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니다. 팔수부인은 왜국 응신왕의 딸로 전지왕이 붕어한 뒤에 목만치와 더불어 백제의 정치를
농단하여 백제를 망국의 길로 접어들게 합니다. 1600여 년 전에 백제 한성(漢城)에서 일어난
희대의 사건을 소설로 엮었습니다. 많은 감상 부탁드립니다.
_()_ 여강 최재효 拜
팔수부인
- 여강 최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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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서 사건으로 한성(漢城)은 벌집 쑤셔놓은 꼴이 되고 말았다. 조정의 대소신료들은 벽서 내용을 대체로 수긍하는 부류와 그렇지 않은 파로 분류되었다. 벽서 내용을 수긍하는 부류는 해씨(解氏)들과 양심 있는 일부 진씨(眞氏)들 그리고 왕실에서는 팔수부인과 목만치의 전횡(專橫)을 용납하지 못하는 인사들이었다. 반면에 벽서를 제작한 백구단을 비난하는 자들은 팔수부인과 목만치에게 빌붙어 잇속을 차리는 활리(猾吏)들이었다.
그들은 주로 왜국을 드나들거나 임나와 연관이 되는 업무를 다루는 기관에 소속되어 있었다. 팔수부인과 목만치는 자신들을 비난하거나 경고하는 벽서를 처음 접하는 일이라,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우두망찰 전전긍긍했다.
한성의 저잣거리는 조정보다 더 시끄러웠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면 으레 벽서가 화제가 되었다. 숫백성들은 팔수부인의 생활에 대하여 자세히 몰랐지만, 이번 벽서 사건을 계기로 그녀에 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항간에서는 팔수부인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주루(酒樓)나 주막에는 팔수부인의 이야기가 단골 안주가 되어버렸다. 빨래터는 아낙들이 모이면 빨래할 생각은 안 하고 오로지 팔수부인과 목만치 관련한 이야기로 수다를 떨었다. 이제는 한성의 남녀노소는 물론 지나가는 개들도 팔수부인과 목만치의 추문(醜聞)을 알고 있을 정도였다.
“팔수의 참월한 생활은 도가 지나쳐도 한참 지나쳤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목만치는 하루빨리 백제 조정에서 사라져야 할 인물입니다. 그 두 사람이 백제의 신성한 국격(國格)을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내가 진(晉)나라에 사신으로 갔는데, 그곳 사람들조차도 팔수부인과 목만치의 관계를 알고 있더군요. 나는 너무 창피하여 고개도 들지 못하고 다녔습니다. 이제 그 두 연놈을 제거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 연놈을 처단하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팔수의 뒤에는 왜국에서 파견 나온 칼잡이들이 있습니다. 사실 그들은 왜국 왕이 보낸 첩자로 일당백 하는 검술의 달인들이라 합니다. 열 명을 없애려면 천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야 하는 계산이 나옵니다.”
“우리 백구단에도 무예에 능한 무사들이 꽤 있습니다. 또한, 백제에서 내로라하는 살수(殺手)들을 고용하여 왜놈 무사들을 죽여버리는 방법도 있습니다. 일단 그놈들부터 없애야 합니다.”
해씨들이 주축이 되어 움직이는 백구단은 벽서를 본 사람들의 반응이 예상외로 뜨거워지자 간부들은 고무되어 있었다. 그들은 벽서로 협박만 할 것이 아니라 자객을 파견하여 먼저 왜인 무사들부터 죽이자고 했다. 그러나 백구단의 총수인 해구(解丘)는 동료들이 뭐라고 떠들든 무척 조심스러웠다.
비밀결사인 백구단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모든 일이 수포가 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뜻한 바도 허사가 될까 우려했다. 그는 부여비유를 주군(主君)으로 옹립하기 위하여 백구단의 총수가 되었지만, 더 큰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해구는 야망이 있는 자였다. 선대 전지왕 때부터 병관좌평을 맡으면서 백제의 군사를 움직이는 막강한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었다. 팔수부인과 목만치가 아무리 전횡을 일삼고 있지만, 그들은 군권만큼은 해구에게서 거두어들이지 못했다. 해씨들이 주요 기관에 포진하고 있어 만약 팔수부인과 목만치가 강제로 해구의 군권을 거두려 하면 자칫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해구가 팔수부인과 목만치의 전횡을 눈 감고 있는 이유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군권이 너무 막대하기 때문이었다. 해구가 독한 마음을 먹으면 부여씨 왕조를 뒤엎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해구는 겉으로는 부여비유를 위한 일을 하는 척했다.
