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중편 역사 소설은 신라 진흥왕과 백제 성왕의 딸인 후궁 부여소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6세기 한반도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습니다. 그때 백제와 신라는 나제
동맹을 맺고 고구려의 남침을 막아냈습니다. 그런데 신라 진흥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을 죽
이면서 두 나라는 백여 년간 원수의 관계가 됩니다. 그럼, 재미있게 감상하세요. -
2019. 10. 30 여강 최재효
부여비
- 여강 최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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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다양한 종류의 성애(性愛)로 그미를 지극한 열락으로 이끌었다. 그는 일곱
살에 보위에 오른 뒤로 여러 여인과 잠자리를 함께한 이력이 있었다. 또한 색공(色
供)을 제공하는 여인들이 늘 곁에 있었기에 언제든지 방사할 수 있었다. 궁중이나
서라벌 저자 심지어 신라 전역 어디에 가든 미색이라면 왕의 손길이 닿을 수 있었고
젊은 여인들은 왕의 의중에 따라 하루아침에 신분이 바뀔 수 있었다.
그미는 국혼(國婚)을 치르기 위해 서라벌로 오기 전에 사비궁에서 늙은 궁인에게
초야(初夜) 및 남녀의 상합(相合)에 대하여 실습을 겸한 교육을 받았다. 그 궁인은
사비성에서 수십 년간 대전의 지밀 궁인(宮人)으로 있으면서 왕의 여인이 되고자
하는 비빈(妃嬪)들의 음사(陰事)를 전문적으로 지도하고 수련을 담당하였다. 그미
는 왕과 비단 금침을 덮기 전에 궁인에게 배운 규방술 몇 가지를 생각해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만물은 음양의 조화 때문에 생겨납니다. 양은 음을
만나 화육(化育)하게 되고, 음은 양을 만나 성(性)이 살아나게 된답니다. 음과 양
은 상접(相接)하여 통하게 됩니다. 즉, 남성은 여성을 느껴 딱딱하고 느슨해지며,
여성은 감응하여 서서히 벌어져 증대하면서 두 성적 기운이 정(精)을 섞어 서로
흐르게 되고 통하게 됩니다. 초야를 치르거나 방사에서 수태를 유도하는 가장 적
합한 자세는 바로 *호보(虎步)나 *원박(猿搏)이 있습니다.’
그미는 두 가지 자세가 처음에는 생경했지만, 빠른 수태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라
면 상관없을 것 같았다. 지난가을부터 지아비와 이미 서너 번의 방사를 치른 적이
있는지라, 그미는 그의 취향을 잘 알고 있었다. 신라 왕실 못지않게 백제 왕실에서
도 남녀의 교접에 대하여 상당한 지식과 자료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미는 늙은 궁
인에게 실전 교육받을 때의 생생한 장면을 떠올리고 그만 뺨이 달아오르면서 가슴
이 쿵쾅거렸다.
* 호보 - 방중구법(房中九法) 중의 하나로 호랑이가 걷는 모양.
* 원박 - 방중구법 중 하나로 원숭이가 나뭇가지를 어깨에 메치는 모양.
그미는 지아비와 처음 방사를 치르던 날, 큰 충격을 받았다. 왕은 그미가 처녀라
는 생각을 하지 않은 듯 초반부터 격렬한 행위로 그미를 유도하며, 다양한 자세를
요구해 그미를 진땀 나게 했다. 그미는 지아비의 요구를 거절하거나 시적거리는 듯
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왕은 그미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미 많은 성적 경험이 있을 거라고 판단하는 듯
했다. 신라왕과 백제 공주의 합일은 여염의 일과 달랐다. 두 사람의 거사는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는 중대한 일이기도 했다. 그미는 사비성에 있을 때 대전 궁
인으로부터 남녀 교합에 대하여 그림이나 인형 등을 이용해 실전에 가까운 성교육
받은 바가 있었지만, 지아비는 성애(性愛)에 있어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천지 산하에 이미 춘수(春水)가 넘쳐흐르는 때라, 그미와 야생마 같은 지아비의
옥체(玉體)에도 봄물이 넘칠 정도였다. 지아비의 일방적인 행위에 그미는 수동적
이지 않았다. 왕의 촉수(觸手)에 매양 수동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그미의 성정에
도 합당하지 않은 처사이기도 했다. 금침 속에서의 미동으로 시작된 자웅상의(雌雄
相依)는 곧 천지를 뒤덮을 듯 격렬한 용호상박(龍虎相搏)으로 이어졌다.
