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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모(1)

* 창작공간/단편 - 김옥모

by 여강 최재효 2020. 7. 17.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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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역사소설은 신라 초창기에 박,석,김씨들이 왕위를 놓고 치열하게 정쟁을 벌일 때

                         박,석씨들을 물리치고 본격적으로 김씨 왕조 700년 역사를 연 여걸 김옥모(金玉帽)

                         태후에 관한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많은 감상 부탁드립니다.

 

 

 

 

 

 

 

                                             김옥모

 

                                                                                                                                - 여강 최재효

                                               1

 

사로국은 진한 12개 소국 중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의 소국들을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합병하며 나라의 세()를 불려 나갔다. 시조 박혁거세부터 3대 유리 *이사금까지 박씨 성()의 군주들이 통치하다가 석탈해(昔脫解)가 제4대 군주가 되면서 바야흐로 석씨의 세상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서라벌에는 박씨나 석씨보다 먼저 김씨 족벌이 뿌리를 내리고 상류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김씨들은 정치적으로 박씨나 석씨보다 열세에 있었기에 자신들을 하나로 뭉치게 해 줄 구심점과 그럴듯한 신화(神話)가 필요했다. 탈해이사금 9년에 *금성 서쪽 시림(始林)에서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궁성 안에 있던 이사금의 귀에까지 들릴 정도면 보통 닭이 아닐 것 같았다. 이사금은 신하 호공(瓠公)을 보내 사정을 살펴보게 했다.

 

* 이사금(尼師今) - 이사금은 '치리'라는 뜻으로 이(齒)가 많은 사람, 즉 연장자는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

                               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으며, 후계자를 뜻하는 말이다. 이 호칭은 마립간으로 바뀔 때

                              까지 사용되었다.

* 금성 – 금성(金城)은 박혁거세부터 탈해이사금때 까지 사로국(계림국)의 도성이었다.

 

“자줏빛 구름이 하늘로부터 뻗쳐 있고 나뭇가지에 황금빛 찬란한 궤짝이 걸려 있는데, 그 아래 흰 닭이 울고 있었습니다. 소신이 그 황금 궤짝을 가지고 대궐로 돌아오려고 하니, 새와 짐승들이 소신의 뒤를 따르며 기뻐하여 뛰놀고 춤을 추었나이다.”

 

호공이 탈해이사금에게 고하니, 이사금이 그 궤를 열어보았다. 황금 궤짝 안에는 용모가 수려한 한 사내아이가 있었다.

 

“오, 이 아이는 필시 하늘이 나에게 보내준 선물이 틀림없다. 나라 백성들에게 알리고 경축하게 하라. 그리고 강상(綱常)의 도를 어긴 흉악범을 제외한 죄인들을 모두 석방하고, 백성들에게 세금을 깎아주고 당분간은 백성들을 동원하는 노역을 금지하라.”

 

탈해이사금은 사내아이를 얻은 기념으로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하고 나라의 이름도 사로국에서 계림국으로 바꿨으며, 그 아이를 거두어 양자로 삼았다. 또한, 아이가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씨를 김씨로 했다. 아이는 자랄수록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이름을 ‘알지(閼智)’라 했다.

 

 

알지는 탈해이사금의 아들로 성장하였고 태자에 봉해졌으며, 혼인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는 군주의 자리를 박혁거세의 후손인 박파사(朴婆娑)에게 양보해야 했다. 알지는 대보(大輔) 벼슬에 만족하며 자손을 번성시켰고, 김씨의 시조로 추앙되었다.

 

 

계림국 세 번째 지존 *노례(弩禮)이사금의 비(妃)와 탈해이사금의 아들 구추(仇鄒)의 배우자도 김씨였다. 또한, 파사이사금의 비와 여섯 번째 군주 지마(祗摩)이사금의 배우자도 김씨였다.

 

* 노례왕 – 박혁거세의 아들로 유리왕(儒理王)이라고도 불린다.

