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중편 역사 소설은 신라 진흥왕과 백제 성왕의 딸인 후궁 부여소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6세기 한반도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습니다. 그때 백제와 신라는 나제
동맹을 맺고 고구려의 남침을 막아냈습니다. 그런데 신라 진흥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을 죽
이면서 두 나라는 백여 년간 원수의 관계가 됩니다. 그럼, 재미있게 감상하세요. -
2019. 10. 30 여강 최재효
부여비
- 여강 최재효
1
그미는 초저녁부터 경대 앞에서 떠날 줄 몰랐다. 사비(泗泌)에서 데리고 온 시비
(侍婢) 영란은 침이 마르도록 *그미가 금방 하강한 항아와 다름없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영란의 칭찬에 그미는 잠시 안색이 밝아지기는 했으나 이내 한숨을 내쉬
었다.
*해시(亥時)에 접어들었지만, 그미의 처소는 고요하기만 했다. 지난번에도 지아
비 *심맥부(深麥夫)는 그미의 처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궁중의 법도에 따라 궁비
(宮妃) 서너 명이 달포에 두 번 내지 세 번씩 지아비와 합방을 하게 되어 있었다.
그미는 방술(房術)에 특출한 재주가 있다고 소문난 후궁들이 중간에서 지아비를
가로챈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사도왕후(思道王后) 박씨를 제외한 후비(後妃)
중에 보명(寶明)이 지아비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왕비와 암투를 벌이고 있었
다. 그미는 다른 후비들에 비해 뛰어난 미색(美色)을 지니고 있었지만, 어쩐 일인
지 최근 들어 지아비의 관심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는 듯 했다.
* 그미 – 그녀를 멋스럽게 이르는 말(주로, 소설에서 사용.)
* 해시 – 밤 9시부터 11시 사이.
* 심맥부 - 신라 제24대 국왕으로 이름은 김심맥부(金深麥夫) 또는 김심맥부(金深麥夫). 지증왕의 손자
이자 법흥왕 동생 입종 갈문왕과 법흥왕 딸 지소부인(只召夫人) 사이에서 출생했다.
낙랑과 대방이 소멸한 뒤 고구려, 백제, 신라가 국경을 접하게 되면서 삼국 간에
갈등이 시작되었다. 요동(遼東) 방면으로의 진출이 어렵게 된 고구려는 한반도 쪽
으로 남진 정책을 꾀하였다. 고구려는 북진정책을 추진하던 백제와의 충돌이 불가
피했다.
내물왕(奈勿王) 때 강력한 국력을 구축한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했
다. 이 같은 상황에서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내물왕에게 사신을 파견해 화친
을 도모하였다. 신라와 백제는 나제동맹을 맺어 형제 관계로 발전하였고, 이 같은
배경으로 근초고왕은 고구려에 대항하여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시키기도 했
다. 나제동맹은 내물왕이 고구려에 접근하면서 깨지게 되었다.
백제가 왜(倭)와 가야 등과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고구려에 다가갔
다. 호태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국도를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강력한 남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고구려의 남진은 백제와 신라에게 큰 위협이었다. 백제 비유왕(毗有
王)은 신라에 접근했다.
신라 눌지왕(訥祗王)은 마침 고구려의 내정간섭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고 있었
다. 서로의 필요 때문에 2차 나제동맹(羅濟同盟)이 맺어졌다. 비상시에 상호 원군
을 지원하도록 한 공수동맹(攻守同盟)이었다.
“대전 궁인들에게 다시 한번 물어보렴. 대왕께서 어디에 계신지.”
“왕후님, 조금만 더 기다려 보셔요. 대왕께서 곧 드실 겁니다.”
웅숭깊고 도저한 성정의 그미는 지아비와 상합(相合)하는 날이면 아침부터 가슴
이 두근거려 낮에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지난해 시월에 그미가 신라왕의 후궁으
로 들어오면서 궁중에서는 그미를 부여비(扶餘妃) 또는 부여소비(扶餘小妃)라 호
칭했다. 그미의 아버지는 백제왕 *부여명농(扶餘明濃)이었다.
