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 최강자로 우뚝 선 고구려의 태왕은 동천 태왕의 아들 고연불(高然弗)이었다. 추모왕 고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280여 년이 지난 뒤라 국가의 기틀은 확고하고 공고했으며, 서방의 위(魏)나라와 자웅을 겨룰 만큼 국력이 막강하여 만방에서 조공을 바치는 나라가 줄을 설 정도였다.
태왕은 아버지를 닮아 팔척장신에 무부(武夫)의 기질을 타고난 호남이었다. 부왕의 갑작스러운 붕어에 25살 청년 연불이 졸지에 대제국 고구려의 지존이 되었다. 즉위 초기에는 선왕이 *짐독(鴆毒)으로 독살되었다는 소문으로 인하여 태왕의 두 동생인 예물(預物)과 사구(奢句) 등이 모반하였다가 처형되었다.
태왕은 연나부 출신 국상인 명림어수의 절대적인 협조로 국내 정세를 안정시키고 대외 사업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태왕은 즉위한 뒤로 백제의 호전적인 군주 고이왕(古爾王)과 자주 부딪쳐 여러 차례 국지전을 치르기도 했다.
태왕은 여성 편력이 심한 편이었다. 그는 선왕의 비(妃)이며 모후인 명림전(明臨鱣) 태후, 연나부 출신 왕비 연씨(椽氏), 요(要)공주, 관나부 출신 관나부인, 잠후(蚕后), 주후(朱后), 연감(淵甘) 등 여러 명의 비빈(妃嬪)을 두고 있었다. 어머니를 후비로 둔 것은 형사취수제에 따른 전통 때문이었다. 요즘 들어 태왕이 관나부인 처소에 드나드는 일이 빈번해지자 연 왕비와 다른 후궁들의 신경이 무척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 짐독 - 짐새에서 얻은 독을 짐독(鴆毒)이라고 하는데, 짐독은 독 중에서 가장 강력하여 고구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했다.
“이사금, 우리 계림국이 기댈 수 있는 곳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고구려밖에 없습니다. 백제와 왜국, 말갈 등이 우리 계림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고구려와 계림국이 한번 국경에서 군사들이 심하게 부딪힌 적은 있었지만, 지금은 우리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나라의 앞날을 알 수가 없으니, 속히 고구려와 동맹을 맺어야 합니다.”
“모후, 소자는 고구려 태왕이 어떤 인물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미와 첨해(沾解)이사금이 머리를 맞대고 심각한 표정으로 국정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 곁에는 그미의 둘째 딸 석정(昔精) 공주가 다소곳이 앉아서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석정은 그미보다는 다소 떨어지기는 하지만 서라벌에서 소문난 미녀였다. 계림국에서 제법 큰소리 좀 친다는 가문에서는 금은보화를 바리바리 싸 들고 석정 공주를 며느리로 들이기 위해서 그미를 찾아왔으나 그미는 코웃음만 쳤다. 그미의 깊은 속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계림국의 아홉 번째 군주인 벌휴이사금이 붕어하자 석씨 가문은 크게 둘로 갈렸다. 하나는 벌휴이사금의 큰아들 골정의 계보를 잇는 골정계(骨正系)와 벌휴이사금의 둘째 아들 이매의 혈통을 잇는 이매계(伊買系)였다.
첨해는 형 조분 이사금의 뒤를 이어 군주가 되자 요절한 아버지 골정을 세신갈문왕(世神葛文王)으로 추봉했다. 지아비가 갈문왕에 추봉되면서 그미는 계림국의 태후가 되었고, 석정은 공주가 되었다. 그미는 어느새 아들 첨해이사금을 능가하는 계림국 최고의 권력자가 된 것이었다.
첨해이사금 앞으로 항렬이 같은 두 명의 이사금이 있었다. 바로 내해와 조분이사금이었다. 계림국 열 번째 내해이사금이 붕어하고 그 뒤를 그미의 큰아들 조분(助賁)이 군주의 자리에 올랐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붕어하였다. 조분이사금의 뒤를 이어 아우 첨해가 계림국의 열두 번째 군주가 된 것이다.
내해이사금이 붕어할 때 그에게는 태자인 우로(于老)와 이음(利音)이 있었다. 우로와 이음의 생모는 바로 그미의 딸 수로부인이었다. 우로와 이음 형제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주가 되지 못한 것에 한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외할머니인 그미와 어머니 수로부인 때문에 밖으로 울분을 표출할 수 없는 처지였다. 내해이사금이 평탄한 군주 역할을 하고 임종 전에 두 아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우로야, 이음아, 아비의 유언을 잘 새겨들어라. 내가 죽거든 내 뒤를 이을 사람은 조분이다. 너희들은 군주의 자리를 탐내면 절대로 안 된다.’
