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니다. 팔수부인은 왜국 응신왕의 딸로 전지왕이 붕어한 뒤에 목만치와 더불어 백제의 정치를
농단하여 백제를 망국의 길로 접어들게 합니다. 1600여 년 전에 백제 한성(漢城)에서 일어난
희대의 사건을 소설로 엮었습니다. 많은 감상 부탁드립니다.
_()_ 여강 최재효 拜
팔수부인
- 여강 최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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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만치는 백제의 도읍지인 한성에서 따분하거나 특별히 할 일이 없을 때는 자신이 다스리는 임나(任那)로 내려가 온갖 못된 짓을 저질렀다. 그는 춘궁기에 가난한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높은 이자를 부쳐 빌려준 양곡을 받아내는데, 조금만 늦어도 수하들을 보내 행패를 부렸다.
제때 빌려 간 양곡을 갚지 못하면 그 집의 딸이나 집주인의 처를 강제로 빼앗기도 했다. 그의 악명은 임나뿐만 아니라 가야연맹 전체에 널리 퍼져 있었다. 임나는 금관가야에 속한 지역임에도 그는 임나 지역에서 왕 같은 존재였다.
그는 임나에 고래등 같은 저택을 소유하고 있는데, 이곳에 서른 명이 넘는 젊은 여인이 항시 목만치의 부름을 받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미색이 출중한 여인은 이 지역 장자들의 딸이거나 아니면 음황한 유부녀로 목만치가 거금을 주고 매수했다. 또한, 빌려 간 곡식이나 돈을 제때 갚지 못해 강제로 끌려온 여인들도 꽤 있는데, 지어미나 딸을 빼앗긴 사람들이 찾아오면 목만치는 그들에게 곤장을 안기거나 돈 서너 푼 던져주고 쫓아냈다.
그의 저택 주변은 늘 무장한 사병(私兵)들이 지키고 있어 일반인의 접근을 통제하였다. 그의 저택에는 크고 작은 창고가 열 개나 있었다. 큰 창고에는 양곡이 가득했고, 작은 창고에는 각종 값비싼 물품으로 채워졌다.
그가 특히 좋아하는 물건은 대륙에서 들어오는 비단 옷감이었다. 목만치는 임나에 왔다 한성으로 돌아갈 때마다 상당량의 고급 비단을 팔수부인에게 선물했다. 왜국에서 건너오는 다양한 물품도 상당량 있는데, 대부분 팔수부인에게 전달되었다.
그의 저택 사랑채에는 목만치가 한성에서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들로 늘 만원이었다. 그는 백제뿐만 아니라 가야연맹의 왕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벼슬 청탁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가야의 벼슬보다 백제의 벼슬이 곱절이나 돈이 많이 들었다.
“국사 나리, 백제 지방군 사령(司令)을 원합니다.”
“그 직책은 좀 비싸오. 삼만 냥은 있어야 하오.”
“나리, 좀 깎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물려받은 전답(田畓)을 모두 처분한 돈이 겨우 이만오천 냥 밖에 안되는데요.”
“돈이 부족하면 반반한 계집을 바치면 될 듯도 싶소.”
“그럼, 소인의 첩을 바치겠습니다. 얼굴이 삼삼하고 그 일도 꽤 잘하는 편입니다. 소인은 꼭 사령이 하고 싶습니다.”
목만치에 백제 지방군 사령 자리 하나쯤 주선해주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돈독이 오른 그가 마음만 먹으면 백제의 장군 자리도 마련해줄 수 있었다. 장군은 십만 냥 정도는 목만치에게 뇌물로 안겨야 가능한데, 중앙군의 장군이 아닌 지방장관인 방령(方領)의 비장이나 혹은 방좌(方佐) 정도였다.
“국사 나리, 제 자식이 다섯인데 조정이나 지방의 말직(末職)이라도 좋으니 제수해 주십시오. 비용은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소인이 돈은 많은데 자식들이 하나같이 붓방아만 찧고 있어 벼슬을 못 하고 있습니다.”