그미는 사랑을 독촉하지 않았다. 고요하게 있어도 지아비는 세상을 삼킬 듯 그미
를 지분거렸다. 잡아채고, 안고, 끌고, 조이고, 풀면서 두 사람은 하늘을 날고 깊이
를 알 수 없는 심연(深淵)으로 빠져들기도 했다.
그미는 사랑을 도구로 활용하기 위해 왕의 빈첩(嬪妾)이 되었지만 어느 한 곳에
만 몰두하고 싶지 않았다. 조국 백제를 위해서 육신의 유희(遊戲)와 함께 고도의
정신적 승리도 거머쥐어야 할 의무도 있었다. 지아비의 어려운 요구에 응하면서
도 그미는 전혀 힘들거나 열없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아, 드디어 두 분이 육전(肉戰)을 시작하였구나.’
영란은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며 자족하였다.
하늘에는 별들이 서로 시기하며 맑은 빛을 뿜어내려 애쓰고, 궁궐 근처 동산에는
짐승들도 잠자리를 찾았는지 고요하였다. 이따금 장끼가 까투리를 상대로 무슨 일
을 벌였는지 모르지만, 비명을 지르며 날아오르기도 했다. *삼경(三更)이 훨씬 넘
은 시각이었다. 내실에서 흘러나오는 달뜬 신음과 거친 묘음(妙音)이 영란을 황홀
경으로 몰아넣었다.
스무 살 가까이 되도록 남성의 접촉은 없었지만, 그녀는 사비에 있을 때부터 그미
를 지근에서 모셔온 터라 주인의 말 한마디와 단순한 몸짓으로도 전후 사정을 판단
할 줄 알았다. 지난해 주인을 따라 서라벌 궁성에 왔을 때부터 영란은 신라 왕궁에
서 벌어지는 다양한 방사(房事)에 대하여 직접 듣고 본 바가 많았다. 왕이 밭은 숨
을 내쉬며 단말마를 토해낼 때 그미도 절정에 올라 극락을 느낄 수 있었다.
* 삼경 – 새벽 1시부터 3시 사이.
“신라와 백제는 멀고도 가까운 사이랍니다. 그러나 과인은 오늘 밤 비로소 그렇
지 않다는 것을 감지하였어요.”
그미가 심맥부의 전신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그는 꼼짝 않고 누워서 서서히
빠져나가는 쾌락의 여운을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듯 했다.
“백제는 대왕의 처가입니다. 부디, 처가 식구들은 사슴의 시선으로 보아주시고,
소비를 많이 은애하여 주셔요. 소비는 단순히 대왕에게 육신을 제공하기 위하여
서라벌에 온 게 아닙니다. 대왕과 일심동체가 되어 두 나라가 화평하게 지내고 한
평생 순하게 살고자 왔습니다. 지난번 대왕께서 소비의 처소에 들지 않는 밤에는
밤새 전전반측하였나이다.”
그미는 왕의 초원처럼 넓은 가슴에 안겨 속살거렸다. 남흔여열의 지극한 복락을
함께 맛본 왕과 후(后)는 서로의 육신을 맞대고 누워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새삼
부부의 인연에 따른 일들을 그려보았다.
“그때는 과인이 갑자기 일이 있었어요. 미안했습니다.”
그미는 왕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소비는 대왕의 깊고 푸른 심연(心淵)에 있고 싶나이다. 그 심연 속에 빠져 한세월
살았으면 합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소비에게 신라와 백제는 없습니다. 오로지
대왕만 계실 뿐이랍니다.”
“소비, 그대의 깊은 심중을 과인이 잠시 망각했나 보오.”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독주(毒酒) 세 주전자를 비우고도 왕은 전혀 취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신라 출
신 후궁들이 오뉴월에 피어난 화려한 야생화라면, 그미는 먼 들녘에 있는 듯 없는
듯 피어난 수줍은 들국화 같았다. 남녀의 운우(雲雨)는 시들어가는 생명에 단비를
내리게 하고, 오리무중 속의 정처 없이 흔들리는 사랑을 확실한 방향으로 이끄는
마법과 같은 속성이 있었다.
두 사람은 서너 번의 은애(恩愛)가 있고 난 뒤에 기침하였다. 그미가 미지근했던
왕의 사랑을 회복하자 사도 왕비와 후궁들은 노골적으로 그미를 외톨이로 만들기
위해 암투를 벌였다.
