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부석사 선묘낭자 영정
일지랑
- 여강 최재효
제5부
삼라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자라서 익어간다. 인간의 심성도 생
각과 모양이 불분명하여 보이지 않지만 서로 작용하고 있다. 삼세
의 인연들 또한 시공의 파장으로 전생의 생각들이 현생에서 실현
되고 금생에 하던 일은 내생으로 연장하게 된다. 종연생종연멸은
만고의 법칙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있어 삼세윤회가 존재한다.
윤회는 필연적인 연기(緣起)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인연 업과에서 ‘인’은 씨앗이고 ‘연’은 씨앗이 뿌려지는 밭이며,
‘업’은 씨앗이 튼실한 결실을 볼 때까지 정성을 다하여 가꾸는
행위 이다. 인과 연과 업이 합해지면서 결실이 생긴다. 종자가 좋
고 밭이 기름져 농사를 잘 지으면 풍년을 맞으리라. 심은 대로
거두고 받을 것이니 선인선과요, 악인악과가 염부주의 진리라.
하늘이 정해준 인연을 멀리하게 되면 이는 나라와 가문에 크게
욕이 되는 것이니, 그 인연을 반드시 성사시키셔야 한다. 호연은
자주 오는 게 아니다. 범인(凡人)에게 좋은 인연은 평생 두세 번
정도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대개는 몰라서 그냥 흘려보낸다. 호
연을 한번 맺기 위해서는 과거로 천세(千世), 내세로 또한 천세가
있어야 가능하다.
“나무관세음보살. 스님, 참선을 방해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응? 신라말.'
선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의상은 신라 말을 하는 당나라 아가
씨의 인사말을 듣고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나무아미타불. 보살님을 뵙습니다. 소승은 신라의 의상이라 합
니다.”
의상이 고개를 돌려 선묘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면서 두
사람은 순간 현기증을 느꼈다.
마치 아지랑이 속에서 춤추는 신기루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꿈결 속에서 보았던 정인의 모습 같기도 했다. 선묘는 눈을 부릅
뜨고 의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아, 그런데, 그런데. 스님이 일지랑 너무 닮았다.’
선묘는 의상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가 분명 당나라 처자를 보고 있는데, 어째서 이 처자의 얼굴
에서 묘화가 보이는 걸까? 참으로 이상한 일이구나.’
의상 역시 선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
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김일지?”
“묘화?”
의상과 선묘는 동시에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놀란 얼굴
로 서로를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었다.
선묘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며, 뺨을 적시고 있었다. 의
상 역시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썼다. 의상의 눈에서
도 눈물이 흘러 빰을 적시고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묘화가 눈앞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의상은 믿기지
않았다. 의상은 혹시 자신이 잠에서 기가 허해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허벅지를 꼬집어보았다. 생시(生時)가 분명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조화인가? 관음보살께서 나를 시험하시고
자 십 년 전에 바다에 투신한 묘화의 모습으로 현신하신 것인가?
아니라면 이승의 현상계에서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
날 수도 있음인가? 내가 지금까지 공부한 것이 한낱 도깨비장난
에 불과하단 말인가? 아아, 도대체 무엇이 어찌된 것인지 모르
겠구나.’
의상은 선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돌부처처럼 앉아 있었다.
“서방님, 묘화가 맞아요. 십 년 전 신라에서 당나라에 공녀로 보내
졌던 그 묘화입니다.”
“정말로 그대가 묘화가 맞소?”
“예. 제가 바로 그 묘화입니다. 서방님과 장래를 약속했던 서라벌
에 살았던 선우부인의 딸, 묘화입니다.”
“아, 묘화. 묘화-.”
의상은 불제자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묘화를 끌어안았다. 의상
의 품에 안긴 육신은 허상(虛像)이 아니었다. 두 사람 흉중에 묻혀
있던 가슴아팠던 10년의 시공(時空)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순
간이 었다.
“서방님, 이게 꿈은 아니지요?”
