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역사 단편소설은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王建)과 그의 제1왕비인 신혜왕후
(神惠王后) 유씨(柳氏)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 입니다. 5부까지 계확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묏버들 잎을 띄워
- 여강 최재효
2
아침 해가 밝았지만, 왕건과 버들아씨가 들어 있는 별채는 아직도 한밤 중
이었다. 밤새 선잠으로 지새운 여리는 세숫물을 떠놓고 툇마루에 앉아 졸고
있었다. 유천궁과 마야부인은 별채에 잡인의 접근을 엄격히 통제하며, 두 사
람이 기침하기만 기다렸다.
“여리야, 장군님과 아씨는 아직도 취침에 들어 계시느냐?”
유천궁은 밤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아침을 맞았다. 간밤
에 편히 잠을 잔 사람은 왕건과 그의 군관들뿐이었다. 주석(酒席)에서 대취한
왕건에게 딸과 함께 잠자리에 들게 한 뒤에 유천궁과 마야부인은 가슴을 졸였
다.
상대방의 마음과 취향을 잘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앞질러 갔다가 자칫 일
을 그르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여리가 검지를 입에 대고 유천궁을 밖으로
유도한 뒤에 속삭였다.
“주인마님, 아직입니다. 간밤에 두 분은 먼동이 틀 때쯤 주무신 거 같았어요.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일어나실 테지요.”
‘먼동이 틀 무렵에 잠자리에 들었다?’
유천궁은 여리의 말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여리의 말뜻은 깊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기에 유천궁의 얼굴이 그제야 환하게 펴졌다. 유천궁이 만면에
웃음을 머금자 여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천궁이 물러가자 이번에는 마야
부인이 별채로 들어 여리에게 간밤의 사정을 물었다.
마야부인 역시 여리에게 똑같은 답변을 듣고 두 눈이 화등잔만 해지면서 입이
양쪽 귀에 걸렸다. 두 *시진(時辰)쯤 지난 뒤에 내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해가
중천에 뜰 즈음 여리가 안채로 달려와 소리쳤다.
“주인마님, 버들아씨와 왕장군님이 기침하셨어요.”
여리의 숨이 넘어갈 듯 했다.
“오, 그래? 어서, 어서 장군님이 소세(梳洗)할 물을 대령하고, *동자아치와 반
빗아치에게 아침상, 아니지 점심상을 푸짐하게 차려서 대령하도록 일러라. 장군
께서 간밤에 술을 많이 드셨으니, 시원한 해장국도 끓이라고 해라.”
유천궁이 여리에게 지시하면서도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 시진 - 옛날 시간을 재는 단위로 약 2시간을 가리킴.
* 동자아치 - 부엌일 하는 여자 하인
* 반빗아치 - 반찬 만드는 일을 하는 여자 하인
“버들낭자, 고맙소. 나의 시침까지 들다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
르겠습니다. 간밤에 내가 낭자와 *상합(相合)한 일은 낭자와 낭자 부모님의 뜻
을 반영한 조치였지요?”
자리끼를 들이키고 난 왕건이 잠자리에서 미리 일어나 다소곳이 앉아있는 그
미에게 물었다. 그미는 부끄러워 왕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미의 양 볼은 새벽녘에 치른 천둥 번개 같았던 첫 *운우(雲
雨)의 여운으로 붉게 물들었다.
* 상합 - 남녀가 잠자리를 함께하는 행위.
* 운우 - 남녀가 육체적으로 관계를 맺는 일.
그미는 생전 처음 경험한 남녀관계가 꿈인지 생시인지 아직도 분간이 안 갔
다. 그러나 하체에서 간헐적으로 미미하게 전해지는 통증인 듯 하면서도 야릇한
반응이 싫지 않았다.
처음에는 비수가 몸속으로 파고들 듯 격심한 통증이 차츰 희열로 바뀌면서 그
미는 어렴풋하게나마 남흔여열(男欣女悅)의 묘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미는 간밤
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울렁거려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소녀, 이제 장군님의 여자입니다.”
왕건은 아침 이슬을 머금은 한 송이 백합처럼 고고한 자태로 앉아있는 그미
의 손을 잡았다. 하얀 손이 사내의 두툼한 손에 들어오면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
졌다. 왕건은 그미를 바라만 보았을 뿐인데도 원초적 본능이 동하면서 갈급(渴急)을 느꼈다.
