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중편 역사 소설은 신라 진흥왕과 백제 성왕의 딸인 후궁 부여소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6세기 한반도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습니다. 그때 백제와 신라는 나제
동맹을 맺고 고구려의 남침을 막아냈습니다. 그런데 신라 진흥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을 죽
이면서 두 나라는 백여 년간 원수의 관계가 됩니다. 그럼, 재미있게 감상하세요. -
2019. 11. 3.
여강 최재효
부여비
- 여강 최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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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신라군에게 생포되어 참수(斬首)된 사실도 모르고 백제 연합군 병영은 깊
은 잠에 빠져 있었다. 신라군 고간 도도와 특공대는 백제왕의 수급과 시신을 가지
고 신라군 본영으로 돌아왔다. 김무력은 백제왕의 수급과 시신이 신라군 본영에
들어온 사실을 일단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그는 백제왕의 수급을 살피고 부하들을 시켜 나무 상자에 넣어 즉시 서라벌로 보
낼 계획이었다. 김무력은 특공대에게 군공을 세운 대가로 고기와 술을 제공하고 모
두 일 계급씩 특진시켰다. 그는 즉시 주요 군관 회의를 주재하였다. 그 자리에는
성주 우덕(于德)과 도도(都刀)가 있었다.
“신라군 총사령관이시며, 신주(新州)의 군주(軍主)이신 김무력 장군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조용히 경청하여 주십시오.”
팔척장신에 꺽져 보이는 김무력은 침착한 어조로 군관들을 둘러보고 입을 열었다.
“하늘이 우리 신라를 돕고 있는 듯 합니다.”
막사 안에 그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 자랑스러운 신라군 특공대가 백제왕의 수급을 베고 그 나머지 시신을 보관
하고 있습니다. 이일이 우리 신라군에게 경사(慶事)가 될지 아니면 흉사(凶事)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자칫 백제왕의 죽음이 백제의 연합군들에게 우리 신
라군에 대한 적개심만 더 키워줄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우리 신라군은 대왕의 특명을 받고 거사를 성공리에 완수했습니다. 날이
밝으면 백제왕이 우리 신라군에게 피살된 사실을 알고 백제군이 대대적으로 공격
을 해올 수 있습니다. 본격적인 전투는 이제부터입니다. 백제왕 한 사람의 수급을
베었다고 우리가 백제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이겼다고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장졸은 날이 밝으면 결전의 자세로 임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라와 백제는 백
여 년간 동맹을 맺고 고구려의 남침을 막아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평화를 유지
하며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삼한의 주인은 한 사람이어야 하며,
그 주인은 바로 우리 신라가 돼야 합니다.
백제처럼 왜놈들을 끌어들여 신라와 맞서려는 야비한 행동은 천벌을 받아 마땅
합니다. 곧 시작될 백제 연합군과의 대전(大戰) 결과에 따라 어쩌면 삼한(三韓)의
주인이 확정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김무력의 연설이 끝나자 관산성 성주 우덕이
백제왕 수급과 시신의 처리를 안건으로 꺼냈다.
“백제왕의 수급은 망루에 내걸고, 몸통은 백제군 진영으로 돌려보내는 게 좋을
듯 합니다. 부여명농의 머리 없는 시신을 보면 백제 연합군들은 잠시 분기탱천하
겠지만, 이내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우덕의 말에 아무도 이의를 다는 사람이 없었다. 여러 장수는 김무력의 눈치를 살
폈다. 이번에는 백제왕의 수급을 벤 도도가 의견을 내놓았다.
“백제왕의 머리는 망루에 걸고, 그의 몸통은 서라벌로 보내서 신라 만백성들이
구경하도록 하시지요. 지금 신라 백성들은 백제왕이 곧 서라벌로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습니다. 신라 사람들이 백제왕의 시신을 보면 안심
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도의 의견에 여러 군관이 동조하였다. 그러나 김무력은 고개만 아래위로 주억
거릴 뿐 말이 없었다.