목만치는 백제 16관등에 대한 뇌물 가격을 매겨놓고 찾아오는 사람의 재산 상황에 맞춰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했다. 1품인 좌평부터 5품인 한솔(扞率)까지는 그가 아무리 백제의 조정을 쥐락펴락하여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은솔 이상은 반드시 구이신 왕이나 팔수부인과 상의를 해야 했는데, 그의 요구는 대부분 받아들여졌다. 5품 이하의 관직은 목만치의 마음대로 좌지우지했다.
6품인 나솔(奈率)은 10만 냥, 7품인 장덕(將德)부터 11품 대덕(對德)까지는 9만 냥에서 5만 냥으로 책정하고, 12품 문독(文督)부터 15품 진무(振武)까지는 5만 냥에서 2만 냥을 받았으며, 최하품인 16품 극우(剋虞)는 보통 2만 냥을 받았다. 지방 장관인 방령은 5만 냥, 방좌는 2만 냥 정도였다. 그가 임나에 한 번 다녀가면 지방 관아에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의 미관말직이 생겨났으며, 그의 곳간은 각종 뇌물로 가득 찼다.
“좋습니다. 그대의 청을 받아들여 16품인 극우 자리를 주지요. 아들이 다섯이니 한 명당 5만 냥을 내시오. 그럼, 아주 좋은 보직을 주리다.”
“넷? 그, 그럼. 이십오만 냥을 내란 말입니까?”
“돈은 얼마든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이번에는 세 명만 하겠습니다.”
“허? 돈이 모자라면 그대 딸이나 예쁜 첩을 오만 냥 쳐서 받아주리다.”
‘이런 날강도 같은 놈을 봤나. 칼만 안 들었지 진짜 강도보다 더한 놈이다. 제 아비 목라근자 장군은 가난하고 불쌍한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고 병든 자를 돌보는 아량을 지녔었는데, 저놈은 누굴 닮아 저리 악독한 짓만 골라 할까? 염라대왕은 저런 놈 안 잡아가고 뭘 하시는 것인가?’
“조, 좋습니다요. 십오만 냥을 드리지요.”
목만치가 임나에 내려와 가렴주구와 탐관오리 짓을 하며 거금을 긁어모으고 있을 때 팔수부인도 이에 질세라 눈만 뜨면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왕의 생모라는 이점과 수렴청정하는 위치라 그가 거금을 받고 관직을 판매하여도 공식적인 행위가 되기 때문에 누구도 간언하지 못했다.
목만치가 자질구레한 관직을 팔며 뇌물을 착복한다면 팔수부인은 좌평을 비롯하여 2품의 달솔(達率), 3품의 은솔(恩率), 4품의 덕솔(德率), 5품의 한솔(扞率) 등을 주요 먹이로 삼고 있었다. 관등의 등급이 높은 만큼 뇌물의 액수도 만만치 않았다.
“소신은 진가(眞哥)로 지방에서 장덕 벼슬을 하고 있습니다. 태후께서 좋은 자리로 승진을 시켜주신다면 각골난망이며, 보답으로 황금괴(黃金塊) 한 상자 드리겠습니다.”
“진씨들이 조정보다 지방에 많이 포진하고 있다죠? 나는 황금보다 사람의 목숨을 원합니다. 그대를 조정에 불러올려 덕솔 벼슬을 제수할 테니, 내 조건을 따를 수 있습니까?”
“네에? 소신의 목숨을 내놓으라고요?”
“호오-, 이렇게 눈치가 없으니, 그 나이에 아직도 7품인 장덕(將德)을 하고 있죠? 그대에게 덕솔 정도의 벼슬을 내려 장차 큰일을 맡긴다는 뜻입니다.”
“고맙습니다. 당장 목을 내놓으라고 하시면 이놈의 목을 드리겠습니다.”
