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묏버들 잎을 띄워(4)

* 창작공간/단편 - 묏버들 잎을 띄워

by 여강 최재효 2019. 10. 18.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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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 역사 단편소설은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王建)과 그의 제1왕비인 신혜왕후

        (神惠王后) 유씨(柳氏)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 입니다. 5부까지 계확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묏버들 잎을 띄워




                                                                                                                                                                            - 여강 최재효





                                                                                          4



 인간도 동물이기에 원초적 본능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전혀 다른 가문

에서 자란 남녀가 인연을 맺고 아이를 낳아 가문을 이룬다. 가문이 또 다른  가

문을 번성시키고, 그 많은 가문이 모여 나라가 되고 인간 세계가 된다. 인간 세

계의 기본은 어쩌면 남녀의 가장 순수한 마음에 기인하여 세워지며, 발전한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지역 또는 한 나라의 구성은 수많은 생각과 생각의 공통적인 합일(合一)에

서 기초하는데, 그 합일에 금이 가거나 갈등 요인이 발생하면 피를 흘려야 함은

염부주(閻浮洲)의 특성이기도 하다. 


 갈등에서 자신을 버리고 어느 한 방향의 이타(利他)를 위한 방편으로는 인간

세상에서 신앙만큼 좋은 방도가 또 있으랴. 그러나 세속을 벗어났다 하여 모든

것을 단시일 내에 버릴 수 있는 일은 뼈를 깎는 고통이 수반되지 않으면 공염불

이 될 수도 있다. 모지락스럽지 못한 자는 절대로 탈속을 할 수 없으며, 끝내는

자신도 잃어버리고 만다.


 그미가 탈속을 결심하고 집을 떠나는 날, 행촌에 바람이 휘몰아치고 마른 번개

가 온종일 지축을 흔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미가 찾아오지 않는 임을 그리

상사병에 걸려 실성을 했다거나 혹은 못된 병에 걸려 집을 떠난다고 입방아를

찧기도 했다. 마차 한 대가 마을을 유유히 빠져나갈 때 마야부인은 가슴을 쳤다.


 “내가, 내가 멍청한 짓을 했어. 이일을 장차 어찌한단 말인가?”
 마야부인은 딸이 대문을 나가자마자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아, 버들아, 버들아, 못 간다. 안 된다.”
 마야부인은 열흘 전부터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누워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미의 확고한 신념은 유천궁과 마야부인도 어쩌지 못했다. 아무리 달래고 설

득했지만, 그미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이 집에 있으면 안 돼. 장군님과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집

을 떠나야 해. 이 집에 있다가는 내가 병이 들고 말 거야. 장군님이 언약을 지킬

지 안 지킬지는 아직 속단할 수 없어.’


 그미가 출가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말 많고 어지러운 세사(世事)에서 자신을

숨기고 싶었다.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늘어져도 소식 한 자 없는 먼데 임을 마

냥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미가 왕건과 정분이 났다는 소문에도 불구하고 근동의 호족들은 정주의 대

부호(大富豪) 유천궁과 인연을 맺기 위하여 수시로 중매쟁이를 보냈다. 그러나

유천궁과 마야부인은 그들의 청을 단호히 거절하거나 중매쟁이를 내쫓았다.


 왕건이 행촌에 나타나지 않자 그미와 관련한 별의별 소문이 난무하였다. 마을

아낙들은 빨래터나 공터에 모이면 그미의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함부로

입방아를 찧어댔다. ‘중구삭금적훼소골((衆口鑠金積毀銷骨)’ 즉, 여러 사람의 입

은 쇠도 녹이고 헐뜯음이 쌓이면 뼈도 삭힌다’라는 말이 전혀 틀리지 않았다.

마을 아낙들보다 총각들이 더 난리였다. 


 왕건이 그미를 사흘간 성적 노리개로 취급했을 뿐인데, 유천궁과 마야부인이

눈치가 없었다. 부부가 일심으로 딸을 왕건에게 바쳐 영화를 얻으려다 딸만 못쓰

게 되었다.


 왕건은 본래 호색한(好色漢)으로 가는 곳마다 여인을 취하는데, 얼굴이 좀 반반

하다 싶으면 처녀와 유부녀를 가리지 않는다. 왕건 주변에 널린 게 미인인데 촌

구석의 처녀에게 관심을 두겠느냐? 


