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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수부인(6)

* 창작공간/중편 - 팔수부인

by 여강 최재효 2020. 8. 30. 18:22

본문

 

 

 

 

 

                본 역사소설은 백제 제18대 전지왕(腆支王)의 부인이며, 제19대 구이신왕(久爾辛王)의

                생모인 팔수부인(八須夫人)과 그의 간부(姦夫)인 목만치(木滿致)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

                습니다. 팔수부인은 왜국 응신왕의 딸로 전지왕이 붕어한 뒤에 목만치와 더불어 백제의 정치를

                농단하여 백제를 망국의 길로 접어들게 합니다. 1600여 년 전에 백제 한성(漢城)에서 일어난

                희대의 사건을 소설로 엮었습니다. 많은 감상 부탁드립니다.

 

                                                                                                         _()_ 여강 최재효 拜

 

 

 

 

 

 

 

 

                                             팔수부인

 

                                                                                                                              - 여강 최재효

 

                                                  6

 

대륙에서는 사마의(司馬懿)의 후손들이 위, 촉, 오 삼국시대를 갈무리한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진(晉) 나라를 세웠으나, 팔왕(八王)의 난을 겪고 30년 만에 망해버렸다. 진이 망하면서 왕조세력 중 사마예(司馬睿)가 강남에 동진(東晉)이라는 나라를 건국하여 겨우 진국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전의 진나라 영토는 전량(前涼)과 전조(前趙) 등 5호 16국이 나누어 점령하였다.

 

이후에 남북조 시대가 열리면서 북조는 북위(北魏)가, 남조는 송(宋)이 대륙의 강자가 되었다. 고구려 태왕 거련(巨連)은 도읍지를 평양으로 천도하고, 남진정책을 취하면서 백제와 계림국은 위기를 맞고 있었다.

 

계림국왕 김눌지(金訥祗)는 박제상의 활약으로 두 아우를 고구려와 왜국에서 빼돌려 귀국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나, 외교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눌지왕의 막내아우인 미사흔(未斯欣)이 탈출한 이후 왜국은 계림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왜왕은 수군을 보내 계림국 해안을 습격하여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노략질을 일삼기도 했다.

 

또한, 극심한 가뭄과 때아닌 서리로 곡식이 여물지 못해 흉년이 이어졌다. 수많은 계림국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도둑이 되거나 자식을 팔아먹는 일까지 생겨났다. 다행히 최근에는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눌지왕은 소원해진 고구려와 관계 개선을 시도하였으나, 거련 태왕은 그를 서름하게 대했다.

 

백구단의 자경대 습격 사건은 백제의 정치 판도를 뒤흔들어 놓았다. 병관좌평 해구는 진가도와 연무상(淵武相)을 일단 *사관부(司冠部)의 감옥에 가둬놓고 회유와 협박으로 그들의 전향을 촉구했다. 겁이 많은 진가도는 해구의 뜻을 따르기로 하였으나, 연무상은 고집이 세어 해구를 힘들게 했다.

 

“진가도, 내 말을 들으면 너는 치료도 잘 받고 예전처럼 활동할 수 있다. 게다가 너에게 벼슬도 내려주겠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고 딴짓하면 너뿐만 아니라 너의 부모·형제는 물론 네 처자식 모두 반역죄로 저잣거리에 효수(梟首)될 것이다.”

해구가 옥에 갇힌 진가도에게 거래를 시도하였다.

 

“병관좌평 어른, 필수태후께서는 어라하를 축출하라고 지시한 적이 없습니다. 저희의 목표는 오직 백구단원을 죽이고 그 단체를 해체하는 것입니다.”

진가도는 해구의 지시대로 자백할 것을 강요받고 있었다.

 

“어허-, 이렇게 사람이 생각이 짧아서야 뭐에 써먹나? 우선 살고 봐야 할 게 아닌가. 죽으면 아무 소용없는 거야.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니까.”

“아, 알겠습니다. 좌평 어른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해구는 진가도에게 왕이 죄인을 국문하는 자리가 펼쳐지면 어떻게 범죄사실을 토설할 것인지를 일러주었다. 진가도와 연무상은 따로 격리되어 있었다. 해구는 진가도에게 자신의 의도대로 토설할 것을 확약받고 연무상에게도 같은 방식을 적용하려 했다.