“태후, 이번 벽서사건은 해씨들의 소행이 분명합니다. 이놈들이 나와 부인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목만치가 벽서를 들여다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증좌가 없으니 심증만으로는 속단할 수 없어요.”
팔수부인 역시 벽서에 적힌 구미호가 자신을 지목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정황이나 물증이 없으니, 함부로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말을 잘못했다가 불의의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놈들은 선대 전지왕을 보위에 올리는 데 공을 세웠다 하여 늘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다가 내가 국사가 된 뒤로 그놈들을 하나둘 숙청을 하니 불만이 많은 게지요. 이참에 해씨 놈들을 조정에서 모두 축출해야 합니다.”
“국사, 해씨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백제를 오랜 세월 좌지우지했던 진씨 세력들이 벽서사건을 일으켰을 수도 있습니다. 속단은 금물입니다. 해서, 나는 나를 따르는 조정 중신들과 다케다를 시켜 이번에 벽서 사건을 일으킨 백구단의 정체를 알아보게 할 계획입니다.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한 후에 우리가 움직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초저녁부터 팔수부인은 목만치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케다도 합석하였다. 목만치가 오랫동안 임나에 있다 돌아오자 팔수부인은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목만치는 돌아오자마자 벽서를 보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백구단이라는 집단이 자신을 죽이겠다고 공공연히 언급한 것에 대하여 그는 두려움과 분노를 느꼈다. 그는 아버지 목라근자의 음덕(蔭德)을 지나칠 정도로 많이 입고 있었다. 목라근자와 비교하면 목만치는 이렇다 할 공을 세운 것이 없었다.
“황녀님, 어떤 방법으로 백구단의 정체를 알아보실 계획입니까?”
“조정에 나의 말이라면 죽는시늉하는 자들과 다케다상이 은밀하게 조사를 해주세요. 해씨들 아니면 우리 두 사람에게 불만을 가진 진씨들이 백구단의 배후일 것입니다. 보름 안으로 백구단의 실체를 밝혀내세요.”
팔수부인은 다케다에게 조정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자들의 명단을 건넸다. 그 명단에는 진씨를 비롯하여 해씨도 일부 있었고, 국(國)씨, 사택(沙宅)씨, 목(木)씨 등도 상당수 있었다. 대개가 그녀와 통정한 사내들이었다.
“당장 오늘 밤부터 제자들을 풀어 한성의 주요 장소를 다니며 백구단을 수소문해보겠습니다.”
“좋아요. 역시 다케다상은 믿음직합니다. 처음에 한성에 올 때보다 더욱 건강해 보입니다. 낮에 내가 무척 한가합니다. 가끔 오셔서 차나 술이라도 한 잔씩 하세요. 요즘은 더욱 무료하답니다. 자, 우선 술을 받아요.”
팔수부인은 곁에 목만치가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케다에게 가드락가드락하며 농을 걸었다. 그녀는 목만치가 임나에 수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무릉도원 같은 저택에서 온갖 호사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가 임나를 다녀오면 보통 한두 달 동안은 팔수부인과 상합(相合)을 피했다.
그러나 다케다가 한성에 오고부터는 그녀는 목만치에게 연연해 하지 않았다. 다케다 역시 정력적인 사내였다, 그녀는 목만치가 궁성에 없을 때 다케다나 다른 사내들을 불러 은밀하게 합방하는 행위에 짜릿함을 느끼곤 했다.
“소신은 황녀님을 위한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역시, 아버님은 사람 보시는 눈이 있으셔. 이것은 내가 다케다상에게 내리는 선물이니 받아두세요. 수하를 거느리면 돈이 필요할 것입니다.”
팔수부인은 금괴가 든 상자를 다케다에게 건넸다. 그녀에게 황금은 돌덩이처럼 흔한 물건이었다.
“부인, 우리도 세를 규합해야 합니다. 다케다상과 그의 수하들은 물론 부인을 따르는 자들과 나의 수하들을 모아 백구단을 대적할 단체를 구성해야 안심이 될 것 같습니다.”
목만치가 팔수부인의 눈치를 살폈다.
“그 일은 국사님과 다케다상이 상의해서 추진해보세요. 나는 비용을 대겠습니다. 될 수 있으면 빨리 만드세요. 벽서를 보면 당장이라도 백구단들이 들이닥칠 것만 같습니다.”