 하루가 멀다 하고 유천궁과 마야부인의 귀에 생뚱맞은 말들이 날아들어 부부

를 괴롭혔다. 유천궁 내외는 그 같은 말들이 딸의 귀에 들어갈까 전전긍긍하였

다. 이제는 마을의 원로들도 유천궁에게 넌지시 그미의 혼인을 추천하였다. 왕

건이 다년간 지도 서너 해가 지났건만 그미를 두고 이상한 소문이 끊이지 않았

다.


 “개똥 어멈, 소문 들었어?”
 “뭔 소문?”


 “이 여편네야 귀 좀 열고 살아.”
 “또 무슨 일인데? 요즘 개똥 아범이 아파서 마실을 못 다녔어.” 


 행촌 우물가에 아낙들이 빨래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을의 시시콜콜한 일부터

시작해 그미에 관한 이야기로 웃고 떠들며 빨랫방망이를 두드렸다. 


 “버들이가 글쎄, 밤마다 왕건 장군을 그리며 울고 있다네. 얼마 전에는 손가락

을 베어 피를 한 사발 뽑아 왕건 장군에게 편지를 썼대.”
 “써놓으면 뭐하누. 임이 어디 있는 줄 모르는데.”


 “그리고 요즘은 버들이가 반쯤 정신이 나가서 유장자와 마야부인도 잘 알아보

지 못한대.”
 “저런. 상사병에 걸리면 사람이 미치광이가 된다는데, 맞는 말이구먼. 어이구,

생떼 같은 딸을 바보로 만들었으니 재물이 태산같이 있으면 뭘 하나?”


 아낙들이 한참 수다를 떨고 있을 때 여리가 빨랫감을 가지고 빨래터로 걸어오

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만 보면 함부로 조잘대던 그녀는 요즘 들어 행촌 사람들

과 마주쳐도 고개를 푹 숙이고 지나칠 뿐 아는 체하지 않았다. 아낙들은 그미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입을 꾹 다물고 여리의 눈치를 살폈다.


 “여리야, 버들이는 요즘 어찌 지내고 있니? 하루 세끼 밥은 먹고 있는 거야?

아니면 임 생각에 식음을 전폐하고 울기만 하는 거 아니니?”
 소똥 어멈이 여리에게 물었다.


 “아주머니는 우리 아씨에 대하여 뭐가 그리 궁금한데유? 우리 아씨는 하루

세끼 밥 잘 먹고, 잘 싸고, 잠도 잘 잔다구유. 괜히 없는 말 만들어 이상한 소문

만들지 말어유.”
 여리가 뾰로통해서 톡 쏘아붙였다.               

     
 “버들이가 정신이 좀 이상하다는 소문도 있어. 그게 사실이니?”
 “개똥 엄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셔유. 우리 아씨는 지극히

정상이라구유. 개똥이가 발정 난 개처럼 마을 계집애들 궁둥이를 졸졸 따라다

니지 못하게 단속이나 잘 하셔유.”


 “뭐야?”
 빨래터에서 여리와 개똥 어멈이 한바탕 언쟁을 벌였다.


 마을 아낙들이 일방적으로 개똥 어멈 편을 들자 여리는 모래를 한 움큼 쥐고

아낙들 빨래에 뿌리고 일어섰다.


 “저, 저런 반거들충이 같은 년을 봤나.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인고?”
 “그 주인에 그 종년이네그려.”
 “그러니, 주인과 종년이 나이가 찼어도 시집을 못 가지.”


 아낙들은 씩씩거리며 돌아가는 여리의 등에 대고 욕지거리를 해댔다. 날이 갈

수록 마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유천궁은 모든 게 자신의

판단 착오로 기인한 일이라고 치부하면서 마을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그미는 바깥소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밤마다 ‘장군님’을 연호하며 왕

건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갈망하였다. 


 그미는 또 단지하여 종지에 피를 가득 뽑았다. 마야부인은 여리에게 딸이 두 번

다시는 단지하는 일이 없도록 곁에서 잘 살피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여리가 밤

마다 그미의 곁에 붙어 있을 수는 없었다. 그미는 한지를 펴놓고 임을 그리는 시

를 썼다. 옆방에서 여리의 코 고는 소리가 가늘게 들렸다.      