첨해이사금은 이찬 장훤(長萱)을 *서불한(舒弗邯)으로 삼아 국정을 맡기고 양부(良夫)를 이찬으로 삼았다. 궁궐 근처에 남당(南堂)을 짓고서 그곳에서 주로 국정을 처리했다.
* 서불한 - 계림국 17관등 중의 1등 관위로 우벌찬(于伐飡), 각간(角干), ·이벌찬(伊伐飡)이라고도 하였다.
첨해이사금 즉위 이듬해 사벌국이 계림국에 반기를 들고 백제에 귀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계림국은 우로(于老)를 파견하여 전쟁을 벌여야 했다. 계림국은 겨우 사벌국을 제압했지만, 왜국의 침입으로 심각한 상황을 맞기도 했다.
이때 왜 열도는 산과 섬에 의지하여 30여 개의 읍락국가(邑落國家)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야마타이국(邪馬台国)이 가장 강력하여 열도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다. 히미코(卑彌呼) 여왕이 야마타이국을 다스렸는데 그녀가 죽고 뒤를 이어 현재는 이요(壹與) 여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공주야, 네가 나라를 위하여 큰일을 할 때가 된 듯하구나.”
“모후,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 소녀는 얼른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나라를 위하는 일은 꼭 사내들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어쩌면 사내들보다 여인네들이 훨씬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남자가 아니다. 제왕의 이불 속에서 세상의 모든 일이 정해지기도 하고 없었던 일이 되기도 한단다.”
그미는 바르게 자란 석정 공주를 바라보며 대견해 했다. 아비 없이 자란 탓에 행여 성격이 삐뚤어지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했다. 그미의 큰딸 수로부인은 내해이사금과 혼인하여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지만, 이제는 미망인이 되었다. 그미는 고구려에 첩자를 보내 고구려 왕실의 사정을 알아보게 했다.
그미가 고구려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백제와 왜국의 침략을 막강한 고구려의 힘을 빌려 막아보려는 셈속이 있어서였다. 또한, 최근 들어 이매 계열의 외손들이나 박씨 족벌(族閥)들의 움직임이 감지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머지않아 계림국에서 피바람을 부르는 정치적인 대격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그미를 더욱 초조하게 했다.
“모후, 소자도 모후의 말씀을 잘 모르겠습니다.”
“이사금께서는 당연히 모르실 테지요. 이 어미만큼 남삼한과 대륙 그리고 주변국들의 정세(政勢)를 잘 아는 이가 또 누가 있겠습니까? 군주가 된 지 사 년이 지났으니, 이제는 이사금도 권력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입니다.”
“모후, 아직도 소자는 정치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미는 갑자기 첨해이사금이 덩둘해 보이자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공주는 이 어미와 함께 고구려로 가자. 지금의 계림국은 내외 우환으로 폭풍 전야와 같은 상태다. 네가 조국을 구하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 같다. 이일은 어미가 하룻밤 만에 결정한 게 아니다. 지난 수년 동안 수백 수천 번도 더 고민하고 번민한 결과다. 너희 남매는 무조건 어미의 말에 이의를 달지 않고 따라주기를 바란다.”
“모후, 공주를 고구려 태왕에게 바치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이제야 그미의 말귀를 알아들은 첨해이사금이 놀란 안색으로 물었다.
“모후, 소녀는 모후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하오나, 고구려 태왕 정도면 궁궐에 이미 여러 명의 절세가인이나 아름다운 비빈(妃嬪)이 있을 터인데, 소녀를 가까이하지 않으면 어찌하나요?”
“여인이 사내를 후리는 일은 얼굴로 하는 게 아니다.”
그날부터 그미는 석정 공주에게 규방의 비술(祕術)을 전수하였다. 그미는 이미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상태로 귀족사회의 사내들 취향과 그들의 기호(嗜好)를 완전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고구려, 백제, 계림국 왕실 사내들의 최대관심사는 영토확장을 위한 주변국 정복 전쟁이 아닌 *어녀술(御女術)이었다.
특히 자신이 영웅호걸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호기를 부리는 사내들의 경우에는 여인의 호감을 사고 잠자리까지 이어지는 신비한 묘술을 터득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 그림을 잘 보아라. 남녀의 그것은 세상을 창조하는 신묘한 영물이란다. 여인은 본 임무인 후손을 생산하고 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다음 단계란 바로 지아비가 지극한 행복감을 맛보게 해줘야 한다. 아무리 얼굴이 예쁘더라도 비단 금침 위에서 지아비의 혼을 빼놓지 못하면 쫓겨나게 된다.”