진가는 20만 냥을 팔수부인에게 전하고 4품의 벼슬을 얻었다. 팔수부인이 주로 다루는 관직은 은솔, 덕솔, 한솔이었다. 좌평은 조정 내 권력의 역학관계로 정해지는 자리이기에 매관매직에는 무리가 따르고, 달솔은 자신의 친위 세력 아니면 함부로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그녀는 한솔 이상의 관직은 보통 20만 냥 이상의 가격으로 거래를 하며 치부하였다. 기존의 관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그녀의 눈 밖에 나거나, 적당한 주기로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그 자리에서 내쳐지기 일쑤였다.
그녀는 관직을 팔아 거둬들인 돈은 사치와 허영심을 채우는 데 허비하였다. 그녀가 사용하는 식기류는 모두 금으로 만들어졌고, 옷은 최고급 비단으로 지어졌으며, 머리와 몸에 치장하는 장신구는 타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황금과 산호, 진주, 호박 등 진귀한 보석으로 만들어졌다. 조정 중신 중에서 그녀에게 아부하고 충성하는 자에게는 수시로 은전(銀錢)이 전달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궁인과 나인 중에서도 그녀에게 아부하여 은자(銀子)를 받는 자들도 부지기수였다. 또한, 팔수부인은 남성 편력이 극심하여 조정의 만조백관 중에서 제법 풍신이 훤칠하고 교언영색에 능한 자를 은밀히 접촉하였다.
“소인, 태후님의 부름을 받고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내가 백(苩) 한솔을 부른 이유는 잘 아실 태죠?”
백지리(苩只伊)는 내법좌평 아래서 일은 하는 관리로 조정에서 가장 잘생기고 학식도 풍부하다고 소문난 자였다. 그는 비가 내리는 날 초저녁에 팔수부인의 부름을 받았다. 그녀는 목만치가 곁에 없으면 조정 내에서 젊고 유능하며 옥골선풍(玉骨仙風)의 관리들을 미리 파악하고 있다가 한 명씩 자신의 처소로 불러들였다.
백지리는 팔수부인의 처소 내실로 들었다가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는 반라(半裸) 상태로 탁자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탁자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주전자가 즐비했고, 백제에서 볼 수 없는, 남국에서 생산되는 과일과 먹음직스러운 생선찜이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며 후각을 자극했다. 그밖에 기름진 안주들이 은접시에 가득 담겨있는데 하나같이 진미(珍味)였다.
빙 둘러쳐진 병풍에는 꽃과 나비, 십장생들이 꽃밭에서 뛰노는 장면이 수놓아져 있는데, 금방이라도 병풍 밖으로 뛰쳐나올 것만 같았다. 또 한쪽 벽면에는 남녀의 노골적인 정사 장면이 그려진 그림이 걸려있었다. 화풍(畫風)으로 보아 왜국에서 들여온 것이 분명했다. 이상하리만치 거대하고 징그럽게 생긴 남근(男根)과 세밀하게 묘사된 여근곡(女根谷)은 마치 살아서 꿈틀대는 것처럼 보였다.
그 그림 옆으로 또 한 폭의 그림이 걸려있는데 여러 명의 나부(裸婦)가 두세 명의 건장하게 생긴 사내를 둘러싸고 해괴망측한 행동을 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시시풍던한 사람은 그림을 바라보아도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백지리는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몰라 주춤거렸다.
하얀 속살이 훤히 비치는 흰색 날개옷을 걸친 팔수부인은 이미 주연을 즐기고 합기(合氣)까지 고려한 듯 했다. 전주(前酒)가 있는 탓에 그녀의 양 볼이 발갛게 익어 있는데 늦가을 서리맞은 홍시 같았다. 그녀는 목만치 이외에도 수많은 사내와 운우(雲雨)를 나눈 경험이 풍부하여 어남술(御男術)에서는 백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상태였다.
신체가 약한 사내들은 그녀와 두세 차례 음사(陰事)를 치르고 나면 몸이 마르거나 정신 이상자가 되기 일쑤였다. 그녀의 내실에는 왜국과 진나라 등지에서 구매한 다양한 기구(器具)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상아를 깎아서 만든 남근이 수백 개나 되었고, 기묘하게 조각된 여근(女根)도 수백 개나 되었다.
