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묏버들 잎을 띄워(최종)

* 창작공간/단편 - 묏버들 잎을 띄워

by 여강 최재효 2019. 10. 19. 16:20

본문





      - 본 단편소설은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王建)과 그의

        제1왕비인 신혜왕후(神惠王后) 유씨(柳氏)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 입니다. 감사합니다. -









                                                                         








                                            묏버들 잎을 띄워




                                                                                                                                                                  - 여강 최재효




                                      終



 삼천대천의 광활한 천지에는 무수한 유정(有精)과 무정(無精)의 존재들이

공존하며 이합집산을 반복하고 있다. 유정의 존재 중에는 형체가 뚜렷하게

있는 것이 있고 무형(無形)의 것이 있다. 또한, 생각할 줄 아는 것이 있고 생

각이 없는 것도 있다. 무정의 것에게도 유념의 것이 있고 무념의 것이 있다.


 삼라의 온갖 잡상(雜像)들을 바로 천지신명이라 한다. 눈에 보이는 달, 별,

구름, 나무, 바위, 사람, 동물, 비와 보이지 않는 바람, 영혼, 귀신, 유령 등이

모두 천지신명에 포함된다.


 유정이나 무정의 간절함은 다른 신명을 매개로 그의 뜻이 상대에게 완벽하

게 전달된다. 글자나 음성이 아니더라도 성심을 다하는 곡진한 뜻이 있으면

언젠가 상대에게 닿게 된다. 그 기간은 찰나, 하루, 한 달, 십 년, 백 년, 천년,

억만년이 될 수도 있다.


 다만, 유한한 사람의 수명이 따르지 못하여 그 전에 한(恨)으로 남거나 죽음

으로 마감하기도 한다. 물질과 비물질이 끊임없이 시차를 두고 치환됨으로

유한의 유정은 당대의 고통을 탓할 필요는 없다. 


 유천궁은 왕건이 보내온 서신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마음의 상처를 입고 혼

탁한 세속을 벗어나 불심에 귀의한 딸에게 서신을 건네야 할지, 아니면 모르쇠

로 일관해야 할지, 부부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행촌 사람들에게도 왕건이 유천궁에게 서신을 보내왔다는 소문이 퍼져 온갖

억측이 난무했다. 곧 왕건이 유천궁 댁에 온다느니, 출가한 버들아씨가 다시 집

으로 돌아올 예정이라느니 별의별 소문이 무성했다.


 “부인, 아무래도 왕건 장군이 보내온 서신을 버들이에게 전해줘야 하겠습니다.

장군이 그 애가 출가했다는 말을 들으면 찾아올지도 몰라요.”


 “저도 여러 날 생각해봤는데, 그리하는 게 좋겠어요. 그 애가 왕장군의 서신을

본다고 해서 금방 환속(還俗)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야부인은 여승이 된 딸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그리하는 게 옳은 일 같습니다. 진종사를 다녀와야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유천궁은 집을 나섰다.


 그의 품에는 왕건이 보내온 서신이 들어 있었다. 그는 이번에도 배에 양곡을

태산같이 실었다. 이튿날 배는 혈구진에 도착하였다. 양곡과 여러 가지 재물을

가득 실은 수십 대의 우마차 대열이 진종사로 향했다.


 “나무아미타불, 유장자님을 뵙습니다. 그간 여여 하셨습니까?”
 원담이 스님들과 사찰 입구까지 마중을 나왔다.


 “나무관세음보살, 소승, 아버님을 뵙습니다.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유천궁은 여승이 된 딸을 보자 눈물을 쏟았다.


 부녀는 합장한 채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반야는 오랜만에 아버지를 대면하자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주위에 여러 스님이 있어 속내를 드러

낼 수 없었다. 원담은 부녀를 법당으로 들게 하여 다과(茶菓)를 제공하였다. 


 그는 유천궁이 찾아온 이유를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가벼운 일상

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다소곳이 앉아있는 반야는 아버

지가 찾아온 이유를 아직은 눈치채지 못했다. 원담은 담소를 마치고 독경을 한뒤

에 인연에 관하여 법문을 시작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도일체고액

   사리자색불이공 공불이색 …….


 삼라는 종연생종연멸(從緣生終緣滅) 즉, 인연에 의해 생겼다가 인연에 의해

사멸한다. 세상 모든 존재의 나고 죽음은 진실한 모습이 아니어서 불생불멸이

라 할 수 있으며, 그 인연마저도 실존성이 부정될 수 있으므로 모든 존재의 실

재는 공(空)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 있다 하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

고 주장하는 자는 인과와 응보의 윤회를 절대로 믿으려 하지 않는다.


