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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모(3)

* 창작공간/단편 - 김옥모

by 여강 최재효 2020. 7. 22.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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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역사소설은 신라 초창기에 박,석,김씨들이 왕위를 놓고 치열하게 정쟁을 벌일 때

                            박,석씨들을 물리치고 본격적으로 김씨 왕조 700년 역사를 연 여걸 김옥모(金玉帽)

                            태후에 관한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많은 감상 부탁드립니다.

 

 

 

 

 

 

 

                                               김옥모

 

                                                                                                                                 - 여강 최재효

 

                                                   3

 

고구려의 정치체제는 5부 연맹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왕족인 계루부가 가장 정치적 영향력이 크고 다음으로는 전통적으로 왕비를 배출해온 연나부(椽那部)였다. 왕비 연씨(椽氏)와 관나부인의 암투가 심하여 날이 갈수록 가관이었다.

 

관나부인은 얼굴이 아름답고 머리카락의 길이가 아홉 자나 되었으며, 이미 선왕인 동천 태왕에게 승은(承恩)을 입었던 전력이 있었다. 그때 연왕비도 관나부인과 함께 동천 태왕을 모시며 의자매를 맺게 되었는데, 동천 태왕이 붕어하자 두 사람 모두 연불 태왕의 후비가 되었다.

 

아들이 아버지의 총애를 받던 소비(小妃)들을 거두어 자신의 후비(后妃)로 삼은 것이다. 고구려의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가 그러한 일을 가능하게 했다. 연왕후가 낳은 아들 약로(藥盧)가 고구려의 태자가 되자 연왕후는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관나부인을 우습게 알고 하대하면서 두 사람은 원수 관계가 되고 말았다. 이에 질투심이 극에 달한 관나부인이 태왕에게 연왕비가 한때 붕어한 동천태왕을 모신 일을 일러바쳤다. 이에 태왕은 연왕비를 천박하게 여겨 점차 멀리했다.

 

관나부인과 태왕 사이에도 아들 공()이 있었다. 그녀는 태왕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연왕비를 끊임없이 질투하고 시기하였다. 그녀는 궁중에 무녀(巫女)를 불러들여 연왕비를 저주하게 했다. 태왕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차츰 관나부인도 멀리하고 새로 들어온 후궁 연감(淵甘)에게 관심을 보였.

 

어느 날 태왕이 연왕비의 처소에 들자 왕비는 관나부인이 예전에 동천태왕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사실을 고해바쳤다. 그리고 그녀는 위나라 황제가 장발의 여인을 좋아하니 관나부인을 그에게 시집보내라고 태왕에게 간청했다.

 

태왕이 연감과 기구(箕丘)로 사냥 간 틈을 타 연왕비와 관나부인은 육탄전을 벌이며 궁성을 소란스럽게 했다. 태왕이 돌아오자 관나부인은 태왕을 찾아가 울면서 연왕비가 자신을 쇠가죽 부대에 넣어 죽이려고 했다며 하소연했다.

 

태왕은 연왕비와 관나부인이 싸우는 것에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관나부인의 하소연은 결국 거짓으로 밝혀졌고 이에 대노(大怒)한 태왕은 관나부인을 처벌하였다.

 

관나를 쇠가죽 부대에 넣어 서하(西河)에 던져버려라.”

 

관나부인은 나이 겨우 21살인데 스스로 투기로 인하여 명을 재촉하고 말았다. 고구려 왕실에 여인들로 인하여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치고 나서 안정을 찾을 때쯤이었다. 계림국의 태후와 석정 공주가 온다는 보고를 받은 태왕은 기대에 차 있었다. 열 여인 마다하지 않는 그의 타고난 성정(性情)은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태왕은 신하들을 국경까지 보내 그미와 석정 공주를 영접하게 했다.

 

“태왕 폐하의 성은이 하해와 같나이다. 소신은 계림국의 태후 김옥모라 하옵고, 이 아이는 소신의 딸 석정이옵니다.”