“소, 소인은 태후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지…….”
“이런, 이런. 그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무슨 출세를 하겠습니까? 사내는 아무리 일을 잘한다고 소문이 나도 그 일이 능숙하지 못하면 헛것입니다. 이리 가까이 오세요. 내가 한잔 드릴 테니 받으세요.”
“고, 고맙습니다.”
백지리가 주춤거리며 반쯤 정신 나간 상태로 겨우 자리에 앉았다. 팔수부인은 백지리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하얀 치아와 빨간 혀가 보였다. 방금 입술에 피를 묻힌 것인지 연지를 바른 것인지 분간이 안 갔다.
“자, 잔을 받으셔요.”
백지리가 술잔을 받자 팔수부인이 주전자를 들어 술을 따랐다. 상아보다 희고 뽀얀 그녀의 손이 백지리의 가슴을 뛰게 했다. 손가락마다 금과 은반지를 끼고 있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보석으로 만들어진 팔찌가 황촛불에 반사되어 야릇한 빛을 뿜어냈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야릇한 향기와 체취가 백지리를 혼몽하게 했다. 백지리는 지금 상황이 생시인지 꿈인지 분간하지 못했다.
“그대가 백제 조정에서 최고의 미남이라 들었습니다. 나는 잘생긴 남자를 보면 꼭 수작(酬酌)하면서, 허심탄회하게 골머리 아픈 세상사를 논하고 싶답니다. 특히 세상사 중에서 남녀의 연정이나 비련(悲戀)에 관한 이야기에 흥미가 많답니다.”
백지리가 팔수부인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그는 아직도 팔수부인의 저의(底意)를 파악하지 못하고 쉴 새 없이 식은땀만 닦아냈다.
“태후님, 소, 소신은 책만 보던 서생(書生) 출신이라 그런 이야기는 별로 아는 바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눈치가 없기는……. 더 가까이 오세요. 화초도 이슬이나 보슬비를 맞아야 활짝 피어나는 법입니다. 나는 지아비가 죽은 뒤로 하루하루 시 들어가고 있답니다. 백 한솔이 오늘 밤에는 담장 밑에서 소리 없이 시들어가는 장화(墻花)에 시원하게 물을 뿌려주세요. 내일 아침까지 옥수(玉水)를 뿌려주면 화초는 한 여름꽃처럼 함빡 피어날 것입니다. 정사(情事)는 세상을 새롭게 만들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미덕이 있답니다.
자웅(雌雄)의 지극한 교합만이 세상을 바르게 이끌고, 진정한 인생의 묘미를 느끼게 해준답니다. 남녀가 그런 지상 최고의 극락을 모르고 한세상 산다면 그 인생은 허깨비 같은 생을 사는 거랍니다. 나는 오늘 밤 그대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답니다. 한솔은 나를 실망시키지 마세요.”
팔수부인이 백지리의 가슴에 안기다시피 했지만, 백지리는 무엇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서 버둥거리며 가리산지리산 했다.
”태후님, 방안에서 어찌 비를 맞으신다고 하시는지요?“
‘아니, 뭐 이런 허접한 멍충이가 다 있나? 겉모습은 무척 씩씩하고 옹골차 보이는데, 그게 아니었나?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인가? 준다고 하는데도 못 먹으니, 참으로 바보천치가 따로 없구나. 이런 야릇한 일에 전혀 생무지 같아 보이지 않는데?’
팔수부인은 백지리가 일부러 바보짓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여인을 다뤄본 경험이 별로 없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갔다. 그녀는 연거푸 술을 서너 잔 마시더니 백지리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백 한솔, 명령입니다. 나의 곁으로 바싹 다가와 앉으세요.”
“소인이 어찌 감히…….”
