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니다. 팔수부인은 왜국 응신왕의 딸로 전지왕이 붕어한 뒤에 목만치와 더불어 백제의 정치를
농단하여 백제를 망국의 길로 접어들게 합니다. 1600여 년 전에 백제 한성(漢城)에서 일어난
희대의 사건을 소설로 엮었습니다. 많은 감상 부탁드립니다.
_()_ 여강 최재효 拜
팔수부인
- 여강 최재효
終
사태가 악화하자 해구는 뒤에서 손뼉을 쳐댔다. 해구뿐만 아니라 해구와 뜻을 같이하는 해씨들은 하나같이 지금의 혼란한 시기를 이용해 그동안 왕비만 배출하던 해씨 가문이 이제는 왕까지도 배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들이 그러한 발칙한 상상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웃 나라 계림의 경우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박혁거세는 진한(辰韓) 12개 연맹 중에서 *사로국(斯盧國)의 6촌장을 휘어잡으며, 왕이 되었다. 이후로 *다파나국(多婆那國) 출신 석탈해가 사로국의 네 번째 왕이 되었고, 그는 김알지를 시림(始林)에서 얻고 난 뒤로 나라 이름을 계림으로 바꾸기도 했다. 이후에 김알지의 7대손인 김미추(金味鄒)가 계림국 13대 왕이 되었다.
수수께끼 같은 계림국의 왕위 계승 절차를 눈여겨본 백제의 왕비족 해씨들은 자신들도 얼마든지 왕을 배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해씨(解氏)의 원조는 해모수(解慕漱)였다.
그는 멸망한 단군조선의 명맥을 잇기 위해 진조선의 제44대 구물단군(丘勿檀君)이 세운 대부여(大扶餘)를 계승하여 웅심산(熊心山) 아래에 도읍지를 정하고 북부여를 개국한 인물이다. 해모수의 둘째 아들은 고진(高辰)이고 그는 고모수(高慕漱)를 낳았다. 고모수가 하백(河伯) 딸 유화(柳花)를 유혹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 아들이 바로 추모왕(鄒牟王) 고주몽이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해주몽이다.
* 사로국 – 신라의 초기 국명(國名)이다. 석탈해이사금 때 김알지를 흰 닭이 우는 시림에서 얻은 뒤로 나라 이름을 사로국에서 계림(鷄林)이라 했다.
* 다파나국 – 석탈해이사금이 태어난 나라로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다파나국이라고 했고, 일연(一然)의 삼국유사는 용성국(龍城國)이라 했다.
‘이제는 내가 나설 차례다. 부여신이나 비유공이 어찌하나 봤더니 그들 역시 구이신이나 다를 바 없이 멍청이들이구나. 오늘 밤 나는 일생일대의 승부수를 던져야겠다. 지금 이 기회를 잡지 못하면 우리 해씨들은 영원히 제2인자에 머물고 말 것이다. 오늘 밤이다. 팔수 년과 부여구이신을 처단하여 나의 오랜 꿈을 이룰 것이다. 두 년놈만 죽이고 궁성을 장악하면 중신들과 왕실은 나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해구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었다.
“별장은 대장들 중 연구돌(燕九乭)과 예수(禰秀) 그리고 목귀자(木貴子)를 빨리 들라 하여라.”
연씨, 예씨, 목씨는 백제 대성8족(大姓八族)에 해당하는 거대 명문이었다. 연구돌, 예수, 목귀자는 백구단 열 명의 대장 중에서 해구가 가장 믿는 자들이었으며, 해구의 의중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일각(一刻)이 채 안 되어 두 사람이 나타났다.
“총수의 부름을 받고 달려왔습니다.”
“우리 백구단에게는 백제의 근간을 흔드는 *난신적자(亂臣賊子)를 색출하여 제거하는 의무가 있다. 난신적자가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절대로 살려두면 안 된다. 한 사람의 잘못으로 나라가 망하고, 만백성이 도탄에 빠지는 꼴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 우리가 팔수가 사육하던 자경대를 박살 낸 지 반년이 지났지만, 구이신은 제 어미의 죄를 벌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다.
