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회
- 여강 최재효
박제상과 신라 왕자 미사흔은 신라로 가는 길잡이가 되었다. 신공
황후는 작고 날렵한 군선(軍船) 네 척과 수군 100명을 내주고 특공
대를 편성토록 하였다. 신라 해안까지 가는데 총책임자는 카츠라기
노소츠히코(葛城襲津彦)였고, 그의 휘하에 세 명의 군관(軍官)을 배
속시켰다. 군선 한 척마다 군병과 수부(水夫) 등 30명 안팎의 사람이
탔다. 동이 트자마자 배 네 척이 하카다 포구를 빠져 나와 대해로
향했다.
하루 꼬박 걸려 목도에 거의 가까이 왔을 때 였다. 갑자기 북서쪽 하
늘이 검은 구름으로 뒤덮이면서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격군들이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었지만 목도에도 도착하기도 전에 풍랑이 일
기 시작하였다. 풍랑의 기세가 얼마나 사나운지 배가 뒤집힐 것 같았
다.
카츠라기는 빠른 속도로 노를 저어 배를 후풍처(候風處)인 목도로
이동시키라고 군관들을 독려하였다. 목도는 고구마처럼 동서로 길게
이어진 섬으로 열도에서 반도를 오가는 배들이 폭풍을 만나거나 혹
은 식량과 음료수를 공급받을 수 있는 중간 지점으로 해중산도(海中
山島)였다.
풍랑의 기세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비위가 약한 사람들은 뱃
속의 내용물을 토하거나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산더미처럼 거대
한 파도가 배를 향해 달려 들 때면 손바닥 만한 배들은 파도 위에서
제멋대로 춤을 추었다. 그 와중에 배들끼리 서로 부딪혀 배 한척이
그만 바다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앗, 배가 뒤집어졌다.”
“배가 안 보인다.”
사람들은 잔득 겁에 질려 빨리 용왕의 노여움이 풀리기만을 기다렸다.
두 식경쯤 지났을 때 바다가 잠시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저기 목도가 보인다.”
카츠라기가 격군들을 향해 소리쳤다. 희뿌연 해무 속에서 목도가 아스
름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풍랑에서 겨우 목숨을 건지 사람들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 와중에 미사흔 왕자는 속이 울렁거려 뱃속의 내용물 들을 모두 쏟
고 말았다. 목도 포구 가까이 도착한 특공대들 역시 대부분 정신이 나
간 상태였다. 비바람과 함께 천둥 번개도 치면서 천지는 암흑 속에 갇
혔다.
“장군, 신라로 가는 계획을 바꿔야 할까요?”
군관 한명이 카츠라기에게 물었다.
“아니다. 목도에서 이삼일 쉬면서 다친 병사를 치료하고 고장 난 배
를 수리하라.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신라로 떠나야 한다. 모두 내려서
후풍처로 대피하라.”
박제상, 미사흔, 오례사벌, 부라모지 그리고 며칠 전 신라에서 서찰을
가지고 온 신라 사내 두 명 등 여섯 명은 늘 함께 다니며, 만일의 사태
에 대비하였다. 그 두 사내들도 박제상이 미사흔을 신라로 탈출 시키
려는 계획을 눈치 채고 있었다. 박제상 일행은 대화국 군사들이 거처
하는 막사 근처에 있는 허름한 숙소를 배정받았다.
“모마리질지 상, 어디 다친 데는 없습니까. 미질기지파진간기(微叱
己知波珍干岐)는 어떻습니까?”
카츠라기가 목도에 마련된 임시 숙소를 찾았다.
“나와 미사흔 왕자는 장군이 신경써주신 덕에 무사합니다.”
“폭풍이 너무 세서 이곳에서 이삼일 대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좀
지루하더라도 참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폭풍우는 예상외로 강력하고 사나워 오래 갈 것 같았다.
아침이면 잔잔하던 바다가 점심때만 지나면 으르렁거렸다. 아무리
용감한 병사들이라 하여도 거친 풍랑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다. 박
제상은 날이 밝으면 미사흔과 오리 사냥을 나갔다. 목도 바닷가에는
오리들이 많이 날아와 항상 오리들을 잡으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카츠라기 장군과 대화군 병사들은 박제상과 미사흔이 사냥을 나갔다
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의심하기도 하였으나, 그들이 오리를 잡아 카츠
라기와 군관들에게 바치자 좋아하며 그들에 대한 의심을 풀었다.