왕이 비빈들을 모두 불러 연회를 갖는 날이면 왕과 신라 출신 후궁들은 화려한 문
양의 비단옷으로 치장하고 나타나 왕에게 아양을 떨거나 엉뚱한 말로 족대기며 일
을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미는 왕비와 후궁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중심
을 잃지 않고 오롯이 본분을 지키며 왕을 보필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미가 왕의 사랑을 서서히 독차지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가자 왕비와 후궁들의
사소한 일들이 콩케팥케 상태로 되면서 그미에 대한 시기와 원망이 차츰 더해갔다.
서라벌의 시간은 무척이나 빨리 흐르고 있었다.
“대왕, 왜국에 갔던 사신들이 도착했습니다.”
“어서 들라하라. 과인은 한시가 바쁘다. 태자도 속히 들라하여라.”
백제왕은 뒤늦게 고구려 왕 *고평성(高平成)과 신라왕이 밀약(密約)을 체결하고
백제를 곤경에 빠트린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수복한 욱리하 하
류 지역의 고토(故土)를 신라에 빼앗긴 배후에 고구려의 묵인이 있었다. 그는 신라
를 상대로 한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 고평성 - 고구려 제24대 양원왕(陽原王)의 이름.
왜국에 갔던 덕솔 과야차주(科野次酒)와 간솔 예색돈(禮塞敦)이 두 달 만에 돌아
왔다. 왜의 야마토 조정에서는 백제의 군사지원 요청을 뿌리칠 수 없었다. 양국은
이백여년전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과 야마토의 신공왕후(神功王后) 섭정 기간
에 국교를 수립하였다. 이후에 양국 간에는 많은 교류가 있었다.
근초고왕이 야마토 왕에게 하사한 칠지도(七支刀)가 그것을 증명했다. 야마토의
긴메이왕(欽明王)은 백제왕의 친서를 받고 왜군 일천 명, 군마 일백 필, 전선(戰船)
사십 척 그리고 전쟁 물자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것은 백제에서 사신이 다섯
차례 왔다 간 후에야 이루어진 야마토 조정의 체면치레에 불과한 지원이었다. 백
제는 가야에서도 군사를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대가야와 아라가야(阿羅伽倻)도 날로 비대해가는 신라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대가야가 백제의 군사지원 요청에 순순히 응한 까닭은 자국의 안위 때문이었다. 백
제왕은 아들 부여창과 향후 전개될 신라와의 전투(戰鬪)에 대하여 논의하고 귀족회
의를 개최하였다.
귀족들은 왕이 신라를 상대로 국지전을 계획하자 호전파(好戰派)와 비전파(非戰
派)로 갈렸다. 왕과 태자 부여창은 귀족세력을 통합해야 전쟁할 수 있었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왕은 왜와 가야에 파견한 사신들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선
전하였다.
“우리 백제는 동맹국인 신라와 합동으로 고구려에 빼앗긴 욱리하 주변 고토를 수
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라왕 심맥부는 금석맹약(金石盟約)을 저버리고 우리를 배
신하였습니다. 그 이면에는 배은망덕한 신라왕과 음험한 고구려 왕 사이에 맺은 밀
약(密約)이 있었습니다.
우리 백제는 수많은 장졸의 죽음으로 되찾은 땅을 반드시 되찾아야 합니다. 여러
분, 부왕과 저 부여창을 믿고 신라 토벌전에 기꺼이 동참하여 주십시오. 야마토의
긴메이왕과 대가야, 아라가야 왕들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태자 부여창의 웅변이 대전에 울려 퍼졌다. 신라와의 전쟁을 뜨악해하던 친 신라
성향의 귀족들도 왜와 가야의 동참에 할 수 없이 전쟁에 동조해야 했다. 백제의 귀
족들은 왕을 신임하는 편이지만, 자신의 용맹성만 믿고 있는 태자 부여창을 마뜩
해 하지 않았다. 귀족들이 태자의 말에 웅성거리자 왕이 다시 나서서 귀족들을 설
득했다.
“여러 *기로(耆老)의 심중을 알고 있습니다. 지난번 우리가 욱리하 하류 지역을
신라에게 탈취당한 일은 천추의 한(恨)이 될 일입니다. 그러나 태자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고구려와 신라의 야합(野合)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신라의 만행을 두고
만 볼 수 없습니다. 반드시 욱리하 주변 땅을 되찾고 말 것입니다. 과인은 여러분
께 약속합니다. 우리 백제가 곧 삼한 제일의 국가가 되고, 머지않아 삼한을 일통
할 것입니다.