백지리가 할 수 없이 팔수부인의 곁에 바싹 다가가 앉았다. 그는 팔수부인이 부른다기에 조정의 일에 대하여 상의를 하거나 어떤 지시를 하는 줄 알고 왔다가 야릇한 상황에 처하자 무척 혼란스러웠다. 괜히 선대왕의 미망인을 잘못 건드렸다가 곤란한 경우를 맞을까 두렵기도 했다, 백지리는 팔수부인의 남성 편력이 심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그 대상이 될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막상 미인의 곁에 있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는 이미 혼인을 하여 자식이 있는 몸이었다.
“나의 몸속에는 활화산이 있답니다. 그대가 그 불을 꺼줘야 이곳에서 나갈 수 있습니다. 불을 못 끈다면 이곳에서 불을 끌 때까지 있어야 합니다. 무슨 뜻인지 이제는 분명하게 알겠지요?”
팔수부인이 빨간 입술 사이로 혀를 날름거렸다. 백지리와 그녀가 시선이 마주치면 불꽃이 튀었다. 백지리는 차츰 기운을 차리고 근본적인 욕구를 키워갔다. 어차피 그냥 나가기는 틀렸다고 판단한 것이다.
“소신이 부인의 몸속 깊이 활활 타고 있는 불만 꺼주면 되는 것입니까?”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기분 좋게 불을 꺼주면 그대의 품계도 올라가고 금은보화를 잔뜩 얻게 될 것입니다. 일체유심조입니다. 그대 마음먹기에 따라 오늘 밤이 인생 최고의 밤이 될 수 있고 아니면 지옥 같은 악몽이 될 수도 있답니다. 이왕이면 환상적인 추억을 만들어 봐야 하지 않겠어요?”
‘어차피 일이 이리된 것을 내가 피할 수는 없다. 팔수가 얼마나 센지 한번 붙어보자. 잘하면 내가 금방 덕솔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겠구나. 팔수가 소양배양하는 꼴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다. 오늘 밤 백씨 가문의 운명을 걸어봐야겠어. 너무 자존심이 팔려 부아가 나려고 한다.’
백지리가 팔수의 어깨에 손을 얹고 살며시 잡아당겼다. 암내와 향내가 묘하게 섞여 사내의 욕망을 자극하였다. 백지리는 그녀의 반응을 살피며 서서히 팔에 힘을 주어 조였다. 그가 완력을 강하게 쓸수록 그녀의 반응은 커져만 갔다. 살짝만 힘을 주어도 그녀는 지남철처럼 찰싹 달라붙었다.
뱀이 쥐를 잡아먹기 전에 쥐를 칭칭 감아 혼을 빼놓는 것과 같았다. 두 사람이 부둥켜안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서로의 심장 고동을 느끼며 정기(精氣)와 요기(妖氣)를 교환하였다.
“소신이 태후께 한잔 올리겠습니다.”
땀으로 범벅이 된 백지리가 팔수부인에게서 잠시 상체를 떼었다. 팔수부인이 아쉬운 듯 눈을 흘겼다.
“이제야 나의 말뜻을 알아들으셨습니다.”
“오늘 밤은 소신의 몸이 태후님이 분출하는 불길에 타서 가루가 되더라도 태후님의 열락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소신이 태후님을 쪽배에 태워 은하수를 건너고 오작교를 지나 서쪽 하늘 끝까지 노를 젓고 가보겠습니다. 기대하셔도 됩니다.”
백지리가 팔수부인에게 술을 따르니 그녀가 한입에 마시고 접문(接吻)을 시도한 뒤에 입속에서 따뜻하게 데워진 술을 백지리의 입안에 넣어주었다. 백지리는 팔수부인의 향긋한 체취와 달콤한 주향(酒香)에 그만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팔수부인은 처소의 궁인이나 나인들을 통해 조정의 대소신료와 한성 저자에서 정력이 절륜하다거나 잘생긴 사내들을 파악하여 명단을 적어두고 적당한 때에 한 명씩 불러들여 밤새도록 술자리를 함께하고 등하색(燈下色)을 즐겼다.
팔수의 다양한 요구에 응하느라 파김치가 된 사내들은 날이 밝기 전에 궁궐을 빠져나가야 했다. 물론 그들 손에는 은자가 가득 담긴 상자가 쥐어져 있었다. 그러나 팔수부인에게 흡족한 열락(悅樂)을 맛보게 하지 못하거나 초반에 허술하게 무너진 사내는 쫓겨나기 일쑤였다.