다음날도 박제상은 미사흔을 데리고 오리 사냥에 나섰다. 바닷가에
는 오리뿐만 아니라 많은 종류의 새들이 있었다. 박제상은 명궁이기
도 하였다. 그는 화살 한 개로 동시에 두 마리를 잡기도 하였다. 미사
흔은 박제상이 쏜 화살이 허공을 나는 오리를 맞출 때마다 박수를 치
며 환호하였다.
“왕자님, 오늘밤에 이곳을 탈출 하셔야 합니다.”
“이모부님, 저 혼자 어떻게 여길 빠져나간단 말입니까?”
“지금 바다의 상태를 보니 내일 아침이면 폭풍우가 사그라질 듯 합
니다. 내일 새벽 작은 배편을 이용해 며칠 전, 신라에서 온 두 장정들
과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합니다. 기회가 없습니다. 만약 당초 계획대로
저들과 서라벌에 간다면 모두 죽습니다. 소신이 소선 한척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모부님도 함께 가야지요?”
“아닙니다. 동시에 여러 명이 사라지면 카라츠기와 군관들이 금방
눈치 채고 따라 올 것입니다. 소신은 기회를 봐서 오례사벌과 부라모
지를 데리고 왕자님 뒤를 따르겠습니다.”
미사흔은 박제상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미사흔은 자신이 탈출하고 나면 뒤에 남은 세 사람은 절대 살 수 없
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잡아온
오리를 가츠라기에게 바쳤다. 날이 어둑해지자 카츠라기는 박제상이
잡아온 오리로 요리를 했다면서 박제상과 미사흔을 초대하였다.
카츠라기와 군관들은 박제상과 미사흔에게 오리를 잡아주어 고맙
다며, 술을 권하였다. 박제상은 술이 센 편이었으나, 미사흔은 조금만
마셔도 금방 취할 정도로 술에 약했다.
“저런, 미질기지 왕자는 일찍 숙소로 가서 쉬는 게 좋겠습니다.”
카츠라키가 미사흔의 상태를 보고 혀를 찼다.
“고맙습니다. 그럼, 제가 왕자 몫까지 마시겠습니다.”
“좋습니다. 역시 모마리질지는 대단하십니다. 오늘밤에는 특별히 할
일도 없으니 이 카츠라기와 한번 대작해봅시다. 내일 아침에 폭풍이
어느 정도 쇠모하여 잔잔해 질 것 같으니, 그때 바다의 상태를 봐서 신
라를 향해 가십시다. 황후께 그리 보고를 드렸습니다.”
카츠라기가 호탕하게 웃자 군관들도 따라서 히죽거렸다. 박제상
은 카츠라기와 군관들 잔에 쉴 새 없이 술을 따라 권했다. 그들이
빨리 술에 취해야 만사가 수월할 수 있었다. 카라츠키와 군관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박제상이 건네는 술잔을 마셨다.
“신라에는 기가막힌 미녀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이번에 가면
미녀들도 몇 명 데리고 와야 하겠습니다. 나는 아직 장가를 들지
못했습니다.”
대취한 군관 한명이 해롱대며 지껄였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미녀들이 많이 있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미녀 열댓 명쯤 데리고 올 테니 걱정 마시고 술이나 드십시오.”
박제상이 네 명을 대적하기에는 무리였다.
흥겨운 술자리는 새벽이 돼서야 끝났다. 숙소로 돌아온 박제상
은 미사흔을 깨웠다. 또한 서찰을 가져온 두 명을 불러 놓고 앞으
로 행동 요령을 일러 주었다.
“너희 두 사람에게 막중한 임무를 주겠다.”
인시(寅時)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박제상은 지도를 펴놓고 세 사람
에게 목도에서 탈출하여 신라로 가는 방법을 일러 주면서 결연한 태
도로 명을 내렸다.
“나의 명은 곧 신라왕의 명령이다. 너희 두 사람은 지금 즉시 포구
입구 우측에 숨겨둔 소선(小船)으로 달려가 왕자님을 태우고 신라
로 탈출하라. 날이 밝으면 저들의 감시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어서
출발하라. 목숨을 아끼지 말고 꼭 왕자님을 서라벌까지 모셔야 한
다.”
두 사내는 신라로 가는 바다길을 잘 알고 있었다.
“이모부님-”
“왕자님, 소신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신도 곧 뒤를 따를 것입니
다. 왕자께서 신라에 도착하는 대로 대왕께 소신의 소식을 잘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사흔은 울면서 박제상에게 큰절을 올렸다. 미사흔은 어쩌면 이
순간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였다. 박제상은 미사흔의
등을 다독거렸다. 잠시도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바람처럼 세 사람
이 소선을 숨겨둔 포구 쪽으로 달려갔다. 대취한 카츠라기를 비롯
한 군관들과 병사들은 잠에 곯아 떨어져 있었다.