고구려가 남진 정책의 일환으로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밀고 내려오자 백제왕은
동맹국 신라를 끌어들였고, 거기에 가야세력까지 가세하게 했다. 백제, 신라, 가야
의 삼국 연합군은 고구려의 *욱리하(郁里河) 주변 지역을 공격하여 백제는 욱리하
하류의 6군(郡)을 차지하였고, 신라는 상류의 10군을 취하였다.
* 부여명농 – 백제 제26대 왕으로 무령왕의 아들. 수도를 웅진(熊津)에서 사비(泗沘)로 천도했다
* 욱리하 – 지금의 한강을 말함. 고구려에서는 아리수(阿利水), 신라에서는 한산하(漢山河) 또는 북독
(北瀆)이라 부름.
영토에 대한 욕심이 많은 심맥부는 백제가 방심한 틈을 타서 백제가 고구려로
부터 탈취한 욱리하 하류 지역을 점령하고, 그 지역에 신주(新州)를 설치하여 가
야 출신 아찬(阿飡) 김무력을 신주의 군주(軍主)로 삼았다. 신라왕의 배신으로 나
제동맹이 깨지고 만 것이다.
수세에 몰린 백제왕은 절치부심하면서도 신라와 화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큰
딸 부여공주를 신라왕의 후궁으로 보냈다. 백제왕이 큰딸을 신라왕의 후궁으로
보낸 것은 신라를 달래 전쟁을 억지하고 경계를 완화하려는 고육지계였다.
“왕후님, 대왕께서 오늘도 다른 처소로 드셨나 봅니다.”
‘대왕이 나를 멀리하고 있음이야.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게 틀림없어. 대왕이 어
떤 음모를 계획하고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나는 신라 왕실에 시집왔지만, 조국 백
제의 안위를 책임져야 한다. 아버님의 기대를 저버리면 안 된다.’
영란의 말에 부여비는 생각이 많아졌다. 신라궁궐 생활도 어느덧 반년이 접어들
었지만 여러 면에서 아직도 서름했다. 특히, 시어머니 지소태후(只召太后)의 날카
로운 시선이 그미의 행동을 어렵게 했다. 그미는 가급적 처소에서 밖으로 외출하
는 것을 꺼렸다. 궁중의 모든 사람이 자신을 백안시하는 것 같아 내실에만 있으려
했다.
예전에도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굳건하게 유지하기 위해 왕실 간에 혼인함으로
써 우의(友誼)를 돈독하게 했다. 백제 동성왕(東城王)은 딸 보과공주(宝果公主)를
신라 법흥왕에게 시집을 보낸 적이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남모(南毛)와 모랑
(毛郞) 남매가 태어났다.
남모 공주는 신라의 청소년 조직의 우두머리인 원화(源花)로 있을 때 같은 원화
인 준정(俊貞)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녀의 남동생 모랑은 제3대 *풍월주(風月
主)로 재직하고 있었으며, 부여비에게 그는 숙부(叔父)뻘이었다. 모랑은 풍월주로
있으면서 신라궁에서 외롭게 생활하고 있는 부여비를 자주 찾았다. 며칠 전에도
모랑은 부여비 처소를 찾은 적이 있었다. 그미는 모랑이 방문할 때마다 그를 따뜻
하게 맞았다.
* 풍월주 – 신라 화랑도 우두머리의 호칭.
‘풍월주의 어머니이신 보과공주님은 나에게 할머니가 되십니다. 신라 궁중에서
백제 왕실의 피가 흐르는 사람은 나와 풍월주뿐입니다.’
‘소신은 왕후님을 남달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라궁에서 생활하시는 데 불편함
이 있으면 언제든지 신에게 하명하소서.’
모랑이 신라의 풍월주라 하여도 그미에게는 일개 신하에 불과했다. 그래도 신라
왕궁에서 그미의 처지를 이해해 주고 보살펴 줄 사람은 모랑밖에 없었다. 원화(源
花)였던 남모가 살아 있었더라면, 그미에게는 더 큰 후원 세력이 될 수 있었을 터
였다. 그미가 신라 궁중에서 마음 놓고 대화할 상대는 오로지 모랑뿐이었다.