조금 전에 있었던 폭풍우는 어느새 잠잠해졌지만, 또다시 밀려드는 거대한 격정
의 파도에 왕건은 활화산 같은 욕망을 감내할 수 없었다.
* 남흔여열 - 부부의 잠자리가 화락(和樂)함을 이르는 말
“잠시 이리 들어와요.”
왕건이 그미의 섬수(纖手)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비단 이불 속으로 잡아끌
었다. 그미는 화들짝 놀라 섬뜩해 하면서도 그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미
의 가슴이 콩닥거리면서 속이 울렁거렸다. 또한,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전신에
서 전율(戰慄)의 기운이 일어나 눈앞이 캄캄했다.
“장군님, 날이 훤히 밝았습니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 그미는 두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았다. 행여나 어머니
마야부인이나 여리가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아 불안하여 자꾸만 문을 응시
하였다. 그러나 감히 왕건과 유천궁의 딸이 함께 들어 있는 동방(洞房)에 무례
하게 들어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별채는 버들아씨의 신성한 공간이라 유천궁이나 마야부인도 딸이 기거하는
별채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다. 여리만 별채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밤이면 어떻고, 대낮이면 어떻습니까? 남녀가 마음이 맞아 정분을 나누는데
시간 따위는 그리 대수로운 게 아닙니다.”
왕건이 넓은 가슴으로 그미를 감싸 안았다. 간밤에 치른 방사(房事)로 눅눅
해진 비단 금침이 또 청춘 남녀가 흘린 땀으로 젖고 말았다. 여리가 문밖에
대기하고 있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내실에서 기척이 없자 살며시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생전 처음 보는 기묘한 광경에 숨이 막혀 호흡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여리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잡고 귀신에 홀린 듯 내실에서 펼쳐지고 있는 은밀
한 도화경(桃花景)을 훔쳐보았다. 문을 닫을 수도 더 열 수도 없었다.
‘아, 아씨-, 너무 부러워요. 이년은 언제 아씨처럼 칠칠한 사내의 사랑을 받
아 볼 수 있을까요. 지금,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죠?’
여리는 두 사람이 그려내는 생경한 춘화(春畫)를 빠짐없이 훔쳐보면서 몸을
뒤틀었다. 이각(二角)이 지나도록 아무 기척이 없자. 마야부인이 별채로 들다
가 문틈으로 내실을 들여다보고 있는 여리를 보고 달려와 그녀의 등을 건드
렸다.
“여리야, 너 뭐 하고 있는 거야?”
마야부인은 내실에서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얼른 눈치채고 여리를 별채
밖으로 내보냈다. 그녀는 내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잠시 엿듣고 있다가 밖으
로 나왔다.
여리에게 별채로 들어가는 문을 닫게 하고 아무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단
단히 주의를 주었다. 남자 하인들이 마당을 쓸기 위해 별채로 들어가려다 여리의
제지를 받고 머쓱해졌다.
“장군님, 소녀를, 소녀를 오래오래 은애해주셔야 해요.”
그미는 왕건의 품 안에서 밭은 숨을 내쉬면서도 다짐을 받아내려는 듯 했다.
격렬하게 이어지는 행위에 그미는 또 한 번 아래가 비수에 찔리는 통증을 느껴
야 했다. 그 통증은 이내 희열로 바뀌면서 그미의 두 눈에 매작지근한 액체가
갈쌍갈쌍했다.
그미는 그 순간에도 자신의 앞날과 가문의 영화를 그려보았다. 단순한 욕정에
이끌려 맺는 남녀의 육체관계가 아니었다. 두 가문의 영원한 우의와 광영을 위
해 허락된 상합이었다.
왕건의 뜨거운 입김이 그미의 부드러운 나신(裸身)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이
미 방사에 경험이 있는 듯 능숙한 몸짓으로 그미를 지극한 즐거움의 늪으로
인도하였다. 그의 입김이 오묘한 곳에 닿을 때마다 그미는 참았던 희열을 나지
막한 소리로 토해냈다. 다양한 자세로 한 쌍의 자웅이 그려내는 춘화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었다.