 인연업과(因緣業果)에서 ‘인’은 씨앗이고 ‘연’은 씨앗이 뿌려지는 밭이며, ‘업’

은 씨앗이 튼실한 결실을 볼 때까지 정성을 다하여 가꾸는 행위이다. 인과 연과

 업이 합해지면서 결실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심은 대로 거두고 받으니 선인선과요, 악인악과가 바로 남염부주의 진리이다.

삼천대천에는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다. 현재의 사람은 곧 사라질 신기루에

불과하다. 색불이공공불이색(色不異空空不異色)은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다.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

요, 공이 곧 색이 된다.


 나 자신이 음(陰)이라고 깨닫는 순간 상대적으로 양(陽)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고, 여자가 없으면 남자도 없는 것이다. 남녀관계

는 물과 불의 관계로 파악할 수도 있다. 물이 있어야 불이 나오고 불이 있어야

물이 생겨난다. 


 반야에게는 하늘이 정해준 인연이 있다. 그 인연을 멀리하게 되면 이는 나라와

가문에 크게 욕이 되는 것이니 반드시 성사시키셔야 한다. 금생에 좋은 인연을

한번 맺기 위해서는 과거로 천세(千世), 내세(來世)로 또한 천세가 있어야 가능

하다. 


 법문 끝에 원담은 반야의 환속을 꺼냈다. 그의 법문을 듣고난 유천궁과 반야는

귀를 의심했다.


 “스님, 금세에 반야 스님의 호연(好緣)이 기다리고 있다니요?”
 유천궁이 깜짝 놀라 원담에게 물었다.


 “나무아미타불. 반야는 영원히 부처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나, 속세에 다하지

못한 인연이 있습니다. 그 인연을 잇고 난 뒤에 다시 탈속하여도 부처님은 크게

나무라지 않으실 겁니다.”
 유천궁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원담에게 절을 하였다.


 “나무관세음보살. 스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아, 원담이 내가 온 이유를 알고 있었구나. 과연 대덕(大德)이다.’


 유천궁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원담의 말에 반야는 정신이 나간 듯

멍하니 앉아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몰랐다. 아직도 원담의 법문이 그녀에게

는 알쏭달쏭했다. 반야는 원담의 법문보다 아버지 유천궁의 행동에 더 의문을

가졌다. 두 사람은 법당을 나와 반야가 기거하고 있는 요사채로 갔다. 


 “버들아, 아니 반야 스님, 이거 받으세요.”
 아버지가 딸에게 어색한 존댓말을 쓰자, 반야도 불편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

다. 유천궁이 품에서 서신을 꺼내 건넸다.


 “아버님, 이게 무엇입니까?”
 “스님, 놀라지 마십시오. 왕건 장군이 보내온 서신입니다.”
 “네에? 와, 왕건 장군님이 보내신 서신이라고요?”


 반야는 왕건이라는 이름을 듣자 두 눈에 눈물이 갈쌍갈쌍했다. 금방이라도 눈

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서신을 받고 잠시 돌아앉아서 눈물을 훔치고

가슴을 진정시켰다.


  버들 낭자에게 !
 그대와 천둥 번개 같은 사랑을 하였습니다. 나는 잠시도 그대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궁예 대왕의 지엄한 명을 받고 후백제의 영토였던 전라

도 나주 지역 일대를 점령하고 경영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습니다.

나는 매일 밤 그대가 건넨 붉은 댕기에 입을 맞추며 그대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우리 두 사람의 연분을 시기하여 오래도록 갈

라놓은 것 같습니다. 자주 서신을 보내지 못한 나의 게으름을 용서하세

요.


 아침에 눈을 뜨면 내 마음은 정주를 향해 달려간답니다. 그러나 몸이

나주 지역에 묶여 있다 보니 안타깝기만 합니다. 너무 많은 시일이 흘렀

습니다. 그대가 밤마다 나를 원망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을 거로 생각

하면 사나이 가슴도 미어집니다. 비록 사흘간의 짧은 사랑이었지만 나에

게는 백 년 같은 사랑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송악에 계시는 아버님이 나

주에 오셨기에 유천궁 어르신과 버들 낭자의 인연에 대하여 말씀드렸습

니다. 머지않아 나주 지역의 경영이 반석에 오르면 철원으로 돌아갈 예정

입니다. 