 

* 사관부 – 백제의 일반 정무를 담당하는 중앙부서에는 사군부(司軍部), 사도부(司徒部), 사공부(司空部), 사관부(司冠部), 점구부(點口部), 외사부(外舍部), 조부(綢部), 일관부(日官部), 시부(市部)가 있는데, 사관부는 사법 및 형벌을 관장한다.

 

“그대는 고구려에서 왔으니 우리 백제의 조정의 속사정을 잘 모를 것이오. 나는 그대를 내란 방조 혐의로 참수할 수 있소. 그러나 내가 시키는 대로 말하면 그대는 무사할 수 있소이다. 그대는 백제에 돈 벌러 왔다가 혼자만 살아 고구려로 돌아간다고 하여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오. 나에게 협조한다면 목숨을 살려줄 뿐만 아니라, 백제에서 평생 살 수 있도록 벼슬도 주고, 집도 주고, 계집도 주겠소.”

해구는 연무상을 집요하게 설득하였다.

 

“나에게 잠시 생각할 여유를 주시오.”

 

“연무상, 머나먼 타국에 와서 개죽음하지 않기를 바라오. 한번 왔다가는 인생이오. 나에게 한 번만 협조하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으니, 잘 생각해보시오. 진가도는 나에게 협조하기로 했소이다. 그대의 상처는 빨리 치료를 받아야 하오. 지금 상태로 두면 살과 뼈가 썩어 목숨도 위험하오. 나에게 협조만 한다면 그대는 예전처럼 활동 있을 것이오. 어렵게 백제에 왔으니 뜻을 이루어야 할 게 아니겠소?”

 

“일겠습니다. 해구 좌평의 뜻에 따르지요. 하지만, 좌평께서 한 말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자백을 번복할 것이오.”

 

결국, 연무상도 해구의 끈질긴 회유에 넘어가고 말았다. 해구는 진가도와 연무상의 속마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의 세 치 혀를 이용해 자신의 야망을 한발 앞당길 궁리를 하고 있었다. 고구려에서 온 연무상까지 협조하면 왕과 중신들은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해구는 비유공에게 자경대 소탕 건에 대하여 상세히 보고하였다. 비유공은 북산 계곡에서 많은 장정이 살해된 사건이 조정의 중대한 사안이 되어 나라를 어지럽게 할 것 같아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해구는 이번 사건을 확대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넓히고 팔수부인을 궁지로 몰아넣을 기회로 활용코자 했다. 그는 진가도와 연무상의 존재에 대해서는 왕과 상좌평 부여신 그리고 비유공에게만 공개하고 다른 신료들에게는 비밀에 부쳤다.

 

“비유공, 죄인들의 입을 빌려 팔수부인을 궁에서 내쫓고 구이신어라하를 궁지로 몰아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공의 대의를 앞당길 수 있습니다.”

 

“나는 비열한 방법으로 권좌에 앉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형님 어라하께서 나라만 잘 다스리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비유공,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게 되면 천추의 한이 될 것입니다.”

 

비유공이 주저하자 해구는 사건 전말서를 작성하여 구이신 왕에게 보고하였다. 해구는 마음이 급했다. 비유공을 주군으로 모시겠다고 천명하였으나, 그보다 자신의 야망이 더 중요했다. 구이신 왕은 해구의 보고를 믿지 않았다.

 

“병관좌평, 이게 사실이오? 어머님이 나를 축출하고 목만치를 왕으로 앉히려 했다니. 나는 이 보고서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자는 지난번 ‘뱃놀이 사건’으로 한쪽 팔을 잃고 임나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어라하, 믿지 못하시겠다면 지금 당장 죄인들을 국문(鞫問)해보소서.”

 

구이신 왕은 해구가 지금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해구가 무례한 중신이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왕에게 허언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왕은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님이 나를 권좌에서 쫓아내고 목만치를 왕으로 앉히려 했다는 게 사실일 리는 없겠지만, 전혀 불가한 일도 아니니 내가 직접 국문을 해봐야겠다. 국문하기 전에 미리 어머님을 만나서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여쭤봐야 하나? 아니야. 우선 죄인들을 문초해보고 난 뒤에 여쭤봐야겠어. 괜히 섣불리 행동하다가 일이 꼬일 수도 있다. 내가 몸이 쇠약하니 어머님께서 나를 탐탁하지 않게 여기시는 것인가? 아니면 목만치가 어머니에게 왕이 되고 싶다고 했나?

