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1)
- 여강 최재효
평소 산을 찾을 때 만큼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다. 자꾸만 유니의 멀뚱한 눈망울이
시야를 가렸다. 의사에 맡기고 나올 때 유니는 나를 따라오려고 몸부림치는 것을 나
는 야박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쯤 의사의 날카로운 메스에 중요 부위가 잘
려 나가거나 혹은 성(性)의 기능이 마비된 채 마취에 취해 잠들어 있던지 또는 반쯤
잠들어 있으면서 주인의 무자비를 탓하며 치를 떨고 있을 것이다.
내가 유니를 미워해서 그런 것은 분명 아니다. 어쩌면 내가 할 수 없는 능력을 유니
가 가지고 있었기에 나의 질투심이 활화산처럼 폭발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 수도 있
다. 망월사역에 내렸을 때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우산을 써야 할 지
경이 되었다. 그냥 맞고 산에 오르기에는 남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경우가 될
것 같아 우의를 꺼내 쓰기로 했다.
40중반의 남녀가 서로에게 우의를 입혀주며 환하게 웃는다. 나하고 아무런 관련이
없는 그들이지만 괜히 얄미운 생각이 들었다. 나의 지난 친 히스테리일까 생각해보지
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왜 산에 올 때면 십대나 이십대 혹은 삼십 초반의 연인들이
나 단체들은 거의 눈에 뜨이지 않고 불혹을 넘긴 인구들이 산의 주인공이 되는 것일
까 불만에 차서 강하게 반문해 보지만 딱히 해답은 떠오르지 않는다.
자꾸 유니의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망울이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남편은 지금쯤 맥
주를 홀짝거리며 내가 어제 저녁에 빌려다 놓은 ‘개 같은 날의 오후’를 보면서 남성으
로서 태어나기를 잘 했다며 나에게 화살을 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침 일찍 비
가 내릴 것 같은 날씨에도 나는 등산가방을 둘러메고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는 내 뒤통수에 대고 남편은 임 보러가느냐고 비아냥 거렸다. 나는 못 들
은 척 하고 나왔지만 속이 쓰렸다. 아파트 단지를 막 나오려다 유니가 생각났다. 내
가 집에 없는 동안 유니는 남편의 총애를 입을 것이고 나는 유니가 남편의 사랑을 받
는 만큼 저 멀리 떠밀려 날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몇 달 전부터 나는 내 손으로 사온 유니가 눈엣가시처럼 느껴지기 시작 했다.
월말이면 보통 나보다 먼저 집에 도착하는 남편에게 유니는 더없는 귀여움의 대상
이 되었고 밤 11시쯤 퇴근하는 나의 눈치를 슬슬 보면서 꼬리도 흔들지 않았다.
그때 마다 나는 속으로 심한 배신감을 맛보아야 했다. 그 배신의 뒤편에는 당연히
내가 받아야 할 남편의 관심을 대신 독차지하는 유니에 대한 나의 증오심이 자리하
고 있었다. 남편이 유니를 끌어안고 귀여워 하는 표정에서 나는 심한 굴욕을 느꼈다.
‘할 말 있으면 말로 할 것이지......‘
남편의 일방적인 유니에 대한 편애는 더 이상의 인내를 요구했고, 나는 그 인내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유니를 데리고 나왔다. 따라 나오면서도 유니는 자꾸만 남
편을 쳐다보면서 구조 요청이라도 하듯 낑낑댔다. 나의 단호한 표정에 남편은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머쓱해 있었다.
이틀 전 나는 남편에게 유니를 병원에 데리고 가 임신을 할 수 없도록 수술을 받
게 할 거라고 말했다. 남편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발정기만 되면 이리
저리 다니며 집안을 어지럽혀 놓고 주인 말도 잘 듣지 않는다며 유니를 병원에 데리
고 가야하는 어설픈 당위성을 설명했다. 심성이 착한 A형의 남편은 나의 이야기에
고개만 끄덕였다.
빗방울이 점차 가늘어 지더니 망월사가 보이는 능선에 오르자 이슬로 변했고 도봉
산은 선경(仙境)속에 모습을 반쯤 보여 주었다. 상당수 많은 사람들이 도중에 하산을
하였다. 나는 계속해서 더 올라 보기로 했다.
나의 오늘 당초 등산코스를 망월사역에서 출발해 망월사 가는 길 반대편 다리 밑
을 지나 도봉산 입장권 매표소를 통과하여 만월암 뒤 능선을 타고 만장대로 오르는
여자 혼자 등산하기에는 약간 힘든 길을 택했다. 보통 도봉산역에서 출발해 만장봉
이나 신선대를 가는 코스를 택했지만 오늘은 이 코스를 다라 산신령이 되고 싶었다.
내가 세상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결혼하고 삼사년이 조금 지나서
였다. 이전 까지 나의 성격은 쾌활하다 못해 왈가닥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그러한 성격이 하루아침에 변한 것은 그 한마디를 듣고 부터였다.
“죄송하지만 부인께서는 지금 상태로는 임신은 불가능 할 것 같습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새로 태어났다. 나의 성격 나의 외모 나의 주변에 관련 된
모든 인연들 심지어 회사에서의 상하 관께 가지 나는 모든 궤도를 수정해야 했다.