더는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다. 지금부터 너희 두 사람에게 백구단의 총수로서 또한 백제국 병관좌평의 자격으로 명령을 내리겠다. 연대장은 검술에 능한 백구단원 스무 명을 선발하여 *한 시진(時辰) 후에 궁성 북문으로 집결하라.
예대장은 활과 표창에 능한 단원 스무 명을 선발하여 역시 북문으로 와라. 내가 정확히 *사경(四更)이 시작되는 시각에 궁성 동문 쪽에서 *명적(鳴鏑)을 한 발 쏘면 두 사람은 각각 단원을 이끌고 어라하의 침전으로 들어 구이신의 목을 취하라. 그자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그자를 죽이는 것은 곧 백제를 구하는 길이다. 우리의 대업을 방해하는 자들은 가차 없이 쳐 죽여라.
목대장은 내일 아침까지 백구단 전원을 완전무장시켜 북산 골짜기에 대기시켜라. 오늘 밤, 일이 잘 처리되면 모든 단원을 궁성으로 출동시킬 것이다. 너희들의 나중 일은 내가 책임질 것이다. 이 순간부터 너희들은 나 이외에 그 누구의 명을 받아서도 안 된다. 너희들 한순간의 선택이 너희와 너희 대대손손에 부귀영화가 따를 것이다. 명심하라. 절대로 흔들리면 안 된다.”
“총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같은 시각 비유공은 국문장에서 해구의 태도를 유심히 지켜보았고 대전에서도 중신들이 팔수부인을 처벌하라는 논리가 해구의 주장과 같다는 점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었다. 해구가 백구단의 총수를 맡고는 있지만, 비유공이 필요시에는 중간 간부들에게 전지(傳旨)를 내려 해구 모르게 별도로 일을 추진할 수도 있었다.
해구가 백구단원 중 주로 해씨들을 활용한다면 비유공은 백씨(苩氏)와 사씨(沙氏) 또는 국씨(國氏) 등을 은밀하게 움직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비유공은 며칠 전부터 밤마다 하늘의 천기(天機)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별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여러 가지 변수를 헤아려 보았다.
* 난신적자 –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와 부모의 뜻을 거스르는 자식
* 시진 – 옛날 시간을 재는 단위로 한 시진은 약 2시간
* 사경 – 새벽 1~3시 사이, 축시(丑時)와 같음
* 명적 – 우는 화살, 순우리말로 울고도리라고 함
“국창(國昌)과 사지신(沙支臣) 대장을 불러라.”
초저녁에 비유공은 심복 두 사람을 불렀다. 그들은 백구단의 중간 간부인 열 명의 대장 중 일부였다. 두 사람이 득달같이 비유공 저택으로 달려왔다.
“비유공, 찾으셨습니까?”
“내가 별자리를 살펴보니 *자미원(紫微垣) 동북 아래쪽에 있는 *태미원(太微垣) 낭위성(郎位星)의 강렬한 살기가 자미원을 향하고 있다. 낭위성은 임금을 경호하는 별인데 자미궁을 침입하려고 한다면, 이는 어라하 신변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징조다. 오늘 밤부터 두 사람은 백구단이 아닌 별도의 장사를 각각 다섯 명씩 데리고 어라하의 침전을 엄호하라. 별고가 생기면 즉시 나에게 알려야 한다.”
“존명(尊命)”
두 사람이 물러가고 비유공은 밖으로 나가 북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점성술에도 일가견(一家見)이 있었다. 고이왕 이후부터 백제의 왕들이 단명하는 경우가 많아지자 비유공은 별들의 움직임을 파악하여 나라의 길흉(吉凶)을 점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점성술을 연구해 왔다. 차갑고 맑은 겨울 하늘에 달도 없이 별들만 초롱초롱 반짝거렸다.
