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2)
- 여강 최재효
내가 산을 찾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첫째로 내 자신 산이 되고 싶
었다. 산은 모든 것을 포용한다. 큰 산 일수록 더 관대하고 수용력도 크다. 주말이나
휴일 집에서 강아지와 TV 그리고 컴퓨터를 끼고 사는 남편에 대한 일종의 반발심리
도 은연중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산에 가면 나무가 되고 산새가 되고 계곡이
되고 이름 모를 꽃들과 잡초도 될 수 있으니 답답한 집보다 백번 낫다고 본다.
둘째로는 산에 가면 존경하는 임들이 계신다. 나는 불자는 아니지만 그동안 명산
(名山)을 찾으면서 발견한 것은 경광이 뛰어 난 산에는 반드시 부처님과 산신령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카필라국의 왕자로 태어나 부와 명예를 초개처럼 버리고
부처가 된 고타마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널리 펼치는 사찰과 암자 그리고 속세를 떠
나 정진하는 스님들이 있고 산신각에 가면 산신령이 계시다. 조용한 산사가 있어
산을 찾는 마음이 늘 설렌다.
세 번째는 환골탈태하기 위하여 산을 찾는다. 전문화 복잡화 집단화 된 사회의
한 부속품이나 다름없는 나 자신이 산을 찾는 시간만큼은 본래의 나를 되찾거나 속
세에 너무 깊이 빠져있는 스스로를 채근하고 또 다른 사유와 탈속(脫俗)을 시도해
보는 일 이다.
그러나 대개가 삼삼오오로 산을 찾는 산사람들에게 여인이 혼자서 산을 찾는 모습
은 별로 유쾌하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혼자서 산을 자주 다닌 탓에 이제는 남의
시선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처음에는 남편과 함께 산을 찾고자 했으나 나와 취향이 전혀 다른 탓에 언젠가는
함께 산행을 할 날이 올 수 있을지 의문하며 늘 집을 나서곤 한다. 건강에 신경을 쓸
중년 이후가 되면 혹 남편이 함께 산을 가자고 할 수 있겠지만 그때는 이미 초보와
고수의 경지의 차에 따른 갈등이 생겨날지 모를 일이다.
마지막 포도주가 알싸하게 속을 태운다. 우습게 보았던 포도주 였지만 상당한 취기
가 오른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으로 보아 빨갛게 변했을 듯싶다. 행여 누가 볼까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다행히 지나가는 산인(山人)들은 보이지 않는다.
유니가 지금쯤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 까 무척 궁금하다. 나는 처음에 남편이
애완견을 사자고 했을 때 수컷을 고집했었다. 그러나 남편은 수컷은 잘 짓지도 않고
사람을 잘 따르지 않는 다는 이상한 논리를 펴 가면 부득불 암컷을 선택했다.
자석의 S극이 S극을 서로 기피하듯 짐승과 인간 사이에도 음양의 조화가 은연중
나타난 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깨달았다. 남편은 유니를 마치 친 자식처럼 귀여워
해주었고 유니도 점차 나보다 남편에게 더 눈길을 주면서 나에게 신경을 쓰이는 존
재로 다가왔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강아지를 끌어안고 희희낙락하는 남편을 볼수록 나는 내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로서 갖는 죄책감에 더 시달리게 되었다. 침대까지 기어 올
라와 남편의 얼굴에 뽀뽀를 해대는 유니에게서 나는 서서히 적대감이 생기기 시작
했고 발정기만 되면 더욱 요란을 떨고 낑낑대는 모습에서 묘한 생각조차 일었다.
상대가 없어 할 수 없이 그냥 발정기를 넘겨야 하는 유니가 어떨 때는불쌍하기도
하지만 만약 상대방을 만나 임신을 할 경우 애완동물로서의 가치보다 뒤치다꺼리가
더 신경이 쓰일 것 같았다.