‘백제왕의 몸통만 서라벌로 보낸다? 인체에서 가장 중요한 부위는 머리가 아닌
가? 머리가 없는 몸통만 보내면 서라벌 백성들의 반응이 시큰둥할 수 있다. 몸통
은 백제군에 돌려주고 머리만 대왕에게 보내면 어떨까? 서라벌 사람들은 반응이
폭발적일 수 있어. 백제왕의 머리를 소금에 절여 서라벌로 보내고, 그의 몸통은
잘 염(殮)을 해서 백제군 진영에 보내야겠어. 그리하면 백제나 신라 백성들도 나
를 못된 사람이라고 비난하지 않을 거야.’
회의가 지루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김무력이 큰기침을 하고 나더니 백제왕 수급
과 시신에 대한 처리 방안을 내놓았다.
“백제왕의 수급은 소금에 절여 나무 상자에 넣어 즉시 서라벌로 보내고, 그의 신
체는 정중하게 염을 해서 관에 넣어 백제군 진영으로 보내시오. 그리고 여러 군관
과 장수는 각자의 위치를 지키시오. 백제군들이 곧 밀물처럼 밀려들 것이오.”
서서히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신라군 진영은 잔뜩 긴장하고 있는 데 비해 백제
연합군 진영은 조용했다. 부여창(扶餘昌)은 간밤에 잠자리가 무척 불편하였다. 선
잠을 자는 중에 부왕의 험상궂은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그는
정신이 아뜩하여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아버님이 왜 그런 모습으로 선몽을 하셨을까? 여태껏 그런 모습으로 현몽한 적
이 없었는데, 혹시 사비성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부여창이 희붐한 새벽빛에 물든 막사 밖으로 나와 맑은 공기를 마시려고 하였다.
멀리 남동쪽의 신라군 본영이 시야에 들어왔다. 무슨 일인지 날이 밝았는데도 신
라군 본영에 횃불이 켜져 있었다. 그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 비장을 불러 신라군의
동향을 물었지만, 간밤에 특이사항이 없었다는 답변만 들었다. 그때, 말 한 필이
백제군 진영으로 달려왔다. 말 잔등에 앉아 있는 자의 등에 깃발이 휘날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비성에서 온 전령 같았다.
“태자님, 소신은 사비성에서 밤새 달려온 사택랑입니다.”
“그대는 서라벌에 파견 나가 있지 않았소?”
부여창도 사택랑을 잘 알고 있었다.
“태자님, 대왕께서는 어디 계신지요?”
“대왕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순간 부여창과 사택랑은 뭔가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감지하였다.
“대왕께서 그제 좌평 네 분과 호종하는 군사 오십 명을 대동하고 이곳 관산성으
로 출발하셨습니다. 소신의 짐작으로는 대왕께서 간밤에 여기에 도착해야 맞습니
다.”
“뭐라? 간밤에 부왕께서 도착해야 맞다고?”
부여창은 눈앞이 캄캄했다.
“대왕께서 아직도 도착하지 않으셨다면, 분명 무슨 변고가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소신이 서라벌에서 부여비 왕후님의 전갈을 가지고 사비성에 도착했을 때 대왕께
서 관산성으로 떠나셨다고 하기에 소신이 밤새 뒤따라 왔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
아직도 도착하지 않으셨다면…….”
“비장은 군사들을 동원하여 빨리 대왕을 찾아라.”
“대왕을 찾아라.”
순식간에 백제군 진영이 어수선하였다.
부여창도 손수 말을 타고 사비성으로 이어지는 길을 달렸다. 군사들 수천 명이 사
비성과 신라군 진영으로 통하는 모든 길을 샅샅이 수색하기 시작했다. 조용하던 백
제 진영이 일순 아수라장이 되었다. 야마토와 가야군사들도 백제군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바싹 긴장하였다.
“아버님. 아버님, 안 됩니다. 아버님-.”
그미의 처소에 여명이 가득했을 때였다. 그미가 자면서 갑자기 비명을 질러댔다.
