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소설은 고구려 제12대 중천태왕의 후궁 관나부인(貫那夫人)의 억울한 죽음을 재조명하는
차원에서 창작되었습니다. 9부까지 계획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과 감상 바랍니다.
여강 최재효 拜
관나부인
- 여강 최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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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맥은 유리태왕(瑠璃太王) 때 고구려 영토가 된 지역으로 한나라와 고구려의 경계지점에서 고구려에 가까운 곳이었다. 양맥 지역에 사는 부족은 대부분 말갈인(靺鞨人) 이었다. 그들은 양맥의 중심지인 단로성(檀盧城)을 중심으로 사방에 흩어져 사는데 그 수가 상당히 많았다. 고구려 역대 태왕들은 이 지역에 공을 들였다.
말갈족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경우 그들은 한나라에 붙어 고구려를 공격할 수 도 있었다. 고구려 태왕들이 한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치를 때마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말갈인을 동원하였다. 그들은 신체가 강건하고 말을 잘 다뤄 기마병(騎馬兵)으로 최적의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사냥터에서 양맥으로 출동한 국상 명림어수는 열흘 후에 궁성으로 돌아왔다. 그는 태왕에게 현지에 주둔하고 있는 고구려 군대를 출동시켜 위나라 군대를 격퇴시켰다고 보고하였다. 고구려 조정에서 명림어수의 보고를 의심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명림어수와 연나부의 위상은 높아지고 관노부는 5부연맹 중에서 더욱 입지가 좁아지게 되었다. 연나부의 후광을 업고 있는 도저한 태왕비는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태왕도 함부로 태왕비에게 이래라저래라 말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관희년 처소에 군사를 배치하여 내,외부인의 출입을 막아라.”
태왕비의 명령에 관희는 두문불출해야 했다. 태왕은 명림어수와 태왕비 그리고 연나부 중신들의 눈치 때문에 관희의 처소를 찾을 수 없었다.
“폐하, 관희를 조속히 위왕에게 시집보내소서. 소신이 양맥의 단로성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 위나라 장수 위지해(尉遲楷)가 사람을 보냈사온데, 위나라와 우호협정을 맺고싶으면 고구려의 장발 미인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장발 미인은 곧 관희를 말하는 게 틀림없사옵니다.”
“위나라 장수가 관희를 요구했다고요?”
명림어수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태왕에게 또 한 번 거짓을 고했다.
고구려와 위나라 국경에는 늘 크고 작은 규모의 일시적인 국지전이 벌어지곤했다. 국상의 그럴듯한 말에 태왕은 가슴이 고동쳤다. 그렇다고 국상의 보고가 사실인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하여 위나라로 사신을 보낼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폐하, 국상의 말씀이 양국의 선린외교를 위하여 합당한 조처인줄로 아옵니다.통촉하소서.”
계루부의 한 장자가 태왕에게 고했다.
“폐하, 한 나라에 국모가 둘일 수는 없사옵니다. 관희는 요즘 들어 국모를 자처하며 기고만장하게 날뛰고 있다합니다. 속히 관희를 위나라로 보내소서.”
이번에는 순노부의 장자가 눈알을 부라리며 침을 튀겨댔다.
“폐하, 남자를 후리는데 특출한 기술이 있는 관희를 위나라 왕에게 시집보내면 양국의 관계가 오랫동안 평화를 유지할 것입니다. 그 기간 동안 국력을 배가시키 소서.”
소노부 소속 조의(皁衣)가 그럴듯한 말을 뱉었다.
“폐하, 계루부 고추가입니다. 나라의 대의를 위하여 백성 한 사람 희생시키는 일은 고금에 미덕으로 칭송되었습니다. 한나라 황제들은 흉노의 선우(單于)에게 후궁이나 공주를 시집보내 양국이 화평하게 지낸 일이 다반사로 있었습니다. 제신들의 고언을 통촉하소서.”
