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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목

* 창작공간/Essay 모음 2

by 여강 최재효 2006. 5. 20.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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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목(裸 木)





                                                                                                             - 글. 최재효





    갈수록 촛점을 잃어가는 큰형님의 얼굴에는 아직 다하지 못한 생의 의무와 자신이 세상을 떠난후 남아있을 어린자식들에 대한 걱정이 암운(暗雲)처럼 짙게 드리워져있다. 간암말기로 53세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노인이 되어버린 형님.


겨울나무처럼 앙상한 팔등에 날카로운 주사바늘을 통해 생을 이어주는 약물이 흘러들고 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두 번째로 무서워 하면서도 존경하는 분. 물론 첫 번째는 아버지다. 이제 그 형님이 꺼져가는 촛불처럼 시한부 삶을 간신히 이어가고 있다.


삼남 사녀중 여섯번째인 나는 위로 형님 두 분과 누님 세 분을 두고 있다. 큰 누님은 1990년 지병으로 타계하였고, 이제 그 뒤를 큰형님이 이으려하고 있다. 부모보다 앞서 먼저 세상을 버린 자식을 우리의 정서(情緖)는 큰 죄인 취급을 해왔다.


아비 어미 보다 먼저간 자식이 과연 미워서 그랬을까. 죄인처럼 부른데에는 부모가 자식에게 줄 사랑을 미쳐 다 주기도 전에 생의 끈을 놓아버린 야속함과 부모가 늙어 거동을 할 수 없을 때 공양을 하고, 부모중 어느 한 분이 먼저 세상을 떠난후 남아있을 한 분을 돌봐야 할 의무를 버린데 대한 원망이 깔려있기 때문이리라.


“자, 임마 다시한번 따라해봐. 하늘천, 따지...” 초등학교 입학도 하기전의 어린 동생을 앞에 앉혀놓고 호랑이같은 중학생 형은 천자문을 따라 읽으라고 강요를 하고 있다. 공부보다 밖에나가 친구들과 나가 놀 생각이 머리에 꽉찬 동생은 자꾸 대문밖만 쳐다보고 있다.


그렇게 형은 시간 날 때마다 이제 겨우 기역 니은을 아는 남동생을 꿇어 앉히고 무서운 훈장이 된다. 그런 형 덕분에 초등학교 들어갈 때 동생은 이미 한글은 읽고 쓰는데 이골이 나 있었고, 천자문과 영어 기초를 알고 있었다. 초등학교 교재에서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한 동생은 형이 배우는 중고등학교 교과서를 넘보기도 했다. 그런 동생을 형은 대견스러워 하며 장기와 바둑을 가르치며 인내심과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쳤다.


그때 배운 지식의 터전을 발판으로 오늘의 내가 있다. 그런 형님이 얼마남지않은 시간을 아쉬워하며 하루하루를 간신히 이어가고 있다. 지난주 내가 형님을 찾았을 때 형은 나와 함께 갈 곳이 있다며 후둘거리는 다리로 한걸음 한걸음 힘겹게 떼며 병원뒤편에 있는 장례예식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형은 그곳 관계자와 자신의 장례절차에 다하여 이것 저것 꼼꼼하게 물어보고 한참동안 장례예식장을 두루 살폈다.


형은 조만간 자신의 영정사진이 안치 될 장소를 가리키며 꽃이 너무 많아도 문상객들에게 욕을 먹는다며 나에게 검소하게 해야한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형의 말을 듣고 나는 충격과 함께 손수건으로 자주 눈가를 훔쳐야 했다.


형은 정신이 있을 때 자신의 장례준비를 하고 싶은 거였다. 장례예식장앞에 나목(裸木)이 된 은행나무는 초겨울의 하늘을 배경으로 을씨년스럽게 서있다. 바람아 휘감고 가도 잎사귀가 없는 은행나무는 멀뚱히 하늘만 쳐다 볼 뿐이다.