그미의 비명을 듣고 영란이 내실로 뛰어들었다. 그미는 반쯤 정신이 나간 듯 멍하
니 앉아서 천정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미의 잠옷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왕후님, 왜 그러셔요? 악몽을 꾸셨나 봅니다?”
“영란아, 지금이 어느 때쯤이냐?”
“오경(五更)이 막 지났습니다.”
“아버님께서, 아버님께서 피투성이가 되어 산발(散髮)하신 모습으로 나에게 살려
달라고 하셨어. 아버님에게 불상사가 일어난 게 틀림없어. 영란아, 다른 궁의 나인
들이나 관리들에게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거라. 답답하고 불안해서 잠
시도 앉아 있지 못하겠다.”
그미는 늘 인자하던 부왕이 험악한 얼굴로 살려달라고 하던 흉몽을 떠올리고 전
율하였다. 그미는 왕후라는 본분도 잊은 채 내실을 이리저리 바장이며 혼잣말로
중절거리면서 체머리를 떨었다.
“공주님, 꿈은 반대라고 하잖아요. 대왕님에게 무슨 좋은 일이 있으신 게죠? 너
무 염려하지 마셔요. 사택랑이 돌아오면 사비성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금방 아실
겁니다.”
영란이 그미를 다독거리며 안심시켰지만, 그미는 여전히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
로 허청대며 주절거렸다. 영란도 그미의 그러한 상태를 처음 접하는지라,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몰라 우두망찰 허둥대다가 어의(御醫)를 불러 그미를 진찰하게 했
다. 영란은 혹여 그미의 태중에 있는 왕의 씨앗에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길까 크게
우려하였다.
“저기, 구천(狗川) 가에 군사들이 쓰러져 있다.”
“백제 군사들과 조정의 고관(高官)들 같다. 빨리 가서 살펴보자.”
백제 군사들이 화살을 맞고 숨져있는 좌평 네 명의 시신(屍身)과 왕을 호종하던
군사 오십여 명의 처참한 모습을 발견하였다. 대부분의 백제군 시신에는 화살이
서너 개씩 꽂혀 있었고, 어떤 시신의 등에는 고슴도치처럼 수십여 발의 화살이 꽂
혀 있기도 했다. 소식을 받고 부여창이 급히 달려왔다.
“대왕을 찾아라.”
“대왕을 찾아라.”
그러나 백제 군사들이 구천 주변을 아무리 샅샅이 수색하여도 왕의 흔적은 발견
할 수 없었다.
“태자님, 여길 보십시오.”
한 병사가 소리쳤다. 부여창이 달려가 보니 검붉은 피가 아직도 땅바닥에 흥건했
다. 화살을 맞은 병사가 흘린 피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피가 땅바닥에
뿌려진 상태로 보아 신체를 크게 베이거나 참수(斬首)가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였
다. 부여창은 대강 간밤에 있었던 상황을 짐작하였다.
“아-, 아버님, 아버님……. 오신다고 미리 통보하지 않으셨어요? 소자가 불충을
저질렀습니다. 소자가 어찌해야 하옵니까?”
부여창은 땅을 치며 대성통곡하였다. 그의 군사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탄
식하며 가슴을 쳐댔다. 부여창과 군사들은 전사한 백제군사와 좌평의 시신을 구덩
이를 파서 묻고 백제 연합군 본영으로 돌아갔다. 부여창이 본영에 돌아와 연합군
장수들을 모아놓고 향후 대책을 논의하고 있을 때였다. 병사 한 명이 막사로 뛰어
들어 소리쳤다.
“태자님, 신라군이 대왕님의 옥체를 모셔왔습니다.”
태자 부여창과 연합군 장수들은 밖으로 나가 신라군이 운구해온 관 뚜껑을 열었
다. 그러나 왕의 시신에 머리가 없었다. 부여창과 연합군 장수들은 크게 충격을 받
고 모두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아버님, 아버님…….”
“대왕, 대왕……. 어찌하시다 이리 처참한 몰골이 되셨습니까?”