 내 사랑, 버들 낭자!
 너무 오래 기다렸습니다. 이제 일 년 내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

습니다. 행촌에 도착하면 그대가 떠 주는 물을 마시고 싶습니다. 나는 보름

달이 뜨는 밤이면 동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그대를 그려 본답니다.


 편지보다 직접 정주로 돌아갈 날만 꼽다 세월이 성큼 도망가버리고 말았습

니다. 자주 편지를 보내야 했는데, 이제 소식을 띄웁니다. 나를 원망하고 욕

하세요. 그래야, 나의 죄가 속죄될 것 같습니다. 다시 만날 그날까지 건강하

세요.
                                                                                                                         나주에서 왕건


 왕건의 서신을 읽고 난 반야는 대성통곡하였다. 유천궁은 무슨 말로 여승이

된 딸을 위로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였다. 여승이 혼자 사용하는 요사채에서

여인의 통곡 소리가 들리자 비구승들이 ‘무슨 일이 있나?’하고 몰려들었다.

원담은 그 울음소리가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비구승들을 요사채

에서 떨어지게 하고 잠시 반야가 서럽게 우는 소리를 듣고 돌아갔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부처님, 제가 어찌해야 합니까?”
 반야는 부처를 찾으며 통곡하였다.


 유천궁은 딸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 옆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한나절 서럽게

울던 반야는 퉁퉁 부은 얼굴로 차마 아버지를 대하기 민망하였다.     

                       
 “반야 스님, 법당에서 주지 스님의 법문 들었지요? 주지 스님은 왕건 장군의

편지를 보지도 않고 내가 찾아온 이유를 눈치챘습니다. 과연 고승대덕이 맞습

니다. 시간을 가지고 앞날을 생각해 보세요. 왕장군은 아직도 스님을 정인(情人)

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지금쯤 스님의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을 겁

니다.”


 유천궁은 반야를 당장 집으로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그녀의 심정을 알 수 없

었기에 함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버님, 저는 이미 불제자가 된 몸입니다. 환속할 수 없습니다. 저와 왕장군의

인연은 이미 끝났습니다.”


 “스님, 버들아, 아가야, 안 된다. 장군은 장차 고려의 왕이 될 분이다. 주지 스님

이 말했듯이 금세의 호연은 반드시 이어야 한다. 그 인연을 거절하면 천추의 한이

될 거다.”


 “아버님, 돌아가셔요. 저는 절대로 환속하지 않습니다.”
 ‘아,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유천궁은 일단 정주로 돌아왔지만 잔잔했던 반야의 가슴에는 돌을 던진 격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 유천궁이 돌아가고 난 뒤에 반야는 더욱 부처를 연호하며

수도(修道)에 정진하였다. 원담은 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부담을 느꼈다. 그도 왕

건이 반야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유천궁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원담도 왕건이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고 있었다.    


 “뭐라고요? 버들이가 환속하지 않겠다고요? 아, 큰일이구나. 왕건 장군이 일 년

 내로 올라온다고 했는데,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마야부인은 즉시 여리와 함께 진종사로 향했다. 반야는 자신을 찾아온 어머니

마야부인의 목적을 알고 있었다. 삼 년 만에 대면하는 모녀는 마치 남남처럼 서

먹했다.


 “어머니, 저는 불제자입니다. 이미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부처님께 귀의하겠다

고 다짐하였습니다.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셔요. 부탁입니다. 저와 왕장군과

의 인연은 삼 년 전에 정리되었습니다.”


 반야의 단호한 말에 마야부인은 통곡하였다. 어머니의 통곡에 반야 역시 흐르는

눈물을 조용히 훔쳤다.


 “반야 스님, 안 됩니다. 우리 가문의 생사(生死)가 달린 일입니다. 자칫 우리 가

문이 멸문지화로 이어질 수도 있어요.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셔요. 이 어미는

당장 스님을 집으로 데려가고 싶답니다.”
 마야부인의 말에 반야는 흔들림이 없었다.


 “스님, 아니 아씨, 집으로 돌아가셔유. 왕장군님께서 행촌에 오셨을 때 집에 아

씨가 없으면 얼마나 허전해하겠어유. 주인마님 내외분은 요즘 밤잠을 통 못 주무

셔유. 주인마님은 매일 탕약으로 겨우 버티고 계셔유. 행여 주인마님께서 잘 못

실까 걱정이 태산이구먼유.”  