바다가 아직도 울고 있었다. 미사흔이 탄 배가 바다로 빠져 나갔으
나 눈치를 챈 대화국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 미사흔 일행을 태운 베
가 목도 포구를 빠져 나가자 짙은 해무(海霧)가 바다를 뒤덮었다.
아침에 느지막해서 잠에서 깬 대화국 병사들은 미사흔이 사라진 사
실을 알고 카츠라기에게 보고하였다.
“뭐라, 미질기지파진간기가 사라졌다고, 모마리질지는?”
“그자는 잠을 자고 있습니다.”
카츠라기와 군관들은 박제상이 자고 있는 숙소로 달려갔다. 그때
까지도 박제상과 오례사벌과 부라모지는 코를 골며, 세상모르고 자
고 있었다. 카츠라기는 기가 막혔다. 병사를 풀어 목도 주변을 샅
샅이 찾아 봤지만 미사흔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모마리질지, 네 이놈. 내가 너를 믿었건만 네놈이 나를 배신하
다니. 정말로 기가 막히구나. 미질기지는 어디에 있느냐?”
카츠라기는 칼을 뽑아들고 길길이 날뛰었다. 박제상, 오례사벌,
부라모지는 결박당한 채 카츠라기 앞에 강제로 무릎 꿇려졌다.
세 사람은 술이 덜 깬 얼굴로 카츠라기를 올려다보았다.
“장군, 나는 모르오. 장군과 새벽까지 술을 마시지 않았소?”
“이놈, 네가 지금 나를 가지고 노는구나. 네놈들을 절대로 용서
할 수 없다.”
카츠라기는 병사들에게 미사흔을 추적하라고 명령했지만 해무
가 걷히지 않아 사방을 분간할 수 없었다.
카츠라기는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그는 칼을 뽐아 금방이라
도 박제상 일행의 목을 내리칠 기세였다. 짙은 해무로 미사흔을 추
적할 수 없게 되자 카츠라기는 박제상과 오례사벌, 부라모지를 발
가벗기고 몽둥이찜질을 하였다. 세 사람은 의식을 잃을 때까지
매를 맞았다. 정신이 들면 또 몽둥이찜질이 이어졌다.
“이놈,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말하라. 그럼, 네놈들 목숨은 살려
주마.”
“우리는 모르는 일이오. 자고 일어나니 그리된 일인 걸 우리가 어
찌 안단 말이오. 우리도 답답하오.”
“여봐라, 이놈들이 죽어도 좋으니 매를 쳐라.”
하루 종일 매질이 이어졌다. 세 사람의 머리, 목, 등허리, 엉덩이,
무릎, 다리 등 성한 곳이 없었다. 아무리 매를 쳐도 입을 열지 않자
카츠라기와 군관들도 지쳤는지 서로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렇
다고 박제상 일행을 함부로 죽일 수도 없었다.
“지금 즉시 저놈들을 포박하여 황후에게 데리고 가자.”
다음날 박제상 일행은 아스카 대화국 도성에 도착하였다. 이미
신라왕자 미사흔이 도망쳤고 그를 도망치도록 도운 박제상 일행
이 잡혀왔다는 소문이 아스카 도성에 왁자하게 퍼졌다. 대화국 조
정에서도 미사흔의 탈출을 두고 중신들 사이에서 왈가왈부하였다.
“경이 나를 속인 게요? 아니면 내가 경을 너무 믿은 게요?”
신공 황후는 인사불성 상태가 된 박제상을 쏘아 보았다. 박제상
일행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은 산발한 상태로 피떡이
덕지덕지 달라붙었고, 얼굴은 시퍼런 멍으로 퉁퉁 불어 있어서 사
람인지 짐승인지 분간 할 수 없을 정도 였다. 옷만 걸치지 않았다
면 짐승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놈, 황후 사마께서 하명하셨다. 어서 대답하라.”
카츠라기는 포박당한 채 간신히 앉아있는 박제상을 발로 툭툭
걷어찼다. 박제상은 가늘게 눈을 뜨고 신공 황후를 쏘아 보았다.
그녀는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는 박제상의 시선을 얼른 피했다.
무서운 살기(殺氣)가 분명했다. 박제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백제 근구수왕의 정인, 아예(阿叡)여! 내말을 들어보시오.”