 

계림국의 여덟 번째 군주였던 아달라이사금이 후사가 없이 붕어하자 구추의 아들 석벌휴(昔伐休)가 아홉 번째 군주가 되었다. 이로써 석씨가 다시 지존의 자리를 되찾았다. 벌휴이사금은 두 아들을 보았는데, 큰아들이며 태자인 골정(骨正)과 둘째 이매(伊買)였다.

 

 

그런데 골정과 이매 형제가 다른 성씨 부족들과 권력 다툼 과정에서 불의의 사고로 죽고 말았다. 얼마 뒤에 벌휴이사금이 붕어하자 다음 군주의 자리는 당연히 골정의 두 아들 중에서 선정되어야 했으나 결과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분하다. 당연히 나의 두 아들 조분(助賁)이나 첨해(沾解) 중에서 계림국의 지존이 나와야 하거늘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이매 아들 내해(奈解)에게 군주의 자리를 빼앗겼다. 조분과 첨해가 어리니 내가 수렴청정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남편이 죽고 권력에서 멀어지니 되는 일이 없구나. 김씨 가문의 선조들과 친정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한(恨)을 아들들을 통해 성취하려 했거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구나.”

 

“어머니, 침수 드실 시간입니다. 벌써 *자시(子時)가 지났습니다. 많이 취하셨어요. 이러다 어머니 옥체라도 상하실까 걱정입니다.”

 

골정 태자의 비(妃) 옥모부인(玉帽夫人) 김씨는 구름이 잔뜩 끼어있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울부짖었다. 큰딸 수로(水老)가 실의에 빠져 초저녁부터 술잔을 벗 삼으며 지청구를 해대는 *그미를 달랬다. 그미는 계림국 최고의 미인이었다. 골정 태자와 일찍 혼인하여 슬하에 두 아들과 자매를 두었지만, 외모는 아직도 처녀티가 났다.

 

백옥같은 피부에 아름다운 얼굴, 늘씬한 키, 허리까지 내려온 검은 머리, 각종 황금 장식품과 비단옷 등이 그미의 고귀한 신분을 대변하고 있었다. 골정 태자와 혼인하기 전에 그미는 이미 계림국 뿐만 아니라, 고구려나 백제국까지 소문난 경국지색이었다.

 

 

골정 태자와 시아버지 벌휴이사금도 그미의 아름다운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울까 걱정하여 항상 웃는 낯으로 대할 정도였다. 그미는 가무뿐만 아니라 규방술(閨房術)까지 경지에 올라 골정 태자가 다른데 시선을 줄 수 없게 했다. 그렇다고 그미의 언행이 되퉁스럽거나 돈바른 것은 절대 아니었다.

 

* 자시 – 밤 11시~ 다음날 새벽 1시 사이

* 그미 - 주로 문학 작품에서, ‘그녀’를 가리키는 말.

 

그미가 서라벌 저잣거리를 걸어가면 허릅숭이나 반거들충이들 때문에 한바탕 난리를 쳐야 했다. 서라벌의 남녀노소가 그미를 보기 위하여 거리로 빽빽하게 모여들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미의 빼어난 자태에 놀라고 태자비라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여인들은 그미를 시샘했고 반지빠른 총각들은 휘파람을 불어대며 그미에게 추파를 던졌다.

 

계림국에서는 군주가 후사도 없이 갑자기 붕어할 경우나 혹은 후사가 있지만, 능력이 부족할 때에는 귀족 회의에서 군주의 친인척 중에서 적임자를 차기 군주로 선출하였다. 군주 계승 서열에서 뒤쪽에 있던 내해가 새로운 군주로 지명되자 서라벌은 한바탕 홍역을 치러야 했다.

 

죽은 태자 골정과 그미 사이에 조분과 첨해가 있었지만, 귀족 회의에서 그들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를 들어 이매의 아들 내해를 차기 군주로 추대한 것이다. 김씨 가문에서 역대 군주의 배우자와 태자비가 네 명이나 배출되는 것을 보고 자란 그미는 자신도 머지않아 계림국의 왕비가 되리라 다짐하였다. 그러나 그미의 꿈은 지아비 골정이 이승을 등지는 바람에 허사가 되었다.