‘자미원 주변에 있는 신하별들이 이상하게 빛을 내고 있는데, 북극성은 반대로 점차 빛이 쇠하고 있다. 자미원 안에 있는 신하별 중에 하늘 감옥에 해당하는 천뢰성(天牢星)도 빛이 밝아지고 있다. 이는 분명히 *하극상(下剋上)의 일이 벌어질 조짐이다. 천뢰성은 잘못을 저지른 중신이나 귀인을 하옥하는 감옥이다.
잘못이 없는 상위층도 강제로 감옥에 넣을 수 있는 자는 조정좌평이나 병관좌평이다. 현재 조정에서 어라하를 위협할 수 있는 무도한 신하는 병관좌평이 유일하다. 그자가 나 모르게 백구단원이나 사병을 움직인다면 나라에 변고가 생긴다. 그런 일이 벌어질 경우 어라하나 나는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자가 야망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때 북산 아래로 큰 별 하나가 길게 꼬리를 매달고 떨어졌다. 비유공은 아무래도 오늘 밤에 무슨 변고가 일어날 게 틀림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복형인 구이신 왕을 지켜야 했다. 궁궐로 국창과 사지신을 보냈지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비유공은 갑주(甲冑)를 걸치고 검술에 능한 심복 열 명을 대동하고 궁성으로 향했다.
* 자미원 – 북극에는 하늘나라 임금인 천제(天帝)가 사는 곳을 자미원(紫微垣)이라 하고 그 중심에 자미궁이 있다. 자미궁은 임금과 왕비, 그리고 태자와 후궁 등 그 가족이 사는 곳이다.
* 태미원 – 자미원의 동북쪽 아래에 있는 영역으로 정부의 각 기구를 뜻한다. 이곳에 재상, 장군 등 중신들을 상징하는 별들이 몰려 있다.
* 하극상 – 계급이나 신분이 낮은 자가 규율이나 법을 무시하고 윗사람을 꺾고 오름.
축시(丑時)가 가까워지자 한성 백제 왕성 북문 쪽에 한 떼의 괴한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모두 검정 옷을 입었고 검은색 복면을 쓴 상태였으며, 손에 병장기를 들고 있었다. 마침 달도 없는 칠흑 같은 밤이지만, 눈이 내려 사물이 희뿌옇게 보였다. 긴장한 괴한들의 눈이 파랗게 빛났다.
“모두 모였으니 지금부터 궁궐 담장을 넘는다. 구이신이 잠든 지밀전은 대전 바로 뒤쪽에 있다. 그곳은 열 명 정도의 병졸들이 지키고 있다. 병졸이나 나인들은 보이는 즉시 죽여라.”
대장인 듯한 자가 괴한들에게 소리쳤다.
“궁사(弓士)들이 먼저 담장을 넘어라. 지밀전 근처에 있는 병졸들이나 궁인들이 보이는 즉시 활이나 표창을 사용해 처치하라.”
이번에는 다른 대장이 괴한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두 대장의 지시가 끝나자 동쪽에서 ‘삐익-’하는 소리를 내며 울고도리 한발이 북쪽을 향해 날아갔다.
“검사들은 나를 따르라.”
“궁사들은 나를 따르라.”
마흔 명의 괴한들이 손쉽게 궁성 북쪽 담장을 넘어 구이신 왕이 침수들어 있는 지밀전으로 접근하였다. 괴한들은 잠시도 머뭇거림 없이 질풍노도처럼 달려갔다
지밀전 근처에는 이미 비유공이 보낸 국창과 사지신 대장이 각자 수하 다섯 명씩 거느리고 은신하고 있었다. 두 대장과 일행은 모두 12명인데 비해 괴한들은 40여 명이 넘었다. 또한, 괴한들은 활을 지니고 있었다.
“앗, 대장님, 저기 검은 물체들이 이리 다가오고 있습니다.”
국창과 사지신은 두 눈을 부릅뜨고 수하가 가리키는 곳을 살펴보았다. 지밀전 주변 사방에 밤을 밝히는 대형 등불이 설치되어 있어 지밀전으로 접근하는 물체의 윤곽을 어느 정도는 분별할 수 있었다.