 

그자가 어떻게 어머니를 구어 삶아놓았기에 어머니는 자식을 마뜩해 하지 않으시는 걸까? 두 분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다정스럽고 정겨워 보이기는 했지만, 어머니가 정말로 나의 왕위를 정부(情夫)에게 내줄 생각을 하셨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지금은 목만치가 한쪽 팔을 잃고 도망치듯 임나에 내려가 있는데, 그 상태에서도 엉뚱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인가?

 

이일을 어찌 처결해야 나라가 조용할까? 이럴 때 나의 곁에 상의할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 아우, 비유 아우를 불러 상의해야겠어. 아우는 나와 배는 다르지만, 이럴 때는 피붙이밖에 없다. 비유는 똑똑하고 사물을 보는 눈이 보통사람과 다르니 나의 고충을 상의하면 무슨 해결책을 제시할 것이다.’

 

구이신 왕은 잠시 고민하다가 해구에게 지시하였다.

 

“병관좌평 말대로 내일 아침 국문장을 설치하오. 내가 직접 죄인들을 신문하리다. 철저히 준비해주시오.”

“잘 생각하시었습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구이신 왕은 즉시 비유공을 찾았다. 형제는 늦은 밤까지 다과를 들며 해구가 보고한 사안에 대하여 논의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사관부 앞뜰에 국문장이 설치되었다. 조정의 7품 이상 중신들이 모두 사관부로 나오도록 했다. 중신들은 자경대의 피습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모르고 있었다. 다만, 병관좌평 해구가 군사를 동원하여 국기(國基)를 혼란케 하려던 흉악한 집단을 잡아들인 것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국문장에 끌려 나온 죄인은 진가도와 연무상 뿐이었다. 중신들은 국왕이 직접 국문하는 사건인 만큼 죄인도 수십 명에 달할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두 사람이 오랏줄에 묶여 나졸들의 부축을 받으며 국문장에 등장하자 중신들은 수군거렸다. 예상했던 장면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거니와 죄인 중 한 사람이 은솔 벼슬을 지낸 진가도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저자는 몇 해 전에 관곡(官穀)을 횡령했다가 파면된 은솔 진가도가 아닙니까? 이번 사건의 주모자(主謀者)가 저자란 말입니까? 소문에 의하면 저자는 폐인이 되어 저잣거리를 돌며 구걸로 연명한다 들었습니다. 그것참, 별 희한한 일도 다 있습니다그려.”

 

“그러게 말입니다. 나는 상상도 못 했소이다. 아신어라하 때 나라에 큰 공을 세우신 진무(眞武) 장군의 조카에서 좀도둑으로 축출당한 자가 아직도 살아서 못된 짓을 했군요. 진가도는 참으로 명줄도 긴 자입니다. 진무 장군이 하늘에서 통탄할 것입니다.”

 

“저자가 이번에 병관좌평에게 걸렸으니 목숨 부지하기는 어려울 거요.”

“그럼, 저자가 팔수부인하고 모종의 음모를 꾸몄다는 거요?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나라에 저자 말고도 인재가 수두룩한데 하필이면 저런 시시풍덩한 만무방이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질렀단 말입니까?” 

 

“쉿-, 아무튼 지켜나 봅시다.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국문할 죄인은 두 명밖에 안 되는데도 국문장에는 병장기를 든 병졸들이 이중으로 철통 경비를 하고 있었다. 해구가 사관부장에게 손짓을 하자 부장이 나졸들에게 뭐라고 지시를 하였다. 나졸들이 우르르 몰려가 진가도와 연무상을 강제로 형틀에 앉혀졌다.

 

진가도와 연무상은 아래 윗도리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곧이어 구이신 왕이 비유공과 함께 국문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왕이 사관부 대청(大廳)에 좌정하고 비유공이 왕의 곁에 섰다.