애 못 낳는 여자가 강아지 새끼에게 우유를 물려주거나 새끼에게 젖을 물려주는
유니의 넉넉한 모습을 안정적인 시각으로 바라 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혹은
짐승의 위치에서 인간으로 착각하여 더 많은 요구 사항이 있을까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많은 생각 끝에 오늘 유니에게 임신할 수 없도록 고통을 안겨 주었지만 마음
은 무겁기만 하다. 내 속내를 들여다 보는 사람이 있다면 나에게 강력하게 항의를
할 것이다.
올 봄 나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회사에서 평소 친하게 지내는 동료 여사원 P의
둘째 아들 돌잔치에서 일어난 일인데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구토증세가 난다.
평소에 조용하던 성격의 P였는데 돌잔치는 나의 P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게 했다.
전무부터 시작해서 회사 내 주요한 임원들과 상당히 많은 동료사원들이 참석하여
P에게 축하의 단어를 쏟아내었고 P는 속으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보였다.
회사동료들과 빙 둘러 앉아 만찬을 즐기는 테이블에서 나는 얼른 일어나고 싶었다.
내가 막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를 대고 테이블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K과장이 나에게 두 번째 돌잔치는 언제 하느냐고 농담 반 비아냥 반 섞인 말
투로 신경을 건드렸다. 나는 뭇들은 체 하고 있었지만 K는 다시 한번 큰 소리로 물어
왔다. 전입 온지 얼마 안돼 내가 아이가 없어 늘 불안해하거나 우울해 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K에게 나는 곧 세 번째 돌잔치를 할 예정이라고 신경질적인 답변을 하고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에서 나는 마침내 참고 있던 설움을 폭발하고 있는데 다른 동료 여직원이
나의 등을 다독 거려주었다. 내가 화장실로 향한 뒤 다른 사원들로부터 나의 사정을
전해들은 K는 몹시 미안해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고 동료는 나에게 전했다.
나는 심한 정신적 충격으로 더 있지 못하고 바로 뷔페를 나와 집으로 향했다. 다음
날 K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그로부터 ‘어제는 내가 미안했다’라는 사과의 말을
듣고 싶었지만 그는 그 후로 아무 말 없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면 나는 습관적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 또한 불편한 모습을 했다.
바람이 불더니 아래 계곡으로부터 안개가 연기처럼 올라왔다. 갑자기 사방이 말
그대로 오리무중(五里霧中)의 상태로 변했다.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여자가 산에서
홀로 술에 취해 비틀거리거나 돌이나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져 모습이 우습게 되어
남들의 웃음거리가 된다면 내 자존심에 상당한 금이 갈 것 이다. 할 수 없이 그냥
앉아서 안개가 걷힐 때 까지 명상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내가 자연 임신에 대한 환상을 접고 있을 즈음 남편이 회사 상사로부터 서울 강남
에서 아주 고명하다는 산부인과를 소개 받았다면서 주말에 날짜를 예약했으니 가보
자고 했다. 나는 거절하였지만 남편의 완강한 요구를 이길 수 없었다. 병원장과 상담,
전신촬영, 혈액검사를 해보았지만 별다른 증상은 없다고 했다.
불임에 대한 원인을 물어보니 환경오염과 스트레스가 주요 원인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답변을 듣고 속으로 웃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병원에서 조제해준
한약을 먹으며 몸 컨디션을 최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평소 손발과
복부가 차가웠던 나는 원만한 혈액순환을 위해 퇴근 후 가사를 마치고 집 근처 공원
에 나가 어둠을 가로지르며 달리기와 마라톤을 병행 하였다.
