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상 초상
제2부
- 여강 최재효
박제상은 눌지왕의 특사 자격으로 고구려를 찾았다. 고구려의
왕은 등극한지 5년 밖에 안 되는 청년왕 거련(巨璉)이었다. 23세
밖에 안 된 왕은 아버지 호태왕(好太王)의 뒤를 이어 거대 제국
고구려를 경영하는 막중한 임무에 양 어깨가 무거웠다.
이때 고구려는 동진(東晉)에 사신을 파견하여 국교를 맺었으며,
북위(北魏)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대륙은 위진남북조 시대를
열고 있었다. 또한 아버지 호태왕 담덕(談德)의 업적을 알리는 거대
한 비석을 즙안현에 건설하고 있었다.
또한 거련왕은 대륙 보다 남서 방향의 진출을 모색하고 있었다.
부왕 호태왕이 몽고와 대륙 서쪽과 동쪽의 여러 부족과 소국들을
평정하였기 때문에 그쪽에는 특별히 고구려에 적대할 만한 세력이
없는 듯 하였다.
거련왕은 한반도의 백제와 신라 그리고 가야와 왜의 야마토 정권을
아우르고 안정적인 국가기반 건설에 매진코자 하였다. 그 같은 상황
에서 한반도 중부 지역은 매우 중요하였다.
고구려는 신라를 속국처럼 대하고 있었기에 신라 사신이 왔다고 하
여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눌지왕은 이미 서라벌에 파견된 막하라
수지와 을지선을 통해 고구려 조정 내에서 영향력이 큰 중신들을 파
악하고 움직였다.
친신라 인사들은 박제상이 거련왕을 쉽게 접촉할 수 있도록 도왔다.
박제상은 고구려에 파견되면서 두 가지 방법을 구상하고 있었다. 한
가지는 사술(邪術)을 써서 왕제(王弟) 복호를 몰래 빼돌리는 것과 두
번째는 고구려왕을 독대하여 언설(言舌)로 그를 설득하여 복호를 인
질에서 석방토록 하여 신라로 안전하게 데리고 환국하는 거 였다.
물론 첫 번째 방법이 효과가 빠를 수 있겠지만 외교적 마찰이 발생하
여 국경에서 국지전(局地戰)이 발발할 가능성이 있었다. 박제상은 후자
의 방법을 택하여 거련왕을 직접 독대하기로 마음먹었다.
박제상이 신라 국왕의 국서(國書)를 가지고 온 사신의 신분임에도
거련왕을 쉽게 만날 수 없었다. 보름이 지난 뒤 박제상은 어렵게 젊은
고구려왕 거련을 독대(獨對)할 수 있었다. 박제상이 거련 보다 서른
살이 더 많았다.
“태왕폐하, 신라의 사신 박제상 문후 올립니다.”
“어서 오시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시었소.”
청년왕의 홍안(紅顔)은 무척 여유가 있어 보였다.
아버지 호태왕이 동정서벌(東征西伐)하는 대신 거련은 현재의 영토
를 유지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벌을 하여 국토를 넓혔다. 거련
은 이미 눌지왕이 보낸 국서를 읽어 보고 박제상이 고구려에 온 이유
를 잘 알고 있었다.
눌지왕이 보낸 국서를 보고 거련왕은 많은 생각을 하였다. 백제나
가야 또는 왜처럼 신라는 고구려에게 거칠게 대응하지 않았다. 한반
도에서 고구려가 오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라의 절대적인
협조가 필요하였다.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를 효과적으로 압박하기
위해서는 신라를 도와 고구려의 영향력을 증강시킬 필요가 있었다.
“폐하, 신라국왕의 소견을 들어 보소서.”
박제상은 달변가 였다. 젊은 고구려왕이 현재 무엇을 가장 필요로
하고 있는지도 훤히 알고 있었다.
거련은 부왕 때 고구려가 많은 영토를 차지하느라 백성들이 전화
(戰火)에 시달리고 큰 고생을 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국토가
넓어지고 물자가 풍부하였지만, 언제 이웃나라나 혹은 정복지 유민
들이 반란을 일으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거련왕은 부왕처럼 정복군주가 되는 것 보다 내실을 다지고 백성을
평안케 하는데 중점을 두고자 하였다. 박제상은 우선 청년왕의 비위
를 맞춰야 했다.