모랑은 신라왕실의 긴급 사안뿐만 아니라 심맥부의 의중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
람이기도 했다. 그미가 모랑과 친근하게 지내고 있지만, 그를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는 것은 그가 신라왕의 신하이기 때문이었다.
‘아버님은 지금 무슨 계획을 세우고 계시는지 궁금하다. 사택랑을 사비에 보내서
아버님의 의중을 알아봐야겠어.’
“영란아, 잠시 궁 밖에 좀 다녀오너라. 사량부(沙梁部)에 사는 사택랑(砂宅郞)을
만나서 아버님께서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알아보게 하거라. 서라벌은 현재 특
이한 움직임이 없고, 대왕께서도 요즘은 궁궐에만 계시니 요즘 나의 일상이 무척
따분하다고 해라. 그렇게 말하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것이야. 어서 다녀오너라.”
사택랑은 백제의 세작(細作)이었다. 그는 사택씨(砂宅氏) 가문의 사내로 백제군
의 군관 출신이며, 무예가 출중하고 기백이 있었다. 백제왕은 딸 부여공주를 신라
왕에게 시집보내 놓고 사택랑을 은밀하게 서라벌에 잠입시켜 딸이 수집한 각종 정
보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러나 사택랑은 신라궁에 드나들 수 없었다. 그는 사량부
에 귀신처럼 은둔하면서 항상 부여비의 하명(下命)을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부여명농이 백제왕으로 즉위할 때 백성들은 그를 성왕(聖王) 혹은 명왕(明王)이라
고도 했으며, 대륙의 양(梁) 나라에서는 명(明)이라 하였고, 왜의 야마토에서는 성
명왕(聖明王)이라 했다. 그는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였다. 웅진(熊津)은 고구려의
남침으로 백제가 위례성을 빼앗기자 문주왕(文周王)은 다급하게 사비로 천도하
면서 국도가 되었다.
웅진은 외적(外敵)의 방비는 훌륭하나 한 나라의 수도로 좁은 지형이었다. 이에
백제왕은 신하들과 논의하여 사비를 계획된 국도(國都)로 삼기로 하고 천도하였다.
이 지역에는 부여명농의 정책을 지지하는 신진 세력이었던 사씨(沙氏)와 사택씨
(沙宅氏) 가문이 번성해 있었다.
그는 사비 지역으로 천도한 뒤에 국호를 잠시 남부여(南扶餘)라 하고 부여의 후
손임을 천명하였다. 고구려로부터 수복했다가 다시 신라에 빼앗긴 욱리하 하류 지
역은 바다를 통한 대륙과 교류할 수 있는 교두보였으며, 비옥한 곡창지대였다.
신라가 욱리하의 상, 하류를 모두 차지하자 전술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된
백제는 불안하였다. 백제왕은 신라에 욱리하 지역을 빼앗기고도 내부 사정상 곧바
로 신라를 공격할 수 없었다. 그는 딸을 심맥부에 출가시켜 화친을 청하였는데, 이
는 자신과 백제 왕실의 권위에 치명적이었다.
그가 즉각 신라를 반격하지 않은 이유는 예전에 개로왕(蓋鹵王)을 죽인 고구려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동맹군이 필요했다. 신라가 도발에 가까운 행동을 하여도 그는
최대한 문제 삼지 않는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백제왕은 신라를 안심시킨 다음 신라를 치기 위한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덕솔 과야차주(科野次酒)와 간솔 예색돈(禮塞敦)을 왜(倭)의 야마토(大和) 조정에
파견하여 군사지원을 요청하였다. 또한 역박사(曆博士), 의박사(醫博士), 음악가,
승려 등을 보내 왜에 선진문물을 전파하였다. 아울러 그는 가야에게도 군사지원을
요청하였다.
신라는 일곱 살의 심맥부가 등극한 뒤로 그의 생모인 왕태후 김씨가 오랫동안 섭
정하고 있었다. 섭정이 끝나자 스무 살 초반의 심맥부는 조정내 관료의 세대교체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는 나라를 연다는 의미의 개국(開國)으로 연호를 바꾸고 이
사부(異斯夫) 등 원로들을 퇴진시켰다.