팔수부인은 두 사내를 좌우에 앉히고 밤늦도록 술을 마셔댔다. 나인들은 깊은 밤까지 세 사람이 마시고 먹어대는 술과 안주를 준비하느라 바삐 움직여야 했다. *삼경(三更)이 되어서야 술자리는 파했지만, 팔수부인은 두 사내를 계속 내실에 머물게 했다. 팔수부인이 두 사내와 내실에 들어 술을 마실 때부터 나인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보통 한 사내와 합방을 하기 위한 절차로 술자리를 하는 것이 예사였는데, 오늘 밤은 상대가 두 명이나 되었다. 삼경이 지나면 두 사내 중 한 명이 돌아가야 정상이지만 두 사내는 계속해서 내실에 머물렀다.
“언니, 참으로 이상해요.”
“뭐가 이상하다는 거니?”
팔수부인 처소의 나인들은 이제나저제나 다케다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삼경이 훨씬 지나도록 내실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언니, 목만치 국사님이 오랜만에 태후님 처소에 들었으니, 오늘 밤도 질펀한 방사(房事)가 있을 거 아니유? 그런데 눈치 없는 다케다는 왜 안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너는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구나. 합기(合氣)는 꼭 두 사람이 하라는 법은 없는 거 아니니? 태후님의 기괴한 취미와 특이한 성정을 나 말고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거야. 너희들도 잘 봐둬. 나중에 유용하게 써먹을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왜국의 오묘한 풍속은 우리들의 평범한 상상을 깨는 일이 많아서 알다가도 모르겠어.”
“어머나, 어머나. 그럼, 태후님이 두 사내와 그 일을……. 왜국(倭國)에서는 그런 일이 자연스러운가 보네요. 어휴-, 짐승들 같아요.”
“쉿-, 오늘 밤 있던 일이 밖으로 새어나가면 너와 나는 죽은 목숨이다. 입을 조심해야 한다. 알았지?”
* 삼경 – 새벽 1시~ 3시 사이
팔수의 처소는 사방이 쥐 죽은 듯 교교했다. 두 고참 나인이 다른 궁인과 나인들을 모두 내보내고 수직(守直)을 섰다.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두 나인은 은은하게 불이 켜져 있는 내실에 신경을 집중하며, 잡인의 접근이 있을까 걱정되어 밤새 팔수부인의 처소 주변을 바장였다. 두 나인은 이따금 들려오는 이상한 심음(呻吟)의 실체를 파악하느라 상상의 나래를 펼쳐야 했다.
여인의 교성이 한번 길게 울려 퍼지면 곧이어서 사내들의 밭은 숨소리가 문틈으로 잔약하게 흘러나왔다. 그때마다 두 나인은 기둥에 몸을 붙이고 온몸을 비틀어대며 끓어오르는 격정을 식혀야 했다.
벽서가 궁성 안팎과 저잣거리에 나붙은 뒤로 궁성의 경계는 한층 강화되었고, 경비병 숫자도 대폭 늘렸다. 그러나 달포가 지나도 한성에서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한성 사람들은 벽서가 거리에 붙은 뒤로 곧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아 일이 손에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여느 때같이 해가 뜨고 달이 떠도 아무 일이 없자 사람들 뇌리에서 벽서 사건이 서서히 잊혀지고 있었다. 팔수부인은 밤마다 스스로 주지(酒池)에 몸을 담그고 뭇 사내들의 육신을 받아내며 극도의 희열을 만끽하고 있었다. 구이신 왕은 충분히 친정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권을 팔수부인과 목만치에게 위임하고 쇠약한 육신을 돌보며 무료한 나날을 보냈다.
“총수 어른, 모레 아침에 팔수부인과 목만치가 *욱리하(郁里河)로 꽃구경 겸 뱃놀이를 하러 간다고 합니다. 참으로 절호의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 행사에 어쩌면 구이신 왕도 참가할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리된다면 우리 백구단의 병력만으로는 곤란합니다. 내일까지 기다려 봅시다. 왕이 안 간다면 일이 수월하겠지요.”
“총수 어른, 우리는 이천여 명의 용사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왕이 행차할 때 호종(扈從)하는 병사는 기껏해야 오백여 명밖에 안 됩니다.”
“그건 공이 잘 몰라서 하는 소리요. 팔수부인에게는 검술에 능한 왜인 무사들이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일당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왜인들만 대적하는 데 천여 명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호종하는 군사들도 무예가 뛰어납니다. 우리 백구단원들의 무예는 아직 완전하지 않아요.”