 

김알지는 세한을 낳았고 세한은 아도(阿道)를 낳았으며 아도는 수류를 낳았다. 수류는 욱보를 낳았고,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았다. 구도는 슬하에 아들 미추(味鄒), 말구, 대서지와 딸 옥모를 보았다. 그미의 가문은 계림국의 왕비족이었다.

 

김구도는 아달라이사금 때 *파진찬에 임명되었고, 벌휴이사금 때는 좌군주가 되어 *소문국(召文國)을 정벌했다. 백제가 모산성을 침공하자 구도가 막아냈고, 이듬해 백제가 다시 침공해오자 구양에서 싸워 크게 승리했다. 하지만 벌휴이사금 7년 백제군에게 속아 와산 전투에서 패배하자 구도는 계급이 강등되어 부곡 성주로 좌천되는 비운을 맛봐야 했다.

 

* 파진찬 – 파진찬(波珍飡)은 계림국에서 관리로서는 네 번째로 높은 관등, 1등급은 각간(角干), 2등급은

                  이찬(伊湌), 3등급은 잡찬(迊飡).

* 소문국 – 경상도 의성(義城) 지역에 존재했던 소국

 

김알지가 박파사에게 군주의 자리를 이양하지 않았다면, 김씨 가문도 박씨와 석씨에 이어 계림국의 군주를 배출하는 귀족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알지가 자신의 지지 세력을 규합하여 박씨 세력과 왕위 쟁탈전을 벌일 수 있었으나, 당시는 여러 면에서 박혁거세 후손들에게 밀리는 상태였다.

 

알지는 자칫 잘못하면 김씨 일족이 박씨들에게 몰살당할 수도 있는 위급한 상황에 몰리자 할 수 없이 태자 자리를 박씨들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미는 아버지 김구도가 임종 때 남긴 유언을 되새겨 보았다.

 

‘아비가 석씨와 박씨 일족을 제압하고 계림국을 만세반석 위에 올려놓으려고

했건만, 한 번의 실수로 나락으로 떨어져 이렇게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는구나. 너희들은 이 아비가 남긴 유언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그리고 아비의 유언을 반드시 성사시켜다오. 유언의 뜻은 너희들이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한평생 일신의 영달과 가문의 중흥을 위하여 동정서벌하던 김구도는 와산 전투에서 백제군에게 패하여 한직으로 쫓겨났다. 그는 와신상담하며 재기의 기회를 엿보았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 했다.

 

그의 두 눈에서는 피눈물이 쉴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임종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함께한 술례부인. 큰아들 미추, 둘째 아들 말구(末仇), 막내아들 대서지(大西知) 그리고 외동딸 옥모가 흐느끼고 있었다.

 

‘아버지, 제가 비록 여자 몸이지만 아버지의 한을 꼭 풀어드리겠습니다.’

 

곁에 있던 남동생들은 여자의 몸으로 어찌 아버지의 한을 풀어 드릴 수 있는지 의아했다. 그미는 이미 태자 골정과 혼인하여 어린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시아버지 벌휴이사금은 김구도의 출중한 무공과 조정 내에서의 그의 지지기반이 탄탄하다는 것을 알고 늘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구도가 백제군에게 한번 패하자 벌휴이사금은 그것을 빌미로 중앙 정치판에서 그를 지방으로 쫓아버렸다.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벌휴이사금마저 붕어하자 그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그미는 천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절호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며칠 후 그미의 형제들이 모여 앞으로의 일을 상의했다.

 

“누이, 멀리 봅시다. 우리 사 남매가 합심하면 언젠가 아버지의 뜻을 받들 수도 있을 겁니다. 계림국의 군주는 조정 내 지지 세력과 잘 조련된 군사 이천 명만 가병(家兵)으로 가지고 있으면 될 수 있어요.”

