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씨(3)

* 창작공간/단편 - 씨

by 여강 최재효 2006. 8. 10. 16:55

본문

    

 

 

 

 

 

 

 

 

         

 

 

 

     씨(3)

 

 

                                                                                                                                                                  - 여강 최재효

 

 

 

 

 


  산안개가 거의 걷힌 듯 멀리 서울 시내가 보인다. 길이 습기를 머금어 상당히

미끄러울 것으로 판단해 더 이상 올라가는 것을 포기했다. 만장대 까지 가려면

 바위를 타야하기 때문에 자칫 대형 사고를 부를 수 있다. 북한산에는 일년에

수십 번 헬기가 뜨는데 대개 실족 하거나 음주로 인한 사고여서 원만해서 산에

올라 술을 마시지 않는데 오늘은 내 스스로 우울한 기분을 달래보려고 가져 온

술을 혼자 다 마셔 버렸다.

 

 온 몸에 알코올 기운이 퍼져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다. 한 시간 정도만 더 앉아

명상을 하거나 자신과의 대화를 즐기면 하산하는데 그게 신경 쓰일 것이 없을 것

같다. 나에게 그동안 많은 인연들이 스쳐지나 갔다. 그중에 뇌리에 깊이 각인 된

경우는 S처럼 애틋한 경우와 용두사미가 되어 버린 일도 있었다. 내가 회사에 막

입사하고 얼마 안 된 어느 봄날이었다.

 

 같이 근무하는 여사원 M이 저녁에 저녁이나 같이 하자고 해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약속 장소로 나갔다. 사전에 나에게 이야기 하면 내가 나가지 않을 것 같아

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서 M은 미안한 얼굴을 했다. M의 곁에는 내 또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나는 그 남자가 M의 애인이나  친구 정도로

생각했다.


  “H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M은 평소 나를 유심히 관찰해보았는데 남자 친구가 없는 것 같아서 오늘 나에

게 자기 대학 동기를 소개 시켜주기 위하여 자리를 마련했다고 한다.


  서울에서 태어난 H는 전형적인 도회지풍의 얼굴이었다. 나는 H가 마음에 들

었다. 첫 인상도 좋았을 뿐만 아니라 매너 또한 수준급이었다. 나는 그날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래 가장 많은 알코올을 수혈했다. 늦은 밤까지 이어진 3차에서

나는 이 남자가 나와 모든 면에서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시골에서 자라 어렵게 대학공부를 마치고 회사에 입사한 나로서는 될 수 있으

면 배우자는 도회지풍의 남자를 선택하고 싶었다. 물론 우리의 정서로 보아 여자

가 남자를 선택한다는 것은 웬만한 용기로는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가급

적 수돗물을 마시고 자란 사람을 택하고 싶었다.

 

 처음 만난 남자와 새벽이 되도록 술을 마셔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나는 H가

술에 취한 여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알고 싶었다. 나는 야성과 지성을 반반 섞인

행동을 기대해 보았지만 H는 술 취한 나를 끝까지 안전하게 집에 데려다 주는 신

사도를 발휘했다. 나는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속으로 중얼 거렸다.


  ‘바보, 일생일대의 찬스를 그렇게 허무하게 버리다니......’

  다음 날부터 H의 전화 공세는 쉴 새 없이 이어졌다. 간밤에 잠은 잘 잤느냐,

속은 괜찮느냐, 머리가 아프지 않느냐, 나는 또 속으로 중얼 거렸다.


  ‘바보, 그렇게 걱정되면 달려와 보던지......’
    H는 내 퇴근 시간에 맞춰 회사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는 너무

술을 많이 마시게 해서 미안하다며 해장술을 사겠다고 했다. 영등포의 먹자골

목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어젠 너무 제가 술만 권했죠? 집에 가면서도 걱정 많이 했어요.”
  어설퍼 보이는 변명에 나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우리는 그날 저녁 또 간밤

의 행복을 되풀이 했다. 나는 H의 진심을 알고 싶었다. 나는 결혼상대로 만나려

고 하는 것인지 단순히 말초신경을 만족시키려는 대상으로 대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이상하게도 그날은 술이 빨리 취하지 않았다.


  H는 초반부터 내가 강세로 나가자 약간 당황하는 눈치 였다. 테이블 위에 소주

병이 즐비하자 나는 더욱 힘이 났다. 분명 H는 나를 평소에 술만 마시는 여자로

생각했을 것이다. 식당을 나오면서 나는 거의 실신 지경에 이르렀었다. 취중에도

나는 H에게 내가 2차를 낼 테니 가자고 강짜를 부렸다. 나의 강력한 요구에 마지

못해 H는 나를 따라 갔고 이후 부터는 내가 주도권을 잡고행동을 했다.


  고급스럽게 보이는 노래방에 H를 데리고 갔다. 막상 술에 취하니 세상이 우스

워 보였다. 내가 먼저 내 애창곡을 몇 곡 뽑고 나서 H 에게 마이크를 건넸지만 그

는 우물쭈물 하면서 자꾸만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카운터에 술을 요구 했다. 소

주가 출렁거리는 뱃속에 맥주를 들이 부었더니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나는

속으로 이 남자에게 거짓이라도 진자처럼 보이도록 행동하고 싶었다.