나라와 나라가 친교를 맺는데 신의로서 할 따름인데 국세가 강하
다 하여 약한 나라의 백성을 불모를 받는다는 것은 춘추오패(春秋
五覇)에 미치지 못할 일이오니 이는 정도가 아닌 줄로 아옵니다.
또한 살펴보건대 고구려와 신라는 본래 한 집안입니다. 남삼한의
소국들은 모두 단군 할아버님의 후손입니다. 한나라의 무력에 의해
비록 나라가 무너져 그 백성들이 사방팔방으로 구름처럼 흩어져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가슴 속에는 늘 옛 조국을 그리워 하고 있습
니다. 단군 조선이 무너진 이후에 대부여(大扶餘)가 그 명맥을 이어
왔고 이어서 북부여와 동부여가 장구한 한민족의 혈맥을 이어왔습
니다.
폐하께서도 잘 아실 테지만 고구려를 건국하신 추모왕께서도 부여
의 혈손으로 해모수((解慕漱) 천왕의 직계 후손입니다. 북부여는 천
왕랑 해모수께서 웅심산(熊心山)에서 건국하시고 이어 태자 모수리
(慕漱離) 천왕께서 대를 이으셨습니다.
이어 고해사(高奚斯) 천왕께서 후사를 잇고 그 뒤를 고우루(高于婁)
천왕이 사직을 이어 받았습니다. 그리고 왕국을 해부루(解夫婁) 천왕
이 통치하셨고, 고두막(高豆莫) 천왕과 그의 아드님이신 고무서(高無
胥) 천왕이 이으셨습니다.
그 다음 위(位)를 영명하신 주몽 추모왕께서는 이으셨다가 졸본으로
오시어 새로이 고구려를 세우셨습니다. 신라의 국조(國祖)이신 혁거
세 왕께서도 북부여 황실녀(皇室女)인 파소(婆蘇)의 소생이시니, 따
지고 보면 고구려와 신라는 한 할아버님의 혈손이라 하여도 과히 틀
린 말은 아니옵니다.
양국이 각각 사백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을 달려 왔습니다.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국 등이 신라를 압박한 가운데 호태왕께서 보우하시
어 신라가 보전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소국의 눌지왕께서는 고구려
의 지원 아래 보위에 올라 신라 만백성을 잘 영도하고 있습니다.
신라의 백성뿐만 아니라 산천초목 까지도 폐하의 하해와 같은 자비
에 감읍하고 있나이다. 하오나 눌지왕을 비롯한 신라 만백성의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칠 년째 기인(其人)의 몸으로 고구려에
살고 있는 왕제 복호(卜好)의 조속한 귀환입니다. 신라는 효도를 숭
상하는 나라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효뿐만 아니라 형제간의 우
애 역시 효에 포함 하나이다.
?춘추오패 - 중국의 고대 춘추시대 제후 간 회맹의 맹주를 말한다. 춘추시대의 5대 강국을 일컫기
도 한다. 오패는 제나라의 환공, 진나라의 문공, 초나라의 장왕, 오나라의 왕 합려, 월나라의 왕,
구천을 말한다. 추모왕 - 주몽. / 기인 - 인질, 볼모.
폐하께서도 호태왕의 살아생전 위대한 업적을 만세반석에 기록하
여 천년만년 후세들에게 남기셨습니다. 효가 아니면 불가능한 거사
입니다. 기왕에 신라를 도와주시어 눌지가 왕이 되게 하셨으니, 그
의 동생을 방면하시어 폐하의 성명(聖名)이 신라 만백성에게 영원
히 남도록 하소서.
조라(蔦蘿)와 같은 늙은 신하가 서라벌에서 수천리 험한 길을 달려왔
으니, 돌아갈 때 눈물대신 웃음을 만면에 띠고 폐하의 성덕을 노래하
며, 돌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시기 바랍니다. 박제상의 간곡하면
서도 핍진(逼眞)한 설득이 청년왕 거련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다.
“우리 고구려 대신들도 잘 알지 못하는 나라의 내력을 그대가 훤히
꿰고 있습니다. 신라에 그대 같은 뛰어난 충신이 있어 앞날이 참으로
밝습니다.”