“과연, 과연 비유공은 귀신같은 분이시다. 궁성에 괴한들이 난입할 것을 알아내시다니, 과연 영걸이 분명하다.”
국창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국대장, 저놈들은 어라하를 해치려고 난입한 놈들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저놈들이 우리보다 훨씬 많은 것 같습니다.”
“많고 적음이 무슨 소용이오? 우리는 목숨을 걸고 어라하를 지켜야 합니다. 모두 일(一)자 수비대형으로 포진하여 저놈들을 대적합시다.”
백제의 도읍지 한성의 겨울밤은 차가웠지만 너무나 고요하고 쾌적했다. 낮에 한차례 눈이 내리다 그쳤다. 부여구이신이 백제의 왕위에 앉은 지 일곱 해가 지나가고 있었다. 만약 그가 조금만 더 나이가 있었더라면 생모인 팔수부인이 수렴청정하지 않았을 것이고, 목만치란 무도한 자가 백제의 국정을 농단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구이신 왕은 아직 미장가였다. 어머니 팔수부인이 친정인 왜국에서 그녀의 큰조카인 리추왕(履中王)의 딸 나카시노(中磯)를 구이신 왕의 배필로 맞이하려고 했으나, 자신의 애욕 문제로 지지부진했다. 청년왕 구이신은 지밀전에서 늦은 밤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리따운 나인이 시중을 들려고 했으나, 왕은 나인을 내보내고 독작(獨酌)을 하면서 만 가지 잡념에 사로잡혔다.
‘국왕의 자리가 이렇게 외롭고 피곤한 자리였다면, 차라리 신체 강건하고 똑똑한 비유 아우에게 양위하는 편이 좋겠다. 나는 심신이 한계에 달해 더는 백제라는 제국을 이끌어 나가기에 너무 힘이 든다. 요즘에는 아침저녁으로 토혈(吐血)을 하고, 하루 한 끼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처지다.
이 나라에서 누가 나의 이러한 사정을 알고 있단 말인가?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 게다가 백관(百官)은 반년이 넘도록 매일같이 어머니를 처벌하라고 협박을 한다. 그러나 아무리 어머니가 중대한 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아들인 내가 어찌 처벌할 수 있단 말인가? 난, 난 죽어도 그리할 수 없다.’
구이신 왕은 초저녁부터 홀로 마신 술에 대취하여 인사불성이 될 정도였다. 지난번 북산의 자경대 사건이 있는 뒤로 왕은 팔수부인과 관계도 소원해지고 말았다. 평소 같으면 하루에 두세 차례 팔수부인이 대전에 들러 구이신 왕과 다과를 나누거나 덕담을 하던 일도 중단되었다. 모자지간이 차츰 서름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구이신 왕은 중신들의 요구를 무시하는데,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을 낳은 생모라 하여도 범죄사실이 명백한 이상 그냥 둘 수는 없는 처지였다. 그렇다고 중신들의 요구에 따라 어머니를 처형하거나 왜나라로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황촛불이 은은한 불빛을 지밀전 안에 가득 채우며 타고 있었다.
‘어머니를 어찌해야 하나? 증좌가 있으니 어머니가 아무리 무죄를 주장하여도 중신들은 믿지도 않거니와 나까지 어머니를 비호하는 못난 왕으로 싸잡아 비난하고 있다. 당분간 외가인 왜국 왕실에 머물다 국내 사정이 잠잠해지면 오시라고 할까? 아니면 죄를 인정하고 명목상 이삼 개월 정도 감옥에 앉아 계시라고 할까? 아, 둘 다 아들로서 할 수 없는 일이다.’
구이신 왕이 비몽사몽 같은 상태에서 혼자 지청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관 한 명이 지밀전으로 뛰어 들어왔다.