  “H씨, 나 어때요? 오늘 밤, 나 책임 질 수 있어요?”

  나의 당돌한 말에 H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맸다. 노래방에서 나는 속내용

물을 모두 토하고 나서야 나올 수 있었다. 그는 내를 부축해서 근처 숙박시설로

갔다. 속으로 나는 쾌재와 동시에 비감함에 젖었다. 그러나 내가 예상했던 행동을

그는 하지 않았다. 나를 재워놓고 그는 나가 버렸다. 혼자 누워있는 내가 너무 야

속하기도 하고 우스워 보였다.


  그런 그가 미더워 보였고 든든해 보였지만 열정이 없는 남자로 비쳐졌다. 아니

면 술 취한 여자를 건드리지 않는 남자다움을 과시하려는 고도의 계산 된 행동이

었는지 모르지만 그날 밤 나는 보통의 남자를 원했고 나는 보통의 여자가 되고 싶

었던 욕망이 꿈틀거렸음이 틀림없었다. 거의 반 년간 H와 연애 같지 않은 연애를

하면서 나는 남자란 다 그런가하는 의구심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H는 데이트를

하는 동안 한번도 내 손을 잡지 않았다.

 

  내가 그의 손을 잡으면 그는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 깜작 놀라며 슬며시 손을

뺐다. 처음에는 수줍어서 그려러니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에게서 시골 영감 같

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해줄 수 있는 남자라는 것을

나에게 은연 중 비추기도 했지만 나는 H가 항상 태양같이 뜨겁고 때에 다라서는

달처럼 차가운 남자이기를 바랬다.


  귀공자처럼 생긴 외모와 부드러움에 대부분의 여자들은 H에게 녹아 들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왠지 무언가 부족해 보였다. 평생을 저 남자에게 얽매여 산다는

것은 내 자신이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귀뚜라미가 울 때쯤 해서 이별을

선언했다. H는 내가 어디가 어때서 그러느냐고 대들었지만 나는 그의 미지근한 성

격이 싫었다. 지금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세 남자를 놓고 비교 분석을 하는 습관이

있다.


  S와 H 그리고 지금의 남편을 가만히 세워놓고 보면 그래도 S가 가장 애틋하고
다정다감하며 어쩌면 나의 가장 적합한 배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

나 그는 이미 저승 사람이 되었으니 어지해볼 도리가 없다. H에게 내가 일방적으

로 결별을 선언하고 H를 소개 시켜준 동료 여사원의 시선에 나는 한 동안 부담을

안고 대해야 했다. 그 후로도 H에게서 여러 번의 전화가 걸려 왔으나 나는 받지

않았다. 그리고 끝까지 그에게 내가 왜 결별을 선언 했는지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았다.

 

  산신령과 산새 그리고 산의 정령들에게 하산 인사를 하고 나는 산을 내려왔다.

습기에 돌로 된 계단이 몹시 미끄러웠지만 발끝에 모든 신경을 집중한 탓에 무사히

도봉산역에 도착 할 수 있었다. 바람도 선선하게 불어왔다. 역에는 얼굴이 불콰해진

중년의 남녀들이 떼로 몰려 있었다. 그들의 행복해 하는 얼굴에 나는 괜히 침을 뱄

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인천행 1호선 전철에 무거워진 몸을 실었다. 전 철안은 의정부 방면과 도봉산

에서 승차한 등산객들로 좌석이 점령되었고 몹시 시끄러웠다. ‘도대체 중년의

남녀들은 이렇게 좋은 날 집에서 마누라 엉덩이나 남편 허벅지나 주무를 것이지

왜들 나와서 난리를 피우나‘하는 불만이 목까지 찼다.


  병원에 들르니 웅크리고 있던 유니가 나를 보고 반가운 척 한다. 꼬리는 세게
흔들지 않았지만 혀로 내 손등을 핥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래도 주인이라고 알

아 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유니를 안고 집에 오니 남편은 소파에 깊이 잠이 들어

있고 TV혼자 떠들어 대고 있었다.

 

  마누라가 산행에서 돌아와도 코만 골고 있는 남편에게 나는 짜증이 일었다.

하지만 나라고 잘한 것은 없다고 자위했다. 오랜만에 거실에 있는 컴퓨터에 생명

을 넣었다. 며칠동안 열어보지 않은 메일 박스에 50여 통 넘게 이메일이 쌓여 있

었다. 전체를 클릭해 읽어보지도 않고 휴지통에 쓸어 넣으려고 하다가 제목이

이상한 편지를 발견했다.


  회원 대부분이 중년들로 구성된 카페에서 온 공지성 메일인데 휑한 가슴을 채워

주는 모임이니 많이 참석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다음주 화요일 저녁 7시에 먼저

정모를 개최했던 장소였다. 나는 특별히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분명히 남편

도 같은 이메일을 받았을 것 이고 남편 역시 나를 의식해 망설이고 있거나 읽어보

지도 않고 삭제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안 나갈 것이라고 판단하고 남편은 참석할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모임을 주선하는 운영자에게 참석하겠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고 인터넷뱅킹으로

회비 이만 원도 보냈다.