박제상의 목소리에는 결연한 의지가 묻어 있었다. 이제는 마지막
이라는 것을 의식한 듯 했다.
우리 신라는 법이 없어도 살아가는 하늘 자손들이 만든 나라요.
이제 걸 욕심을 걷고 평범하게 살아가십시오. 평범이 최고의 미
덕이오. 귀국의 천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日照大神)께서도
이런 모습을 원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여우도 죽을 때는 고향을
바라보고 죽는다 했소.
어린 나이에 귀국에 인질로 잡혀와 이십년 가까이 핍박을 받아
온 미사흔 왕자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절대 그리해서
는 안 되는 일이오. 황후도 자식이 있지 않습니까.
갈 사람이 간 것이니 마음 상해할 필요도 없소. 불쌍한 미사흔
왕자에 대한 집착은 버리시오. 박제상의 말은 참착하면서도 오
스스하게 들렸다. 박제상의 이야기를 듣는 중에도 신공 황후는
심정이 복잡한 듯 신음을 토하기도 하고 얼굴빛이 수시로 변했
다.
“좋아요. 미사흔은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고맙구려.”
신공 황후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 나왔다. 그동안 미사흔
은 아무 이용가치가 없어 골머리가 아팠었다며, 그녀는 지난
이야기를 하였다.
모없는 신라 왕자가 사라졌다고 해서 화가 나는 게 아닙니다.
그대를 믿었던 내 자신이 얄미워서 부아가 납니다. 미사흔을
신라로 보냈으니 이제 그대의 임무는 끝났습니다. 이 순간부터
그대는 야마토 조정의 신하가 돼야 합니다. 그대가 나의 신하
가 된다면 야마토 조정의 가장 중요한 직책을 맡길 것입니다.
부디, 나의 간곡한 제의를 무시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신공 황후는 박제상이 미사흔을 신라로 탈출시켰다고 하여
당장 그를 죽이거나 그에게 욕되는 행위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반년 동안 두고 본 박제상의 일거수일투족 그리고 그의
해박한 학식 등은 야마토 조정 중신 누구도 따라갈 자가 없었
다.
그녀는 박제상을 붙잡고 싶었다. 그녀는 미사흔같은 왕자 열
명을 내주더라도 덕망 있고 국정 운영 경험이 풍부한 박제상
같은 인물 한명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아예여! 하늘에 어찌 해가 둘일 수 있겠소.”
죽음 앞에선 박제상의 모습은 도올해 보였다. 목숨을 구걸하
기 위하여 야비한 말이나 행동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의 오달
지고 당당한 모습에 신공 황후는 시치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는 경을 존경합니다.”
신공 황후는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박제상을 야마토 조정의 중신
자리에 앉히고 싶었다.
만약 박제상이 황후의 중신이 되어 그가 지닌 모든 역량을 대화국
발전을 위하여 쓴다면 그 가치는 어마어마할 것 같았다. 또한 신공
황후는 백제의 근구수왕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지라, 박제상이
협조만 한다면 백제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었다. 과연 그녀의
판단은 교활하면서도 의뭉스러웠다.
“나의 조국은 신라요. 잠시 필요에 의해 황후의 마음을 훔쳤을
뿐이니 과히 상심할 일은 아닌 듯 하오.”
“참으로 딱하십니다. 경은 나와 첫 대면에서 경의 몸에 피가 마르
고 뼈가 다 닳을 때까지 오직 나를 위해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
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찌 반도의 큰 사내대장부가 일
구이언을 한단 말입니까?”
신공 황후는 진실로 박제상을 존경하고 있었다.
박제상 한 사람이면 대화국 뿐만 아니라 백제에도 엄청난 이익이
된다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박제상 한 사람을 대
화국의 핵심 요직에 앉히면 장차 신라와 가야 등 반도의 여러 나라
들을 쉽게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셈속을 가지고 있었다.
“사익보다 국익을 위한 행동이었으니 깊이 혜량해 주시오.”
“다시 한 번 부탁합니다. 경이 나의 중신이 되어 야마토 조정을 위
하여 헌신해 주세요. 지난 일은 다 잊으시고요. 그리고 나와 함께
이 나라에서 복락을 누립시다. 내가 경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신공 황후가 피로 얼룩진 박제상의 두 손을 잡았다. 그녀에게서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박제상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나는 어차피 신라로 돌아갈 수 없는 몸이다. 내가 신라로 돌아간다
면 눌지와 나는 또 다른 정적이 되어 서로에게 칼을 겨누게 된다. 내
가 복호를 데리러 고구려에 갔을 때 눌지의 의중을 눈치챘어야 했었
다.