평소하지 않던 운동을 하니 온몸에 근육이 뭉쳐 거동하기 불편하였고 발톱에 피
멍이 들었지만 아이를 향한 일념으로 겨울을 녹였다. 남편과 함께 운동을 한다면
우리 금슬이 더 좋아질 거라는 기대를 가져 보았지만 남편은 귀가하면 곧 잠자리에
들거나 게임 방으로 직행했다.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을 맞으며 운동을 하는 나에게 달은 나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유일한 벗이었다. 달과 독백을 하고 또 사색을 하며 내면의 나를 만났던 그 시간이
유일한 낙이었고 상쾌함에 젖어 운동을 하루를 빠트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 아이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내 스스로 포기한 것은 아니지
만 ‘ 이 험난한 세상에서의 우리 아이가 잘 자랄 수 잇을까’하는 두려움이 앞 선 것은
사실 이었다. 결혼하여 나의 신변에 이상이 있었다.
시가(媤家)의 환경적응과 홀로 10여년을 객지생활을 하였던 남편의 틀에 박힌 사고
에서 빚어지는 갈등은 나를 더욱 힘겹게 하였고 직장생활과 가사일 까지 겹쳐 혼자
감당하기에 벅차 나의 몸은 나도 모르게 하루 하루 지쳐 스트레스가 누적되어 혼전
정상치였던 혈압이 저기압으로 내려가 있었다.
맞벌이하는 아내로서 남편에게 가사 역할분담을 당당하게 요구를 할 수 있었는데
도 남편의 자발적인 참여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침묵 하였다. 결혼 전 꿈꾸던 TV에
서나 볼 수 있었던 자상한 남편상과 배치되는 현실 속에서 신혼생활의 단꿈을 깨트
리고 싶지 않았다.
한방과 양방을 병행하는 병원을 매월 1회 방문하며 컨디션 상태와 몸의 체온상태
그리고 명상치료를 받아 보았지만 학수고대하던 임신 소식은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
이겠거니 생각하며 기다려 보았지만 아이에 대한 강박관념은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주변에 보이는 사람마다 임산부나 아이들이고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갓난아이들이
귀엽고 사랑스러워 눈길에서 뗄 수 없었다. 남편에게 문제가 있는가 싶어 몇 번씩 병
원에 함께 방문을 하여 검사를 받아 보았지만 별다른 증상은 없다는 답변만 습관처럼
들어야 했다. 불임치료를 받으며 작은 위안은 동병상련을 겪고 있는 직장동료 후배와
간호사와 마음을 나누는 일이었다.
직장동료 후배는 내가 결혼 한 후 1년 뒤 결혼을 하였는데 그 두 내외에게도 바라던
아이가 생기지 않아 후배와 틈틈이 시간을 내며 아픔을 공유하며 울적한 심사를 달래
곤 했다. 나중에 동료들은 내가 걱정이 되는지 지방 어디가면 유명한 사람이 있으니
그곳에 가서 약을 지어 먹으라는 둥 무당에게 굿을 한번 해보라 둥 혼란스러웠다.
주변사람들의 얘기에 흔들리고 싶지 않아 과감하니 물리치고 다니던 한방병원을
고집하였다. 치료를 받으며 금방이라도 아이가 생길 듯싶은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내외에게는 남들처럼 함께 잠만 자도 아이가 생긴다는 행운은 없었다. 다만 남편이
나에게 조금만 자상한 배려가 있다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하는 막연한 아쉬움만 더
했다.
