 있소. 좀 더 기다려 봅시다. 언젠가는 조선을 자
유롭게 오갈 수 있는 날이 올게요. 그때까지 참으며 기다려 보십시다.
나도 조선에 있는 당신 부모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소.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오. 그대가 조선으로 간다면 우리는 이혼을 하는 거나
다를 바 없소. 저 두 아이들은 어떻게 하라고 조선으로 간다는 말씀이
오?“
니시하라는 소근비의 애타는 마음을 잘 알고 있으나, 소근비를 조선
으로 돌아가게 할 수는 없었다. 불같은 아버지 니시하라겐죠는 절대 허
락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고 무엇보다 자신이 소근비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보낼 수 없었다.
‘어떻게 한다? 이틀 후면 쇄환사들이 조선으로 떠난다는데. 이대로 이
집에서 도망해 쇄환사들이 묵고 있는 관아로 간다? 아니야, 내가 관아로
숨어든다하여도 시아버지는 나를 찾아내 엄한 벌을 내리겠지. 정녕 살아
서 고향을 갈 수 없다는 말인가?‘
소근비의 일거수일투족이 니시하라와 시어머니 하루꼬의 최대관심사
가 되고 말았다. 하룻밤을 뜬 눈으로 지새운 소근비는 탈출하기로 결심
하였다. 오늘밤 쇄환사들이 묵고 있는 곳으로 도망하기로 마음먹고 자
리에서 일어나 정신을 차렸다.
‘도망하려면 니시하라와 시어머니에게 잘 보여야 돼. 우선 몸도 추스
르고…….’
“얘들아, 너희들은 지금부터 별당 아씨를 잘 감시해야한다. 만약 별당
아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내 너희들을 그냥두지 않을 것이야.“
하루꼬는 집안 하인들을 불러 모아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시어머니 입
장에서 만약 며느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남편에게 큰 질책을 받을
것이고 자신과 가문의 체면에 먹칠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소근비는 별채에서 하루 종일 아무것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이 집을 빠
져나가 조선으로 무사히 갈 수 있을까를 궁리하였다. 그러나 뾰족한 방법
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찌한다. 내일이면 쇄환사들이 조선으로 떠날 텐데……. 오늘밤에
이 집을 탈출하여 쇄환사들이 있는 관아로 가는 거야. 오늘 아니면 영원
히 조선으로 갈 수 없을지도 몰라. 오늘밤, 오늘밤 꼭 이집을…….‘
소근비는 아침, 점심 , 저녁 식사를 제 때에 꼬박꼬박 챙겨서 들고 몸과
마음을 안정시킨 뒤 밤이 오기만 기다렸다. 만약을 위하여 금붙이 같은 값
나가는 물건과 호신용 칼, 남자복장과 복면을 옆방에 숨겨 두었다.
어쩐 일인지 니시하라가 술 냄새를 풍기며 일찍 별채로 들었다. 소근비
의 냉랭한 태도에 가슴앓이를 하던 니시하라가 오늘 밤은 소근비를 위로
해 주고 싶었다.
“소근비, 이것 받아요.”
“…….”
“조선 장인이 만든 옥으로 만든 빗과 거울입니다.”
니시하라가 작은 상자를 소근비에게 건넸다.
“슈진, 고마워요.”
“오늘은 당신 얼굴에 화색이 도니 기분이 좋소. 무슨 일 있어요?”
“무슨 일은요?”
소근비는 아무일도 없는 것처럼 평상시 같이 행동하였다.
“이제 조선으로 간다는 생각을 접어요. 언젠가 좋은 시절이 오면 내
당신을 데리고 조선을 찾을 것이요. 나도 조선에 계신 장인, 장모가 보
고 싶소.“
“슈진, 고마워요.”
“아니요. 당연히 찾아뵙고 인사 올려야지요. 다만 조선과 전쟁을 한 뒤
라 갈수 없는 나 또한 답답하기는 당신과 같소.“
“고마워요.”
소근비는 잠시 부모님을 떠올렸다. 딸자식을 왜병에게 빼앗긴 후 불철주
야 근심 걱정으로 속을 태우고 계실 부모님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흑 -.
소근비의 양눈에 눈물이 갈쌍갈쌍하였다.
“또 고향 생각을 하는구려. 우리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 합시다. 내 당신과 주
거니 받거니 하면서 오늘밤을 보내고 싶소.“
“슈진, 고마워요.”
소근비는 하인을 시켜 간단한 안주거리와 정종을 따뜻하게 데워 내오
도록 하였다. 함께 살을 비비며 사는 부부지만 함께 술잔을 마주하는 경
우는 드물었다. 고향을 그리는 아내가 측은해 니시하라는 아내를 위하여
일부러 술자리를 만들었다. 비록 조선에서 포로로 잡혀와 자신과 혼인하
여 자식까지 낳고 아무 불평불만 없이 자신의 뜻에 따라준 소근비가 한
편으로 고맙기도 하고 늘 고향을 잊지 못해 마음 고생하는 아내를 곁에서
바라보는 니시하라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자, 내잔 받아요. 내 자주 당신과 이런 자리를 함께하지 못해 미안하오.”