그리고 가야 출신인 김무력(金武力) 등 신진 인사들을 기용하는 등 파격적인 인
사를 단행하였다. 명장 이사부 등 원로들이 퇴진하자 신라군을 지휘하는 군관들은
젊고 경험이 부족한 장수들로 채워졌다. 백제왕은 이 시기를 신라를 쳐서 빼앗긴
영토를 되찾을 수 있는 적절한 시기로 판단하고 있었다.
“대왕, 백제의 동향이 심상치 않습니다.”
사비성에 파견 나갔다 돌아온 신라의 세작들이 백제의 상태를 알렸다.
“병부령은 자세히 말해보시오.”
신라왕은 한동안 뜸하던 백제의 움직임이 이상하다는 말에 먼저 부여비를 떠올렸
다. 세작들의 보고보다는 그미의 말이 더 신빙성이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며칠 전 부여비 처소 대신 후궁인 보명궁주(寶明宮主)의 처소를 찾은 일을
기억하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보명은 큰아버지 법흥왕의 딸이었다. 그녀는 서라
벌에서 이름난 미색이었지만, 그미보다 훨씬 뒤처져 있었다. 왕은 지그시 눈을 감
고 보명궁주와 나눈 운우지락(雲雨之樂)을 떠올리고 있었다.
‘보명이 다른 여인들에 비해 과인과 찰떡궁합이야. 초저녁부터 먼동이 틀 때까지
관계하여도 질리지 않아. 그녀는 *색공지신(色供之臣)도 아닌데, 어찌 그리 요분질
을 기가 막히게 하는 걸까? 아직도 하초가 얼얼하고 열기가 가슴에 진득하게 남아
있는 걸 보면 보명은 타고난 색골(色骨)이 틀림없어. 과인하고 사촌지간이기는 하
지만, 그 일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니 과인의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가 있나.’
병부랑과 장군들은 왕이 침을 질질 흘리며, 혼자 웃고 있자 어이가 없었다. 그러
나 중신들은 모른 체하였다.
* 색공지신 - 색을 바쳐 왕족을 보필하는 신하 또는 여인.
“대왕, 사비성에 나갔다 들어온 세작들의 말에 의하면 백제왕이 바다 건너 열도
의 야마토 조정과 가야(伽倻)에 사신을 파견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최근 들어서는
역박사, 의박사, 음악가, 승려 등을 보내 왜놈들의 환심을 사고 있다고 합니다. 이
것은 분명 백제가 왜국과 모종의 거래를 하는 증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가
야는 우리 신라보다 백제에 더 가까이 하려고 합니다.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할
듯 싶습니다.”
“오늘은 부여비의 처소를 찾을 것이야.”
왕은 엉뚱한 말로 병부령의 보고에 답하고 옥좌에서 일어났다.
“대, 대왕, 아직 대낮입니다.”
병부령은 왕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허허, 대왕이 요즘 양기(陽氣)가 넘쳐나는가 보군. 보고를 받는 와중에도 눈을 감
고 고개를 연신 주억거리며 여색을 그리워하고 실실 웃고만 있으니 원. 하기사, 스
물 초반의 보령(寶齡)이시니 그럴 만도 하지. 오늘 밤은 백제공주 처소에 밤새도록
폭풍우가 치고 쾌락에 겨운 신음(呻吟)이 난무하겠군. 젊음이란 참으로 좋은 것이
야.’
조정에 출사했던 장군들도 왕의 의중을 몰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고개를 갸
우뚱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들은 젊은 왕이 지난해 백제로부터 한산하(漢山河)
하류 지역을 탈취하고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는 것 같아 불안하기만 했다.
신하들은 왕이 국토를 확장하고 내정을 튼튼히 하기보다는 후비(后妃)들과 방사
(房事)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에 불만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왕이 국사를 나 몰
라라 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대왕이 오늘 이리로 오신다고?”
왕의 전갈을 받고 그미는 가슴이 콩닥거렸다.
이달 들어 두 번이나 자신의 처소를 찾지 않던 지아비가 갑자기 순번도 아닌데 온
다는 말에 그미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미는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경대
앞에 앉아 단장하였다.