“어라하, 어서, 어서 피하십시오. 괴한들이 난입하여 수직병(守直兵)과 혈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들이 곧 이리로 들이닥칠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야? 나는 백제의 왕이다. 누가 감히 왕에게 위해를 끼치려 한단 말이냐? 헛소리하지 말고 물러가거라. 아니다. 술을 더 가져오너라.”
“어라하, 정신 차리십시오.”
내관은 구이신 왕이 대취하여 말이 통하지 않자 대취한 왕을 들춰업고 지밀전을 뛰쳐나갔다. 지밀전을 나가자 괴한들이 지밀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내관은 구이신 왕을 업고 다시 지밀전 안으로 들어갔다. 지밀전 안에는 숨을 곳이 없었다. 지밀전 밖에서는 나인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윽고 지밀전 안팎의 모든 병사와 궁인들을 처치한 괴한들이 지밀전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비유공이 파견한 12명의 장사를 어렵게 제압하고 수직 병사와 나인들도 모조리 죽여버렸다. 내관 한 명을 제외하고 지밀전을 지키는 병사나 궁인은 한 명도 없었다.
“구이신이다. 빨리 저놈의 목을 취하라.”
“이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침입하였느냐? 어서 썩 물러가거라.”
내관이 괴한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때 괴한 한 명이 칼을 휘두르자 내관의 목이 뎅겅 떨어지고 그의 몸통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며, 구이신 왕의 얼굴에 튀었다. 피를 뒤집어쓴 구이신 왕은 아직도 대취한 상태로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구이신의 목을 쳐라.”
대장인 듯한 자가 명령을 내리자 칼이 또 춤을 추었다. 열여섯 살에 백제 제19대 왕에 즉위한 부여구이신은 재위 7년 9개월이 되는 12월에 *시해되고 말았다. 아신왕이 재위 12년 만에 붕어하였고, 전지왕은 재위 14년 만에 훙서하였으며, 그의 아들 부여구이신은 23살 꽃 같은 나이에 급서하였다. 괴한들이 구이신 왕의 머리를 취하여 막 나오려던 순간이었다.
“나는 백구단의 주인 부여비유다. 너희들의 행동을 보니 모두 백구단원이로구나. 그 보자기에 쌓인 것은 어라하의 목이 맞을 터, 그간의 공로를 감안해서 너희들의 죄를 용서하겠다. 어서, 어라하의 목과 병장기를 내려놓고 조용히 궁성을 빠져나가라. 백구단의 주인으로 하는 명령이다. 불복하는 자는 즉시 참수하겠다.”
괴한들은 혼란스러운 듯 멈칫거렸다. 그들은 총수인 해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아니면 백구단 주인인 비유공의 명령을 따라야 할지 갈팡질팡했다. 괴한들의 숫자가 반으로 줄어 있었다. 궁궐 담장을 넘어 지밀전에 접근할 때 비유공이 보낸 장사들과 접전을 벌였고, 이어서 수직 병사들과 혈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상당수가 희생되어 반수로 줄어든 것이었다. 그때 괴한 중 한 사람이 소리쳤다.
*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 백제본기 구이신왕편에는 八年 冬十二月 王薨(8년 동12월 왕훙)이라고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총수께서 그 누구의 말을 들으면 안 된다고 했다. 우리는 오로지 총수 말만 따라야 살 수 있다. 우리 앞을 막는 자는 누구든 처단해야 한다.”
“이놈, 단원주제에 감히 주인의 명령을 거역할 셈이냐?”
비유공이 칼을 빼 들고 소리쳤다.
“우리는 빨리 왕의 수급을 가지고 여기를 떠나야 한다. 빨리 나가자.”
대장인 듯한 괴한이 비유공에게 달려들었으나, 비유공이 휘두르는 환도(環刀)에 그만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 괴한들은 이미 상당히 지친 상태였고, 비유공 일행은 모두 검술의 달인이었다. 지밀전에 비상사태가 일어났음을 감지한 궁성 수비 병사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나는 백구단의 주인이다. 나의 명령 없이 누가 너희들에게 어라하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는지 모르지만, 병장기를 내려놓고 투항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비유공의 말에 십여 명이 병장기를 내려놓았고 나머지는 끝까지 비유공 일행에게 대항하다 모두 피살되고 말았다.