  溶溶漾漾白鶴飛(용용양양백학비)
  물결 넘실넘실 출렁출렁 흰 갈매기 나르는데
  綠淨春深好染衣(녹정춘심호염의)
  푸르고 청정하게 깊은 봄기운 옷깃에 물들어 좋아라.
  南去北來人自老(남거북래인자노)
  남으로 갔다 북으로 다니며 사람은 절로 늙어 가느니
  夕陽長送釣船歸(석양장송조선귀)
  저녁 해 멀리 보내자 낚싯배는 돌아오네



  
그미가 두목지(杜牧之)의 칠언절구 시 한강(漢江)을 다 써놓고 마지막으로

입술연지를 아래에 찍었다. 여러 해가 지나도록 그미의 인생을 틀어쥐고 있는

임은 소식이 없었다. 이제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미는 진홍빛 연시(戀詩)

를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마침 하현달이 동산에서 애잔하게 솟아오르고 있었

다.


 ‘달님, 왕장군님은 소녀를 잊지 않고 계시는 거죠? 저의 일편단심을 전해주셔

요. 그리움이 원망으로, 그 원망이 다시 가슴에 한(恨)으로 쌓였답니다. 이제 소

녀는 임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장군님께서 적군의 칼날에 몸이 상하지

 않도록, 적군이 쏜 화살이 장군님을 비껴 날도록 보호하여 주시고, 속히 전쟁이

끝나면 장군님께서 저에게 돌아오도록 해주셔요. 소녀가 이렇게 달님께 비나이

다.’


 그미가 조금 전에 피로 쓴 연시를 나지막한 소리로 낭송하고 달님을 올려다보

며 혼잣말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광경을 선잠에서 깬 여리가 문을 빠끔히 열

고 우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 아씨가 저러다 병이라도 얻으면 어쩌나. 아씨가 잘 돼야 내 신세도 편한데

큰일이다.’                             


 다음 날 아침, 여리는 마야부인을 찾아가 간밤에 별채에서 있었던 일들은 알렸

다. 그미가 또 피를 내어 글을 썼다는 말에 마야부인은 대경실색하며 어찌할 줄

몰랐다. 그녀는 지아비 유천궁에게 그미의 출가에 대하여 깊이 상의하였고, 결국

부부는 그미를 출가시키는 쪽으로 마음을 정리하였다.


 “혈구진에 내가 잘 아는 절이 있습니다. 그곳 주지 스님하고는 동향(同鄕)입니

다. 내가 버들이와 함께 가서 부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장자께서 잘 아시는 분이라니 다행입니다.”


 부부는 온종일 딸의 출가 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며칠이 흐르고 드디

어 정주의 대부호 유천궁의 딸이 출가하는 날이 밝았다. 아침부터 마을 사람들

은 그미의 모습을 보려고 유천궁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마을 총각들도 굳은 표

정으로 그미를 바라보았다.  


 “아버님, 어머님, 못난 딸을 용서하셔요.”
 “버들아, 이 어미가 잘못했다. 이 어미를 원망하거라. 우리 욕심이 너무 컸구나.

너를 출가시키고 내가 어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구나.”


 모녀는 서로 부둥켜안고 오열하였다. 곁에서 모녀를 바라보던 유천궁은 헛기침

을 해대며,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얘야, 어서 가자. 갈 길이 멀단다.”
 유천궁이 간신히 모녀를 떼어 놓고 길을 재촉했다.


 그미는 가마를 타고 신지강 포구까지 이동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불제자가 되기 위해 집을 떠나가는 그미를 배웅하였다. 그미를 두고 이러쿵저

러쿵 입방아를 찧던 아낙들도 나와 그미가 떠나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마른 하

늘에서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거리면 입 가벼운 아낙들은 몸을 사렸다. 


 ‘버들아, 너를 사랑하였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마는구나.’
 ‘아, 나의 사랑, 나의 꿈속의 연인. 이제 떠나면 영영 돌아오지 못하겠구나.

나의 찢어지는 심정을 누구에게 하소연한단 말인가.’


 그미가 떠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행촌의 총각들은 가슴을 쳤다.

어느 날, 갑자기 마을에 나타난 왕건에게 버들아씨를 빼앗겨 울분을 삭이고

있던 총각들은 왕건이 나타나지 않자 희망을 품고 있었다.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면 유천궁이 가까이서 사윗감을 고를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팽배해 있었

다.      


 유천궁은 큰 배 두 척에 양곡을 산더미처럼 싣고 유유히 흐르는 신지강을 따

라 혈구진으로 내려갔다. 이틀에 걸려 수백 석의 미곡(米穀)이 우마차를 이용

해 진종사(眞宗寺)로 실려 갔다. 그뿐만 아니라 유천궁은 수만 냥을 부처님 전

에 시주하였다.