명림어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관노부를 제외한 노부(奴部)의 중신들 일제히 태왕에게 관희의 위나라 왕에게 시집보내라고 압박하였다. 벌떼처럼 일어나 태왕을 압박하는 중신들의 언동을 태왕은 막을 수 없었다. 태왕의 집권 초기라 오부연맹에서 합심할 경우 태왕의 자리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만약 태왕이 5부 연맹의 요구를 거절하고 그들과 척을 지고 있는 상태에서 위나라가 고구려를 침범한다면 동천태왕때 위기를 구한 유유(紐由)와 밀우(密友)같은 의인의 출현은 어려웠을 것이었다. 유유와 밀우는 동천태왕을 사지에서 구한 고구려의 충신으로 동부(東部) 지역을 관할하는 순노부(順奴部) 출신이었다.
“경들은 짐에게 사흘의 말미를 주시오.”
“테왕 폐하, 속히 결정을 하셔야 합니다. 위나라가 언제 다시 우리의 국경을 넘을지 알 수 없사옵니다.”
6년 전 관구검과 왕기(王頎)의 침입으로 환도성이 쑥대밭이 되었던 기억이 다시 한 번 태왕을 괴롭혔다. 태왕은 간신히 사흘의 기간을 얻는 것으로 중신들의 요구를 일단 피할 수 있었다. 중신들이 물러가자 태왕은 대전에서 독작(獨酌)을하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하루, 이틀, 사흘, 태왕은 대전에 들어 앉아 술로 밤낮을 지새우고 있었다. 태왕 곁에는 오로지 나이든 궁인 한명이 곁에서 심부름을 할 뿐이었다.
“폐하, 밤이 깊었사옵니다. 침수(寢睡)드실 시각입니다.”
‘내가, 관희를 위나라에 보내고 다른 여인과 잠자리를 함께 할 수 있을까? 관희는 짐에게 최고의 여인이 확실하다. 몸과 마음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찰떡궁합이 틀림없도다. 짐이 대고구려의 태왕이 되어 사랑하는 여인을 보호해주지 못한단 말인가? 짐이 과연 이 나라의 태왕이 맞는가?’
“폐하, 이제 침수 드실 시각입니다.”
궁인이 아무리 고해도 태왕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지, 태왕은 넋이 나간 듯 술잔만 들여다 보고 있었다.
‘짐은 절대로 위왕에게 관희를 보낼 수 없다. 관희를 위왕에게 시집보내라는 주장은 왕비의 주장이 분명하다. 왕비가 국상과 연나부 중신들에게 사주(使嗾)한 것이야. 어째서 여인들 끼리 잡아먹지 못해 안달일까.’
“폐하, *사경(四更)입니다. 그만 침수에 드소서”
“여봐라, 관희의 처소로 갈 것이다.”
태왕이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 너무 늦은 시각이옵니다.”
늙은 궁인은 태왕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관희의 처소로 태왕을 인도하였다.
술에 취한 태왕의 발걸음이 좌우로 휘청거려 불안해 보였다. 태왕이 휘청거릴 때마다 호위 무사들이 좌우에서 태왕을 부축하였다. 태왕이 관희의 처소를 방문하는 일은 사냥터에서 돌아오고 나서 열흘이 훨씬 지난 뒤였다. 태왕이 온다는 소식에 관희는 문앞까지 나와 태왕을 마중하였다.
* 사경 - 새벽 1시부터 3시 사이
“군사들은 비키세요. 폐하께서 이리로 오고 계십니다.”
관희가 소리치자 출입문을 막고 서있던 군사들은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비실거리며 물러났다. 관희는 출입문에 등을 밝히고 태왕을 기다렸다.
“관희야, 이게 얼마만이냐? 보고 싶었느니라.”
태왕은 비틀거리면서도 관희를 껴안고 내실로 들었다.
여아는 태왕을 위한 주안상을 준비하여 내실로 들였다. 관희는 태왕이 환궁하였다는 소식을 여아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문밖 출입이 통제되어 태왕을 찾아갈 수 없었다. 그녀는 태왕이 환궁하면 반드시 자신의 처소를 찾아 올 것을 믿고 있었다. 그 믿음이 실현된 것이었다.