“대왕, 소장들을 벌하소서.”
“오신다고 알려주셨으면 이런 망극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태자님, 이것은 신라 김무력 장군이 보내는 서신입니다.”
백제왕의 시신을 운구해온 신라 병사 한 명이 부여창에게 다가가 서신을 건넸다.
백제연합군 총사령관 보시오.
간밤에 귀국의 대왕이 우리 신라 군사들이 순찰하는 도중에 구천에서 마주
쳐서 불상사가 일어났소이다. 귀하에게는 안된 일입니다만, 전쟁하다 보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귀국의 대왕이 전사한 만큼
이제 군사를 철수하여 양국이 평화를 누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백제국에는 백제국만의 사정이 있고, 신라에는 신라만의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법입니다. 서라벌에 계신 부여비(扶餘妃)를 조금이라도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쯤에서 양군이 철군(撤軍)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겁니다. 부디,
귀하의 신중한 행동을 기대합니다.
신라군총사령관 김무력
“이노옴, 김무력, 네놈이 감히 대백제국왕의 수급을 취하다니,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변변치 못한 가야놈이 신라군 장수가 되더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가 보구
나. 내가 네놈을 죽여 간을 씹어 먹을 테다. 기다려라. 김무력 이노옴. 내 눈에 흙
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네놈을 용서치 않으리라.”
부여창이 김무력이 보내온 서신을 읽고 노발대발하였다.
“태자님, 고정하십시오. 평정심을 잃으면 안 됩니다. 일단 전군에 대왕의 훙서
(薨逝)를 공표하고 대왕의 고혼을 위로하는 제(祭)를 성대하게 지내십시오. 그리
고 우리 군사들에게 신라군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을 최대한 끌어 올리셔야 합
니다.”
태자 부여창은 비장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전군에게 부왕의 참변을 공
표하였다. 그는 삼국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 지금의 난국을 타개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부왕이 신라군에게 피살된 마당에 그가 경조부박(輕佻浮薄)하거나 마구
발방으로 행동한다면 연합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질 것이었다.
부여창은 잠시 전투를 멈추고 부왕의 명복을 비는 추도 기간을 설정한 뒤에 성대
한 제사를 준비했다. 제사에는 삼국의 모든 장수와 군관들이 참석하였고, 전군도
엄숙한 자세로 제사에 임했다. 부왕의 참변을 듣고 둘째 왕자 부여계(扶餘季)와
임성왕자(琳聖王子)도 급거 도착하였다. 해가 지자 제사가 시작되었다.
삼국 연합군총사령관 부여창은 삼가 부왕의 영전에 고하나이다. 신라왕 심맥
부는 오랜 전통처럼 이어오던 공수동맹(攻守同盟)을 손바닥 뒤집듯 깨고 백제
의 영토를 탈취하였습니다. 사람의 탈을 쓴 신라왕 김심맥부는 오랜 신의를 저
버렸습니다. 부왕의 영령이시어. 골수에 사무친 한을 이제는 훌훌 털어버리고
평한 마음으로 영면에 드소서. 대왕께서 이루지 못한 대업은 소자와 후손들이
반드시 이룩하겠나이다.
소자를 비롯한 백제의 만백성들은 오늘부터 와신상담하며, 배은망덕한 신라
를 철저하게 파멸시킬 것을 맹세 하나이다. 백제는 천지신명의 도움을 받아 반
드시 삼한을 일통하고,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피땀 흘리신 선조들의 은혜에 보
답할 것입니다. 후손들이 지혜롭게 난국을 헤쳐날 수 있도록 도우소서. 여기
삼국의 장수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헌작(獻酌)하오니, 흠향하시고 노여움을
푸소서.
망자의 명복을 비는 의식이 끝나고 백제왕의 머리 없는 시신은 사비성으로 운
구되었다. 부여창을 비롯한 연합군 장수들은 연일 신라군의 만행(蠻行)을 규탄하
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백제군은 대형 허수아비 수십 개를 만들고 목에 ‘배신
자 신라왕(新羅王) 김심맥부(金深麥夫)’라는 커다란 팻말을 걸어 놓았다.