“묘화, 생시가 맞소. 어디 있다 꿈결처럼 나타난 거요?”
“서방님,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하자면 하룻밤을 꼬박 새워야 합
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말씀드리고 우선 제가 이집
수양딸이 된 사연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묘화, 보고 싶었소. 너무 그리웠다오. 그런 당신을 먼 타국 땅에
서 만나다니요. 당신을 이렇게 안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소.”
“서방님, 저도 지금 이 순간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게 부처님의 뜻인가 봅니다.”
두 사람은 한식경 가까이 안고 있다가 떨어져 앉았다. 아무리 보
아도 틀림없는 신라의 김일지이고 묘화였다. 선묘는 하염없이 흘러
내리는 눈물을 닦아내느라 말을 잇지 못하였다. 의상은 그런 선묘를
은은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인연의 무서움에 대하여 몸서리 쳤다.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염부주의 모든 인생은 종연생이고 종
연멸이로다. 십 년 전에 죽은 줄 알았던 묘화가 지금 내 눈앞에 있
다니. 나와 묘화가 비슷한 시기에 신라 땅 서라벌에 태어난 것, 묘
화가 당나라에 공녀로 건 것, 내가 삼보에 귀의한 것, 머나먼 당나라
등주에서 다시 묘화를 만난 것, 이 모든 것이 부처님의 뜻이었더란
말인가? 이 순간 이후부터는 우리 두 사람 앞날이 어떻게 진행 될
것인가.’
의상은 선묘를 보고 또 쳐다보아도 십 년 전에 죽었다고 알고 있
던 묘화가 분명하였다.
“서방님, 들어보시어요.”
묘화가 승만공주의 간계에 의해 당 황제에게 바쳐지는 공녀로 선
정되어 당나라로 가는 배를 탔었다. 그녀는 당나라 등주항에 입항
하는 배에서 바다로 투신하는 순간 몸이 허공에 붕 떠있는 느낌을
받았고 이후로는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그때 한 줄기 하얀빛이 묘
화에게 닿으면서 그녀는 붉은 연꽃잎에 쌓인 채 바다 속으로 서서
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사흘이 지난 이른 아침 등주 앞바다에 큰 연꽃이 파도에
밀려 해안가로 서서히 다가왔다. 이를 본 어부가 급히 관아에 신
고하였고, 해안 경비를 담당하는 군관과 병졸들이 급히 해안가로
뛰어갔다.
그들도 그렇게 큰 연꽃을 본적이 없었다. 병졸들은 그 연꽃을 건
져 올려 해안가로 안치하였다. 군관이 오므라진 연꽃잎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연꽃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기 때
문이었다.
군관은 병졸들에게 일러 연꽃잎을 다시 벌려보라고 하였다. 병졸
들이 두려워하며, 조심스럽게 오므라진 연꽃잎을 벌리다 혼비백산
하여 물러났다.
연꽃 안에 웬 여인이 백의(白衣) 차림으로 합장한 채 다소곳이 앉
아 있었다. 여인의 머리 위로 오색 무지개처럼 걸려 있었고 향기가
풍겼다. 사람들은 여인의 거룩한 모습에 그만 두 손을 모으고 허리
를 숙여 예를 올렸다.
“관음보살님이다.”
“백의관음보살께서 등주에 현신하셨다.”
군관이 기이한 일이 일어나자 즉시 등주의 주장(州長)에게 보고하
였고, 보고를 받은 주장은 급히 해안가로 달려갔다.
“오오, 백의관음이시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잠시 후, 연꽃 안에 앉아 있던 여인이 의식이 돌아오면서 눈을 떴다.
“나무관세음보살. 여기가 어디입니까?”
“…….”
“나무관세음보살. 나는 신라에서 왔습니다. 여기가 어디고 당신들
은 누구십니까?”
“…….”
여인이 아무리 말을 하여도 주장과 병사들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주장이 붓을 그 여인에게 건넸다. 여인은 이곳이 이
국(異國)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붓을 들어 글을 써서 주장에게 건넸다.
