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모말(1)

* 창작공간/단편 - 모말

by 여강 최재효 2018. 8. 2. 12:47

본문












                                   








           제1부





  

                                                                                                                                                         - 여강 최재효





 4세기 후반 한반도는 합종연횡의 시대였다. 고구려 왕 거련은 부왕

인 호태왕의 뒤를 이은 국토 팽창정책은 신라, 백제, 가야, 왜를 긴장

하게 하였다. 약소국 신라는 정치적 격변기 때마다 이해득실을 따져

주변국들과 동맹을 맺어 간신히 나라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백제가 강력하게 신라를 공격하거나 협박할 때 신라는 고구려와

연맹을 맺고, 고구려가 남하하여 신라의 영토를 침범할 경우에는 백

제와 연합하여 공동으로 대처하였다.


 그 당시 신라는 내물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내물왕 집권 후반기가 되

국제 관계는 변화무쌍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신라는 백제, 가야, 왜

연합 사이에 끼어 고립된 상태가 되었다. 3국의 협공에서 벗어나기 위

하여 신라는 북방의 강자 고구려에 의지해야 했다.


 내물왕은 392년 귀족인 김실성(金實聖)을 고구려에 기인(其人)으로

보냈다. 내물왕과 김실성은 둘다 미추왕의 사위였다. 내물이 큰사위,

실성이 둘째 사위였다. 미추왕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후사를 걱정하였

다. 미추왕이 죽자 큰사위인 내물이 자연스럽게 왕으로 추대되었다.


 내물왕의 아랫동서인 김실성이 동서지간에서 강력한 정적(政敵)이

되자 내물왕은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그때 내물왕은 정적인 김실

을 고구려로 추방시켜 정치적 안정을 도모코자 하였다.


 백제, 왜, 가야의 연맹군이 신라를 침입하였을 때 내물왕은 고구려

담덕(談德)왕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고구려왕은은 5만 명의

보병과 기병을 신라로 파견하여 3국 동맹군을 격파하였다.


 반면 신라는 그 댓가로 고구려 군사들이 신라 땅에 주둔하여 그들

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된다. 고구려는 내물왕이 조공을 제때에 보

내지 않고 말도 고분고분하게 잘 듣지 않자 점차 불만이 쌓여 갔다.


 401년 고구려 조정은 신라 조정을 흔들어 놓을 요량으로 느닷없이

김실성을 신라로 돌려 보낸다. 신라 조정 중신들 모두 내물왕 편이

아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왕의 눈치만 보며, 충성을 다하지 않았다.

그런 왕중에 내물왕이 갑자기 승하였다.


 “차기 신라를 이끌 왕은 아무래도 김실성이 적합한 인물입니다.

선대왕의 세 자제들은 나이가 어리고 정치에 대한 경험이 없습니

다.” 

 김실성을 지지하던 중신들은 노골적으로 그를 차기 신라왕으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내물왕때 부터 은밀히 김실성과 내

통해오고 있었다.



 “좋습니다. 김실성 공은 외국 문물도 익혔으니 적절한 인사입니다.”
 “암요. 신라에 그만한 인재가 없어요. 신라를 이끌 인물로 아주 적

합한 인물입니다.
 화백회의에서 김실성은 차기 신라의 왕으로 선정되었다.


 화백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중신들은 고구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김실성을 뽑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이미 고구려와 김실성으로부

회유당하거나 마음이 상당히 울어져 있었다.


 김실성은 고구려의 강력한 지지를 발판으로 삼아 신라왕으로 즉위

하였다. 실성왕은 내물왕에게 당한 10년 원한을 갚을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이다. 김실성은 김알지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최초의 김씨 왕

인 미추왕의 동생 이찬 김대서지(金大西知)로 내물왕과 먼 친척이

기도 하였다. 


 김실성이 10년 동안 고구려에 있으면서 귀국하자마자 신라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고구려에 인질로 있을 때 고구려의 고위층

과 좋은 관계를 맺어 놓은 인적 자산이 뒷바침되었다. 고구려 측의

입장에서도 그가 신라의 왕이 되는 것이 고구려의 국익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다. 고구려는 신라가 자신들의

말을 잘 듣고 그들의 대외 정책에 호응해 주는 왕을 원했다. 실성왕

은 10년 동안 고구려에 인질로 있으면서 절치부심하며,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다. 그가 왕이 되었지만 외세의 침략은 이전과 다르지 않

았다.


 실성왕은 보위에 오른 후 미사품(未斯品)을 서불한(舒弗邯)으로

삼고 국정을 맡겼다. 서불한은 신라 17관등 중의 1등 관위로 일명

이벌간(伊罰干), 우벌찬(于伐飡), 각간(角干), 이벌찬(伊伐飡)이라

고도 불렀다. 실성왕은 즉위년에 선대왕이며,자신의 손위 동서였

던 내물왕의 막내아들을 왜와 화해하기 위한 조건으로 인질로 보

내려 하였다.