 ‘아버님이 매일 약으로?’
 여리의 말에 반야는 흔들리고 있었다. 마야부인이 돌아가고 반야는 밤잠을 이루

지 못했다.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한 뒤에 나 혼자 해탈하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나는

불효녀이며 두고두고 만인의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다.’


 ‘멸문지화’를 당할 수 있다는 어머니 마야부인의 말과 유천궁이 ‘매일 약으로 버

티고 있다’라는 여리의 말에 그녀는 번민과 갈등에 시달리며 어려운 나날을 보내

야 했다.


 “버들 낭자가 나 때문에 출가하였구나. 나의 잘못이로다. 내가 큰 죄를 지었구

나. 그녀가 얼마나 괴로웠으면 여승이 되었을까?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수신

修身)도 못 하는 놈이 어찌 평천하(平天下)를 꿈꾼단 말인가?”


 왕건은 칙사가 건넨 그미의 시를 읽고 또 읽으며 자신의 무관심을 탓하며 눈물

을 흘렸다. 후백제를 상대로 전쟁을 하는 큰 사내 왕건이 그미가 피로 쓴 춘망사

를 읽고 통곡하자, 막료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의아해하였다.


 다행히 왕건 휘하의 마진국 군사들은 후백제군의 도발이 없어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왕건은 자주 북녘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자 중얼 걸렸다.
  
   花開不同賞(화개부동상) 꽃이 피어도 함께 감상할 수 없고
   花落不同悲(화락부동비) 꽃이 져도 함께 슬퍼하지 못하네
   欲問相思處(욕문상사처) 묻고 싶어라. 그리운 임 계시는 곳
   花開花落時(화개화락시) 꽃피고 꽃 지는 이 시절에…….

 
 “장군, 잠시 정주에 다녀오시지요?”
 부장으로 있는 신숭겸(申崇謙)이 왕건에게 고했다.        

  
 “장군, 신부장 말대로 정주를 잠시 다녀오십시오. 후백제의 도발이 없으니 크게

염려할 일은 없습니다.”
 이번에는 부장 복지겸(卜智謙)이 왕건에게 권했다.


 여러 명의 부장이 왕건이 정주에 두고 온 정인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것을 알고

강력하게 충언하였다. 며칠을 고민하던 왕건은 정주로 수군에게 필요한 장비를

구하러 간다는 명분으로 부하 서너 명을 대동하고 정주로 향했다. 그가 전선을

비우기 위해서는 궁예의 재가(裁可)가 있어야 했다. 그는 철원의 조정에는 알리

지 않고 극비리에 정주를 찾았다. 


 “유장자님 내외분을 뵙습니다. 못난 놈을 꾸짖어 주십시오.”
 “아닙니다. 이렇게 장군을 다시 보니 감개무량입니다.”


 늦은 밤 왕건이 비밀리에 정주의 행촌 유천궁의 저택을 찾았다. 유천궁 내외

는 왕건을 보자 반가운 마음보다 걱정이 앞섰다. 버들아씨가 여승이 된 마당에

왕건이 찾아온 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싶었다. 또한, 딸이 출가했다는 말에 분

노하여 행여나 왕건이 자신들에게 해코지나 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모든 게 저의 잘못입니다. 내일 버들 낭자가 있는 절로 찾아가겠습니다. 장자

님께서 다소 번거롭더라도 소장과 같이 가실 수 있겠습니까?”


 왕건은 새벽까지 유천궁 내외와 마주 앉아 수작(酬酌)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

다. 마야부인은 하인들에게 왕건이 찾아온 사실을 외부에 절대로 알리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렸다.


 날이 밝기 전에 왕건 일행과 유천궁 그리고 마야부인이 정주의 신지강 포구로

달려가 큰 배를 타고 혈구진으로 향했다. 왕건의 마음은 급했다. 행여나 버들아

씨 반야가 마음을 돌리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면서 진종사로 향했다. 다

음날 점심 때쯤 왕건은 진종사에 도착하였다.  


 “나무아미타불, 원담이 왕건 대장군을 뵙습니다.”

 왕건과 유천궁이 진종사로 온다는 기별을 받고 원담과 비구승들이 절 입구까지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러나 반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유천궁과 마야부인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행여나 반야가 부모나 왕건이 찾아올까 봐 진종사를 떠

난 게 아닌가 걱정하였다.


 “대사님, 마진국 장수 왕건이 문후 올립니다. 상구보리(上求菩提)하시며, 하화

중생(下化衆生)하시느라 노고가 많으십니다.”