‘무슨 일일까? 이미 두 번이나 순번을 지나치셨는데, 느닷없이 드신다니. 혹시 백
제에 무슨 일이 있어 나에게 질책하려고 하시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 얼마 전에 사
비성에 보낸 사택랑에게서 아직 아무 소식이 없는데, 무슨 일이 있나?’
“왕후님, 좋겠어요. 대왕께서 순번도 아닌데 오늘 밤에 오신다니……. 오늘은 원
래 대왕께서 사도 왕비님 처소로 드시는 날입니다.”
영란이 너스레를 떨면서 그미의 눈치를 보았다. 왕이 오늘 밤에 온다는 전갈에도
그미의 미간이 펴지지 않았다. 왕이 왕비와의 동침 순번을 취소하면서까지 온다는
것은 무슨 중대한 사안이 있음이 분명했다. 그미는 왕이 온다는 전갈이 오히려 부
담되었다.
“영란아, 지금 즉시 사택랑 은거지에 다녀오거라. 지금쯤 사비성에서 돌아와 있
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가 돌아왔다면 아버님과 백제의 소식을 자세히 듣고 오너
라. 문서나 서류를 주면 절대로 받아서는 안 된다. 이야기만 듣고 와야 해. 알았
지?”
영란은 신라궁과 외부를 마음대로 오고 갈 수 있는 신분이었다. 궁궐수비병과 군
관들도 그녀가 부여비의 시녀(侍女)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영란은 궁궐을 출
입할 때마다 수비 군관이나 수직을 맡은 군사들에게 수고비를 안겼다.
“뭐라고? 그게 정말이냐? 대왕이 오늘은 나와 지극한 부부지락(夫婦之樂)을 나
눠야 하는 날인데, 갑자기 부여비(扶餘妃)의 처소에 드신다니, 뭐가 어찌 돌아가
는 것이냐? 나인은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여라.”
‘도대체 그 백제 년이 무슨 수를 쓴 거야? 그 여우 같은 년에게 대왕을 빼앗기면
안 된다. 달포 전부터 대왕이 극락과 지옥을 오고 가게 하려고 규방술(閨房術)을
열심히 익혀왔는데, 어이없이 그년에게 빼앗기고 말았구나. 아이고, 분해라. 오늘
밤은 허전해서 어찌 잠을 잔단 말인가?’
정비(正妃)인 사도왕후 박씨(朴氏)는 나인들의 보고를 받고 불쾌한 낯빛을 하였
다. 그녀는 각간(角干) 박영실의 딸로 왕이 태자 시절에 혼인하였다. 그녀는 다혈
질이며, 욕심이 많은 여장부였다. 지아비에게 여러 명의 후궁이 있으나, 시기와 질
투심이 많은 후궁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서라벌에 땅거미가 내려앉자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궁궐은 온통 꽃 대궐
이었다. 선대(先代) 법흥대왕이 초화를 좋아하여 신라궁 주변은 꽃나무와 기화요
초로 뒤덮였다. 수십여 종류의 꽃들이 바람에 날려 궁궐 안으로 날아들었다. 초승
달이 서천에 뜨고 꽃비가 내리면서 서라벌 처녀, 총각들의 가슴을 달뜨게 하였다.
“왕후님, 제가 사택랑이 사는 곳에 갔을 때, 그분이 막 사비성에서 오는 중이었
어요.”
“그, 그래? 어서 백제의 소식을 알려다오.”
영란은 사택랑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미에게 소상하게 전했다. 그미와 사택랑 사
이의 소식은 늘 영란의 입을 통해 주고받았다. 문서나 서신을 주고받다 다른 사람
들에게 발각될 경우를 대비한 조치였다. 사택랑이 전하는 이야기를 모두 전해 들
은 그미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아버님과 태자가 반격을 준비하고 있구나. 이제부터 내가 제대로 역할을 할 때
가 되었어. 나도 내일부터 궁궐을 돌며 새로운 소식을 수집해야겠어. 그리고 모랑
에게 친 백제 성향의 인사들을 접촉하여 대왕이 자칫 판단 착오를 하지 않도록 해
야지.’
그미가 영란에게 백제의 소식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 때였다.
“대왕님 행차요.”