그리고 화살을 날려 허수아비를 쏜 다음 화형식(火刑式)을 거행하였다. 그 같은
소식은 곧바로 서라벌에 전해졌고 신라왕은 난감해했다. 서라벌 저잣거리에는 김
무력 장군과 군관 도도가 합심하여 백제왕을 참수했다는 소문이 왜자했다.
“개똥어멈,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
서라벌 사람들은 모이면 귓속말로 백제왕 이야기를 하였다.
“우리 신라군이 백제왕을 죽이고 목을 서라벌로 가져왔대.”
“저런, 저런. 웃어야 할지, 아니면 울어야 할지 모르겠네.”
“그게 무슨 소리여? 웃어야지, 울긴 왜 운단 말이야?”
“이런 맹추 같은 여편네. 백제왕 딸이 시방 신라왕의 후궁으로 있는데, 지금 웃
고 떠들어 댈 일이 아니지. 소문에는 그 후궁이 신라왕의 아기를 가졌대.”
사람들은 부여비의 임신 사실을 입에 올리며 안타까워했다. 갑자기 서라벌 저자
가 어수선했다. 소문이 확대되어 또 다른 말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왕후님, 이를 어째요? 백제 대왕께서 신라군에게 잡혀서 참수되셨답니다. 그리
고 대왕의 머리가 나무상자에 담겨 서라벌에 보내졌답니다.”
그미는 부왕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만 혼절하였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
도록 그미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미가 혼절하여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
고 있다는 소식이 지아비에게 보고되었지만, 그는 그미의 처소를 찾지 않았다.
“대왕, 백제왕의 머리를 백성들이 많이 다니는 북창(北倉)의 계단에 묻어 두십시
오. 이는 우리 신라가 북쪽과 서쪽으로 진출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백제왕을
제거하고 그를 욕보임으로써 우리 신라가 삼한을 통일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
는 조치입니다.”
병부령이 강한 어조로 신라왕에게 아뢰었다. 관산성에서 보내온 백제왕의 머리를
두고 왕과 중신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렸다. 대부분 중신이 병부령의 의견에 동조
하였지만, 왕은 묵묵부답이었다.
“백제가 우리 신라와 적대관계이지만, 사자(死者)의 신체 일부를 백성들이 밟고
다니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조치는 죽은 자를 조롱하는 처사이며, 자칫 백제
백성들에게 신라에 대한 적개심과 원한을 키울 뿐입니다. 백제로 돌려보내는 게
좋을 듯 합니다.”
노장군 김이사부(金異斯夫)가 왕에게 고했다. 그러나 왕은 역시 묵묵부답이었
다.
“이사부 장군은 너무 관대하시오. 그자는 우리 신라의 서진(西進)과 북진(北進)
정책에 큰 걸림돌이었소이다. 백제와 싸우다 전사한 신라의 젊은이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가족들에게 분풀이할 수 있도록 조처하는 게 맞습니다. 소신은 병부령의
의견에 찬동합니다.”
대아찬 거칠부(居柒夫)가 이사부를 무섭게 힐난하였다.
“소신도 병부령과 대아찬의 의견에 절대 찬성합니다. 앞으로 우리 신라는 멀리
봐야 합니다. 가까이는 백제, 가야, 고구려뿐만 아니라 멀리는 대륙의 북제(北齊)
나 양(梁)나라 열도의 야마토까지 정복해야 합니다. 단군께서 건국하신 옛 조선의
영토를 우리 신라가 모두 수복해야 합니다.
갈 길이 바쁜데 하찮은 백제왕의 수급을 놓고 우리끼리 왈가왈부하는 모양새가
썩 좋지 않습니다. 이사부 장군의 패기와 정기가 모두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나이
드시더니 심신이 많이 연약해졌습니다그려.”