* 기로 – 연로하고 덕이 많은 사람, 즉 조정의 중신들을 말함.
우리 백제는 오백 년 넘는 세월 동안 나라를 굳건하게 유지해 왔습니다. 그동안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여름이 시작되는 칠월,
과인의 명령을 받은 태자가 용감한 백제의 용사들과 왜와 가야의 지원 병력을 앞
세워 신라를 향해 진군할 것입니다. 이미 준비는 마친 상태입니다. 여러분들의 마
음만 하나로 뭉치면 신라를 상대로 하는 전쟁은 수월하게 끝날 것입니다.”
왕이 전쟁 선포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전은 일순간에 적막했다. 기침 소리
도 없었고 간간이 숨 쉬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서슬 퍼런 왕의 언설(言說)에 귀
족들은 감히 불만을 표출하지 못했다.
백제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곧 신라의 세작들에게 포착되어 신라왕의 귀에 들
어갔다. 신라왕은 즉시 중신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다. 갑작스러운 왕의 호출
에 각간을 비롯한 중신들이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회의 석상에 나타났다. 왕이 나
타나기 전까지 중신들은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각자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왕
이 나타나자 중신들은 일제히 일어나 예의를 갖추었다. 왕의 굳게 다문 입은 금방
열리지 않았다.
“대왕, 지난번 회의 때 병부령이 고했듯이 음흉한 백제왕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속히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거칠부가 충심으로 왕에게 고했으나, 모든 중신이 그의 편은 아니었다. 거칠부의
충언을 왕은 지나가는 말로 흘리려고 하였다. 왕이 중신들의 충언(忠言)을 흘러가
는 물처럼 귓전으로 흘려버리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장군, 너무 심려하지 마시오. 과인도 병부령과 백제와의 일전을 대비하여 경험
이 풍부한 장수와 군관들과 협의하였고, 방책을 마련하는 중입니다.”
왕의 답변에 문관의 중신들은 서로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왕이 특단의 방책을
준비 중에 있다는 말에 중신들은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혈기 왕
성한 어린 왕이 앞뒤 분별하지 못하고 백제와 전쟁을 벌이면 자칫 국난(國亂)을
자초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왕의 세부적인 설명이 이어졌다.
과인이 고민하는 방책은 어려운 게 아닙니다. 백제왕이 *북독(北瀆) 하류 주변 땅
을 과인에게 빼앗겨 울화병이 생겼을 겁니다. 그자가 우리와 화친하고 주위를 분산
시키기 위해 딸을 과인의 후비(后妃)로 보낸 것입니다. 과인은 부여명농의 수법을
이미 간파하고 있습니다. 손무(孫武)가 갈파하기를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
태(白戰不殆)라 했습니다. 또한 부지피부지기(不知彼不知己)면 매전필태(每戰必
殆)라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과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 것입니다.
* 북독 – 지금의 한강의 옛 지명으로 신라는 한산하(漢山河) 또는 북독이라 불렀
다. 고구려는 아리수(阿利水), 백제는 욱리하(郁利河)라 불렀다.
과인은 전자(前者)에 무게를 두고 전시를 대비하여 세밀한 계획을 수립하고 있습
니다. 우리 신라는 백제와 비교하면 고산지대와 하안(河岸) 지역이 널리 분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신라가 대륙의 여러 나라와 교역(交易)할 수 있는 교두보
를 마련하고 있는 상태에서 백제 군사 일이만여 명이 달려와 예전의 상태로 되돌려
놓을 수는 없습니다.
과인은 앞으로 오십 년 혹은 백여 년 안으로 신라가 삼한을 일통(一統) 하리라 굳
게 믿고 있습니다. 준비하는 자에게는 늘 기회가 있기 마련입니다. 피눈물 나는 준
비 과정도 없으면서 행운이 오기를 앉아서 바란다면, 이는 큰 도적 조조(曹操)보다
더 악독한 놈이 틀림없습니다.
백제군들이 아무리 용맹하다 하더라도 백제왕이 신실하지 못하고 제대로 정신이
박힌 자가 아니니 만사가 평탄할 것입니다. 백제군 수뇌부가 자신들의 처지를 모르
고 날뛴다면 싸우나 마나입니다. 승패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과인
은 특수 부대인 무영단(無影團)을 양성하여 활용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무영단장이 과인에게 보고하기를 백제왕 부여명농이 머지않아 사비성
를 떠나 특정한 지역으로 움직일 거라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조만간 있을 백제와의
전투가 신라의 국운(國運)을 결정지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왕의 중언(重言)에 중
신들은 더는 할 말도 불만도 없는 듯했다.