“버들낭자, 걱정하지 마시오. 죽음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기 전까지 그대를 은
애하고 또 은애하리다.”
“장군님-.”
내실에 폭풍우가 치고 격렬한 파도가 일었다. 그미의 애절한 신음이 별채 마당
을 가득 채웠다. 이따금 파열음처럼 터져 나오는 사내의 단말마가 별채의 담장을
넘을 지경이었다. 그미는 이제껏 모르던 자신의 육신에 대한 새퉁스러움을 느끼
는 순간 수정보다 맑은 눈물을 쏟고 말았다.
‘아, 관세음보살.’
그미는 지극한 희열을 느낄 때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처를 찾고 있었다.
방사를 치르는 남녀 사이에 얄망궂게 발생하는 태산 같은 격정을 그미는 극락으
로 간주하고 싶었다. 이윽고 '끙'하는 소리와 함께 파정(破精)으로 용광로 같이
끓어오르던 사랑의 절정은 막을 내렸다. 두 사람은 죽은 듯 누워 전신에 퍼져있
는 열락의 여운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아쉬움을 삭혔다.
그미가 살며시 일어나 마른 수건으로 왕건의 단단한 육신에서 비 오듯 흘러내
리는 땀방울을 닦아냈다. 그미는 어머니 마야부인으로부터 초야(初夜)에 관하여
서너 차례 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실제로 사내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 터
라, 운우의 묘미를 깊이 깨닫지 못했다.
그미가 부드레해진 왕건의 육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희열의 여운을 음미하던 왕건이 벌떡 일어나 다시 한번 그미를 꼭 안아 주었다.
하룻밤 사이에 진정한 여인으로 탈바꿈한 그미는 앞으로 전개될 자신의 인생
길이 무척 궁금하였다.
“왕장군, 간밤에 잠자리는 편안하였습니까?”
안채로 든 왕건에게 유천궁이 물었다. 왕건이 옆에 앉아있는 그미를 한번 흘낏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 유천궁의 말에 왕건보다 그미가 더 반응하였다. 그미는
두 뺨이 능금보다 더 붉게 변하면서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푸짐하게 차려진 점심상을 앞에 두고 유천궁 내외, 왕건과 그미는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장자(長者)께서 소장을 배려해주시어 참으로 오랜만에 숙면했습니다. 이 은
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왕장군께서 은혜를 갚는 방법은 딸 아이를 자주 은애해주시는 것입니다. 남
녀의 인연은 미묘한지라, 지속적인 은애와 관심이 없으면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
있습니다. 내 집에서 숙면하셨다니 다행입니다. 갑작스럽게 맺어진 관계지만 어
쩌면 장군과 우리 가문에 경사가 있을 징조로 보고 싶습니다.”
유천궁은 간밤에 딸과 왕건의 깊은 관계를 숙연(宿緣)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의 그러한 심정은 오래전부터 불심(佛心)이 돈독한 마야부인과 딸에게도 마찬
가지였다.
“소장이 지금은 전장에 임하는 처지라 당장은 인륜지대사를 이행할 수 없겠지
만, 어느 정도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아버님을 모시고 정주 땅을 방문하여 논의
하겠습니다.”
왕건은 유천궁의 말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왕
륭으로부터 유천궁의 가문에 대하여 듣고 있었던 터라 유씨 가문에 친근감이 있
었다.
“장군님, 딸이 이제는 장군님 한 분을 밤길을 밝혀주는 등불처럼 여기며 한세
상을 살아갈 것입니다. 부디, 딸의 눈에 눈물이 고이지 않도록 해주셔요. 오늘부
터 우리 모녀는 일심으로 장군님의 앞날에 오로지 광영만 있도록 부처님에게 빌
고 또 빌 것입니다.”
마야부인이 말을 마치고 나서 두 손을 모아 부처의 명호를 연호하였다. 어머니
마야부인이 ‘관세음보살’을 부르자 그미도 따라서 부처의 이름을 외쳤다.
“왕장군, 일정이 긴박하지 않으면 며칠 더 쉬었다 가시지요? 이왕 우리 가문과
장군의 가문이 이어졌으니, 쇠심줄처럼 맺어지기 위해서는 사나흘 묵어가는 것
도 좋은 방법입니다.”