“아니예요. 오히려 소첩이 준비를 못해드렸어요. 죄송해요.”
“아버님과 어머님은 요즘 조선에서 온 쇄환사로 인하여 당신에게 심경의
변화 있을까 걱정하고 계시 답니다. 나는 당신이 나와 두 아이들을 사랑하
기 때문에 절대로 함부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싶소. 조선과의 전쟁
이 있어 나와 당신이 부부가 되었고 두 아이들이 태어났소. 전쟁이 우리의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 주었어요. 나는 당신과 해로동혈할 때 까지 이곳 교
토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소. 그러나 요즘 들어 나는 왠지 불안하오.“
니시하라는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그런 남편을 바라보는 소근비는 마음
이 아려왔다. 오늘밤이면 남편과 두 아이들과 영영 다시 못 볼 수도 있기 때
문에 소근비는 남편 니시하라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부인, 내 얼굴에 뭐가 묻었소?”
“아닙니다. 이제 자세히 보니 슈진 얼굴이 너무 잘 생겼다는 생각이 들어
요.”
소근비가 배시시 웃으며, 니시하라를 쳐다보았다.
“허-, 새삼스럽게…….”
“슈진, 잔 받으세요.”
술이 잔에 떨어지는 소리가 폭포소리 같이 들렸다. 남편에게 술을 따르면
서 소근비는 오늘밤을 생각했다.
‘할 수 없어. 오늘 아니면 기회가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이 집을 꼭
탈출해야 돼. 그리고 조선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거야. 왜와 조선
이 서로를 인정하고 관계가 호전되면 얼마든지 왜와 조선을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이 집을 나가더라도 남편은 날 이해해 줄 거야.‘
“아니, 소근비, 잔이 넘치잖소?”
“아, 죄송합니다. 슈진.”
“뭘 그리 골똘히 생각을 하는 게요?”
소근비는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빨개졌다.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자, 당신도 잔을 받구려.”
정종 두 병을 비우고 나서야. 부부는 잠자리에 들었다. 니시하라에게서
술 냄새와 함께 강한 남자의 체취가 풍겼다. 조선에서 쇄환사들이 온 뒤
로부터 니시하라는 거의 매일 밤 늦게까지 야근을 해야 했다. 조선으로
소환될 포로들을 점검하고 또한 쇄환사들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처리
해야하는 위치에서 니시하라는 자주 조선의 관리들에게서 아내의 고향
인 순천에 대하여 물었다. 훗날 조선과 관계가 돈독해지면 꼭 아내를 데
리고 처가가 있는 전라도 순천을 찾고 싶었다.
“오늘은 당신과 이리 평안한 밤을 맞으니 혼인 첫날밤이 생각나는구려.”
“…….”
“자, 이리 오시오.”
니시하라의 팔이 소근비의 미끈한 등을 감싸 안았다. 술을 마셔 그런지
두 사람의 열기가 금방 이불속을 덥혔다. 니시하라의 손이 소근비의 풍덕
한 젖가슴과 엉덩이를 간질였다. 오늘밤은 마직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
각에 소근비는 능동적 행동하여 니시하라를 즐겁게 해주고 싶었다.
부부관계에서 늘 수동적이었던 소근비가 스스로 역할을 바꾸며 적극성
을 띠며, 요분질에 몰두하자 니시하라는 구름위에 앉은 기분이었다. 사내
의 굵직한 신음과 끈적끈적한 땀방울이 두 몸을 더욱 달아 오르게 했다.
소근비의 부드러운 혀가 니시하라의 단단해진 그것을 더욱 남성답게
만들었다. 남편과 마지막 밤이라고 생각하니 소근비의 눈에서 물끼가 배
어나왔다. 소근비는 모든 기교를 부려가며 니시하라를 달 뜨게 하였다.
그녀는 결혼 칠년간 스스로 익히거나 남편에게 배운 온갖 방중술를 사
용하였다.
더 이상이 참을 수 없는 지경이 이르자 니시하라는 늘 그러했던 것 처
럼 익숙한 자세로 소근비를 열락으로 인도하였다. 강약 조절을 해가며
재바르게 움직이던 니시하라가 이윽고 거친 숨소리와 탄성을 질러대며
파정(破精)하였다. 소근비는 누워서 긴 여운을 삭혔다.
행복한 시간이 너무도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니시하라는 오랜만에
맛보는 달콤한 기분에 빠져들었고 곧 코를 골기 시작했다. 소근비는 니
시하라가 깊은 잠에 바질 때 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과 두 아이를 두고 정말로 이 집을 탈출해야하나? 내가 조선에
무사히 갈 수 있을까?‘
갑자기 칼을 든 시아버지 니시하라겐죠의 험상궂은 얼굴이 떠올랐다.
‘만약에 내가 도망하다 잡히면 시아버지는 나를 어찌할까? 차마 죽이
지는 않겠지.’
니시하라가 깊이 잠든 것을 확신한 소근비는 살며시 일어나 남장을
하고 칼과 금붙이를 챙겼다. 별채와 안채로 통하는 문이 잠겨있지 않았
다. 한 발짝 한 발짝 대문을 향해 다가갔다. 하인들도 모두 잠든 상태여
서 집안은 교교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