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로 서두르지 마시고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임하셔요.” “낭자, 그대가 나에게 지혜를 알려주는구려. 가슴 깊이 새기리다.”
이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진군하는 왕건은 유천궁과 그미를 향
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의 군대가 산모퉁이를 돌아 시야에서 가물가물할 때
까지 그미는 그 자리에 꼼짝하지 않고 서서 눈물을 훔쳤다.
“아씨, 너무 슬퍼하지 마셔유. 장군님께서 도적들을 퇴치하고 나면 곧바로
행촌으로 돌아오실 테지유.”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니.”
그미는 한숨을 쉬면서 지난 사흘간의 사랑을 음미했다. 생전 처음 겪은 일이
라 생각만 해도 짜릿하고 환상적인 일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남녀의 사랑을
막연하게 그리고 있던 그미는 야생마 같던 왕건의 정력에 고통과 희열을 동시
에 맛보는 경험을 하였다.
마야부인은 딸이 왕건과 첫 밤을 보내고 나서 조용히 불러 사정을 알아보았
다. 그미는 마야부인이 묻는 말에 얼굴을 붉히며 간신히 대답하였지만 모두 말
할 수 없었다. 마야부인은 딸이 왕건과 운우의 정을 나눴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그녀는 손가락을 세면서 무엇을 계산하며 미소를 지었다.
유천궁은 딸이 고려 최고의 사내와 정분을 나눴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
며, 장차 딸의 앞날에 부귀와 영화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마을 원로들은
그에게 ‘축하한다’는 인사를 하였고, 그는 곧 왕건을 사위로 맞을 것처럼 화답
하였다.
‘정주의 유천궁이 왕건을 사위로 들인다’는 소문이 바람을 타고 근동까지 퍼
져나갔다. 사람들은 유천궁을 게염내거나 시기하였다. 세사경염랭(世事經炎冷)
이란 선인들의 말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왕건이 유천궁의 딸과 정분이 났다는 말에 유지들은 유천궁을 찾아와 미리
부터 잘 봐달라는 부탁을 하였고, 지역의 하급 관리들은 유천궁에게 인사 청탁
을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유천궁은 자칫 일이 틀어질까 걱정되어 외부인들을
만나지 않는 등 자신을 엄하게 잡도리했다.
마야부인은 마을 아낙들을 불러 딸이 왕건과 사흘 밤낮을 함께 했던 일을 될
수 있으면 입에 올리지 말 것을 당부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라는 지
극히 당연한 진리를 그녀는 두려워했다.
한 달, 두 달이 무심결에 흘렀다. 마야부인은 딸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그
녀는 사흘간의 합방으로 행여나 딸이 수태(受胎)의 기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그미가 다시 꽃물이 비치자 그녀의 기대가 실망
으로 끝나고 말았다.
‘임신하기 딱 알맞은 기간이었는데, 참으로 아쉽구나.’
속절없이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왕건이 다녀 간지 반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그미의 한숨과 탄식은 늘어만 갔다. 비가 내리는 밤이면 그미는
황촛불을 켜놓고 밤새 책을 읽거나 수취인도 없는 연서(戀書)를 썼다.
그미는 서신을 써놓고 입술연지를 찍은 다음 장독대에 올려놓고 기도하며 글
이 바람을 타고 왕건에게 전해지기를 기도하였다.
그미가 늘 곁에 두고 읽는 서책이 있었다. 불경(佛經)과 당나라 여류 시인 설
도(薛濤)와 어현기(魚玄機) 그리고 두목지(杜牧之)의 시첩이었다. 그미는 당나
라 시인들의 시를 거의 외우고 있었다. 그미는 아버지의 배려로 어려서부터 사
서삼경과 다양한 불경을 접할 수 있었다.
유천궁은 뜻한 바가 있어 정주에서 제일가는 지식인을 초대하여 그미에게 학
문을 가르치도록 했다. 그미는 특히 당시(唐詩) 중에서 연가풍의 연시를 감상하
면서 그 시들이 자신의 아픈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다고 보았다.