 

그미의 바로 아래 남동생 미추가 자신 있는 태도로 말했다. 그 역시 어려서부터 대권에 뜻이 있던 터였다.

 

“큰형님, 손바닥만 한 서라벌에서 이천여 명의 병사를 어찌 양성한단 말입니까? 자칫 잘못하다가 반역죄에 엮여 처형될 수 있습니다.”

그미의 막내 남동생 대서지가 의문을 제기하였다.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누님, 일단은 내해가 군주가 되었으니 앞으로 얼마나 계림국을 잘 다스리나 두고 보면서 차차 계획을 세웁시다. 누님이 젊고 조분과 첨해 조카도 어리니 시간은 누님 편입니다. 당분간은 내해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내해를 안심시킨 다음에 후일을 도모해야 합니다. 우리는 당분간 납작 엎드려 죽은 척하고 살아야 합니다.”

 

성질 급한 그미의 둘째 남동생 말구가 앞으로 살아갈 방법을 제시했다. 말구와 대서지는 둘 다 무예에 뛰어나고 용맹스럽기로 소문난 청년 장사(壯士)였다. 둘은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돌아다니며 잔뼈가 굵었고 용병술도 익혀 장래가 촉망되었다.

 

그에 비해 미추는 무예에 특출한 재주는 없었지만, 키도 크고 외모가 근사한 헌헌장부였으며, 학문에 조예가 깊고 사리가 분명하였다. 그미는 남동생들을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든든했다.

 

“우리 가문은 서라벌을 본관으로 하는 김씨의 중심이다. 하지만 알지 시조님으로부터 칠대(七代)를 내려오다가 아버지 대에서 그만 가문이 쇠퇴하고 말았다. 내가 석씨 가문에 시집을 갔지만, 마음은 늘 친정에 있단다. 이번에 조분이가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면 우리 가문이 중흥할 기회를 맞을 뻔했다. 그러나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내 아들이나 우리 가문 사람이 계림국의 군주가 될 것으로 믿는다.

 

과일나무 아래 입을 벌리고 앉아 있다고 입안으로 과일이 떨어지지 않는다. 바람이 불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훔쳐 갈 수 있다. 우리 가문은 먼 미래를 보고 준비를 해야 한다. 미추는 조정 안팎의 인사들을 두루 만나면서 좋은 관계를 맺어놓거라. 그리고 말구, 대서지는 중앙과 지방의 장관들 또는 군부 인사들을 잘 사귀거라. 짧으면 십 년 길면 이십 년 내로 우리 가문에 영광이 있도록 다 함께 최선을 다하자.”

그미의 눈에서 푸른빛이 발산되고 있었다.

 

 

“어미가 너희들에게 한마디 하마. 서라벌에는 눈들이 많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다. 서라벌 저잣거리에는 석씨와 박씨 가문에 충성하는 하수인들과 파락호들이 차고 넘친다. 옥모가 조금 전에 말했듯이 앞으로 너희들은 벙어리와 귀머거리 그리고 장님처럼 살아가야 한다. 너희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는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 명심하거라.”

 

그미의 어머니 술례부인 박씨는 이칠(伊柒) 갈문왕의 딸이었다. 조쌀해 보이는 그녀는 매사에 조심스럽고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로 자식들을 지극 정성으로 훈육하였다. 그미는 태자궁을 나와 두 아들과 친정으로 거처를 옮겼다. 지아비도 없는 궁궐에 어린 자식들과 남아있는 것이 그미는 내해이사금을 볼 때마다 무척 부담을 느껴야 했다.

 

 

내해이사금도 그미가 친정으로의 이거(移去)하는 것을 흔쾌히 승낙하였다. 서라벌의 세월은 청산유수와 같았다. 그미는 내해이사금에게 큰딸 수로를 시집보냈고 두 아들의 훈육에 정성을 쏟았다. 그미의 세 남동생은 경향(京鄕) 각지에서 은밀하게 행동하며 후일을 도모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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