유천궁은 왕건이 딸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을 알고 넌지시 그의 속내를 떠
보았다. 동정서벌(東征西伐)하는 사내에게 하룻밤의 정분은 자칫 풋사랑으로
끝날 염려가 있었다. 왕건은 이미 삼한 제일의 사윗감이라고 소문이 난 상태라
그가 가는 곳마다 그 지역의 호족(豪族)이나 장자(長者) 혹은 유지(有志)들은
그와 인연을 맺고 싶어 했다.
유천궁은 그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에 왕건이 자신의 저택에서 며칠 더
머물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아버지의 뜻을 눈치챈 그미가 조용히 자신의
속내를 내비쳤다.
“장군님, 소녀는 이제 장군님이 떠나시면 가슴 한구석이 휑하니 뚫린 채로 무
정세월을 탓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기왕에 저희 집에 들르셨으니, 아버님 말씀
대로 사나흘 쉬셔요. 늦봄의 초화(草花)가 이제 막 이슬을 맞고 활짝 피려고 합
니다.”
“늦봄의 초화?”
그미가 흐느끼듯 애원하는 탓에 왕건은 파도처럼 밀려드는 진한 연민의 정
을 뿌리칠 수 없었다. 아침 겸 점심을 들고 나서 왕건은 그미와 행촌 근처를 산
책하기로 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무장한 군사들이 뒤따
르며 혹시 있을지 모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그미는 왕건을 신지강으로
안내하였다. 신지강가에 유천궁이 운영하는 조선소(造船所)가 있었다.
“저 조선소는 아버님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왕건은 그미가 가리키는 강기슭을 바라보았다.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규모가 컸다. 왕건은 또 한 번 유천궁의 재력에 놀랐다. 그의 조선소에서는 주
로 상선(商船)이 건조되고 있었는데, 배의 규모는 다양했다.
큰 배는 선원이 백여 명으로 소금을 싣고 황해를 건너 당나라를 갈 수 있는
규모였고, 보통 배는 선원이 오십 명 정도로 쌀이나 생필품을 싣고 서라벌이
나 전라도 지역을 다닐 수 있는 크기였다.
‘내가 장차 후백제나 신라를 정벌하기 위해 수군(水軍)을 운용할 수도 있다.
그때 유장자의 조선소를 적절히 이용하면 여러모로 유용하겠구나. 내가 유씨
가문과 인연을 맺기 잘했어.’
왕건은 여러 장소를 둘러보고 유천궁의 활동상을 직접 알아볼 수 있었다.
유천궁의 집으로 돌아온 왕건은 날이 저물자 또 주연에 참석하였다. 그런데 이
번 주연은 유천궁이 베푸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후의(厚意)에 답례하는 의미에
서 왕건이 마련한 행사였다.
유천궁은 정주 일대에 거주하는 집안 친족들과 지인들을 모두 초대하였다.
그는 왕건이 내는 음식 이외에 별도로 소와 돼지 수십 마리를 잡고 인근 마을과
근동의 주막과 주점을 뒤져 수십 독의 술을 준비하였다.
“어제 유장자께서 소장에게 베푼 후의에 답례하는 의미로 오늘은 소장이 조
촐한 주연을 마련하였습니다. 비록 차린 음식은 변변치 못하나 소장의 마음이
니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왕장군께서 우리에게 후덕한 정을 베푸셨습니다. 마음껏 드시고 즐
겨주십시오, 제가 만세 삼창을 할 테니 따라 해주세요.”
유천궁의 제의로 ‘왕건 장군 만세’ 구호가 행촌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마을
이 또 한 번 왁자했다. 온마을 사람들이 유천궁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유천궁
은 음식을 내어 마을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그는 춘궁기나 추수가 끝나는 시기
에 음식을 내어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곤 했다.
“개똥네, 많이 드슈. 이런 때 안 먹으면 언제 먹어보겠어.”
“쇠똥어멈도 배가 터지게 들어. 우리는 유장자님 덕분에 자주 이런 호사를
누린다네. 그런데 어제, 오늘 연이틀 잔치를 하니 유장자댁에 좋은 일이 있는
가 보네?”
아낙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쑥덕거렸다.