내관의 외침이 오늘만큼 우렁차고 반갑게 들린 적이 없었다. 그미는 칠보(七寶)로
단장하고 지아비를 마중하였다. 이미 두 번이나 부여비를 찾지 않는지라 왕의 마
음도 편치 않았다.
“어서, 오시어요. 소비가 대왕을 뵙습니다.”
그미가 처소 밖으로 나와 왕을 공손히 마중하였다. 왕은 평복으로 갈아입고 내관
한 명만 대동한 채 그미의 처소를 찾았다. 그는 미안한 마음에 그미와 똑바로 눈을
맞추지 못했다.
“지난번에는 급한 일이 있어 오지 못했습니다. 적적했지요?”
“아닙니다. 소비는 곧 대왕께서 오실 거라 믿고 있었사옵니다.”
그미가 왕을 내실로 안내하였다. 내실에는 이미 두 사람을 위한 주안상이 푸짐하
고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영란은 오랜만에 왕의 얼굴을 보더니 실실 웃으며 이
리저리 바장였다. 두 사람이 내실로 들자 어느새 밖에는 군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펼치며 잡인의 접근을 막았다.
“소비, 과인의 술잔을 받아요.”
“대왕, 고맙습니다.”
왕이 금잔에 미주(美酒)가 찰랑찰랑 넘치도록 따랐다. 지아비의 은근하고 끈적끈
적한 시선이 그미의 전신을 훑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왕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고, 그미는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소비는 과인의 사람이오. 아직도 부끄럼을 타시는구려. 신라에 왔으면 몸과 마
음도 완전한 신라 사람이 돼야 합니다. 그런데 소비는 아직도 백제인 같구려.”
왕이 건배를 제의하며 한마디 하고는 호쾌하게 웃었다. 언중유골(言中有骨)이었
다. 그미는 가슴이 뜨끔했다. 그미는 왕의 말대로 신라왕의 후궁이 되었으니 모든
것을 이른 시일 안에 신라인이 되어야 했다. 그미는 마치 지아비가 자신의 속내를
모두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아 좌불안석이었다. 그미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
키고 잔을 비웠다.
‘정신 차려야 해. 나는 신라왕의 후궁이자 백제왕의 딸이야. 아직은 신라보다 친
정을 더 생각해야 한다. 내색하면 절대로 안 되겠지.’
“대왕의 하해와 같은 성은(聖恩)을 입어 소첩은 그에 보답하기 위하여 완벽한 신
라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나이다.”
그미가 지아비에게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당연히 그리해야지요. 선대왕 때에도 백제의 동성왕의 보과공주가 신라 왕실에
시집온 적이 있었지요. 보과공주는 선대 법흥왕 사이에 남매를 두었습니다. 남모
공주는 비명횡사하였지만, 아들 모랑은 지금 풍월주로 당당하게 신라 조정을 위하
여 정성을 쏟고 있습니다. 그대의 몸에서도 과인의 혈통을 이은 자식들이 태어났
으면 좋겠습니다.”
“대왕, 고맙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그미는 지난가을에 신라왕의 후궁이 된 이후로 서너 차례 합궁(合宮)하였지만,
태기는 없었다. 겉으로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원앙 같지만 두 사람의 심정은 그렇
지 않았다. 새로 술이 가득 담긴 주전자가 내실로 들었다.
‘대왕께서 오늘 밤에 모주망태가 되려고 하시나? 독주 두 주전자가 들어가도 불
이 꺼질 줄 모르니…….’
영란은 내실의 상태를 그려보면서 처소 앞을 이리저리 바장이며, 어서 동방(洞房)
에 불이 꺼지기만 기다렸다. 서라벌 남산에 유성우가 끊임없이 떨어졌다. 바람이
궁궐 담장을 타고 들어와 봄꽃들이 내뿜는 향기를 실어왔다. 비릿한 밤꽃 향기가
어찌나 강한지 영란은 하마터면 향기에 취해 정신을 잃을 뻔했다.
또 한 번 주전자가 들어가고 반 시진이 지나 내실의 불이 꺼졌다. 영란은 내실 가
까이 다가가 두 귀를 쫑긋 세웠다. 궁궐 밖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영란의 귀
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