해구의 집무실로 뜻을 같이하는 자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그들은 모두 백구단을 움직이는 간부로 모두 해씨들이었다. 그들은 호시탐탐 목만치와 팔수부인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벽서사건 뒤로 왕의 행사나 또는 팔수부인과 목만치의 외부 출타 시에는 이전보다 배나 많은 호위 군사들이 동원되었다.
* 욱리하 – 백제 시대 한강을 부르던 이름
‘만약에 왕이 행차하지 않고 팔수와 목만치만 간다면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다. 일단 하루만 더 두고 보자.’
해구도 내일모레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정확하지도 않은 정보를 믿고 함부로 관군이나 백구단을 움직였다가 일을 그르치게 되면 그동안의 수고가 무의미하게 될까 봐 걱정하였다.
“부총수, 만약이란 게 있습니다. 백구단 소속 단원들에게 통보하여 내일모레 동이 트기 전까지 완전무장한 차림으로 아차산(阿且山)으로 집결토록 하시오. 나는 비유공을 찾아뵐 것입니다. 우리 백구단의 정체가 드러나면 안 됩니다. 비밀 유지에 철저해야 합니다.”
“그럼, 거사를 일으키는 겁니까?”
해구는 비유공을 만나 거사를 논의하기로 했다. 해구는 만약 왕이 뱃놀이에 참여하려고 하면 일을 만들어 왕의 행차를 막을 속셈이었다. 왕이 뱃놀이에 참여하지 않아야 목적을 달성하는데 쉽기 때문이었다.
부여비유도 백구단이 붙인 벽서를 보고 백성들과 조정의 신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그는 조정에 출사는 하였지만, 벼슬은 하지 않았다. 가끔 모든 대소신료가 참석하는 조회(朝會)에 얼굴을 내비칠 뿐이었다.
구이신 왕은 이복 아우인 부여비유를 친동생처럼 아꼈다. 두 사람 모두 전지왕의 아들이지만 비유공은 후궁 해씨의 소생이었다. 팔수부인과 해씨 부인이 견원지간이지만, 형제는 무척 사이가 돈독했다. 구이신 왕은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아우 비유공을 불러 함께 나누곤 했다. 팔수부인은 구이신 왕의 그 같은 행동을 몹시 못마땅해했다. 그러나 구이신 왕은 어머니 팔수부인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유공을 무척 아꼈다.
“목만치는 죽이더라도 팔수부인만큼은 안 됩니다.”
비유공의 말에 해구는 언짢은 표정이었다.
“비유공, 목만치만 죽인다면 이번 거사는 일으키나 마나입니다. 팔수 년 때문에 백제가 오늘날, 이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해구도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팔수부인은 나에게 어머니가 됩니다. 아들이 어찌 어머니를 죽일 수 있습니까? 목만치만 죽이고 팔수부인은 살려둬야 합니다. 팔수부인은 왜왕 오진(應神)의 딸입니다. 왜국과 우리 백제는 오랜 세월 밀접한 국교를 맺고 군사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와 계림국 또는 말갈과 맞서왔습니다.
팔수부인이 변고를 당하면 백제와 왜국의 관계가 틀어지게 되면서 엄청난 국가적 손실을 볼 수 있습니다. 경은 나의 뜻을 존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비유공이 해구에게 자기 뜻을 분명히 밝혔다.
“비유공의 말뜻을 충분히 알았습니다. 그럼, 이번 거사는 팔수에게는 경고를 하는 선에서 끝내고 목만치 놈은 팔이나 다리 한쪽을 잘라버려야겠습니다. 죽이면 너무 재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해구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총수, 각궁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왜인들은 날아오는 화살도 막아낸다고 하니 그자들에게는 강력한 각궁을 사용해야 합니다.”
비유공은 냉엄한 국제관계를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 만약 백제가 왜국과 전통적인 우호 관계를 끊어버리게 되면 왜국은 계림국이나 고구려와 동맹 관계를 맺고 백제를 압박할 수도 있다. 팔수부인 한 명을 희생시키게 되면 백제는 국난을 맞을 수도 있게 된다. 비유공은 나라를 운영하는 최고 통치자는 아니지만, 오래전부터 국가경영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나라 안의 많은 인재와 폭넓은 대인관계를 맺으며, 그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국가발전을 위한 정책을 구이신 왕에게 제안하기도 했다. 또한, 대륙이나 고구려 또는 계림국의 국가 조직이나 군사편제 등을 살펴보고 장점을 발췌하여 왕과 상좌평 등 국가 중신들에게 알려 국정에 반영하도록 했다.