“이런, 먹통 같은 여편네. 아직도 소식 못 들었어?”
“뭔 소식?”
“어이쿠, 저 여편네는 귀가 없나? 행촌 사람 맞아? 어젯밤에 고려 최고 미남
자면서 궁예 대왕의 심복으로 총애를 받는 왕건 장군이 유장자 댁에 오셨잖아.
버들이가 왕장군 시침(侍寢)을 들었대요. 글쎄.”
“뭐시여? 그럼, 버들이 왕장군하고 같이 잠을 잤다는 거 아녀? 워메, 유장자
님께서 삼한 최고의 사윗감을 얻으셨네 그려. 경사로세.”
밤이 이슥해지자 이웃 마을 사람들도 유장자의 저택으로 모여들었다. 유장자
의 저택은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왕
건의 얼굴을 보려고 기를 쓰고 그가 들어 있는 내실을 엿보았다. 내실에서 왕건
과 유천궁 그리고 그의 일가붙이, 마을 원로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
왔다.
어쩌다 하인들이 유천궁의 부름을 받고 내실로 들어갈 때 사람들은 ‘우-’하고
언뜻 보이는 왕건의 모습에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유천궁의 저택으로 몰려든 사
람들은 모두 배가 터지도록 기름진 음식을 먹고 술에 대취하여 흥얼거렸다. 마
야부인은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음식과 술을 제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집사와 하인들에게 마을 사람들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하
도록 지시하였고, 남자 하인들은 근동까지 다니며 술을 구해서 나르느라 비지땀
을 흘려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마야부인은 마을 어귀에 진을 치고 있는 왕건의
병사들에게도 술과 떡, 고기를 보냈다. 마을 사람들과 왕건의 군사들은 밤새워
먹고 마시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낭자, 고맙습니다. 낭자와 유장자께서 나를 위하여 너무 큰 후의를 베푸셨습
니다. 유씨 가문의 후의를 오래도록 잊지 않을 것입니다.”
“장군님, 그리 알아주시니 소녀도 마음이 가볍습니다. 오늘도 많이 드셨습니다.
이제 잠자리에 드셔요.”
왕건이 베푸는 주연은 파했지만, 삼경(三更)이 지나도록 마을의 젊은 축들은
아직도 행랑채와 마당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오늘 같은 날
이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면서 고주망태가 되도록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몰랐다.
왕건과 그미의 침소가 마련된 별채 문이 굳게 닫히고 여리는 별채 안마당을
이리저리 바장이며, 어서 두 사람이 잠자리에 들기를 바랐다. 밤이슬이 지붕에
뽀얗게 내려앉았다. 마침 반쯤 이지러진 달이 동천에서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마을 뒷산에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짐승들이 울부짖으며 짝을 찾느라 시끄러
웠다.
내실에 불이 꺼지자 여리는 문에 바싹 붙어서서 안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신경
을 썼다. 사내의 음성에 이어 여인의 말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잔잔한 미음(微音)
이 문틈으로 흘러나왔다. 여리는 내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상상하며 숨을 죽였
다.
여인의 신음이 길게 이어지다가 사내의 숨 가쁜 소리가 이어졌다. 여리는 마치
자신이 운우(雲雨)를 치르는 것으로 착각하고 몸을 뒤틀었다. 뒷산에서 시끄럽게
울던 산짐승들도 제짝을 찾았는지 잠잠했으나, 소쩍새의 처량한 울음소리가 여
리의 심사를 틀어 놓았다.
‘저놈의 새는 눈치도 없이 피를 토하듯 울고 있네. 우리 아씨가 시방 장군님과
요지경 속을 들락거리며 대사를 치르고 있는데 말이여.’
마야부인은 어제에 이어 선잠을 자며 자주 뒤척였다. 대취한 지아비 유천궁은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나무관세음보살’ 그녀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내실에 모신 불상 앞에 향을 피우고 딸이 청년 장수 왕건과 고운 역사(歷史)가 이
루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하였다.
-계속-
묏버들 잎을 띄워(최종) (0) | 2019.1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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묏버들 잎을 띄워(4) (0) | 2019.10.18 |
묏버들 잎을 띄워(3) (0) | 2019.10.17 |
묏버들 잎을 띄워(1) (0) | 2019.1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