“모후, 망측스러워요.”
석정 공주는 그미가 보여주는 규방 비술이 그려진 화첩(畫帖)을 보며 얼굴을 붉혔다. 어머니와 딸이 묘한 그림을 보며 사내를 어찌하면 단박에 자신의 사람을 만들 수 있는지 연구하는 모습이 무척 낯설었다. 딸에게 운우(雲雨)의 기교를 가르치는 그미나 배우는 석정 공주나 얼굴을 붉히기는 마찬가지였다.
* 어녀술 - 잠자리에서 남성이 여성을 다루는 기술.
“잘 들어봐라. 방중술이란, 음양(陰陽)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올바른 교접을 통해 인간의 기(氣)를 원활하게 유통시켜 천수(天壽)를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것이 핵심이란다. 즉,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억압하거나 방종하게 사용하지 않고 올바르게 발산하면 음양의 이기(二氣)가 조화를 이루어 불로장수할 수 있단다.
지나치게 방사를 가져도 안 되고 그렇다고 무조건 금욕을 해서도 안 된다. 규방술은 철저하게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게 목적이고 남녀의 관계를 그 수단으로 삼고 있을 뿐이다. 철저히 본질에 접근해야 규방술의 진정한 뜻을 이룰 수 있단다.”
“모후, 소녀는 아직 사내를 받아들인 적이 없습니다. 항간에는 남녀가 관계하기 전에 어떤 묘약을 쓰면 좋다고 하는데, 그 묘약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석정 공주는 사내와 관계를 맺지 않았을 뿐 그 방면에 상당한 것을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미도 딸이 사내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석정 공주는 온상에서 자란 화초(花草)와도 같았다.
“어미가 애용하던 묘약 하나를 소개하마. 그 묘약은 네가 고구려에 갈 때 어미가 다량으로 만들어 너에게 줄 것이야. 말벌집인 노봉방(露蜂房)을 채취해서 하룻밤 눌러 놓은 후 명주로 만든 주머니 속에 집어넣어 장대에 걸어 백일 동안 그늘에 말린다.
합방하기 전에 그것을 소량을 항아리 속에 넣고 볶는다. 검은색 재가 하얀색 재로 변할 때까지 볶고는 그것 반 푼(分)을 따뜻한 술과 함께 복용하고 또 반 푼(分)은 손바닥에 놓고 타액으로 짓이겨 양물(陽物)에 발라주면 사내가 효험을 볼 수 있단다.”
“모후, 참으로 흥미가 있습니다.”
그미의 설명에 석정 공주의 눈망울이 샛별처럼 빛났다. 모녀는 밤마다 함께하면서 각종 규방 비서(祕書)를 보며 남녀의 다양한 체위와 음양의 조화에 관하여 연구하거나 목각인형으로 실전에 가까운 연습을 하였다. 그미의 구체적이고 흥미진진한 설명과 실험은 석정을 어느새 황제(黃帝)에게 소녀경(素女經)을 가리키던 채녀(采女)의 수준에 버금갈 만큼 경지에 오르게 했다.
“소녀경에서 말한 팔익 중에서 칠익(七益)이 무엇이더냐?”
그미가 어느 날 석정 공주에게 물었다.
“그것은 익액(益液)이라 하며 음양의 접점에서 일흔두 번 헤아려서 시행하고 마치면 즉시 중지하옵나이다. 이를 시행하오면 사람의 뼈에 골수가 가득 차 뼈가 단단해지옵나이다. 활짝 핀 꽃이나 꿀을 따는 벌에게 모두 이득이 되지요.”
“그만하면 너도 어느 정도는 경지에 이른듯하구나.”
무서리가 내린 늦가을 그미는 석정 공주와 고구려로 향했다. 첨해이사금이 국경까지 가서 고구려로 가는 그미와 공주를 전송했다. 계림국의 태후가 공주와 함께 고구려로 가는 일은 처음 있는 대사건이기도 했다. 이미 한 달 전에 첨해이사금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그미와 석정 공주의 방문과 목적을 알렸다.
모녀의 고구려 방문은 단순히 친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첨해이사금은 여동생 석정 공주의 예물로 금은보화와 계림국의 특산물을 수십여 대의 우마차에 실어 보냈다. 고구려 국경으로 향하는 그미의 일행이 십여 리에 걸쳐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