 

“지금부터 어라하께서 나라의 기본을 흔들려다 체포된 진가도와 연무상을 국문하겠습니다. 국문에 참여하신 중신들께서는 잘 봐두시고 서기(書記)는 국문 내용을 빠짐없이 기록하기 바랍니다.”

해구가 큰소리로 외쳤다. 형벌을 담당하는 조정좌평 대신 군무(軍務)를 총괄하는 병관좌평이 개정을 알리자 중신들이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잠깐, 어라하의 위임을 받아 내가 죄인을 심문하겠소이다.”

 

비유공이 좌중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그가 구이신 왕을 대신하여 죄인을 국문하려는 이유는 행여 해구가 이상한 방향으로 국문을 이끌려는 의도가 있을까 우려해서였다. 비유공이 앞으로 나서자 해구의 안색이 금방 변했다. 비유공은 해구에게 백구단의 총수직을 맡겼지만, 해구의 심중을 의심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배를 탓지만, 생각은 달랐다.

 

‘아니, 비유공이 죄인들을 국문한다고? 나나 비유공은 사실 이 사건의 배후인데 이 사건의 심문을 맡는다면 무엇이 어찌 돌아가는 것인가? 이런 경우를 두고 오월동주(吳越同舟)라 하는 게 아닌가? 참으로 이상하게 되어가고 있구나. 일단 지켜보자. 만약 비유공이 나를 어찌해 볼 심산이라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야. 나는 백제의 병권(兵權)을 손에 쥐고 있으니, 그 누구도 나에게 대적할 수는 없다. 그 누구라는 범주에는 부여구이신과 부여신 그리고 부여비유와 기타 왕실 사람도 포함된다.’

 

해구는 비유공의 속내를 몰라 당황하였다. 비유공이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가 그들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진가도 앞에 섰다.

 

“나는 어라하의 위임을 받아 너희들을 국문하겠다. 먼저, 그대의 이름과 나이 그리고 사는 곳을 말하라. 응답하지 않는다고 하여 죄가 감면되지 않는다. 오히려 국왕을 능멸한 죄가 추가되어 형량만 더 가중될 뿐이니 명심하라.”

 

비유공의 질문에 진가도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해구는 비유공이 엉뚱한 질문을 할까 바짝 긴장하였다.

 

“나는 ‘진가도’라 하오. 예전에 조정에서 은솔 벼슬을 했소이다. 비유공도 나를 잘 알 것이오. 나이는 마흔일곱이고 한성에 살고 있소이다.”

 

진가도는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비교적 정확한 말로 대답했다. 이어서 비유공이 신문(訊問)을 이어나갔다.

 

“이 사건 전말서를 보면 팔수태후가 자경대라는 비밀조직을 동원하여 지금의 구이신 어라하를 폐위시키고 목만치를 백제의 군주로 옹립하려고 했다. 태후의 음모에 네가 호응하기 위하여 너는 사병 천여 명을 북산 계곡 산채에 수용하여 밤낮으로 군사훈련을 시켰다. 또한, 고구려에서 연무상이라 하는 저자를 끌어들이기도 했다. 이에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백구단이 산채를 급습하여 사병들을 모두 주살하고 너희 두 명을 사로잡아 사관부에 넘겼다. 이 전말서는 네가 자백한 내용을 근거로 사관부 관리들이 작성한 문건이다. 이 문서에 적힌 내용이 모두 사실이렷다?”

 

비유공의 낭창낭창하고 날카로운 목소리에 중신들은 기가 막힌 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도리질을 해댔다. 비유공의 국문 내용을 잠자코 듣고 있던 구이신 왕의 안색이 하얗게 변해있었다. 그는 해구의 보고 내용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러나 비유공의 입을 통해 생모인 팔수부인이 자신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려 했다는 말에 그는 멍한 표정으로 왕은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비유공, 모든 게 사실입니다. 팔수태후와 나는 사병을 양성하여 구이신 어라하를 강제로 폐위시키고 목만치 국사를 새로운 국왕으로 등극시키려 했습니다. 구이신 어라하가 늘 입에 약을 달고 사는 바람에 팔수태후께서는 어라하의 건강을 고려하여 벌써부터 그리하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조치는 자식을 위하는 어머니의 갸륵한 마음입니다. 다만, 이일이 성공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울 뿐입니다.”