거련은 즉석에서 흔쾌히 복호의 방면을 약속하였다. 또한 복호를
방면하는 조건으로 신라는 매년 두세 차례 사신을 보내고 신라의 군
사 행동 전반에 대하여 보고하고 통제를 받게 하였다.
“짐이 윤상의 도리를 잠시 잊은 것 같습니다. 앞으로 짐은 신라를
작은집처럼 생각하고 어떠한 난국이 닥치더라도 기꺼이 달려가 도울
것입니다.”
박제상은 고구려의 젊은 왕을 세치 혀로 설득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는 복호의 석방 뿐만 아니라 군사적 지원까지 얻어냈다.
“폐하, 고맙습니다. 대양보다 크고 태산 보다 높은 폐하의 성은이 신
라 만백성에게 십년 가뭄에 감우(甘雨)와도 같습니다.”
박제상은 젊은 왕 거련에게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절을 하였다.
달변가의 혀는 필요에 따라 천군만마보다 거대하였다. 산전수전, 인
생의 수많은 질곡을 겪어온 박제상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말은 청년왕의 마음을 움직이고도 남았다.
박제상은 고구려 왕의 하사품을 받고 복호와 함께 신라로 귀국하
였다. 눌지왕과 신라 백성들은 박제상의 외교적 업적에 박수를 보냈
고, 서라벌은 연일 왕제 복호와 박제상을 환영하는 행사가 열렸다.
왕은 박제상에게 진정으로 고마워하는 치하를 여러번 하면서 대궐
에서 위로연을 개최하였다.
“경의 공이 태산과 같습니다.”
“망극하옵니다. 신은 신하로서 당연히 할 일을 하였을 뿐이옵니다.”
“너무 겸손하시구려. 오늘은 마음껏 마시고 취해 봅시다.”
눌지왕은 손수 술병을 들어 큰 동서인 박제상에게 술을 따랐다.
만조백관들도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박제상에게 연신 술잔을 건
네느라 바빴다.
지방의 일개 군수가 하루아침에 왕의 총신(寵臣)이 되자 중신들
은 박제상을 부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질투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보통 총신이 아니었다. 산해진미와 감주(甘酒)가 대청에 산더
미처럼 쌓였고, 풍악에 맞춰 춤을 추는 무희들의 현란한 동작에
모두 넋을 빼고 술잔을 기울였다.
왕의 동생 복호가 고구려에서 7년 만에 돌아와 왕실사람들과 모
든 조정 중신들이 흥겨운 주연(酒宴)에 정신을 빼고 즐기는데 왕
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대왕 폐하, 오늘같이 기쁜 날 어찌 눈물을 흘리시는지요?”
“경들은 기쁠지 모르지만 과인은 더욱 마음이 쓰리고 아프오. 과인
의 두 팔 중에 한 팔만 돌아왔는데 언제 한 팔을 되찾을 수 있을
지…….”
“황공하옵니다. 소신들이 미처 몰랐습니다.”
“미사흔이 보고 싶구려.”
“폐하, 신들의 불충을 용서하소서.”
주연은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했다. 중신들은 눌지
왕이 왜의 대화국에서 17년째 인질 생활을 하고 있는 막내 동생
미사흔이 눈에 밟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실성왕이 자신이 고구려에서 10년간 인질 생활 한 것에 대한 보
복차원으로 당시 열 살 밖에 안 된 미사흔을 왜에 보냈지만, 형
눌지는 자나 깨나 어린 미사흔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
다. 박제상이 고구려에서 복호를 데리고 온 날, 눌지왕은 미사흔
의 귀향을 생각하였다. 눌지왕은 조용히 박제상을 불렀다.
“과인의 막내 동생 미사흔이 십칠 년째 왜의 대화국에 볼모로 잡
혀 있습니다. 경이 한 번 더 수고를 해주실 수 있겠소?”
“신하된 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박제상은 엎드려 왕의 심중을 헤아리고 속마음을 이야기 하였다.
신이 걱정하는 바는 고구려 거련왕은 신의 말뜻을 빨리 알아듣는
현자(賢者)인 반면에 지금 대화국을 통치하는 왜왕은 신이 알기로
는 신공황후(神功皇后) 아예(阿叡)라 들었습니다.