 

그미와 석정 공주가 고구려 왕궁에 들어 태왕에게 공손히 예를 올렸다. 고구려는 대국이고 계림국은 보잘것없는 소국이라 생각하여 그미는 스스로 태왕의 신하라 자청했다. 대소신료들은 고구려가 건국된 이후로 처음 있는 신기한 일이라며 절색(絶色)의 모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 여인이 계림국의 옥모 태후라고? 아, 한 마리 고고한 황새로다. 이제까지 짐과 인연을 맺은 관나부인이나 연감 등은 한낱 참새나 뱁새에 불과하다. 하늘은 왜 이제야 나에게 황새를 보낸 것일까? 피부는 백옥보다 더 희고 매끈하며, 웃을 때면 생기있게 보이는 단순호치(丹脣皓齒)는 음양의 조화를 이미 터득하고 남음이 있어 보인다. 반달처럼 생긴 짙은 아미(蛾眉)와 상아로 깎아 놓은 듯한 얼굴은 수많은 사내 가슴에 불을 지펴놓았을 것이다.

 

어쩐지 며칠 전부터 꿈속에 한 미인이 나타나 잠을 설치게 하더니만, 그 가인이 바로 옥모 태후였구나. 그 옆에 서 있는 아이는 짐에게 시집올 계림국 공주일 테고. 그런데 어찌 된 것이 어미는 월궁 항아(姮娥) 뺨치는 미모인데, 저 아이는 아직도 젓 냄새가 덜 가신 듯 하다. 이삼 년쯤 지나야 원숙한 여인 티가 좀 나겠어.’

 

태왕은 한동안 정신이 나간 듯 넋을 잃고 모녀를 바라보았다. 중신들이 헛기침하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온 듯 태왕은 눈을 한번 비비고 나서 모녀를 반겼다.

 

“오, 과연, 과연 두 사람 모두 듣던 대로 경국지색입니다. 서천에서 강림하신 *서왕모(西王母)와 그의 딸 요희(瑤姬)가 틀림없습니다. 어서, 어서 이리 가까이 오세요. 짐은 두 분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밤잠도 잊은 채 뜬눈으로 지새워 속이 은결들 정도랍니다. 짐의 이 목 좀 보세요. 학(鶴)의 목이 되고 말았습니다.”

 

영명한 태왕이 모녀를 보더니 갑자기 어둔한 몸짓으로 허둥거렸다. 태왕은 중신들의 입을 통해 그미와 석정 공주의 면면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미와 공주를 직접 가까이 보니 태왕은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마구발방으로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할 지경이었다.

 

신선의 세계를 동경하는 태왕은 자신도 모르게 그미를 여자 신선 중의 최고의 존재로 추앙받고 있는 서왕모라 하였고, 석정 공주를 서왕모의 딸이며 *요지(瑤池) 최고의 미인으로 알려진 요희라고 불렀다.

 

* 서왕모 - 도교 신화에 나오는 불사의 여선(女仙)으로 모든 신선을 관리 감독하는 일을 한다.

* 요지 – 곤륜산(崑崙山)에 있는 곳으로 서왕모가 살고 있는데, 3천 년에 한 번 열리는 반도(蟠桃- 복숭아)

               나무와 십장생(十長生), 기화요초들 사철 만발해 있다.

 

“소신, 폐하를 알현하오니, *주목왕(周穆王)이나 *유철(劉徹)은 감히 비견될 수도 없으며, *동왕공(東王公)이 강림하신 줄 알았사옵니다. 참으로 선풍도골이오며, 대제국의 주인이십니다. 소신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폐하 같은 헌헌장부는 처음 뵙습니다.”

그미의 찬사에 태왕은 지리산 가리산 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짐을 그리 높게 평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멀리 계림국에서 서왕모가 오셨으니 *반도연회(蟠桃宴會)를 열어야겠습니다.”

 

“폐하, 그렇다면 소신이 고래의 눈, 곰 발바닥, 기린 입술, 용의 간으로 맛있는 요리를 준비하고, 삼천 년에 한 번 열리는 반도(蟠桃)도 푸짐하게 준비하여 잔치를 흥겹게 만들어 보겠나이다.”

 

“오호라! 염화미소로다. 이심전심이로다. 옥모 태후, 아니 서왕모께서 손수 준비를 하신다니 짐은 복이 많은 사내가 분명합니다.”

 

태왕의 이상한 태도에 중신들도 어리벙벙해졌다. 대전 안에 있던 사람들도 모녀의 화려한 미모와 태도에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공교롭게도 태왕과 그미는 도가(道家)에 관하여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중신들은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의 뜻을 몰라 우두망찰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 주목왕 – 주나라 제5대 왕으로 요지에서 서왕모를 만나 연회를 즐겼다고 함.