自歎多情是足愁(자탄다정시족수) 스스로 한탄함은 내가 원래 다정하여 시름이 많음이니 況當風月滿庭秋(황당풍월만정추) 하물며 가을바람 불고 밝은 달 가득 비치는 철 아닌가 洞房偏與更聲近(동방편여경성근) 동방에서 듣는 때를 알리는 북소리 夜夜燈前欲白頭(야야등전욕백두) 밤마다 나는 등불 앞에서 저 소리 들으며 머리가 센다
그미는 왕건과 함께 덮었던 비단 이불에 어현기의 추원(秋怨)을 써 내려갔다.
추원은 어현기가 그의 연인이었던 이억(李億)을 그리며 지은 칠언절구 연시(戀
詩)이다. 그미는 붓을 놓고 추원을 세 번, 네 번 읽으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장군님, 저를 영영 잊으셨습니까? 사흘간의 사랑이 그저 한때의 장난이었고
풋사랑이었습니까? 어찌, 소식 한 자 없으십니까? 간밤에도 장군께서 백마를 타
고 저희 집에 찾아오시는 꿈을 꾸었습니다. 저는 너무 기뻐 달려갔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장군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너무 놀라 잠자리에서 일어나니 창밖에
잎이 떨어지고 달만 덩그러니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정녕, 저를 잊은 건
아니죠?’
그미가 흐느끼는 소리는 별채 안마당까지 퍼져나갔다. 옆방에서 밤마다 버들아
씨가 슬피 우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해야 하는 여리의 심정도 답답했다. 그녀
도 그미가 우는 사연을 잘 알고 있었다.
‘도대체 사내들은 모두 다 그런가? 곧 다시 올 것처럼 말하더니 장군님은 언제
오시려나. 우리 아씨 저러다가 상사병(相思病)이라도 나면 어쩌란 말인가? 장군
님이 계신 곳을 알면 내가 달려가 아씨의 심정을 전해주련만…….’
별채에는 밤마다 한 여인의 애잔하게 흐느끼는 소리와 또 한 여인의 탄식 소리
가 반복되었다. 꽃 같던 그미의 얼굴이 서리 맞은 가을꽃처럼 변해가자 유천궁과
마야부인의 시름도 깊어 갔다. 유천궁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왕건의 무심함을
탓하고 있었다.
아무리 비적(匪賊)을 소탕하고 반란 세력을 제압하는 일이 중요하다지만, 딸에
게 기별도 없는 그의 처사가 야속하기만 했다. 그러나 전선(戰線)의 상황을 정확
하게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속단할 수도 없었다.
“장자께서 송악을 다녀오세요.” 반년이 넘도록 왕건에게서 아무런 소식이 없자 마야부인은 지아비 유천궁에게
송악으로 사람을 보내 왕건의 근황을 알아보라고 했다.
“아니오. 더 기다려 봅시다. 왕장군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릴 인물이 아니오.
지금 후백제를 상대로 치열하게 전쟁을 하는 마당에 우리가 사람을 보내면 왕륭
(王隆) 대인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 가문에서는 아들의 생사가 달린
문제로 항상 신경이 날카로울 겁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딸의 문제를 들고
가면 그 댁이 탐탁하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어요. 기다려 봅시다.”
마야부인은 지아비의 너그러운 마음씨에 부아가 났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
그녀는 차츰 말수가 적어지는 딸이 걱정되었다.
‘아, 저러다가 버들이가 병이라도 얻으면 어쩌나? 사람들은 우리 부부의 욕심 때
문에 딸이 병을 얻었다고 손가락질할 텐데…….’
새해가 되고 다시 봄이 찾아왔다. 그러나 학수고대하던 임으로부터 전혀 기별이
없자 그미는 절망에 가까운 심정이었다. 그미는 별채에 들어앉아 두문불출하였다. 유천궁은 딸이 행여 병이나 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자주 별채에 들어 딸을 들여다 보았다.