 “나무아미타불, 유장자님을 뵙습니다.”
 주지승 원담이 절 입구까지 나가 부녀를 맞이하였다. 


 “대사, 여식을 잘 부탁합니다. 딸이 완전한 탈속은 쉽지 않겠지만 대사께서 잘

지도 편달해 주시면 안심이 될 것 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모든 게 부처님의 뜻이니, 가랑(家娘)께서 일심으로 부처를

찾고자 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입니다. 장자께서는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유천궁이 달포 전에 미리 인편으로 원담에게 기별을 넣어 사찰 내 비구승들은 그

미가 온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다. 비구승들이 수도하는 가람에 여승이 함께 수도

한다는 일이 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스님들은 주지가 재물에 눈이 멀어 계율을 어긴다고 숨어서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차츰 그 같은 비난의 목소리는 사그라지고 말았다. 원담은 그미에게 반

야(般若)라는 임시 법명을 내렸다. 반야는 속세의 모든 인연을 끊으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왕건장군…….”
 ‘아,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반야는 법당에 들어 부처를 호명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왕건장군’을

부르고 말았다. 옆에 있던 원담과 다른 비구승들은 못 들은 척하며, 염불하였

다. 반야는 그만 양 볼이 빨갛게 변해 잠시 염불을 멈추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시나브로 바뀌고 있었다. 왕건은 궁예의 명을

받아 전국 각지에서 소규모로 발흥(勃興)하는 비적이나 반란 세력을 대부분 진

압하였고, 오로지 후백제의 견훤을 제압하기 위해 전력투구하였다.


 왕건은 그의 가문이 키운 수군(水軍)을 이용해 멀리 신라의 서라벌 인근 지역

과 나주까지 진출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는 전라도 서해 덕진포

(德津浦)에서 견훤의 수군을 화공(火攻)으로 대파하는 전공을 세웠다.


 왕건은 이전부터 후백제를 제압하기 위해서 견훤의 목덜미를 물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나주와 영암은 풍요로운 지역으로 견훤의 보물창고와 같은

지역이었다. 


 이곳은 바다와 이어지는 지역으로 소금이 나오고, 까마득하게 넓은 연안 갯벌

에는 다양한 수산물이 풍부했으며, 나주의 광대한 평야에서는 미곡이 생산되었

다. 이러한 풍요로운 조건을 바탕으로 마한(馬韓)과 백제(百濟)는 수백 년 동안

번영을 누렸다.


 마진국에서 왕건의 명성은 궁예보다 더 높았다. 이에 궁예는 점차 왕건의 승승

장구를 질투했고, 그를 관심법으로 보며 궁지로 몰아넣기도 했다. 그러나 왕건은

천지신명이 돕고 있었다. 


 왕건이 태어나기 전의 일이었다. 그의 아비 왕륭(王隆)이 송악의 남쪽에 집을

짓고 조금 지나서였다. 신라 최고의 선지식인 도선(道詵) 대사가 마침 왕륭의 집

근처를 지나가다가 집주인 만나기를 청하였다.


 “나무아미타불. 이 터에서 곧 성인(聖人)이 태어나실 것이오.”
 “대사님,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
 왕륭이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는 도선에게 시주하며 물었다.


 “내년에 장자께서 귀한 아들을 보실 겁니다.”
 일 년 후에 왕륭의 부인 힌씨(韓氏)는 정말로 옥동자를 낳았다.


 그가 태어나기 전날부터 송악산은 오색 구름으로 뒤덮였고, 왕륭의 집 위로 밤

낮으로 무지개가 걸렸다. 왕건이 태어나고 17년이 흐른 어느 날, 도선대사가 송

악의 왕륭을 찾아왔다.    


 “가랑(家郞)은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왕륭은 도선의 방문을 반기면서도 그에게 아들의 운명을 외부 사람들에게는 절

대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대사님, 고맙습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낭중지추(囊中之錐)입니다. 내가 입을 다문다고 하여도 걸출

한 영웅의 존재는 저절로 알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도선은 왕륭의 집에 머물면서 청년 왕건에게 손자(孫子)와 오자(吳子)의 병서

(兵書)와 각종 술법(術法), 무예를 가르쳤다. 또한 그는 왕건과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고대 중국 왕조들의 여러 전쟁사를 면밀하게 분석하며, 승패의 원인 등

을 따져 보기도 하고, 전술에 능통한 자들을 초빙하여 자문을 받기도 했다. 왕

건은 문무를 겸한 삼한 최고의 인재였다.