그렇다고 지금와서 내가 이 여인에게 스스로 무릎을 꿇을 수도 없다.
나는 신라도 대화국도 아닌 이상향으로 가고 싶다. 그 곳이 이승이든
혹은 저승이든 상관없다. 내 대에서 신라 왕조에 박씨 성을 가진 인
물로 왕을 세우려는 일도 수포가 되고 말았다. 나의 일생이 대화국에
서 마감하는구나.’
박제상이 면벽 기도하듯 잠시 명상에 잠기자 신공 황후는 긴장한 채
숨을 죽였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그녀는 걱정 반 두려움
반이었다.
“아예여! 나에게 미련을 두지 마시오. 그대가 아무리 달콤한 말을
하여도 나는 개, 돼지가 될지언정 야마토 조정의 천격스러운 신하가 될
수는 없소이다. 미안하오.”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 참으로 멍청하시오. 그럼, 잘 가세요.”
황후의 두 눈에서 눈물이 비쳤다.
“아예, 미안하오.”
“카츠라기 장군, 법에 의거하여 대역죄인을 처단하라.”
신공 황후는 차갑게 돌아서며 미친 듯 소리쳤다. 카츠라기와 병
사들은 박제상과 그의 수하들을 포박하여 가까운 섬에 데리고
갔다.
하카다에서 가까운 작은 무인도 였다. 섬 전체가 갈대밭처럼 보
였다. 신공 황후의 명령은 누구도 되돌릴 수 없었다. 카츠라기와
군관들은 황후의 지엄한 명을 엄숙히 수행하였다.
“저들의 발바닥 껍질을 벗기도 불에 달군 쇠판 위를 걷게 하라.”
“하이-.”
병사들이 날카로운 칼을 들고 박제상과 오례사벌, 부라모지에게
달려들었다.
“오례사벌, 부라모지-. 미안하다. 신라의 사내답게 조국의 명예
를 위하여하게 당당하게 죽자.”
“간, 잠시나마 당신을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저승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신라의 세 영웅은 이름도 모르는 섬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치고 말
았다.
나중에 박제상과 오례사벌, 부라모지의 의로운 죽음이 신라 조정
에 알려졌다. 눌지왕은 대성통곡하면서 박제상에게 대아찬(大阿飡)
의 벼슬을 추증하고 미사흔을 박제상의 둘째딸 아영(阿榮)에게 장
가들도록 조치하였다. 또한 오례사벌, 부라모지 가족들에게 많은 상
금을 내리라고 명했다.
지아비가 죽은 줄도 모르고 박제상의 처 김씨 부인은 큰딸 아기(阿
奇), 막내딸 아경(阿慶)을 데리고 치술령(鵄述嶺)에 올라가 대화국
이 있는 바다를 향해 기도를 하며 소리쳤다.
“여보, 아기 아버지, 언제 오실건가요? 우리 세모녀와 당신 아들 문
량이 눈이 빠질 지경입니다. 살아서 오지 못하신다면 넋이 돼서라도
오셔야 합니다. 대화국은 당신이 가실 곳이 아닙니다.”
김씨 부인은 지아비를 찾다가 지치면 혼절하였다가 다시 정신이
들면 두 딸들과 지아비 이름을 부르며 비손하였다. 지아비의 무사
귀환을 빌다가 뒤늦게 지아비의 죽음을 알게 된 김씨 부인과 두 딸
들은 치술령 높은 곳에 섰다.
“여보, 끝내는 그리되셨군. 차라리 왜국의 앞잡이가 되느니 순국하
시어 신라인으로 기상을 드높이는 행동이 자랑스럽습니다. 내세에서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나이다. 천지신명님, 저희 부부가 저승에서 다시
부부가 되어 이승에서 못 다한 사랑을 다하도록 도우소서.”
“아버지, 저희 자매는 아버지의 딸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부디 극락왕생하세요.”
세 모녀는 치마를 뒤집어 쓰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계곡으로 몸을 던지
고 말았다. 세 모녀가 투신하고 얼마 뒤에 그곳에 세 모녀를 닮은 바위
가 생겨났는데 사람들은 그 바위를 망부석(望夫石)이라 이름붙였다.
신라 조정에서는 김씨 부인은 국대부인(國大夫人)을 추증하고 모녀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겨 치술령에 사당(祠堂)을 짓고 모녀의 영혼을 달
래주었다.
-끝-
% 모말은 박제상의 다른 이름이고 그의 아들 박문량은 백결선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