“그동안 더욱 예뻐졌구나. 짐은 하루도 네 생각을 잊은 적이 없었구나. 압록수 근처로 사냥을 나갔어도 네 생각이 실로 간절했었다. 네 청을 들어 너를 데리고 갔어야 했다.”
“폐하를 다시 뵈니 눈물이 앞을 가리옵니다.”
관희는 전주(前酒)가 있어 몸도 제대로 가누기 어려운 태왕에게 술을 권했다. 애첩이 권하는 술잔을 마다할 태왕이 아니었다. 술잔을 비우면 태왕은 관희의 붉은 입술 사이에 물려있는 고기 안주를 받아 삼켰다.
또 한잔이 비워지면 태왕은 관희의 젖가슴을 안주로 대신하였다. 관희는 대취한 태왕에게 태왕비의 소행을 고해봐야 아침이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할 것 같아 아무말 하지 않고 태왕에게 술만 권했다.
“관희야, 너의 야릇한 춤을 보고 싶구나.”
“폐하께서 소첩을 버린 줄 알았습니다.”
관희는 얼른 일어서서 춤을 추었다. 악사가 울려대는 풍악소리도 없지만 그녀는 노래를 부르며 요염한 육신을 놀려댔다. 게슴츠레한 태왕의 눈이 거의 풀린 듯 했다. 관희는 아홉 자나 되는 새카맣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머리를 풀어 헤쳤다.
긴머리카락이 그녀의 전신을 둘둘 감아버리고 춤을 출때마다 머릿결은 마치 검은 비단자락처럼 아래위로 흘러내렸다. 긴 머리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태왕은 탐스러운 관희의 머릿결을 볼 때 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야릇한 기분이 들면
서 억눌려있던 본성이 마구발방으로 날뛰었다.
公無渡河(공무도하) / 公竟渡河(공경도하)
그대여 물을 건너지 마오
그대여 그예 물을 건너다가
천지 봄물이 가득하고 가지마다 춘심(春心)이 솟아나는 계절이라 그런지 관희의 목소리는 짝을 그리워하는 음색이 완연했다. 속곳만 걸친 채 봄바람에 흔들리는 실버들처럼 살랑거리는 관희의 뽀얀 육신은 금방 태왕의 음욕을 강하게 자극하였다. 관희의 음색이 차츰 깊어지면서 슬픔이 묻어났다.
그녀가 부르는 공무도하가는 고조선(古朝鮮) 시대 노래로 진졸(津卒) 곽리자고(霍里子高)의 아내 여옥(麗玉)이 부른 노래였다. 여옥은 남편에게 사공 백수광부가 강을 건너다 빠져죽은 이야기를 듣고 공후인을 연주하며 불렀다 했다.
墮河而死(타하이사) / 當奈公何(당내공하)
물에 빠져 죽어지면,
장차 그대는 어찌하리오
관희가 노래 소리가 차츰 애절한 음색으로 변하면서 침통한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신이 나서 시작한 춤사위도 흐느적거리면서 태왕의 심기도 흔들렸다. 노래 내용 또한 사랑하는 임을 영원히 이별하는 것으로 관희 자신의 불길한 운명을 대변하는 듯 했다. 관희는 흐느끼면서 노래를 불렀다.
“관희야, 울고 있구나.”
“폐하, 소첩은 폐하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짐은 태왕이니라. 누가 감히 너를 내보낸단 말이냐?”
태왕은 관희의 두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녀가 왜 눈물을 흐르고 있는지 모를 리 없는 태왕은 관희를 꼭 껴안았다. 태왕은 귓속말로 속삭이며 관희를 안심시켰다. 향기 진한 여인의 체취가 금방 태왕의 후각을 자극하였고 곧 사내의 본능을 강하게 일으켜 세웠다.
“폐하, 소첩을 살려주셔요.”
“너는 나의 분신이나 마찬가지다.”
“폐하, 정말이지요? 폐하의 말씀을 믿어도 되는 거지요?”
“짐은 고구려의 태왕이다. 이 나라의 주인이란 말이다. 걱정하지 말라. 짐이 살아 있는 한 그 누구도 너를 어쩌지 못한다.”