* 유철 – 한나라 제7대 황제인 한무제로 서왕모를 초빙하여 연회를 즐겼다는 전설이 있음.

* 동왕공 – 서왕모와 혼인한 사이로 부상대제동왕공(扶桑大帝東王公)이라고도 불림.

* 반도연회 – 서왕모의 생일이나 큰 회의가 있을 때 요지에서 행해지는 연회로 산해진미와 3천 년에 한 번

                  열리는 복숭아가 제공된다고 함.

 

‘태왕께서 좀 이상하다? 태왕과 혼인할 사람은 난데 모후만 바라보니, 혹시 태왕이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멀리서 온 신붓감을 몰라보다니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했나? 어머니가 태왕보다 나이가 더 많은데, 태왕은 연상의 여인을 좋아하는 취향을 지녔나 보다. 계림국에서 보낸 사신이 고구려와 계림국 간의 국혼(國婚)에 관하여 자초지종을 전했을 터인데…….’

 

석정 공주는 혼잣말로 중절거리다 용기를 냈다. 가만히 있으면 어머니 때문에

자신은 태왕의 관심 밖으로 밀려날 것만 같았다.

 

“폐하, 소녀는 계림국 세신갈문왕(世神葛文王) 석골정과 김옥모 태후의 둘째 딸로 폐하께 의탁하고자 불원천리하고 고구려를 찾아왔사옵니다. 부디, 소녀를 어여삐 여기시고 거두어주시기를 간청하나이다.”

 

“오, 그대가 옥모 태후의 딸이며 첨해이사금의 친동생 석정 공주라 했겠다? 과연 그 어미에 그 딸이로다. 어쩌면 그리도 어미를 빼닮아 절세가인일꼬? 잘 왔구나. 짐이 장차 그대를 어여삐 여길 것이니라.”

 

‘장차 어여삐 여긴다?’

 

“폐하, 소녀는, 소녀는 두 나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들고 폐하의 옥체를 더욱 강하게 보전하는 데 도움이 되는 폐첩(嬖妾)이 되고자 하나이다. 어머니는 곧 계림국으로 돌아가실 겁니다.”

 

석정 공주가 일부러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미가 돌아간다는 말을 하자 태왕은 펄쩍 뛰었다. 그미는 철딱서니 없는 딸의 허리를 쿡쿡 찔렀다. 그미의 반응에 석정 공주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 폐첩 – 귀여움을 받는 첩

 

“아, 안 된다. 짐의 윤허가 있기 전에는 태후는 고구려를 떠날 수 없구나.”

 

“폐하, 소신은 고구려와 계림국의 돈독한 유대관계를 맺고 싶어 딸과 수천 리 국내성(國內城)까지 왔나이다. 양국의 관계가 사이좋은 형제처럼 될 때까지 고구려에 머물 것이니 염려하지 마소서. 또한, 폐하께서 소신을 서왕모라 칭하시니 어찌 지아비인 동왕공을 두고 떠날 수 있겠나이까?

곤륜산 위에는 크고 높은 기둥이 있는데 하늘에 닿는다고 했습니다. 이 천주(天柱)는 길이가 삼천리이고 기둥주위에는 신선들이 모여 사는 선인구부(仙人九府)가 있습니다. 그곳에 큰 새 한 마리가 사는데 희유(希有)라고 합니다. 그 새의 척추 부분이 일만 구천리라 하는데, 울지도 않고 먹지도 않으며, 늘 남쪽을 향해 서서 날개를 펴고 있습니다.

 

동왕공은 이 새의 좌측 날개 밑에 살고, 서왕모는 우측 날개 아래 살면서 희유의 날개 위로 올라가 회포를 푼다고 했습니다. 동왕공이신 폐하께서도 저희 모녀를 희유 오른쪽 날개 아래 사는 서왕모와 요희로 여기시고 어여삐 여기시면 각골난망이겠습니다.”

 

태왕은 그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본인과 통하는 부분에서는 ‘그렇지’, ‘그럼’ 하며 맞장구를 쳤다.

 

“좋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짐이 오랜만에 태후와 더불어 도가의 전설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석정 공주는 짐의 다의(茶儀) 역할을 맡길 것이니, 그리 알고 정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다음에 택일하여 혼례식을 거행할 예정입니다.”