“태후님과 국사님을 호종하는 군사들은 두 분이 욱리하에 무사히 도착하실 때까지 잠시도 긴장을 풀면 안 된다. 모두 명심하라.”
구이신 왕이 팔수부인을 호종하는 장수에게 말했다.
“어라하, 그럼, 어미와 국사 어른은 뱃놀이 좀 하고 오겠습니다.”
“어머니, 소자 모시지 못해 송구하옵니다.”
“아닙니다. 갑자기 일이 생기셔서 그런걸요. 어라하, 염려하지 마세요. 국사님과 즐겁게 놀다가 오겠습니다. 닷새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
아침 일찍 팔수부인과 목만치가 탄 황금마차가 궁성을 떠났다. 두 사람을 호위하는 군사들만 5백여 명이 넘었다. 구이신 왕은 벽서가 붙은 뒤라 어머니 팔수부인과 목만치의 행차에 안전을 위하여 신경을 썼다.
다케다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도 팔수부인의 행차를 따라갔다. 뱃놀이를 위해 욱리하로 떠나는 팔수부인의 행차 대열이 십 리에 걸쳐 뱀처럼 길게 이어졌다. 대략 군사들과 궁인들 그리고 잡부들까지 천여 명은 족히 되어 보였다.
구이신 왕은 궁성 문밖까지 두 사람을 배웅하였다. 왕도 뱃놀이 행사에 참여하려고 했으나, 아침 일찍 병관좌평 해구가 남쪽 지방 일부 현(縣)에서 흑룡이 나타나 백성들을 죽이고 가축을 잡아먹어 피해가 극심하다는 장계가 올라왔다고 보고하였다. 나라 안에 변고가 있으면 왕은 행동거지를 조심하고 몸가짐에 신중해야 했다.
“저기 팔수 년과 목만치가 탄 마차가 오고 있다.”
“저 연놈은 오늘이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나 있는 걸까?”
아차산에서 합류한 백구단원 이천여 명은 두 편으로 나누어 남산과 북산에 각각 천여 명씩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은 활과 칼로 무장한 상태로 모두 붉은색 두건을 썼다. 팔수부인과 목만치가 가려고 하는 목적지는 남산에서 불과 일각(一刻)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늦봄의 따스한 햇볕이 만산에 핀 봄꽃을 더욱 화사하게 했다. 팔수부인과 목만치는 한성 백제궁을 떠나면서부터 황금 마차 안에서 수작(酬酌)을 하였다.
“태후, 한잔 받으시구려. 이렇게 부인과 호젓한 시간을 보내는 게 참으로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우리 잘 먹고 잘 놀아 봅시다. 산천의 초목들이 온통 물이 올라 빛깔도 고와 보입니다. 부인 얼굴도 활짝 핀 것 같고요.”
“국사께서도 혈기가 왕성해 보입니다.”
황금 마차 안에서 남녀의 음탕한 웃음소리가 밖으로 흘렀다. 한성에서 욱리하의 목적지까지는 한나절 걸리는 거리였다. 팔수부인과 목만치가 뱃놀이하러 가는데 드는 비용은 모두 국고(國庫)에서 충당되었다. 두 사람의 곳간은 금은보화로 넘쳐났지만, 자신들이 즐기러 가는 뱃놀이에는 돈 한 푼 쓰지 않았다. 팔수부인이 탄 마차가 남산 아래를 지날 때쯤이었다. 명적(鳴鏑) 한발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나라를 좀먹는 두 연놈을 잡아라.”
“호종하는 잡부들과 아녀자들은 해치지 말고 군사들만 처치하라.”
“왜놈들에게 각궁을 사용하라.”
홍건(紅巾)을 쓴 괴한들이 활을 쏘며 산 아래로 쏟아져 내려왔다. 그들은 함성을 지르며 팔수부인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호종하던 군사들이 급히 방어태세를 취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군사들이 화살을 맞고 맥없이 쓰러졌다. 몇몇 군사들은 산으로 줄행랑을 놓기도 했다.
“제군들, 하타히메미코(八田皇女)님을 보호하라.”
다케다와 그의 제자들도 일제히 칼을 뽑아 들고 백구단에 맞섰지만, 사방에서 각궁으로 쏘는 번개 같은 화살을 막지는 못했다. 아무리 검술에 달인이라 하여도 강력한 각궁의 위력을 당할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호종하던 군사들 대부분이 화살을 맞고 절명하였고, 왜인들도 다케다만 남고 모두 이마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남은 군사들은 모두 도망쳤다. 이천여 명의 백구단원 중 전투과정에서 이십여 명이 죽거나 다치고 나머지는 무사했다. 전투는 일각이 채 안 되어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전투에서 이긴 백구단원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황금마차로 달려들었다.