“태후께서 드디어 시작하셨다.”
“나도 좀 보자. 저리 비켜봐.”
팔수부인 처소의 나인들은 처소에 사내가 들면 으레 운우지락의 대사(大事)가 벌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팔수부인의 처소에 잘생긴 사내가 드는 날이면 고참 나인들이 수직(守直)을 서다가 일이 시작될 즈음해서 내실을 엿보기 위해 문 모여들었다.
“어머나, 저 자세는 귀등(龜登)이란 자세인데, 태후님이 지난번에 목만치 국사님과 시도하던 것이야. 태후께서 저 체위를 아주 좋아하시나 보다. 저 자세는 사내가 고도의 기술이 있어야 가능해. 단점은 여인이 너무 흥분하면 자칫 아이가 들어서기 딱 좋은 자세이기도 하지. 갑자기 나도 아랫도리가 이상해지려고 하네.”
“언니, 테후님은 호랑이 걸음, 호보(虎步)를 좋아하시잖아요?”
“그 체위는 너무 흔한 자세야. 사내가 여인의 뒤태를 보는 재미가 있지만, 앞만 쳐다봐야 하는 여인은 재미가 반감되어 고욕이라고.”
“태후님은 목만치 국사님과 방사를 가질 때마다 그 자세를 하면서 괴성을 질러대곤 하셨는데. 그 장면이 눈에 선하다. 그런데 얌전하게 생긴 백지리 한솔님이 보기와는 아주 딴판이네. 허리 놀리는 것을 보니 한참 동안 태후님에게 총애를 받겠어.”
“지금도 총애받고 있는 벼슬아치들이 스무 명이 넘어. 그리고 얼마 전에 왜국에서 건너온 사내 중에 다케다란 자가 태후님의 총애를 받고 있어. 그자는 대낮에도 태후님과 침상에서 뒹구르기도 한다고. 너희들은 태후님이 하는 일을 절대로 비밀로 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저잣거리에서 제법 놀 줄 안다고 소문난 남정네도 열 명이나 태후님에게 사랑을 받고 있어. 아휴, 그 많은 사내를 혼자서 어찌 받아내는지 몰라. 암튼 왜녀(倭女)는 선천적으로 그 짓을 잘하도록 체질적으로 타고 나나 봐. 정말로 신기해. 거의 매일 밤 불을 지피니.”
나인들의 하나둘 계속해서 몰려들었다. 두 사람이 극도의 희열로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질러대는 은은하고도 괴상한 소리는 다른 전각까지 퍼져나갔다. 어느새 팔수부인의 처소에는 스무 명이 넘는 궁궐 내 궁인들과 나인들이 모여들어 암수가 흘리는 묘음(妙音)에 집단으로 도취하여 밤이 깊어가는 줄도 잃고 있었다. 팔수부인의 기호는 참으로 해괴망측하고 패역(悖逆)할 뿐만 아니라, 천격(賤格)스러운 행위는 백제 왕실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조정 내에서 팔수부인의 부름을 받은 신료들은 콧대 높은 줄 모르고 안하무인으로 처신하다가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저자의 왈패 중에서도 팔수부인과 관계를 맺은 자는 자신의 해괴한 무용담을 떠들고 다녔다. 밤하늘에 수시로 별똥별이 떨어지며 한성의 밤이 깊어만 갔다.
“해돌아, 이곳만 붙이면 다 되는 거지?”
“궁성 담장에 오십여 장, 한성 저잣거리에 이백여 장을 붙여놨으니, 내일 날이 밝으면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다. 우리는 이만 가자.”
“날이 밝으면 볼만할 거다.”