 그가 궁예의 막료가 되어 반란지역이나 군소 호웅(豪雄) 집단을 진압하기 위해

출전하면 대부분 승리로 마감하였으며, 상대방의 적장을 처단하고 나머지 장졸

들은 방면하였다. 방면된 장졸 중에는 스스로 왕건의 군사가 되겠다고 자원하는

자가 많았다. 투항하여 왕건의 군사로 편입된 자들은 그의 사병(私兵)이 되거나

왕륭의 사업장에서 일하며 왕씨 가문의 충직한 일꾼이 되었다.


 왕건은 나주 지역에 출전하여 수년간 영토 확장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나주 지역 토호들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 지역의 토호 중 한 사람인

오다련이 왕건의 인품과 덕망을 알아보고 그에게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하였다.

이때부터 왕건은 이 지역 호족들과 끈끈한 인연을 맺으며, 전라도 서남부 지역을

평정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왕건이 후백제와 전쟁을 치르면서도 문득문득 정주에 있는 그미를 떠올렸다.

그는 미안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며 먼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습관이 되다시피

했다. 머지않아 정주를 찾아가겠다고 한 언약이 공약(空約)이 된 것만 같아 늘

가슴이 답답하고 체증이 있는 듯 편치 않았다.


 전라도 지역 정벌에 너무 오랜 세월을 허비하는 것 같아 왕건은 불안하였다.

철원에 있는 궁예는 자주 특사를 파견하여 왕건의 주변을 살피게 했다. 궁예는

왕건이 딴마음을 먹고 자신을 배반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내가 유천궁의 딸과 백년가약을 약속했는데. 오랫동안 찾아가지 못했구나.

나의 몸은 이곳 나주 지역에 있지만, 마음은 항상 정주 행촌에 있었다. 이제는

버들 낭자를 가까이 두고 싶다. 지금도 내 가슴 속에는 버들 낭자의 체온이

아있다. 내가 대왕의 부름을 받고 철원으로 가는 날 정주 행촌에 들러 그녀를

만나야 한다. 어쩌면 그녀는 매일 밤 나를 원망하면서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죄인이구나. 한 여인의 가슴에 통한(痛恨)을 남겼으니, 이 벌을 어찌

받을꼬.’


 왕건은 수하 중에서 발 빠른 자를 시켜 정주의 유천궁을 만나보게 하였다. 그

는 버들 낭자에게 보내는 서신을 주면서 반드시 답신을 받아오라고 하였다. 왕건

의 칙사는 밤낮을 쉬지 않고 북쪽으로 달렸다. 사흘 만에 정주 땅에 도착한 칙사

는 곧바로 유천궁의 저택을 찾았다. 말 탄 군사가 행촌에 진입하자 마을 사람

이 몰려나왔다. 


 “나는 왕건 장군님의 수하입니다. 유장자를 만나고자 합니다.”
  마을 촌장이 군사를 유천궁의 집으로 안내하였다.     


 “와, 왕건 장군께서 보내셨다고요? 자, 어서 안으로 듭시다.”
 유천궁은 칙사를 후히 대접하였다.


 “장자님, 이 서신은 장군께서 버들낭자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반드

시 낭자의 답장을 받아오라 하였습니다.”
 “아,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유천궁 내외는 탄식하였다. 유천궁과 마야부인은 그간의 사정은 말하지 못하고

가슴을 쳤다. 그때 곁에서 시중을 들던 여리가 마야부인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어서, 어서 그것을 가져오너라.”
 여리는 그미가 피로 쓴 시들을 버리지 않고 별채에 잘 보관해두고 있었다.


 여리가 시들이 적힌 한지를 가져와 마야부인에게 건넸다. 마야부인은 여러 편

의 시 중에서 설도의 춘망사를 골랐다. 유천궁은 그 시를 읽고 눈물을 훔쳤다. 마

야부인은 피로 쓰인 춘망사를 곱게 접어 봉투에 넣고 칙사에게 건넸다.


 “이것은 내 딸이 왕장군님을 그리며 쓴 글입니다. 왕장군님께 전해주셔요. 그리

고 그 아이는 삼 년 전에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칙사는 버들아씨가 불제자가 되었다는 말에 매우 놀랐다. 칙사는 곧바로 남쪽을

향해 달렸다. 칙사가 떠난 다음 유천궁과 마야부인은 왕건이 보낸 서찰을 개봉했

다. 부부는 서찰을 읽고 또 한 번 눈물을 훔쳐야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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