我是 新羅國人, 金城居住, 妙花
“아, 신라국 서라벌에서 오신 묘화님이시다. 묘화님이 우리 당나라
에 백의관음으로 현신하여 나투셨다. 여봐라, 이 분을 가마로 정중하
게 관아로 모셔라. 그리고 이일을 일단 비밀에 부쳐야 한다.”
등주와 인근 고을에 신라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주장
은 신라 여인을 초빙하여 묘화에게 말동무로 붙여주었다. 필화(筆話)를
통하여 주장은 묘화에 대한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다. 주장은 묘화를 자
신의 집으로 옮겨 거주하게 했다.
“나는 이곳 등주를 책임지고 있는 당나라 관헌 유지인(劉知仁)이라
합니다. 마땅히 가실 곳이 없으시다면 누추하지만 내 집에서 마음
편히 머물도록 하십시오.”,
“나무관세음보살. 고맙습니다.”
묘화는 새로 태어난 느낌이었다. 묘화라는 이름을 버리고 스스로
선묘(善妙)라 하였다. 유지인은 당나라 관리이면서 부처님을 마음에
담고 있는 신실한 신앙인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선묘가 배에서
바다로 뛰어 내리면서 등주 앞바다에 연꽃에 쌓여 나타날 때까지 있
었던 일에 대하여 아무 기억이 없었다.
선묘는 신라에서 건너온 여인을 통하여 당나라 말과 풍습을 배웠
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되었다.
“어르신, 오갈 데 없는 저를 거두어 주시어 너무 감사합니다. 이제
이 댁을 떠나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너무 오래 신세를 졌습니
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요?”
“선묘, 정처도 없이 어디를 간다고 하십니까? 이 험한 애분(埃氛)에
서 마땅히 갈 곳이 없을 테니, 이 집이 내 집이려니 하고 살도록 하십
시오.”
유지인에게도 딸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어려서 역병으로 그만 그
딸이 죽고 말았다. 그 이후로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하고 부부는
쓸쓸히 황혼을 맞고 있었다. 그들은 선묘가 집안으로 들어 올 때 죽
은 딸이 환생하여 돌아왔다고 생각하였다.
“어르신, 고맙습니다.”
선묘는 유지인 부부를 아버님, 어머님이라 부르며 그들을 공경하
였고, 유지인 부부는 선묘를 친딸처럼 대해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정식으로 선묘를 수양딸로 입적(入籍)시켰다.
부부는 한가할 때 선묘와 함께 등주에 있는 관음사에 들러 부처님
에게 공양을 올리곤 했다.
선묘는 신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자신을 거두어 준 유지인 부부
의 은혜를 저버릴 수 없었다. 서라벌에 계신 어머님과 일지의 소식
이 궁금하였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인연이 닿을 것이라 믿고 있었
다.
선묘가 유지인의 수양딸로 지내면서 양부 유지인을 통하여 종종
신라의 소식을 접하였다. 덕만여왕이 죽고 자신을 당나라로 보낸
승만여왕도 죽었으며, 그녀의 뒤를 이어 진골 출신의 김춘추가 왕
위를 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해 여름에 백제국이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멸
망하였다는 소식도 접하였다. 조국 신라가 무척 혼란스러운 지경
에 처했을 거라는 생각에 선묘는 어머니의 안위가 무척 궁금하였
다. 강제로 헤어진 지 이미 10년 세월이 지나고 있었다.
“나무아미타불지장보살마하살. 묘화, 이모님은, 이모님은…….”
“서방님, 어머님이 어찌되셨나요?”
의상은 얼른 입을 열지 못했다.
“이모님은 묘화가 당나라로 떠나고 얼마 뒤에 돌아가셨습니다.”
“네에, 어머님이 돌아가셨다고요?”
의상은 묘화가 당나라로 가던 도중에 배에서 투신하였다는 소식
을 듣고 선우부인이 목을 맸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머니-, 어머니-.”