*축시(丑時)가 훨씬 지난 시각 한성의 거리 요소요소 마다 복면을 한 자들이 서너 명씩 몰려다니며 벽서(壁書)를 붙이고 다녔다. 그들은 온통 검정 옷을 입고 있어 사람들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 비호처럼 날쌘 동작으로 보아 그들은 다년간 무예를 연마한 자들이 틀림없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덩그러니 벽서만 붙어있었고, 아직은 아무도 그 벽서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했다.
소서노 여제께서 온조대왕과 백제를 건국하고 사백사십 년이 지났다.
그동안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성인(聖人)이 나타나시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시고, 나라를 안정되게 하였다. 그런데, 요즘
평화로운 이 땅에 난데없이 먼 바다에서 건너온 구미호(九尾狐) 한 마
리가 국기(國基)를 흔들어 놓고 있다. 게다가 임나의 광폭한 승냥이까
지 가세하니, 백제에 희망은 사라지고 금수(禽獸)의 나라가 되었도다.
경고하나니, 여우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을 잊지 않았다면 속히 바다
를 건너갈 것이며, 승냥이는 심산으로 들어가 나오지 말지어다. 민심은
곧 천심이니, 하늘의 명을 어기는 자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 백구단(百救團) -
동이 틀 무렵 한성의 백성들 몇몇이 벽서를 가지고 궁성을 찾았다. 그런데 벽서를 들고 궁성을 찾아온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들은 벽서를 궁성 수문장에게 건넸다. 궁성 수문장은 벽서의 내용이 심상치 않은 것을 알고 즉시 일직 사령에게 고했다. 일직사령은 그 벽서를 보고 얼굴이 하얗게 변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일직사령은 간밤에 궁성 안이나 한성 저잣거리에서 일어난 일들을 상세히 기록하여 윗선에 보고해야 했다. 보고서와 수거된 벽서는 즉시 궁궐의 수비와 수직 군사를 총괄하는 위사좌평(衛士佐平)에게 보고되었다. 위사좌평은 상좌평 부여신(扶餘信)에게 보고하였고, 부여신은 벽서를 보고 착잡한 심사를 달래야 했다.
* 축시 – 새벽 1~3시 사이
* 수구초심 - 여우가 죽을 때 제가 살던 굴이 있는 언덕 쪽으로 머리를 둔다는 뜻으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르는 말
‘백구단이라, 백구단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분명히 팔수부인과 목만치의 전횡을 고발하는 내용인데, 어라하와 팔수부인에게 어떻게 보고를 해야 하나? 무턱대고 갔다가는 욕만 먹을 것이다. 보고하기에 앞서 우선 실세인 병관좌평을 불러 상의를 해봐야겠다.’
“여봐라, 병관좌평을 속히 모셔와라.”
부여신은 조정의 모든 업무를 관장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아신왕의 서자이며, 붕어한 전지왕의 아우이기도 했다. 전지왕이 붕어하고 어린 구이신 왕을 대신하여 왕의 생모인 팔수부인이 수렴청정하다가 자신의 권한을 목만치에게 위임하는 바람에 그녀는 마치 허수아비처럼 된 이상한 형국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상좌평인 부여신은 예전처럼 힘을 쓰지 못했다.
“상좌평 어른, 지금 즉시 어라하와 팔수부인에게 보고해야 합니다. 이처럼 중대한 사안을 가지고 있다가 어라하와 팔수부인이 다른 통로를 통해 알게 되면 상좌평 어른만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됩니다. 자칫 잘못하다가 모든 책임을 상좌평 어른이 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속히 보고해야 합니다.”
백구단의 총수를 맡은 병관좌평 해구(解丘)는 은연중에 부여신을 협박하고 있었다. 노쇠하고 겁이 많은 부여신은 해구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고 즉시 구이신 왕을 찾았다. 그러나 몸이 쇠약한 구이신 왕은 아직 기침(起寢) 전이었고, 팔수부인은 백지리와 밤을 하얗게 새우며 고된 노동을 한 탓에 피곤함에 지쳐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물론 동이 터오기 전에 백지리 한솔은 은자가 가득 든 상자 한 개를 들고 그녀의 처소를 빠져나간 뒤였다. 목만치는 아직 임나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보고받을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부여신은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