  유니에게 약을 먹이고 영양이 많은 밥을 해서 주었다. 성질이 고약한 주인을 만

나 고생하는 유니에게 괜히 미안했다. 내가 유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유니의

큰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내가 너무 함부로 판단

하고 대한 것 같아 가슴이 아려왔다. 맥없이 고리를 흔드는 유니가 가여웠다.

 

 남편에 대한 일종의 반항 심리에서 비롯된 생각이 결국 애꿎은 유니가 피를 보

았다. 두고두고 유니에게 속죄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 같다.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 때 까지도 남편은 일어나지 못했다. 낮에 마신 술 때문인 것 같았다.


  예정시간보다 30 정도 늦게 모임 장소에 도착 했다. 들어가기 전에 창문을 통해

대충 안을 살펴보았다. 70여명 정도 모인 것 같은데 남자회원이 30여명 정도 되어

보였다. 그중에는 전에 보았던 낯익은 얼굴들이고 꽤 보였다. 여성회원 절반 정도

는 생소한 얼굴들이었다.

 

   다행히 남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30분이 넘어도 안 온 것으로 보아 오늘

은 분명히 모임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다. 평소에 시간을 칼 같이 지키는 그의 성격

으로 보아 오늘은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내가 남자들만 앉아 있는 테이블에 앉자

남자들의 얼굴이 금방 환해 지면서 소주잔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눈 깜작 할 사이

에 내 앞에 소주잔이 여섯 개가 놓였다.


  닉이 흑기사라고 하는 30후반의 남자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며 마치 취조하는
형사처럼 나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려고 무진 애를 섰다.
  “목련님, 아직 미혼이시죠?”


  흑기사의 말에 나는 그렇다고 답변하자 곁에 있던 남자들도 고개를 약간 갸우뚱

거리며 과연 내가 미혼인지 아니면 기혼인지를 속으로 가늠하느라 고민하는 눈치

가 역력해 보였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내가 멍청한 남자들 눈에 아직도 미

스로 보인다는 사실에 괜히 기분이 들떴다. 한 시간쯤 지나자 오늘 모임을 주최한

운영자들 세 명이 일어나 모임의 취지를 설명하고 한명씩 자신의 소개를 하라고

한다.
 

  “목련 입니다. 반가워요. 오늘 기억에 남는 아름답고 의미 있는 밤이었으면 좋

겠습니다.”
  나의 소개 뒤에 대부분의 남자들이 박수를 치며 휘파람을 불기도 했다.


 많은 여자들이 순간적으로 질투심을 나타내는 모습을 나는 포착 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와 달리 진한 색조화장과 미니스커트로 볼륨을 살렸더니 많

은 남자들은 연신 내 뒷모습을 훔쳐보느라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회원들의 소

개가 끝나자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나는 두세 군데 자리를 옮겨 앉으

며 새로 온 회원들의 인상과 기타 정보를 파악하느라 바빴다.


  “어머나, 상당히 미인이세요. 기혼 이신 것 같은데?”
  내 또래 정도 되 보이는 여자 회원이 나에게 술을 따르며 아부성 발언을 했다.

나는 그 여성에게 술을 따르며 접근 했다.


  “오늘 처음이세요? 굉장히 활발하고 매력적이세요?”
  나의 호의에 그 여성은 금세 가슴을 열었다. 부천에 사는데 이런 모임은 몇 번

다녀 보았지만 이렇게 분위기 좋고 멋진 남자들이 많은 모임은 처음이라면서 약간

은 푼수기 있는 제스처를 보였다. 그러자 건너편에 있던 흑기사가 소주병을 들고

 내 앞에 앉더니 잔을 채웠다.


  “목련님, 오늘은 저의 휑하니 뚫린 가슴을 채워 주셔야 합니다.”

  흑기사는 큰 소리로 자신이 나를 점찍었으니 다른 남자회원들은 건드리지 말라고

하는 메시지를 공표했다. 나는 속으로 웃으며 이 남자가 진자로 나를 미혼이나 혹은

이혼녀 쯤으로 보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일었다.


  남자들은 조금만 호의를 보여도 착각을 자유롭게 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기에
신경이 안 쓰일 수 없다. 나는 더 이산 이 대로 있다가 이 남자가 더 강도를 높여
대시해 올 것 같아 신분을 밝혔다.


  “저, 애가 둘인 데요. 흑기사님은 몇 이세요?”
  나의 정면 돌파성 발언에 흑기사는 실망하는 눈빛이 분명했다.
  “요즘은 미스보다 미시가 더 좋은데 어쩌죠? 난 아직 관청에 총각으로 되어 있

습니다만?“  옆에 있던 여자들이 입을 가리며 키득거렸다. 

 

 


 

   -계속-
 

 


 


'* 창작공간 > 단편 - 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씨(최종회)  (0) 2010.12.21
씨(4)  (0) 2010.12.21
씨(2)  (0) 2006.08.09
씨(1)  (0) 2006.08.06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