묘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울면서 동쪽을 향해 절을 하였다.
“이모님은 극락왕생하셨을 겁니다. 너무 슬퍼하지마세요.”
의상이 아무리 타일러도 묘화는 울음을 그치지 못하며, 어
머니를 애타게 불렀다.
묘화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의상은 자신이 고구려의 접경지역
에서 근무하다 덕만여왕의 부름을 받고 서라벌에 돌아왔을 때,
묘화가 당나라에 공녀로 뽑혀간 사실과 선우부인의 자결 소식,
동생생 수로의 타살 소식을 접하고 한동안 방황했던 일들을
들려주었다.
“어머님, 어머님이 저 때문에 돌아가셨어요. 일련의 비극으로 서
방님께서 인생의 허무를 느끼시고 부처님에게 귀의하셨군요.”
선묘는 어머니가 자신이 바다에 투신한 소식을 듣고 목을 맸다
는 이야기에 또 다시 대성통곡하였다. 의상은 울고 있는 선묘를
달랬으나, 그녀는 쉽게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나무아미타불. 이 모든 게 부처님 뜻인 것을…….”
의상과 선묘의 상봉은 둘만의 비밀로 하였다.
만약 양부모가 의상과 선묘가 한때 장래를 약속했던 연인 사이
라는 것을 알면 의혹의 시선으로 볼 것이고, 앞으로 묘화의 운신
이 힘들 것 같았다. 선묘는 날마다 의상을 찾아 지성으로 그의
건강을 돌보았다. 금방 한 달이 지나갔다. 어느 날, 의상은 선묘
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알렸다.
“안 돼요. 서방님, 십년 만에 어렵게 만났는데 또 이별이라니요?
이곳에도 절이 있어요. 서방님, 그 먼 곳까지 가지마시고 이곳 등
주에서 수행하세요. 제가 서방님의 뒷바라지를 하겠어요.”
“선묘, 우리가 예전으로 돌아가 육욕(肉慾)의 늪에 빠져 음락(淫
樂)에 심취한들, 그 순간이 얼마나 가겠어요. 삼보에 귀의하여 정
토(淨土)에 들어 영겁(永劫)을 함께 삽시다.”
선묘의 두 눈에는 금방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그녀도 이미 10
년전에 출가하여 불제자가 된 의상을 환속시키는 일은 불가할 것
같다는 생각하였다.
“나무아미타불. 선묘, 지금부터 하는 내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의상은 차분하고 묵직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선묘는
과연 의상이 무슨 말을 할지 잔뜩 기대하는 눈치였다. 의상은 조용
히 입을 열었다.
매정한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의 이승에서의 인연은 이미 십
년 전에 소멸되었습니다. 우리가 우연히 타국에서 다시 만난 것은
지난 인연의 연장이 아니라, 두 사람 가슴에 아픔으로 남아있던 미
련을 깨끗이 정리하여 금강석 보다 단단한 불심을 얻고, 일심으로
오직 부처님을 믿고 의지하며, 도반으로 지내라는 뜻일 겁니다.
나는 장안 종남산으로 가서 지엄대사에게 화엄을 배워야 합니다.
그 화엄의 오묘한 뜻을 얻어 신라로 돌아가서 남삼한 백성들에게
부처님의 뜻을 전해야 합니다.
그대도 나의 이 같은 뜻을 존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김일지
도 아니고, 서방님도 아닌, 불제자 의상입니다. 부처님을 대신하여
그대에게 선묘화(善妙花)라는 법명을 내리니, 더욱 열심히 부처님
을 찬탄하고 정진해야 합니다. 또한 재가신도가 지켜야할 다섯 가
지 계(戒)를 이르니 어느 한 가지도 소홀하면 안 됩니다.