“수비대장은 저자들을 옥에 가두고 지금 즉시 조정의 대소신료들을 입궐하라 통보하고, 궁성 문을 모두 닫고 병관좌평 해구를 체포하라, 또한, 평소에 해구와 가까이 지내던 자들도 모두 잡아들여라.”
비상시국이 된 지금 왕이 아우인 비유공의 명을 누구도 거절할 수 없었다. 투항한 자들은 일단 모두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비유공은 심복에게 감옥에 갇힌 단원들을 회유하여 자신들은 백구단과 아무런 상관이 없고 해구가 고용한 용병이라고 말하도록 했다. 또한, 수비대장에게 심복 두 명을 딸려보내 해구가 체포되면 그의 혀를 잘라버리게 했다. 비유공은 구이신 왕의 목을 지밀전에 있는 신체와 합쳐놓고 팔수부인이 머무는 전각으로 달려갔다.
비유공으로부터 사태의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팔수부인은 혼절하였다. 일각이 지나고 깨어난 팔수부인은 비유공의 말을 반신반의하다가 구이신 왕의 시신이 있는 지밀전으로 달려갔다. 아들의 참혹한 죽음을 목격한 팔수부인은 대성통곡하며 몸부림쳤다. 상좌평 부여신(扶餘信)과 내법좌평 해수(解須)가 혼비백산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어라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도대체 누가 어라하를 이리 만들었습니까?”
팔수부인은 곁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싸늘하게 식어버린 아들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지밀전이 떠나가도록 통곡했다. 자신의 음욕(淫慾)과 탐욕(貪慾)이 빚어낸 결과를 그녀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듯 했다. 중신들이 하나둘 지밀전으로 모여들었다.
“비유공, 병관좌평을 체포하여 압송하였습니다.”
궁궐 수비대장이 비유공에게 보고하였다.
“그자를 재갈을 물려 감옥에 가둬라.”
사태의 경위를 파악한 상좌평 부여신이 중신들을 대전으로 모이게 하였다. 뒤늦게 입궐한 신료들은 아직도 궐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대궐 안이 어수선하여 마치 난리라도 난 것 같았다. 궁인들을 여기저기 모여 귓속말로 소곤거렸고, 궁성을 수비하는 병사들은 간밤에 일어난 일을 대강은 파악한 뒤라 입을 꾹 다물고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난밤 사경이 조금 넘은 시각에 애석하게도 부여구이신 어라하께서 궁궐 담장을 넘어온 자객들의 손에 시해되셨습니다. 이에, 지금, 이 순간부터 나와 비유공이 국가 비상시국을 맞이하여 국왕의 권한을 분담하여 국사를 처리하겠소이다. 이번 흉사는 병관좌평 해구가 권력을 탐하여 벌인 일로 어느 정도 판명되었습니다. 그자를 신문하여 세부적인 범죄사실을 조사할 것입니다. 또한, 국왕의 자리는 잠시도 공석이 되면 안 됩니다. 금일중으로 육좌평과 왕실 인사로 구성된 귀족 회의를 열어 차기 어라하를 선출하도록 하겠습니다.”
부여신의 발표에 대소신료들은 웅성거렸다. 신료 중 일부는 상좌평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비유공을 의심하였다. 그러나 신료 대부분은 해구가 권력에 욕심이 많다는 것과 비유공이 구이신 왕과 사이가 돈독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비유공이 애초 백구단이라는 비밀결사를 결성한 것은 팔수부인과 목만치의 전횡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총수를 맡은 해구가 나라의 안녕을 위해 사용해야 할 백구단의 저력을 자신의 권력을 탈취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려다 오히려 그 자신이 제물이 되고 말았다. 한성 저잣거리에 순식간에 구이신 왕의 붕어 소식이 전파되었다. 백성들은 모여서 웅성거리며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수습될 것인지 관심을 보였다.