‘아이도 못 낳는 년이 뭐가 잘 났다고......’
나는 서서히 우울증 환자가 되어 갔고 마음의 빗장을 서서히 걸어 닫기 시작했
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자주 결근을 했다.
남편은 그런 나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가며 살피는 눈치였다. 그렇다고해서 남편
이 술을 못 이길 정도로 대취하여 밤늦게 들어오거나 전에 없던 이상한 버릇이 생긴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예전의 내가 아닌 이방인이 되어 버렸다. 내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이야기를 남편을 통해 들은 시어머니는 명절 날 시댁을 찾아가도 전에 며느리를 대하는 대하던 태도가 아니었다.
나는 다시 한번 결혼제도에 대하여 속으로 강하게 성토했다. 남녀가 왜 일정한 나이
가 되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 형제들의 강압에 못 이겨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결혼하면 왜 자식을 만들어야 하는 것인지?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지만 그냥 결혼하지 않고 자식이 필요할 경우 마음에 맞는 남자와 서너 달 살며 아이를 임신하면 헤어지고 아이만 얻으면 왜 안 되는 것인지?
“아가야? 정말로 임신이 안 되는 거니?”
시어머니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나의 가슴을 난도질 했다. 명절 날 시댁에서 이틀
정도 중노동에 시달리고 오면 일주일은 후유증으로 시달려야 했다. 집에서 살림하는 현모양처가 아니기에 후유증은 더 길었다. 작년 추석명절 이후로 나는 시댁과 발길을 끓었다. 올 봄 시어머니의 생신날에도 나는 남편 혼자 시댁에 보내면서 나는 회사에서 연수에 참석 하느라 갈수 없다는 메시지를 시댁에 전해달라는 주문을 했다.
그 후부터 시어머니와 시댁 어른들의 눈초리는 더욱 차가워졌고 남편도 나를 대하는 눈빛이 달라져 갔다. 남편의 정자와 나의 난자가 수정이 안 되는 특별한 이유를 의사는 설명하지 못하고 단지 특별한 케이스라며 계속해서 치료를 받아보라고 했다.
나는 계속해서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식의 후세를 위한 투자를 중단하였다. 가능성이
있는 투자라면 내 등뼈가 휘는 일이 있더라도 하겠지만 특별한 원인도 없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A형의 남편을 B형이나 O형의 남편으로 바꿔보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비 갠 뒤라 길이 상당히 미끄러웠다. 앞서 가던 30중반의 여인이 미끄러지면서 나뒹
굴었다. 웃음이 나왔지만 웃지 못하고 억지로 참아야 했다. 남이 잘 못 된 곳을 보고 웃는 다는 것은 도리상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온 탓일까?
나의 이혼에 대한 결심을 아버님과 어머님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할 수 없다는 친정아버지의 말씀에 나의 결심은 없었던 것으로 돌려야 했다. 남편에게
친정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시다고 핑계를 대고 찾아간 날 밤, 아버지는 어머니로부터
나의 불임에 대한 이야기를 대충 들으시고 낮술을 드셨는지 이미 어량해 있었다.
결혼은 남녀가 부부로서 일심동체가 되는 일이며, 두 집안 어른들 간의 묵시적 계약
이며, 그 계약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파기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며, 비록 자식이 없더라도 부부가 죽어 한 구덩이에 들어가야 할 중대한 인생사이기 때문에 절대로 파경을 용납할 수 없다고 침을 튀기는 아버지의 일장훈시를 열 번도 더 들어야 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친정과도 소원한 관계가 되어 버렸다. 지난 봄 아버지 생신 날 나는 어머니 앞으로 약간의 용돈을 부치고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댔다. 다음날 회사에서 나는 올케로부터 아버지가 하루 종일 나를 생각하시고 눈물을 흘렸다는 전화를 받고 나 역시 하루종일 마음을 달래야 했다.
공식적으로 부부라는 점을 공증받기 위하여 관청에 부부로 이름을 등록하고 한집에서 한 솥밥을 먹고 있기는 하지만 사적으로 부부라고 하기에는 서로에게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뒤로부터는 그냥 허울 좋은 부부로 지내는 것이 좋다는 묵인이 나와 남편사이에 생겨나게 되었다. 한 이불 속에서 섹스하고, 같이 다니고, 같이 회사에 출퇴근 하고, 같이 술 마시고 그러나 미래에 대한 설계는 아직도 각자의 구도가 틀리다는 것은 이미 서로가 확인 한 상태다.
남편도 의사의 최종 판결 이후 후세에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는 눈치다. 일년간은 서울이나 지방에서 유명하다는 산부인과는 모조리 뒤지고 다녔었지만 어느 산부인과 의사도 우리 부부에게 불임에 대한 시원한 답변을 주지 못했다. 아이가 무슨 대수냐고 말 하면서도 가끔 시댁을 다녀오는 남편의 어깨는 늘 축 쳐져있었다.