먼저 불살생계(不殺生戒),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마라. 둘째, 불
투도계(不偸盜戒), 남의 것을 훔치지 마라. 셋째, 불사음계(不邪婬
戒), 음란한 짓을 하지 마라. 넷째, 불망어계(不亡語戒), 거짓말하
지 마라. 다섯째, 불음주계(不飮酒戒), 술 마시지 마라. 이렇게 오
계를 그대에게 전하니 내가 떠나더라도 미몽에 얽매이지 말고 불
도에 매진해야 합니다.
나는 내일 장안 인근에 있는 종남산 지상사로 떠납니다. 그곳에
계신 지엄대사님의 제자가 되어 화엄사상을 배우려 합니다. 이곳
에서 그곳 까지는 삼천리나 되는 머나먼 길입니다.
그대 역시 신라에 있을 때부터 부처님을 마음 속에 모셨으니, 이곳
에 있으면서도 열심히 수도하여 서방정토에 들 수 있기를 바랍니
다. 의상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선묘의 가슴에 비수로 날아와 깊이
찌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였다. 선묘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
할 수 없었다.
“아아, 서방님. 스님.”
“선묘화-.”
의상은 통곡하는 선묘화를 안아주었다.
“저도 스님을 따라 종남산으로 가면 안 될까요? 여기 남아서 무
의미하게 사느니 차라리 스님을 따라 머리를 깎고 출가하고 싶습
니다.”
선묘화는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몸종 난
희는 방에서 선묘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고
들어왔다가 놀라서 얼른 밖으로 나갔다.
“아니오. 그대는 양부모님을 모시고 이곳에서 살아야 합니다. 산속
에 들어간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나는 신라라는 나라와
약속을 했습니다. 화엄을 배워 고국 사람들에게 전파해야 합니다. 나
를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님, 알겠습니다. 스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세세생생 스님에게
귀명(歸命)하여 대승(大乘)을 익히고, 스님의 대업이 성취되도록 이
한 몸을 바치겠습니다.”
선묘화는 내일 지상사로 떠나는 의상을 위하여 법복과 내복, 신발
등 앞으로 3개월간 길고 지난한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하였다.
유지인은 의상이 떠난다는 말에 무척 섭섭해 하였다.
의상은 하루라도 더 머물러 있으면 잡념으로 가득하여 수도에 방해
가 될 것 같았다. 선묘화는 여비를 준비하여 의상에게 건넸고, 유지인
은 의상이 장안까지 무사히 갈 수 있도록 신분증을 만들어 주었다.
“나무아미타불. 주장님, 그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도 못 갚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발길 닿는 대로, 인연 닿는 대로 바람처럼 왔다가 가는
게 세사경염냉(世事經炎冷) 속에서 몸을 부대끼며 살이기야 하는 우
리네 인생 아닌지요. 내 집에서 몸을 추스르셨으니 다행입니다. 부디,
정진하시어 해동성국 '신라'의 이름을 빛내시기 바랍니다.”
유지인 부부는 먼 길 떠나는 의상을 따뜻하게 배웅하였다. 선묘화는
등주의 경계가 끝나는 지점까지 따라가서 의상을 배웅하였다.
“선묘화, 이제 그만 돌아가야지요. 너무 멀리 오셨습니다.”
“스님-.”
선묘화는 의상을 불러놓고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말은 하지 못
했지만 지금이라도 의상을 팔을 잡고 등주에서 살자고 떼라도 쓰고
싶은 심정이었다.
“선묘화, 내가 공부를 마치면 다시 들리리다. 양부모님은 참으로 좋
은분들입니다. 부디 두 분을 잘 공양하시고 불도에 정진하며, 잘 살기
바라오.”
선묘화는 의상이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의상은 ‘선묘화’를, 선묘화는 ‘일지’을 부르며, 점점 멀어
져 가는 서로의 모습을 가슴에 새겨 넣었다.
집으로 돌아온 선묘화는 양부모에게 의상이 신라에 있을 때 장래
를 약속했던 사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선묘화는 예전처럼 지
내면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였으나, 그녀의 가슴
한 구석은 뻥 뚫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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