“얘야, 너무 상심하지 말거라. 왕장군은 지금 후백제를 상대로 전쟁을 하고 있
으니 여념(餘念)이 없을 것이야. 조금만 더 기다리면 무슨 소식이 있을 거다. 그
러니 제때 밥 챙겨 먹고, 늘 좋은 생각만 하고 있거라. 왕장군은 대인(大人)이라
범인(凡人)과는 다르다.” “아버님, 잘 알겠습니다.”
그미가 왕건과 연분을 맺은 지 일 년이 되는 날 아침 일찍 가까운 사찰을 찾았다. 여리와 하인들 서너 명을 대동하고 찾아간 사찰은 평소 자주 다니던 곳이었다. 그미는 대웅전에 들어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불공을 드리고 원통전에서 관음보살에게도 소원을 빌었다.
“부처님, 나무관세음보살님, 왕건 장군님이 적들의 창칼에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여 주시고, 소녀가 건넨 붉은 댕기가 장군님의 부적이 되어 호신하도록 해주셔요. 일 년이 지나 건, 십 년, 백 년, 천년이 지나더라도 소녀의 임을 향한 일편단심은 변함이 없을 겁니다.”
그미의 간절한 기도를 관음보살이 알아들었는지, 그미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부처는 염화미소(拈花微笑)로 화답하였다. 스님들은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절을
방문하여 공양을 올리는 그미를 알고 있었다. 주지 스님은 그녀의 간절한 소원을
부처님이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고 위로하였다. 불공을 올리고 돌아온 날 밤,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 봄비, 저 봄비가 내리고 나면 초화(草花)는 더욱 만화 방창할 테지. 그러나,
마치 죄인처럼 별채에 갇혀 있는 나는 누구인가? 왕건이란 사내를 마냥 기다리
기만 해야 하나.’
그미는 정인 왕건의 선풍도골(仙風道骨)을 그리며 눈물을 찍어내고 답답하고
아픈 심사를 글로 써 내려갔다. 여리가 옆에 앉아 먹을 갈았다. 그미는 여리에게
밖에 나가서 연적을 가져오라고 시키고 왕건이 건네준 단검을 꺼냈다.
그미는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단도로 검지의 끝에 대고 그었다. 종지에 선홍빛
피가 떨어졌다. 그 피는 임을 향한 그미의 단심이었고, 변함없는 정절(貞節)이었
다. 여리가 연적을 가지고 방으로 들었을 때 피 묻은 단검을 보고 놀라서 소리
쳤다.
“안 돼요, 아씨, 안 돼요.” ”쉿, 여리야, 조용히 하여라.“
종지에 선홍빛 피가 가득 고인 것을 보고 여리는 충격을 받았다. 그미는 여리를
진정시키고 마음을 정리한 다음 붓을 들었다. 연시를 쓸 때마다 눈물이 글자 위
로 떨어져 붉게 번졌다. 글씨가 써질 때마다 그미의 탄식이 이어졌다.
花開不同賞(화개부동상) 꽃이 피어도 함께 감상할 수 없고 花落不同悲(화락부동비) 꽃이 져도 함께 슬퍼하지 못하네 欲問相思處(욕문상사처) 묻고 싶어라. 그리운 임 계시는 곳 花開花落時(화개화락시) 꽃피고 꽃 지는 이 시절에…….
그미는 설도의 춘망사(春望詞)를 써놓고 설움이 복받쳐 더는 쓸 수 없었다.
그미의 피로 쓰인 설도의 시는 그녀의 단심(丹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곁에 앉아있던 여리가 그 뜻을 모르지만 버들아씨가 울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우울해 했다.
여리가 흐느끼는 그미를 아무리 달래고 위로하여도 소용이 없었다. 여리는
슬그머니 나가더니 잠시 후에 마야부인과 함께 별채로 들었다. 마야부인은 혈
서(血書)를 써놓고 울고 있는 딸을 보고 가슴이 벌벌 떨리고 정신이 아득하였
다.
“버들아, 버들아, 이게 무슨 일이니? 네가 얼마나 임이 보고 싶었으면 단지
(斷指)를 하여 피를 내어 시를 쓴단 말이야. 아이고. 아이고.” 마야부인은 딸 앞에서 눈물을 훔치며 통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