태왕의 말에 관희는 금방 예전의 밝은 얼굴로 바뀌었다. 관희가 촛불 하나를 더 밝혔다. 태왕은 그 의미를 알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관희는 태왕과 늘 하던 은밀한 행위를 시도하였다. 술상을 옆으로 치우고 대낮같이 밝은 불빛에 청춘남녀의 알몸이 눈부시게 빛났다.
태왕의 옥체(玉體)는 관희의 취향에 맞춰져 있었다. 그녀의 손짓 말 한마디에 태왕은 마치 꼭두각시처럼 움직였다. 관희가 혀와 옥수(玉手)로 태왕의 옥체를 마음대로 누빌 때 마다 둔탁한 사내의 음성이 길게 또는 짧게 이어졌다.
다른 날 보다 관희는 정성을 다하여 태왕의 말초 부분에 신비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관희의 지극한 정성 덕분에 태왕은 금방 술이 깬 듯 했다. 순식간에 두 육신이 일심동체가 되어 마치 비익조(比翼鳥)가 되어 창공을 나는 듯 혹은 한 쌍의 물고기가 심연을 헤엄치는 듯 부드럽게 극락을 오르내렸다. 관희는 소비에게서 전수받은 모든 방술(房術)을 동원하여 태왕을 열락으로 인도했다. 남녀의 역할이 뒤바뀐 상태에서 두 동체는 연리지(連理枝)로 하나가 되어갔다.
“폐하, 기분이 어떠세요?”
“너는 요지(瑤池)의 선녀가 틀림없다.”
여아와 궁인 두 명이 밖에서 내실의 관경을 훔쳐보며 탄식하였다. 시각은 오경(五更)을 넘고 있었다. 먼동이 터올 때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관희가 자극적인 토연호(兎吮毫) 자세로 태왕을 환락으로 이끌었다. 미끈한 여체가 움직일 때마다 태왕의 밭은 숨소리가 내실에 가득했다.
다음으로 태왕이 호보(虎步) 자세로 체위를 바꿀 때 마치 초원을 질주하는 한 마리 야생마 같았다. 오랜만에 남녀의 묘성(妙聲)이 관희의 처소 안팎으로 넘쳐나면서 궁인들까지 가슴을 태우게 했다. 먼동이 터올 무렵이 돼서야 태왕과 관희의 운우지락(雲雨之樂)은 끝이 나고 긴 여운만 내실에 넘실거렸다.
“태왕이 단단히 미쳤구나. 그년을 반드시 죽이고 말리라.”
여아의 보고에 태왕비는 발끈했다. 태왕비와 제신(諸臣)이 태왕에게 관희를 궁에서 내쳐야 한다고 충언을 하여도 태왕은 요지부동처럼 행동하자 태왕비는 실성한 사람처럼 발악하였다. 태왕비는 즉시 명림어수를 불러들였다. 태왕비의 하얀 얼굴을 본 국상 명림어수는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 채고 있었다.
“태왕비님을 뵙습니다.”
“국상은 지금 즉시 모든 대소신료들을 군복을 입게 하여 관희년 처소로 달려가 마지막으로 태왕에게 충언을 하세요. 마지막이란 말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지요?”
태왕비는 명림어수를 만나면 자주 명림답부의 전설(傳說)을 입에 올렸다. 태왕비의 의도는 명림어수가 명림답부처럼 태왕을 시해하라는 뜻이 아니고 태왕을 겁박하여 관희를 궁에서 쫓아내는 정도로 행동을 취해달라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관희를 내버려둘 경우 관희의 소생 관노가 차기태왕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태왕비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명림어수는 등청한 신료들에게 군복으로 갈아입고 대전으로 들게 하였고, 등청하지 않은 신료들에게 연락을 취해 군복을 입고 등청하게 했다. 신료들이 전시 상태가 아니면 무장하지 않았다. 문무백관이 모두 군복을 입고 병장기를 휴대하자 궐내 분위기는 긴장감에 휩싸였다.