신라왕은 태후의 섭정(攝政)에서 벗어나 직접 국정을 다루면서 무영단이란 비밀
첩보부대를 운영하고 있었다. 무영단원들은 고구려, 백제, 가야, 왜국에 침투하여
그 나라의 정치 상황과 백성들의 민의(民意)를 탐지하여 왕에게 보고하였다. 무영
단원은 일당백의 무예를 지닌 자들로 행상(行商)이나 나무꾼 또는 소규모 풍악단
(風樂團)으로 위장하여 국경을 넘나들었다.
최근 들어 백제 사비성과 웅진성에 백여 명 규모의 무영단원을 파견하여 백제왕
과 백제군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서구(傳書鳩)를 이용해 이상
징후가 있으면 즉시 서라벌에 알렸다. 아침에 사비성에서 비둘기를 날리면 저녁나
절에 서라벌에서 사비성의 소식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백제는 전서구 사용을 할
줄 몰랐다. 중요한 첩보는 일개 국가의 존망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왕후님을 뵙습니다.”
“풍월주, 어서 오셔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미가 모랑(毛郞)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미는 최근에 왕의 동태를 유심히 살피
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친 백제 성향의 중신들로부터 왕의 움직임과 군사들의
이동상황까지 전해 듣고 있는 터여서 불안했다. 마치 신라 군부에서 백제의 정세
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대비하는 것 같았다. 모랑은 왕후가 왜 불렀는지 대충은 짐
작하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비밀스럽게 주변 사정을 살피며 만나야 했다.
“요즘 대왕님과 금슬이 좋다고 들었습니다. 참으로 잘된 일입니다.”
“모두 주변에서 도와준 덕분인걸요. 그런데 요즘 대왕의 흉중에 많은 생각이 있
는 듯 합니다. 그러나 나는 대왕의 속을 전혀 알 수 없으니 답답할 뿐입니다. 혹여,
그 많은 생각 중에 백제에 관한 것이 있다면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대왕의
내조자(內助者)이기 전에 백제왕실의 딸입니다. 물론 풍월주도 백제의 피가 흐르
고 있지만요.”
그미는 은연중 풍월주의 혈통을 강조하였다.
“왕후님, 소신은 화랑도를 이끄는 신분입니다. 대왕의 의중에 무슨 내용이 담겨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백제에 관한 사안이 있다면 왕후님 말씀대로 알아봐
야 하겠지요. 지금은 양국이 평온한 국면에 있으니 크게 우려하실 일은 없을 것입
니다.”
모랑 역시 최근에 왕의 움직임과 신라 군부의 동태에 대하여 예의주시하고 있었
다. 고위 군관급 회의 때 모랑은 풍월주로서 참가하였지만, 긴급하거나 중대 사안
에 대한 구수회의에는 참석이 제한되기도 했다. 모랑은 성골(聖骨)과 진골(眞骨)
세력들에게 은연중에 차별을 받고 있었다.
백제 출신 공주의 아들이란 점이 강점(强點)이면서 한편으로는 약점(弱點)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 같은 사정으로 그는 남모르게 속이 은결들어 가고 있기도 했
다. 모랑은 그미의 처소에 들 때마다 주변을 살펴야 했다. 남들이 그가 백제 출신
공주의 처소에 드나드는 것을 알면 좋지 않은 시각으로 볼 것이 분명했다.
“풍월주는 자랑스러운 신라인으로 만인 중에 우뚝 섰습니다. 어머니의 나라에도
보탬이 되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대왕과 신라 군부의 중요한 일이 있으면 즉시
알려주셔요. 행여나 대왕이나 신라 장군들이 오판하여 백제에 위해를 가하는 일이
발생할까 두렵습니다.”
“왕후님, 만약 그 같은 일이 발생할 조짐이 보이면 즉시 왕후님께 말씀드리겠습
니다. 소신의 외가가 백제이니 그냥 지나친다면 안 되겠지요.”
“고맙습니다.”
두 사람이 은밀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영란은 그미의 처소 안팎을 이리저리
바장이며 혹시 잡인이 접근하지 않을까 긴장하였다. 그녀 역시 그미를 따라 신라
에 올 때 백제의 안위를 위한 역할이 주어져 있었다. 그녀는 신라왕궁을 자유자재
로 드나들며 여러 명의 신라 출신 궁녀들에게 접근하여 친하게 지내려 애썼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