그의 아들이 사정이 있어 그의 어머니인 신공이 섭정하고 있습니
다. 야마토 사람들은 사람이 신의가 없고 사람의 말로는 그들을
교화할 수 없으니, 꾀로써 그들을 기망하고 미사흔 왕자를 데리고
오겠나이다.
신이 떠나고 나면 신이 신라를 배반하고 대화국으로 도망쳤다고
대대적으로 소문을 내주십시오. 그래야 왜인들은 신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떠나고 육개월 후에 소신과 미사흔 왕자
님에게 밀정을 보내시어 조정에서 신의 처자를 감옥에 가두고 곧
처형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주십시오,
그때 대왕께서 모후이신 보반왕후(寶飯王后)를 핍박한다는 내
용도 함께 적어 주십시오.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왕의 뜻을 헤아
리고 대화국에 가겠다는 박제상의 말에 눌지왕은 흔쾌히 허락하
였다.
박제상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처와 세 딸들이 보고 싶었으나
집에 들릴 경우 자신의 의지가 약해지거나 처자식들의 만류가
걱정되었다.
박제상은 부인은 김씨 사이에 딸 셋을 낳았다. 큰딸은 아기(阿奇),
둘째딸은 아영(阿榮), 막내딸은 아경(阿慶)이었으며, 아들은 문량
(文良)이었다. 박제상은 날이 밝기도 전에 대화국을 가기위해 율포
(栗浦)로 향했다. 박제상은 무예에 뛰어난 신라 무사인 오례사벌과
부라모지를 함께 데려 가기로 하였다.
“여보,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무정하게도 처자식이 있는 집에 들르지도 않고 왜국을 향해 떠
나가는 박제상을 보고 부인 김씨와 아기, 아영, 아경은 바다가 잘
보이는 율포의 망덕사(望德寺) 남쪽 모래사장으로 달려갔다.
?율포 – 지금의 울산
“부인, 미안하오. 나라님의 명으로 왜로 떠나오. 반드시 다시 돌아올
테니 기다려 주시오. 딸들아, 이 아비의 심정을 이해해 다오. 아비가
다시 돌아올 테니, 기다리거라.”
박제상은 처와 세 딸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손을 흔
드는 박제상의 두 눈동자는 붉게 충혈 되어 있었고, 눈자위로 맑은 액
체가 스며들었다.
“아버지, 집에도 안 들리시고 그냥 가십니까?”
“아버지, 대화국 사람들은 험악하다 들었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시고
꼭 다시 돌아오세요.”
“밤새 어머니와 동생들하고 아버지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집에
도 아니 들리시고 바로 왜로 가신다니……. 반드시 미사흔 왕자님을
모시고 돌아오세요. 아버지의 무사귀환을 위하여 천지신명께 빌겠
습니다.”
김씨와 세 딸들은 박제상이 타고있는 바다를 향하여 큰절을 하고
배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통곡하였다. 해가 졌어도 김씨
부인과 딸들은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몰랐다. 친척들이 김씨를 부축하
고 돌아오려고 했지만 얼마나 상심이 컸는지 부인은 그만 다리가
풀려 얼른 일어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곳을 벌지지(伐知旨)라고
했다.
‘앞으로 나는 어찌 처신해야 하는가?’
박제상은 이물에 앉아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바다는 잔잔하고
북서풍이 불어와 배는 순항하였다. 두 무장(武將)은 박제상의 침통한
모습을 보고 숨소리를 죽였다. 뱃사공들이 노를 저으며 부르는 구슬
픈 노랫가락이 바다에 은은하게 울려퍼졌다. 박제상은 자신의 위치
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눌지왕이 나를 두고 고민이 많은 듯 하구나. 단순히 대화국에 가서
미사흔 왕자를 데려오라고 한 것이 아니다. 야마토 정권과 우리 신
라는 견원지간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나는 대화국에 가면 살아 돌
아올 수가 없을 것이다. 이미 박씨 왕조(王朝)를 재건하기에는 기회
를 잃고 말았다. 아달라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우리 박씨들은 영원
히 신라에서 왕조를 재건할 수 없다는 것인가. 나는 왜국에 가서 미사
흔 왕자만 빼돌리고 영원히 신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진정 눌지
가 바라는 것이 동생 미사흔을 원하는 게 아니고 나의 불귀(不歸)를
원하고 있는 것이야.