 “주지 스님, 반야 스님은 잘 계시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 법당에서 공양(供養)을 올리고 있습니다.”


 원담의 말에 유천궁과 마야부인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비구승들은 처음 보는

왕건을 보기 위하여 몰려들었다. 왕건은 곧바로 반야가 있는 법당으로 향했다. 


 “반야 스님, 왕건입니다. 법당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왕건이 문을 열자 반야는 부처에게 공양을 올리고 천 배를 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왕건이 법당 안으로 들었지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지극정성으로 부처

의 명호를 연호(連呼)하며, 절을 올리는 반야를 보고 있던 왕건도 그녀 옆에 서서

 ‘나무석가모니불’을 연호하며, 절을 하였다. 


 법당 밖에는 유천궁과 마야부인, 원담과 비구승 그리고 왕건의 수하들이 왕건

과 반야가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한 *시진(時辰)이 지나도 법당문이 열리지

않았다. 천 배를 올린 반야와 왕건의 얼굴에 땀방울이 아롱아롱 맺혔다.


*시진 - 옛날 시간을 재는 단위로 약 2시간을 가리킴.


 “반야, 버들 낭자, 못난 놈을 용서하세요. 내가 잘못했습니다.”
 왕건이 반야에게 무릎을 꿇고 흐느꼈다.


 “나무아미타불. 장군님, 일어나셔요. 마진국 대장군이 일개 빈승(貧僧)에게 무

릎을 꿇다니요? 안 될 일입니다. 어서요.”


 “반야, 버들낭자, 나는 한시도 그대를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나주 진영에서 대

왕의 명이 없이는 나올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소장이 대왕의 재가 없이 죽음

을 각오하고 달려왔습니다. 부디, 나를 용서해주세요. 내가 잘못했습니다.”


 왕건이 흐느끼자 반야는 왕건에게 다가가 살며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반

야는 한동안 울음을 삼키며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왕건이 어느새 반야

를 안고 있었다. 두 사람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간밤에 꺼졌던 불을 다시 지피리라 결심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염화

미소로 화답하셨고요.”
 “버들낭자. 고, 고맙습니다.”


 법당 문이 열리고 왕건과 버들아씨가 나란히 손을 잡고 나올 때 원담과 비구승

들은 합장하며 큰소리로 부처의 명호를 연호하였고, 유천궁과 마야부인은 서로

얼싸안고 감격하였다. 왕건의 수하들은 손뼉을 치며 두 사람의 재회를 축하했다.

왕건은 얼마 후에 나주에서 올라와 환속한 유천궁의 딸 버들아씨를 정식 부인으

로 맞이하여 혼례식을 올리기로 했다. 


 “버들 낭자, 물 좀 주시구려.”
 “장군, 천천히 드셔요. 빨리 드시면 체할 수 있답니다.”


 유천궁의 저택에서 혼례식을 올리기 전에 왕건과 버들아씨는 우물가로 갔다.

두 사람이 우물가로 가자 마을 남녀노소가 모두 나와 그 광경을 숨 죽이며 바라

보았다.


 왕건이 버들아씨가 건넨 물바가지를 들고 물 위에 뜬 버들잎을 후후 불며 물을

마시고 나서 버들아씨를 살며시 안아 주자 마을 사람들은 환호하며 손뼉을 쳤다.

왕건은 송악으로 돌아와 성대한 혼례식을 올렸다. 송악과 정주의 행촌마을에서

는 보름 동안 마진국 대장군 왕건과 버들아씨의 혼례를 축하하는 잔치가 열렸다. 

                                                  
                                                                                                                                  -끝-






                      왕건의 청동상



          왕건과 신혜왕후  합장 묘 - 개성에 소재










* 본 소설의 여주인공 버들아씨 류씨(柳氏)는 삼중대광(三重大匡) 류천궁(柳天弓)의 딸이자

 태조의 제1왕후이다.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본관은 정주(貞州)이다. 그녀는 왕건과 혼인

하고 그를 지극 정성으로 보좌하였으며, 아내이자 국모로서 많은 이들로부터 총애와 우대를

받았다. 왕건이 즉위하자 왕비로 봉해지고, 뒤에 신혜왕후(神惠王后)로 추봉되었다. 그녀는

태조 왕건의 현릉(顯陵)에 합장되었다.


  _()_ 긴글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다음에는 또 다른 소재와 주제로 임을 찾아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19. 10. 19(토)

                                                                                              인천 구월동 여강재에서 최재효 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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