결혼 5년이 넘어가면서 남편은 히스테리증세까지 보였다. 명절날 우리는 시댁은 물론 친정을 찾지 않게 되었다. 각자의 취미생활을 하거나 배낭하나 둘러메고 동남아나 일본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물론 남편은 방콕을 찾는 다면 나는 홋카이도를 간다. 남편이 태국에 여행에서 돌아오거나 내가 일본에서 새벽녘에 집에 도착하면 우리는 마치 이웃집 마실 다녀 온 사람들처럼 아무 말이 없다.
그것이 편하고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는 처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올 구정 연휴기간에 나는 중국의 유명한 관광지를 다녀왔고 남편은 대만을 관광했다. 물론 같은 행선지를 얼마든지 잡을 수 도 있지만 서로의 생각과 취향이 다르다고 말 할 수 있다. 남편이 주로 도심지를 중심으로 여행코스를 잡는 반면 나는 산이나 바다 온천 휴양지등 자연과 가까이 있는 곳을 찾는다.
올봄에 남편과 나는 잠시 가까워진 적이 있었다. 사이버 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 줄 알았던 남편을 30중반의 친목 카페 모임에서 만난 것이었다. 나는 목련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반면 남편은 마의태자라는 닉네임을 사용하고 있었다. 부부가 한 친목모임에 각자 참석하는 기이한 현상에 나는 웃음이 나올 뻔 했다. 나는 남편과 눈이 맞았지만 모른 척 하기로 했다.
남편 역시 나의 그런 의도를 알고 씩 웃더니 나의 존재를 잊으려는 듯 미시들과 잘 어울렸다. 나를 미혼으로 착각한 마왕이라는 닉을 가진 40초반의 대머리가 약간 벗겨진 남자가 강력하게 대시를 해왔다. 나는 못 이기는 척 그 남자의 대화에 고개를 끄덕여 주고 자주 웃어 주자 그 남자는 내가 자신을 좋아하는 줄 알고 착각하였다.
모임을 주선한 운영자가 2차 장소를 가까운 노래방에 마련하였으니 절대로 가지 말
라며 은근히 엄포성 발언을 하였다. 나는 2차에서의 남편 행동이 궁금했다. 마왕 아저
씨와 서너 명의 중년 아저씨들의 술잔이 나에게 쇄도했다. 중간 중간 남편의 걱정스러
운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그러나 나는 전혀 남편에게 대응하지 않았고 마치 대학시절 미팅에서 만난 남학생들 다루듯 나보다 나이가 많은 중년 남자들을 아이들 다루듯 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약간 휘청거리자 남자 두 명이 좌우에서 나를 보좌했다. 내가 노래방에 가서도 남편을 의식하지 않고 노래를 하며 춤을 추고 분위기를 뜨겁게 달구자 많은 남성들이 유혹의 시선을 보내왔다.
밤늦게 까지 이어진 호프집에서의 3차에서 까지 나는 남편을 철저히 무시했다. 내가
일부러 술 취한 척 하자 남편은 내 옆으로 오더니 ‘목련님’을 연발하며 술이 세다는 둥
매우 고혹적이라는 둥 다른 남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남편의 강력한 대시에 다른 남자
들이 더욱 기세를 올리며 나에게 강한 어필을 할 때 나는 너무 즐거운 나머지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남편은 그 자리에서 나에게 새로운 면을 발견 했다면서 다른 남자들이 안 볼 때 내 술잔을 순식간에 가져가 마셔 버리곤 했다. 나는 그 날 밤 나의 새로운 모습이 내 안에 꿈틀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 밤 우리는 길고긴 꿈을 꾸었고 그 효과는 한 보름정도 이어졌다.
그날 이후 나는 집에 들어오면 컴퓨터를 키지 않았고 남편 역시 컴퓨터와 소원해지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그날 모임이 있은 날부터 서로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느꼈기 때문 아니지 생각해봤다.
만월암 뒤편 너럭바위에 앉아 잠시 쉬고 가려고 능선에서 내려가 보았는데 이미 중년들이 차지하고 앉아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산신각 앞 탁자처럼 만들어 놓은 바위에 앉아 집에서 가져 온 깁밥과 포도주를 꺼내 차려 놓았다. 지나가던 남녀들이 혼자 무슨 청승을 떠느냐는 눈으로 처다 보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산신각의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예의가 아니다 싶어 옆문을 열고 들어가 산신령님께
인사를 올리려고 하였지만 옆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내가 직접 담근 포도주지만 입에
한 모금 넘어가는 순간 속아 싸하고 달콤한 감이 느껴졌다. 설탕을 전혀 쓰지않고 담갔기 때문에 포도의 아로마향이 그대로 속으로 전해지는 듯 했다.
내가 처녀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산에 다닐 때 홀로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속으로 무
슨 청승을 저리 떠느냐고 그들을 나무랐지만 산부인과 의사의 선고가 있은 후 부터 혼자 산을 찾는 습관이 들었다. 마치 오랜 세월 그렇게 해온 사람처럼 일요일이나 연휴 때면 등산가방 하는 덜렁 둘러메고 산을 찾는 산 여자가 되었다. 아니 산신령의 여인이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