신라왕의 핵심 심복인 사찬 성종(成宗)이 두 눈을 부라리면서 이사부를 거칠게
몰아붙였다. 역시 왕은 아무 말 없이 두 눈을 감고 신하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있었
다. 마치 면벽에 든 비구승처럼 한동안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왕이 눈을 번쩍 뜨
고 정색(正色)을 하더니 중신들을 향해 일갈하였다.
“중신들 사이에서도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니, 장차 이 나라가 어디로 흘러갈지
걱정입니다. 사찬과 병부령의 제안대로 백제왕의 머리를 잠시 북창 계단에 묻어
두시오.”
왕의 하명에 중신들은 고개를 조아렸다. 그는 하명을 하면서도 그미의 얼굴을 떠
올렸다.
‘과인이 차마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구나. 그러나 과인에게는 부여비도 중요하
지만, 신라 만백성도 중요하다. 부여비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국왕으로서 어쩔 수 없는 때도 있다. 장차 부여비를 어찌 달래줘야 할까?’
중신들이 물러간 뒤에 왕은 나인을 시켜 그미의 처소에 어의를 보내고 약재를 하
사하였다. 그미의 울고 있는 모습이 자꾸만 왕의 심기를 어둡게 했다. 그는 나인들
에게 술을 가져오라고 하여 독작(獨酌)하며, 자신의 처결에 대하여 곰곰이 곱씹어
보았다. 대전 나인들은 숨소리까지 죽여 가며 왕의 동태를 살폈다. 그 시각 그미
의 처소에 모랑이 들었다.
“소신, 모랑입니다. 왕후님,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힘이 모자라서 그러한 흉사(凶事)가 일어난 것 같아 속이 쓰리고 아프답니다.
저의 몸에는 왕후님과 같이 백제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지금 심정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비성으로 달려가고 싶습니다. 소신의 모자람을 꾸짖어 주십시오.”
모랑이 한마디 하고 침통한 표정으로 말없이 누워 있는 그미를 물끄러미 바라보
았다. 그녀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초점이 없었다. 마치 실성한 사람 같았다.
‘백제 공주인 내가 이 신라궁에서 더는 머물고 있을 명분이 없다. 나는 양국의 평
화와 번영을 위하여 신라에 시집왔다. 그러나 양국의 평화는커녕 점차 싸움만 크
게 번지고 있다. 나는 신라왕에게 있어 무엇이란 말인가? 왕이 나를 조금이라도 생
각한다면 차마 부왕을 참수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사비성으로 돌아가야겠다.
공수동맹, 결혼동맹은 이미 깨진 거나 마찬가지다. 내가 서라벌에 남아있을 이유
가 없다. 지아비 신라왕이 부왕을 죽였으니, 나는 복수를 위해 태중에 있는 아기를
지워야 한다. 아기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나는 부왕의 한을 풀어
드려야 한다.’
그미의 눈가에 소리 없이 미지근한 액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영란이 훌쩍거리
며 그미의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냈다, 모랑은 조용히 일어나 그미에게
공손히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처소를 나갔다. 모랑이 나가자 그미가 간신히 자리
에서 일어나 영란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공주님, 아니 왕후님, 그 약초는 어디에 쓰시게요? 그 약초는 맹독성 약초로 임
산부가 가까이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임신으로 입덧이 심할 때 냄새만 맡아도 멈춘다고 했어. 너는 아무 말 하지 말고
그 약초를 구해다오. 부탁이다.”
“안 되는데, 그러다 대왕이 아시면 이년은 죽은 목숨입니다.”
그미는 거짓말로 대충 둘러대고 영란을 궁 밖으로 내보내 그 약초를 알아보게 했
다. 그미는 왕이 보낸 어의를 돌려보내고 약재도 내다 버렸다. 태중에 왕의 씨앗은
그미의 아픈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수일 동안 물 한 모
금 넘기지 못한 그미는 낮에도 자주 죽은 부왕(父王)의 환영을 보았다. 그미는 반
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아버지’를 외치다 대성통곡하며 자신의 운명을 탓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