 

태왕은 그날 저녁 그미와 석정 공주를 환영하는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에는 고구려 조정의 대소신료들은 물론 왕실 인사들도 대거 참석하였다. 태왕은 대제국의 군주로서 그미에게 위신을 세우고 싶었다. 소와 돼지 수백 마리를 잡고 이웃 나라에서 조공으로 바친 산해진미가 주연상 위에 태산같이 올려졌다.

 

그날은 태왕의 명령에 따라 대궐 앞마당과 궁성 밖에도 임시 천막을 치고 도성에 사는 백성들까지 불러 고기와 술을 배불리 먹도록 했다. 온 성이 떠나갈 듯 왁자했다. 오늘같이 태왕이 도성 백성들까지 불러 주연을 베푸는 일은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볼 수 있는 진풍경이었다. 백성들은 모두 저잣거리로 나와 먹고 마시며 태왕과 계림국 태후 이야기에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과연 연불 태왕은 통이 크고 대인의 풍모를 지니셨어. 우리 같은 무지렁이에게도 술과 고기를 내리시니 지금이 바로 태평성대가 아니겠는가?”

 

“이보게 흥부, 이게 무슨 술인지 알기나 하는 거여? 이 술은 국혼을 축하하는 술이야. 태왕께서 계림국 옥모 태후와 혼인을 하신대.”

 

“아니야, 놀부 자네가 잘못 알고 있네. 옥모 태후가 아니라 태후의 딸 석정 공주와 국혼을 하는 거래. 똑바로 알고 떠들라고. 모르면 술이나 마시고.”

백성들은 술을 마셔대면서 태왕을 칭찬하느라 열을 올렸다.

 

“예쁜 여인이라면 환장하는 태왕께서 저절로 굴러온 호박 두 개를 그냥 둘 것 같은가? 하나는 구워 먹고, 또 한 개는 호떡을 만들어 먹겠지. 지난봄에 서하에 수장(水葬)당한 관나부인만 억울하게 되었네. 지금쯤 원귀(冤鬼)가 되어 구천을 떠돌고 있을 거야.”

 

“이 사람아, 목이 몇 개라도 되는가? 말조심하게.”

 

“말똥이 말이 맞네. 우리 같은 사람은 평생 여인네 고샅 구경이나 한번 할 수도 없는데, 궁성에 비빈이 넘쳐나지 않는가? 그런데 멀리 계림국에서 두 마리 암 여우가 제 발로 왔으니 태왕은 오죽이나 좋겠는가?”

 

술에 취한 사내들은 옆에 관리나 군사들이 있어도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모두가 취한 상태라 태왕을 험담하든 또는 칭찬하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소문을 듣고 국내성 밖에 사는 가난한 백성들도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궁성과 저잣거리는 밤새도록 불야성을 이루었다.

 

 

아낙네들도 삼삼오오 모여 술과 고기로 배를 채우며, 태왕의 후덕함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가난한 백성들은 먹다 남은 음식을 보자기에 싸가기도 하고 억지로 뱃속으로 구겨 넣기도 했다.

 

“쇠똥어멈, 많이 드슈. 오늘같이 태왕께서 베푸실 때 안 먹으면 평생 후회한다구. 고기가 목구멍에 찰 때까지 먹어두라구.”

 

“대식 어멈도 배가 터지도록 드시구랴. 태왕님 만세야.”

 

궁궐에서는 환락의 밤이 절정을 향하고 있었다. 연회장 한가운데에 마련된 주연상에는 태왕과 그미가 마치 부부라도 되는 것처럼 다정하게 앉고 좌우로 석정 공주와 태왕의 비빈들이 앉았다. 왕비 대신 타국의 태후를 고구려 태왕 옆에 앉히는 것은 전례가 없는 파격적인 조치였으나, 비빈들은 태왕의 의도를 짐작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미의 미모와 빼어난 자태는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석정 공주 역시 그미에 버금갈 정도로 화려한 맵시를 자랑하였다. 태왕의 늙은 전태후와 연왕비 등 비빈들은 자신들의 추레한 모습에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였다. 백여 명의 악사가 연주하는 풍악이 울리자 속살이 훤히 드러나는 날개옷을 입은 젊은 무희(舞姬)들이 춤을 추며 연회장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이미 반쯤 취한 중신들은 무희들의 뒤태에 혼이 나가 해롱거렸다. 젊은 신료들은 무희와 시선이 마주치면 벼락을 맞은 것처럼 전율하면서 눈동자가 뒤집히기도 했다. 연회장을 오가면 시중을 드는 시녀들 역시 날개옷을 입은 터라 엉큼한 신하들은 시녀들의 엉덩이를 슬쩍 만져보기도 했다.