박제상 일행이 탄 배는 이틀 후 새벽에 대화국의 남쪽 포구 하가다
(和家多)에 도착하였다. 일행은 도착하자마자 해안을 지키는 야마토
군사들에게 잡혔다.
“너희들은 어디서 온 자들이냐?”
“나는 신라의 압량주를 다스리던 간(干) 박제상이다. 신라에서 도망
쳐 야마토에서 살고자 왔다.”
박제상 일행은 즉시 체포되어 대화국 도성으로 압송되었다.
야마토 조정에서는 박제상의 도래로 일대 혼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들은 박제상의 신라 탈출을 믿지 않으려 하였다. 왜 열도의 대부분
을 차지한 야마토 정권은 신라보다 백제에 우호적이고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신공왕후(神功皇后)는 백제 근구수왕(近仇首王)과 밀
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야마토 정권은 백제의 분국이라 해도 과언
이 아니다.
백제 근구수대왕은 왕자 시절 일본에 건너가서 성무왕(成務王)의
반란을 평정하고 응신천황(應神天皇)이 되었고, 성무왕 후비인 야
가하에히메를 취하여 아이부인(阿爾夫人)으로 삼았다. 그녀가 임신
하여 낳은 아들이 나중에 백제의 침류왕이 된다.
근구수대왕은 백제로 돌아가 태자가 되고 고구려의 침략에 맞서
고구려 평양성으로 달려가 고국원왕을 전사시켰고, 마침내 백제왕
이 되었다가 다시 왜로 건너가 예전천황(譽田天皇)이 되었다.
아이부인이 근구수왕과 인연을 맺은 뒤 신공황후가 되었다. 백제
와 야마토 정권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때 마치 압량주 군수를 지낸 박제상이 신라를 배반했다고 하며, 스
스로 대화국으로 찾아 들어 온 것이다.
야마토 정권에서는 박제상 일행을 신문(訊問)하여 그의 진위를 알
고자 하였다. 대화국 입장에서는 신라의 지방관을 역임한 박제상이
항복하였으니 큰 수확이 아닐 수 없었으나, 그의 진위를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그대가 무슨 일로 신라를 배반하고 우리나라로 건너 왔는가?”
대화국의 취조관(取調官)이 박제상에게 물었다.
“우리 조상은 대대로 신라에 충성하여 왔고, 나 또한 세신(世臣)
으로 있는데 신라왕은 특별한 까닭도 없이 나를 핍박하였다. 하여,
나는 평화롭고 살기 좋은 대화국으로 건너 온 것이다.”
박제상의 대답은 당당하였고 잠시도 막힘이 없었다.
“당신이 신라에서 무슨 일을 하였는가?”
“나는 신라 압량주를 다스리던 지방관으로 그 지역 발전과 백성
들의 풍요한 생활을 책임지고 있었다.”
박제상의 자신있는 대답에도 취조관은 의구심에 찬 시선이었다.
“아무래도 당신이 우리 대화국에 항복하여 신민(臣民)이 되겠다
고 온 이유가 미심쩍다. 정확하게 말하라.”
취조관은 이맛살을 접히며, 눈알을 부라렸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내가 대화국에 온 이유는 눌지왕의 억압
때문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대화국에
충성하며, 여생을 마음편히 살고자 한다. 그자는 나처럼 고지식하
거나 자신에게 아부하지 않는 신하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 함께 온 이 자들은 누구인가?”
“나의 충복들로 이름은 오례사벌과 부라모지라 한다. 앞으로 이들을
잘 부리면 대화국에 큰 이익이 될 것이다.”
신공황후는 박제상 일행의 조사 내용을 보고 받고 매우 흡족한 표정
을 지었다. 한반도에서 대화국으로 이주해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백제
나 가야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정처 없이 떠도는 유민이거나 천민(賤
民)들이 었다.
장차 백제와 가야와 연합하여 신라를 침공할 뜻을 가지고 있는 야마토
정권에서는 박제상 같은 인물은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그녀의 눈
에 박제상은 왕재(王才)이기도 하였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