“우리는 백구단이다.”
“팔수 년과 목만치를 끌어내고, 저 왜놈에게 오랏줄을 안겨라.”
백구단원들이 팔수와 목만치를 마차 밖으로 끌어내 오랏줄로 꽁꽁 묶었다. 두 사람은 얼굴이 하얗게 변해 부들부들 떨며 백구단원들을 노려보았다.
오랏줄에 묶인 상태에서도 팔수부인과 목만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때 단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목만치에게 발길질을 해댔다. 목만치는 길바닥에 쓰러져 비명을 질러대며 버둥거렸다. 그러나 단원들은 팔수부인에게는 달려들지 않았다. 잠시 후에 황금가면을 쓴 자가 세 사람 앞에 섰다. 팔수부인은 서 있고 목만치와 다케다는 무릎이 꿇려진 상태였다.
“나는 백구단의 두령이다. 얼마 전에 우리가 붙인 벽서를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겁도 없이 뱃놀이를 하시겠다고? 참으로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종자들이로다. *하타(八田), 너는 왜왕의 딸로 전지어라하의 배우자가 되어 백제에 왔다. 전지어라하께서 붕어하셨으면 너는 근신하며, 구이신어라하의 뒷바라지를 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너는 저 짐승만도 못한 목가 놈하고 전횡을 일삼고, 온갖 못된 짓을 하며 백제국의 위신을 땅에 떨어지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발정 난 암캐처럼 조정과 시정잡배들을 끌어들여 밤마다 육욕의 향연을 벌였다. 이에 나는 백제의 만백성을 대신하여 팔수, 너에게 매를 치겠다. 너를 매로 끝내는 것은 구이신어라하를 생각해서다. 만약에 오늘 이후로 정신을 못 차리고 예전과 같은 행동을 한다면 너를 죽이거나 왜국으로 보낼 것이다.
목만치, 너는 목라근자 장군의 명성에 먹칠하였다. 너의 부친 목라근자 장군께서 못난 자식 때문에 지하에서 통곡하실 것이다. 너를 이 자리에서 당장 죽이고 싶지만 너의 부친을 생각해서 오늘은 팔 하나를 취하겠다. 너는 이 순간부터 백제국의 국사(國師)가 아니다.
임나로 돌아가서 그동안 임나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 축재한 너의 전 재산을 임나 백성들에게 나눠 주고, 그곳에서 근신하며 죽은 듯 살아라. 네놈이 나의 명령을 어기고 또다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면 네놈의 목을 베어 장대에 매달아 놓을 것이다. 명심하라. 우리 백구단원들이 항상 네 주변에서 맴돌며 너를 유심히 지켜볼 것이다.
다케다 이놈, 네놈은 무례하게도 왜국의 첩자로 백제국에 왔겠다? 그동안 백제에 관련한 귀중한 정보를 왜국에 넘기고 남들 눈을 피해 팔수와 잘도 놀아났으렷다. 이 자리에서 네놈을 참수하여 네놈이 백제에 지은 죗값을 받도록 하겠다. 네놈이 주인을 잘못 만났으니, 네놈 운명을 탓하거라. 저승에 들면 전지어라하께 백배사죄하고 용서를 빌어라. 단원들은 즉시 나의 처분을 이행하라.”
* 하타 – 팔수부인은 왜왕 오진(應神)의 딸로 본명은 야타노(矢田)이고, 별명은 하타(八田)이며, 전지왕과 혼인하면서 핫치스(八須)로 개명했다.
황금가면의 처분이 내려지자 팔수부인은 땅바닥에 강제로 엎드려진 채 회초리로 매를 맞았고, 목만치는 오른팔을 잘렸다. 또한, 다케다는 팔수부인이 보는 앞에서 참수되었고, 그의 목을 팔수부인에게 건네졌다.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팔수부인은 잠시 혼절했다가 깨어났다.
그녀의 흰 비단 치마는 회초리에 갈가리 찢겨 핏빛으로 물들었다. 한쪽 팔이 잘린 목만치는 피를 흘리면서도 길길이 날뛰며 울부짖었다. 황금가면은 팔수부인과 목만치를 황금 마차에 태우게 하고 궁인들과 함께 궁성으로 돌려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