“해구가 언젠가는 큰일을 낼 줄 알았어. 전지어라하 때부터 줄곧 병권을 쥐고 있더니 간이 부은 게야. 심성 고운 구이신 어라하만 불쌍하게 되었어.”
“해구와 가깝게 지내던 인사들도 몽땅 잡혀갔다면서요?”
“진씨(眞氏)들이 판칠 때 끽소리도 못하던 놈들이 권세를 얻더니 모두 안하무인이 되었지. 잘되었어. 이참에 그놈들을 모두 조정에서 내쫓아야 해. 그래야 나라가 조용해진다고.”
“전지어라하께서 해씨들의 도움을 받아 등극한 것부터 잘못되었다고. 이제는 해씨와 진씨라면 징글징글해. 백제 대성팔족(大姓八族) 중에 연씨, 국씨, 사택씨(沙宅氏), 목례씨(木刕氏), 예씨(禰氏) 등이 있으니, 그들을 중용해서 물갈이를 해야 해.”
“맞아요. 앞으로는 왜국이나 가야 또는 고구려 같은 나라에서 왕비를 들이면 안 된다고요. 팔수부인이 왜인이다 보니 이십 년 넘게 백제에 살았어도 백제말을 잘 모른다고 합니다. 하루 세끼도 화식(和食)을 먹고 옷도 왜색풍의 옷만 입는다고 하니, 그런 여자가 무슨 국모와 태후의 자격이 있겠어요?”
“구이신어라하가 변을 당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여자 때문입니다. 목만치를 불러들이지 않고 수렴청정을 잘하다가 아드님에게 넘겼더라면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귀족 회의에서는 차기 백제왕을 선정하기 위한 절차에 돌입했다. 상좌평을 포함하여 좌평 7명, 비유공을 제외한 왕실 인사 7명, 대성 8족 중 해씨와 진씨를 제외한 인사 6명 등 모두 스무 명이 귀족 회의 임원에 뽑혔다. 귀족 회의 의장은 전지왕의 아우이며 상좌평인 부여신이 맡았다.
그러나 차기 왕은 거의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구이신 왕의 이복 아우인 비유공 이외에 왕족인 부여씨 중에 특출한 인물이 없었다. 귀족 회의 임원들은 금일중으로 차기 왕을 선정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조급함에 회의를 거듭하였다. 회의를 열 때마다 비유공의 입지는 더욱 확고부동해졌다.
“해구는 체포하는 과정에서 입을 다쳐 말을 하지 못해 대신 사관부의 장교들이 *공사(供辭)를 받았습니다. 그자의 자백을 보면 자신은 어라하를 시해하라고 지시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매를 치고 인두로 등을 지져도 그는 절대로 자신이 지시한 게 아니라고 잡아떼고 있습니다. 지난밤 지밀전에 침입했다 붙잡힌 자들과 대질신문했더니, 그제야 시인합디다.”
조정좌평이 귀족 회의에서 해구가 자백한 내용을 공개했다.
“비유공께서 군사를 거느리고 지밀전으로 달려가 괴한들을 제압했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더 큰 화를 당할 뻔했습니다.”
“비유공이 아니었더라면 팔수부인이나 왕실 인사들 상당수가 괴한들 손에 목숨을 잃었을 겁니다. 모두 비유공의 선견지명에 고마워해야 합니다.”
“비유공이 대안입니다. 왕실에 비유공만 한 인재가 없어요.”