 

진가도의 자백에 구이신 왕뿐만 아니라 중신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구이신 왕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날 해구가 보고한 내용을 믿지 않았지만, 진가도의 입에서 팔수부인의 사주가 있음을 자백하자 몹시 혼란스러웠다. 구이신 왕은 앉은 채 눈을 감고 깊은 상념에 빠진 듯 했다. 중신들도 옆 사람과 귓속말로 속살거리며 진가도의 자백 내용을 의심하는 듯 했다.

 

“네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거짓 자백을 하는 게 아니냐?”

비유공이 진가도를 다그쳤다.

 

“아닙니다. 제 말을 믿지 못하면 태후에게 물어보십시오. 나는 처음부터 이 일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는데. 태후께서 나에게 사정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억울합니다. 처음에는 도와달라는 말만 듣고 참가하였으나, 차차 이상한 음모를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빠져나갈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이놈, 그것이 정령 사실이라 하여도 너를 믿고 일을 맡긴 태후의 처지를 생각해서라도 입을 닫고 있어야 사내의 도리 아니냐? 네놈 목숨을 부지하고자 가볍게 입을 놀리면 되느냐?”

비유공이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이제 곧 죽을지도 모르는데 거짓말을 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옆에서 진가도의 자백을 듣고 있던 해구는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비유공 이어 연무상에게 다가가 그를 한번 노려보았다.

 

“그대는 이름과 국적 그리고 무슨 일로 여기에 잡혀 왔는지 소상히 말하라.”

 

“나는 고구려 사람으로 이름은 연무상이라 하오. 달포 전에 팔수태후로부터 연락을 받고 수하 열 명을 데리고 한성으로 왔소이다. 우리는 한 사람당 만 냥을 받고 고용되었소이다. 우리들의 임무는 진가도와 협력하여 사병을 조련하고 곧이어 무력을 동원하여 궁궐을 장악하는 것이오. 그다음에는 현재의 백제왕을 폐위시키고 목만치라는 자를 새로운 백제왕에 옹립하는 것이오, 팔수태후가 우리를 환영하는 행사장에서 직접 말한 내용이오. 거사가 완성되면 성공보수를 두 배로 지급하겠다고 약속까지 했소.”

 

연무상은 비유공의 물음에 답하며, 씩 웃어보기까지 했다. 구이신 왕은 연무상의 말에 또 한 번 충격을 받고 말았다. 진가도와 연무상이 같은 말을 하니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구이신 왕은 더는 국문장에 있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전으로 돌아갔다. 국문은 중단되었고 중신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어라하,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나는 그자들을 전혀 모릅니다. 그놈들이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나를 모함하려고 하는 짓거리입니다. 나는 어라하의 생모입니다. 어미가 어찌 아들의 앞길을 막는단 말입니까? 그리고 목만치는 이 어미와 뱃놀이 하러 가다가 괴한들에게 잡혀 한쪽 팔을 잃고 임나로 돌아갔습니다. 나 역시 그 괴한들에게 매를 맞아 아직도 엉덩이가 얼얼합니다. 억울합니다.”

“어머니, 고정하세요. 소자가 다시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어라하, 이일은 분명 해씨 세력들이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을 것입니다. 특히 해구가 이일을 주도하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놈을 당장 잡아다 물고를 내세요. 그놈은 선왕이신 전지어라하 때부터 위험한 놈이었습니다.”

 

팔수부인이 펄펄 뛰며 자신은 자경대라는 조직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발뺌했다. 긴장의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구이신 왕은 죄인들이 자백한 내용에 반신반의하는 반면에 조정 중신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팔수부인을 당장 궁에서 내치거나 내란죄로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소에 팔수부인의 편을 들던 관료들도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그녀를 조속히 처벌해야 한다고 왕을 압박했다. 그러나 구이신 왕은 팔수부인의 신병 처리를 놓고 이렇다 할 조치를 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구이신 왕이 팔수부인의 처결을 미루자 해구는 해씨들을 움직여 더욱 왕을 압박하도록 했다.