체온계를 재고 배란일을 체크하고 병원을 방문하여 합방일과 시간을 받아와 임신 유
도를 해보았지만 인력으로서는 이룰 수 없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는데 참으로
하늘도 무심하였고 무엇이 원인인지 참으로 알 수 없어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삼신할미에게 아이를 점지받기 위하여 나처럼 피눈물 쏟아가며 혼신의 노력을 하는
주변의 불임 부부들을 보면 나는 애틋함과 어리석음을 생각해본다. 어쩌면 인간의
그와 같은 어리석음을 뒤 늦게 깨달은 나는 최근 들어 인연이란 단어에 대하여 깊게
생각해 보았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도 인연이고 현재의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리게 된 것도 인
연이고 아직 나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은 것도 역시 인연 이며 유미가 우리에게 애
완견으로 입적하게 된 것도 인연이며 내가 자주는 아니지만 산을 찾게 된 것 역시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인연의 끈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인연이 없는 없는 아이를 가져 보겠다고 아둥바둥하는 내 모습에서 나는 쓴웃음을
종종 지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거나 나에게 삼신할미와 인연의 끈이 닿지 않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내 몸의 구조가 남성화 되었거나 겉만 여자지 내면에는 남성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망상도 해본다. 그렇다고 독실한 불자도 아닌 내가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설에 대하여 연구하거나 전적으로 수긍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 세상을 많이 살아 보지 못한 나로서는 오랜 불임에서 느끼는 경우를 단지 인연
의 굴레에서 찾아보고 싶었다. 대학교 3학년 때 나에게 S라는 사람과 인연이 닿았다.
소위 말하는 캠퍼스커플은 아니었지만 그는 아주 자상한 남자였었다. 졸업 후 나는
대기업 무역부에서 일하면서 외국지사나 파견근무를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고
일찍 취업시험에 매달렸다.
군대를 다녀온 S는 늘 아침일 찍 학교에 와 도서관에 내 자리를 맡아 주곤 했다. 다
른 아이들이 끼리끼리 몰려다니며 젊음을 만끽 할 때 나와 S는 도서관에서 이심전심
으로 미래를 개척했다. 그런 그가 4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면서 며칠째 보이지 않았
다. 단지 도서관에서 자리를 맡아주고 하루 종일 책과 시름하며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건네거나 점심을 같이 하는 사이였으며 보이지 않는 일정한 선이 그어져 있었
지만 잔정이 많은 그에게 나는 은연중 사랑의 감정이 싹트고 있음을 느꼈다.
흠이라면 군대에 있을 때 훈련도중 부상을 당해 다리를 다쳐 약간 절고 있다는 사실
뿐 이었다. 일주일이 되어도 S는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을 해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책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같은 학과 학생들에게 주소를 알아
내어 집으로 찾아 가보았지만 하숙을 하던 집 주인은 일주일전 고향에 다녀온 다고
나간 뒤 연락이 없다고 했다.
방에는 S의 옷가지와 책들이 썰렁하게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름이 지나도 S는
도서관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지방에 있는 그의 고향을 찾았
다. 바닷가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았을 때 나는 세상에 태어나 가장 많은 눈물을 뿌려야
했다.
“그 아가 글씨, 즈아부지보다 먼저 용왕님 곁으로 갔구먼.”
S 어머니는 굵게 패인 눈에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뱃
일을 하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다리를 다쳐 누워있자 마침 고향을 다니러 온 S는 아
버지 대신 뱃일을 하다가 배가 뒤집혔지만 몸이 불편한 S는 끝내 탈출하지 못했다
고 했다.
나는 도서관에서 늘 내 자리를 잡아주고 환한 미소를 잃지 않던 S를 한번만이라도
다정하게 대해주거나 흔해 빠진 공원에라도 하루 쯤 놀러가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다.
S를 화장해 뿌린 바닷가를 찾아 나는 대성통곡을 했다. 너무 울다 지친 나를 그의 부모님들은 내 등을 다독여 주었고 나는 더 이상 취업 준비를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어느 해 나의 여름은 눈물로 점철 되었었고 지금도 한 여름이 되면 나는 S를
떠 올린다. 그가 말없이 가고 거의 일년을 자폐증 환자가 되어 혼자 술집을 찾아 S를
지우려고 노력 했지만 그의 미소는 더욱 생생하게 떠올라 나를 자유롭게 해주지 않았
다. 힘들게 대학을 졸업한 나는 일년을 더 쉬다가 직장을 잡았다. 아직도 나는 S의 미
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만약 그가 살아 있었다면 현재의 남편 자리에는 S가 있지 않
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