* 공사 – 죄인을 문초하거나 신문해서 얻은 자백을 기록한 문서
스무 명의 위원 중에 두세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가 비유공을 차기 백제의 군주로 뽑는 데 찬성하였다. 부여비유(扶餘毗有)는 제20대 백제국 왕에 선정되었다. 왕은 풍신이 칠칠하고 선풍도골이며, 언변이 뛰어났다. 전지왕의 서자로 태어나 구이신 왕의 뒤에서 조정일을 도왔다. 또한, 백성들에게 인품이 고매하고 인정이 많은 왕제(王弟)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비유공이 백제 왕에 즉위하면서 구이신 왕을 양지바른 곳에 장사지내고, 시해 사건에 가담한 자들은 죄의 경중(輕重)에 따라 참수되거나 원지에 유배되었다. 팔수부인의 자경단을 이끌던 진가도와 연무상은 매를 맞고 방면되었고, 해구는 절해고도로 유배되었다. 왕은 임나로 군사를 보내 목만치를 체포하라고 했지만, 그는 이미 임나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비유왕이 등극하면서 정치적 보복은 없었다. 팔수부인은 명분상 어머니이기 때문에 일단 자숙의 시간을 갖게 했다. 왕은 해씨와 진씨 그리고 나머지 대성8족 중에서 인재가 있으면 과감하게 등용했다. 비유왕은 생모는 전지왕의 후궁 해씨였다. 자신의 의지 때문에 만들어졌던 백구단원은 모두 정규군사로 편입되었으며. 심복들은 중앙군의 주요 요직에 포진시켰다.
비유왕의 등극 소식을 접한 왜왕 인교(允恭)은 축하사절단 50명을 파견하면서 금은보화를 바리바리 챙겨 보냈다. 왜왕이 대규모 축하사절단을 보낸 이유는 그의 고모 팔수부인을 왜국으로 무사히 보내 달라는 의미였다.
“어라하, 고맙습니다. 백제의 왕비로서 처신을 바르게 하지 못해 아들을 죽게 했습니다. 부디, 성군이 되시어 명성이 자손만대에 빛나시기 바랍니다. 이 몸은 어라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를 입고 왜국으로 돌아갑니다. 고맙습니다.”
팔수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비유왕에게 큰절을 하였다. 비유왕이 마음만 악하게 먹었더라면 팔수부인은 능지처참 형을 당했을 수도 있었다. 비유왕은 백제와 왜국의 오랜 외교적 우호 관계를 고려하여 팔수부인을 왜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녀가 왜국으로 돌아가자 한성은 오랜만에 평화가 찾아왔다.
왕이 등극하는 날 서설(瑞雪)이 내려 한성이 온통 설백의 세상이 되었다. 백성들은 모두 저잣거리로 몰려나와 비유왕의 등극을 환호하며 만세를 외쳤다. 전국의 모든 감옥에 갇혀있는 죄수 중 강상(綱常)의 죄를 지은 자를 제외한 모든 죄인을 방면했다. 또한, 당분간은 백성들을 동원하는 힘든 공역(公役)을 중지시키고, 세금을 감면하거나 받지 않도록 조치했다.
“하타(八田), 보고 싶었소.”
“국사님, 저 역시 국사님이 그리워 단 하룻밤도 편하게 잠자지 못했답니다. 이제 우리 헤어지지 말아요. 백제에서 보낸 지난 20년 세월이 춘몽(春夢) 같아요.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아요.”
왜국은 팔수부인의 생부인 오진왕(應神王)이 죽고 그의 손자 인교왕(允恭王)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팔수는 인교왕의 아버지 닌도쿠왕(仁德王)의 동생으로 왜왕의 고모였다. 인교왕이 거주하는 야마토의 도읍지 나라(奈良)에 있는 궁궐 토오츠아스카노미야(遠飛鳥宮) 한쪽에 다시 왜국 황녀의 신분으로 돌아온 하타가 사는 저택이 있었다.
목만치는 한성에서 백구단원들에게 한쪽 팔이 잘리는 수모를 겪은 뒤 임나로 내려가 가산을 정리하여 왜국으로 건너갔다. 인교왕과 목만치는 오랜 친분이 있었다. 목만치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인교왕은 그의 고모를 생각해 그에게 벼슬을 내려 왜국에 살게 했다. 하타는 자주 북쪽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신의 패덕(悖德)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아들 부여 구이심을 생각하며 눈물을 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