 

“어라하, 나라의 법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해야 하옵니다. 팔수태후는 본분을 망각하고 나라를 혼란에 빠트렸을 뿐만 아니라, 왕조의 주인을 바꾸려 했습니다. 목만치와 감탕질로 밤을 새우는 것도 모자라 저잣거리의 파락호들까지 끌어들여 음욕을 채웠습니다. 어젯밤에도 저잣거리의 왈패 한 명을 불러들여 밤을 새웠다 합니다. 태후는 이미 정상인의 범주를 벗어났습니다. 하루속히 단죄하여 국가의 근본을 바로 세우셔야 합니다. 가납하소서.”

 

“어라하, 팔수태후의 일을 눈감고 넘어가게 되면 제2, 제3의 국가 변란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일벌백계로 처결하소서.”

 

“어라하, 팔수태후는 전지어라하 생전에도 목만치와 은밀히 통정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목만치는 목만치대로 매관매직을 일삼아 천만금을 치부하였고, 태후는 태후대로 중앙에서 관직을 팔아 억만금을 긁어모았습니다. 두 사람을 당장 처형하여 국법을 엄히 세우셔야 하옵니다. 이제 백제는 팔수태후가 필요 없습니다.”

 

“어라하, 팔수태후는 어라하의 생모입니다만, 본분을 망각하고 목만치를 관등에도 없는 국사(國師)라는 자리까지 만들어 앉혔습니다. 태후와 목만치가 어라하 대신 진정으로 참된 청정(聽政)을 했다면 나라가 더 잘돼야 했습니다. 그러나 작금의 나라 꼴이 매우 혼란스럽고 백성들은 왕실을 욕하고 있습니다. 속히 팔수부인을 단죄하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 것입니다.”

 

“어라하, 팔수태후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빨리 태후의 죄를 단죄하소서. 저잣거리는 밤마다 태후를 처벌하라는 백성들의 시위와 집회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자칫 나라가 분열될까 심히 우려되옵니다.”

 

“어라하, 태후의 죄를 덮어두었다가 어라하께 화살이 갈 수도 있습니다. 한시가 급하옵니다. 수많은 성난 백성들이 궁성 밖에서 농성하고 있습니다. 사태를 안이하게 보시다가 내란이 일어날 수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중신들은 구이신 왕 앞에서 공공연히 팔수부인을 하대하기까지 했다. 중신들은 구이신 왕을 우습게 보는 게 분명했다. 팔수부인이 군사를 일으켜 국왕을 교체하여 역성(易姓)하려 했다는 소문이 백성들 사이에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또한, 이제는 구이신 왕이 반역을 획책한 팔수부인과 목만치를 법으로 다스리지 못하고 그냥 묻어두려고 한다는 말까지 돌면서 조정과 도성 안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고 말았다. 조정 중신들은 이제 팔수부인을 공공연히 죄인으로 취급하며, 구이신 왕에게 벌을 내리라고 주청하였으나 왕은 묵묵부답이었다.

 

“구이신은 왕의 자격이 부족하다. 왕을 갈아야 한다.”

“구이신어라하는 결단력도 없고 오로지 제 어미만 감싸려 든다. 그런 자는 왕이 될 자격이 못 된다. 속히 권좌에서 끌어내려야 한다.”

 

“구이신은 절대로 팔수와 목만치를 단죄하지 못할 것이다.”

“구이신을 끌어내리고 상좌평 부여신(扶餘信)을 옹립하자.”

 

“부여신은 늙었다. 젊고 명석하며, 백성을 위할 줄 아는 비유공(毗有公)을 새로운 어라하로 추대하자.”

“병관좌평 해구도 나라를 안정되게 이끌만한 인재다.”

 

“차라리 팔수를 여왕으로 옹립하는 편이 좋겠다.”

“이게 나라냐? 이러다가 고구려나 계림국에게 먹힐라.”

 

조정에 출사하는 대소신료들은 모이기만 하면 구이신 왕의 우유부단을 탓하며, 이전의 처결까지 들춰내며 성토하기 바빴다. 구이신 왕과 팔수부인은 조정이 잠잠해지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조정과 한성의 분위기는 날이 갈수록 악화하였다. 이를 보다 못한 상좌평 부여신까지 나서서 구이신 왕에게 결단을 촉구했으나, 구이신 왕은 갈팡질팡할 뿐 처결을 내리지 못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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