 

 

시녀들은 마음에 드는 사내면 눈을 찡긋하며 미소를 지었고, 사내는 얼른 은자(銀子)를 시녀 앞가슴 사이에 넣어주기도 했다. 마음에 없는 사내가 건드리면 시녀는 눈을 흘기며 무서운 얼굴로 노려보았다.

 

태왕이 앉은 뒤로 화려한 병풍이 펼쳐져 있는데 보기만 해도 병풍에 그려진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림은 곤륜산 요지에서 아름다운 서왕모와 주목공이 연회를 즐기는 장면이 분홍색 비단 위에 오색 실로 수 놓여 있었다.

 

그들 주변에는 삼천 년에 한 번 열리는 반도(蟠桃)와 청송, 괴석, 기린, 공작, 사슴, 학 등이 그려져 있었다. 서왕모와 주목공은 궁녀와 시종을 거느리고 주연상에 앉아 봉황과 선녀들의 춤을 감상하며 여흥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무척 황홀해 보였다.

 

“태후, 짐과 춤 한번 춰보지 않겠습니까?”

 

어느 정도 취기가 올라 기분이 좋아진 태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미는 민망하여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았다. 석정 공주가 그미와 시선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었다. 석정 공주의 하얀 미소속에는 지아비가 될 태왕에 대한 연민과 그미에 대한 게염이 진하게 녹아있었다.

 

“폐하, 비빈들과 중신들 눈이 있습니다.”

“태후, 짐은 고구려의 주인입니다. 짐의 말이 곧 법이고, 만백성은 짐의 말을 따라야 합니다. 비빈들 역시 짐의 백성들입니다. 짐이 흥겨워 태후와 춤을 추고자 하는데 어느 누가 감히 뭐라 하겠습니까?”

 

태왕이 춤을 추고 싶어 하는 의지가 너무나 확고하여 그미는 못 이기는 척 태왕의 손을 잡고 무대 한가운데로 나갔다. 태왕의 모후이면서 동시에 후비(后妃)인 전(鱣)태후와 연(椽) 왕비를 비롯한 태왕의 비빈들은 충격을 받았다. 이제껏 태왕이 공식적인 연회장에서 비빈의 손을 잡고 무대로 나가 춤을 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연회장에 앉아 있던 수많은 대소신료는 비빈들의 눈치를 보며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몰라 더펄이처럼 갈팡질팡했다. 태왕과 그미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무대에 오르자 일순간 연회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태왕이 악공들을 향해 수신호를 보내자 풍악이 울렸다.

 

“폐하, 소신을 이리 환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그미가 춤을 추면서 태왕의 귀에 대고 속살거렸다.

 

“짐은 세상에 태어나 오늘처럼 행복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동안 어디 있다가 이제야 짐 앞에 나타나셨습니까? 태후를 처음 본 순간 짐은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숨을 쉴 수도 없었습니다. 평생을 꿈속에서 그리워하던 몽인(夢人)을 이제야 만났습니다. 태후는 이제부터 짐의 허락 없이는 움직이면 안 됩니다.”

 

태왕이 두 팔을 높이 들고 그미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미도 태왕의 춤사위에 맞춰 온갖 교태(嬌態)를 부려가며 태왕의 혼을 뺐다. 악사들 옆에 서 있던 무희들이 나와 태왕과 그미를 빙 둘러싸고 춤을 추었다. 나이가 든 중신들은 환상적인 모습에 두 눈을 비비며 무대에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곧이어 젊은 신료들은 손뼉을 쳐대며 ‘폐하 만세’, ‘옥모 태후 천세’를 외쳤다.

 

‘아,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구나. 나는 계림국의 태후로서 석정 공주를 태왕에게 시집보내려고 왔거늘, 태왕은 자꾸만 이상한 말만 하는구나.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석정 공주가 태왕의 속내를 알면 크게 실망할 텐데.’

 

연회장은 순식간에 태왕과 그미 그리고 무희들이 발산하는 열기에 휩싸여 흥분의 도가니가 되고 말았다. 석정 공주도 박수를 쳐대며 모후와 태왕의 아름다운 만남을 축하했다. 그러나 전태후와 연 왕비를 비롯한 비빈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빈 술잔만 만지작거리며 깊은 생각에 빠진 듯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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