형은 한 그릇 나목이 되가고 있었다. 비록 나무처럼 가을까지 화려하고 원숙한 삶을 살다가지 못하지만 피우다만 나뭇잎을 떼어버리고 스스로 겨울 나무가 되어가고 있다. 게다가 마음까지 비우고 자신의 장례식 때는 너무 요란스럽지 않게 하라고 주문까지 하고 있으니...


곁에서 바라보는 동생의 마음은 남극의 빙산처럼 맥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일남삼녀를 둔 형님은 아직 한 명도 출가를 시키지 못했다. 이제 그 몫을 내가 맡아야 한다. 조카딸들이 아버지 대신 작은아버지 손을 잡고 예식장을 들어가야 하는 미래상황을 생각하다가 울컥 욕지기가 나왔다.

“저 어린 것들을 어떻게 해야하나”


찬바람이 불고 수분이 줄어드는 계절이 되어 더 이상 광합성작용을 할 수 없을 경우 나무는 나뭇잎 밑부분에 떨켜라는 특수조직을 만들어 나뭇잎을 낙엽으로 만들어 자연스럽게 떨구어 버린다. 그러나 형은 찬바람부는 생의 계절을 맞기도전에 억지로 자식들을 낙엽을 만들려 하고있다. 스스로 나목이 되어가고 있는 형의 심정은 오죽하랴.


그런 형을 어찌하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해야하는 동생. 한 배에서 나온 형제는 그렇게 이승과 저승의 서로다른 갈 길을 눈앞에 두고 착찹한 마음을 가다듬고 있다. 나는 그런 형에게서 성자(聖者)같은 느낌을 받았다. 세상에 자신의 장례준비를 마치고 이승을 떠나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조금이라도 더 생을 잇고 싶어서 발버둥치는 비참한 모습이 아닌 이미 세상과 인연이 닿았던 모든 것들과 조용히 이별을 준비하는 형의 모습은 비록 복음 설파하거나 전파하는 성자는 아니지만 이 순간 내 눈에는 형은 성자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장례식장을 다녀온 뒤 형은 가뿐숨을 몰아쉬며 한참을 병상에 누워 휴식을 취했다.


“형님, 내일 또 올께요.” 얼음장 같은 파리한 손을 잡아주자 형은 가늘게 눈을 뜨며 잠깐만 기다리라고 한다. 누워있는 모습은 기록영화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방송에서 봤음직한 아프리카 어느 난민촌에서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의 모습같았다. 한참만에 정신을 가다듬은 형은 간신히 일어나 앉더니 벼개밑에서 무엇인가 주섬주섬 꺼내 놓는다.


그것은 ‘신체기증서약서’였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전통적인 유교가정에서 자란 형님이 사후 자신의 신체를 의학발전을 위해 현재 입원하고 있는 병원에 기증한다는 서약서에 자신이 직접 작성하여 싸인까지 하고 아우에게 보여주고 있다. 나는 다시한번 충격을 받고 한참동안 멍하니 형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서방님, 형님이 이미 결심을 했어요.” 곁에있던 형수가 침묵을 깼다. 형님이 간암 말기판정을 받았을 때 둘째형과 큰형의 사후 장례에 대하여 논의를 했다. 고향 여주에 있는 남한강공원묘지에 모시자고 했었다. 나는 형에게 왜 신체를 기증하려 하느냐고 물었다.


“내가 세상에 나와 마지막으로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내 신체를 의학발전을 위해 기증하는 것이란다. 내 결심을 존중해 다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렸다. 형은 철저히 나목이 되가고 있었다. 마음까지 나목이 된 것도 모자라 몸까지 나목이 되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겨울이 되어도 낙엽을 만들줄 모르는 미련한 나무는 자신이 만든 나뭇잎에 대하여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붙잡고 있다가 결국 겨울바람의 집요한 공세에 항복을 하고만다.


형은 한 그루 성자같은 나목(裸木)이 되어가고 있다.




                                                  2004. 12. 12 일요일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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