궁인들은 모든 신료들이 칼을 차고 나타나자 두려움에 떨며 끼리끼리 모여 속삭이기도 했다. 국상이 양맥으로 군사들을 출동하여 다녀온 뒤라 궁성은 뒤숭숭했다. 어떤 궁인들은 위나라군대가 평양성을 행해 진경하고 있다는 소문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폐하, 이제 기침하셔야지요. 해가 중천에 올랐습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느냐? 이리 오너라. 짐은 잠시도 네가 보이지 않으면 허전하구나. 손에 쥐고 있던 옥구슬을 잃어버린 느낌이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눈부신 관희의 미모와 미끈한 육신이 또 한 번 태왕의 심기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해가 중천에 오른 시각이지만 휘장이 쳐진 내실은 한밤중이었다. 황촛불이 여전히 내실을 대낮처럼 밝히고 있었다. 태왕은 자리끼를 들이키고 나서 관희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폐하, 간밤에 먼동이 틀 때까지 용을 쓰셨습니다.”
“괜찮다. 너의 나신(裸身)만 보면 속이 울렁거리고 그것이, 그것이 가만히 있지 않는구나.”
내실에서 또 한바탕 폭풍우가 불고 지축을 흔들 정도로 뇌성벽력이 이어졌다. 한낮에 들려오는 자웅(雌雄)의 포효하는 소리로 관희 처소를 호위하고 있던 군사들과 궁인들은 반쯤 정신이 나간 듯 했다. 묘음이 한 시진쯤 이어지고 있는 동안 이백여명의 대소신료들이 무장을 한 채 태왕이 들어있는 관희 처소 앞에 모여들었다.
“폐하께서 사냥을 가신 뒤에 태왕비가 소첩을 찾아와 저 안으로 들어가라 하였
습니다.”
땀으로 범벅이 된 태왕의 옥체를 마른 수건으로 닦아 내리던 관희가 내실 한쪽에 있는 물건을 가리켰다.
“저게 무엇이냐?”
“폐하, 저것은 쇠가죽으로 만든 부대입니다.”
“쇠가죽 부대가 어째서 저기 있는 것이야?”
관희는 갑자기 흐느끼며 몸을 떨었다. 관희는 태왕비가 자신을 가죽부대로 들어가라고 했다며 더욱 큰소리로 흐느꼈다. 태왕은 태왕비가 자신이 사냥나간 틈을 타서 관희를 죽이려 했다고 판단하였다.
‘태왕비가 이제 관희를 죽이려 하는구나. 이제는 짐이 관희와 태왕비 둘 중에 한 명을 택해야 할 기로에 섰다. 짐의 팔팔한 육신은 관희가 없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태왕비를 버리면 짐의 안위(安危)를 장담할 수 없다. 아직도 고구려 태왕의 지위는 오부연맹의 수장(首長)일 뿐이다. 관희냐 아니면 잠자리에서 어둔해 보이는 연씨(椽氏)냐.’
관희는 태왕이 넋이 나간 사람처럼 허수한 상태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자 몸이 달았다. 태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확실한 대책을 받아내지 않으면 언제 태왕비가 다시 찾아와 겁박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폐하, 국상입니다.”
‘뭐라, 국상? 국상이 어인일로 이곳까지 찾아왔단 말인가?’
태왕은 부랴부랴 이러나 의복을 정제하고 밖으로 나가 명림어수를 대면했다.
“아니? 구, 국상, 무슨 일이 있는거요? 웬 융복(戎服) 차림입니까?”
“폐하, 문 앞에 조정의 모든 대소신료들이 집결해 있습니다. 어서 속히 나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태왕은 완전무장한 채 질서정연하게 모여 있는 제신들을 보고 그만 정신이 아득했다. 관노부를 제외한 조정 제신들은 무척 분노한 표정이었다. 태왕은 그만 오금이 저려오면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었다. 제신들 앞에 늠름한 자세로 서있는 국상 명림어수는 태왕이 가장 두려워하던 상상속의 명림답부 모습이었다.
-계속-
탈고전 작품입니다. 탈고시에 오탈자 및 띄어 쓰기 등을 수정할 에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