 “미사흔(未斯欣)을 야마토에 기인으로 보내라.”
 실성왕은 중신들과 상의도 하지 않고 김눌지의 막내 동생을 왜국

으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집권 초반기라 실성왕은 서슬이 퍼래서 감히 어느 누구도 그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나는 너의 아비로 인해 고구려에 십년간 인질로 있었다. 그 십년

세월 동안 나는 모진 수모를 겪었으며 살아왔고 다시 신라에 돌아

와 왕이 되었다. 너희들도 내가 겪은 고통을 맛 봐야 할 것이야. 왜

국에 가서 아예 돌아오지 말라. 나는 너희 형제를 온전히 두지 않을

것이다. 그 첫 번째 앙갚음으로 네놈을 왜국으로 보낸다.'

 실성왕은 정말로 실성한 듯 신하들 앞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실성왕은 내물왕에게 받은 설움을 그의 막내 아들에게 되갚아주

려고 했다. 내물왕에게는 세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 눌지(訥池),

차남 복호(卜好), 막내 미사흔(未斯欣)이었다.


 눌지는 아버지 내물왕을 이어 왕이 될 인물이었다. 그러나 고구려

의 간섭으로 엉뚱하게도 김실성이 왕이 되는 바람에 눌지를 비롯

한 삼형제는 실성왕의 눈엣가시가 되고 말았다.


 삼형제는 분루를 삼키며 실성이 왕이 되는 것을 바라만 봐야 하는

처지였다. 미사흔은 원치 않은 왜의 대화국에 기인으로 가야했다.

실성왕은 자신이 당한 수모를 그대로 갚은 것이다.


 서기 200년 경 왜의 열도(列島)에는 세 지역에서 호족들이 군웅

할거하고 있었다. 북구주(北九州)를 중심으로 사마태국(邪馬台國)

이 있었고, 신라와 마주한 동해를 중심으로 출운국(出雲國)이 있

었으며, 아스카 지역에는 대화국(大和國)이 있었다.


 각 지역에서 세를 불리며 각축을 벌이던 나라들을 대화국이 모두

평정해 버렸다. 대화국 병사들은 해적으로 변해 틈만 나면 신라의

해안지역에 침입하여 백성들의 목숨과 재산을 빼앗기도 하고 신라

 땅에 숨어서 신라 조정을 위협하였다


 "왜에 인질을 보내는 일은 중신들이 결정한 것이라 나는 모르는

일이다. 내가 생각해도 미사흔 정도면 얼마든지 왜에 갔다 와도 될

것이야. 야마토는 날씨도 춥지 않다고 들었다."

 눌지의 항의를 받자 실성왕은 엉뚱한 말로 둘러댔다. 실성왕은 전왕

의 아들들을 신라 밖으로 내보내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적당한

때를 보아 숙청시키려는 의도를 품고 있었다.


 왜의 대화국은 미사흔을 인질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백제와 연합

하여 신라를 자주 침입하였다. 야마토 정권은 미사흔이 말만 왕족

이지 인질로서 제대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이에 실성왕은 친히 기병을 이끌고 독산 남쪽에서 왜병과 두 번 싸

워 이기고, 왜병 3백여 명을 죽이기도 하였다. 실성왕은 고구려의 압

박에 굴복하여 412년 내물왕 차남인 복호를 고구려에 기인으로 보

내 고구려와 관계를 개선하려 했다.


 “대왕, 너무하십니다. 어찌 이번에도 저와 중신들의 의견도 묻지

않고 복호를 고구려로 보내려 하십니까?”

 내물이 실성왕을 찾아가 강하게 항의하자 그는 이상한 말로 어물쩍

넘어가려 하였다.


 “복호는 신라의 동량지재라 장차 이 나라를 위하여 크게 쓰기 위하

여 외국의 문물을 배우게 하려는 나의 깊은 뜻이 있느니라. 사위는

너무 상심해 하지 말라."


 ‘말은 참 번드르르 하구나. 장인이 아니었다면 당장 어찌해볼 텐데.'
 눌지는 자신의 수족을 자르려는 왕의 속셈을 알고 있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눌지는 마음이 급했다.


 눌지는 실성왕이 두 동생들을 모두 외국으로 추방하였으니, 다음은

자신의 차례가 될거라 판단하였다. 실성왕에게 사위 눌지는 사위임

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입지를 넓히기 위하여 빨리 제거해야 할 대상

이었다. 


 눌지는 선대왕의 아들로서 품신이 훤칠하고 성품도 칠칠하였다. 그

는 아버지 내물왕에게 총애를 받았던 중신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

고 있었기에 실성왕을 불안하게 했다. 또한 실성왕을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인물은 바로 삽량주간((歃良州干) 박제상이었다.


 박제상은 실성왕이 미사흔과 복호를 대화국과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 사대(事大) 외교노선을 지향하자 왕에게 불만이 많았다. 이에

실성왕은 큰사위 박제상을 삽량주의 군수로 좌천 시키고 말았다. 

박제상은 동서인 눌지와 자주 만나 의기투합하며, 장인을 권좌에서

끌어 내리기 위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다음은 네놈 차례다. 멀지 않았다. 사위도 필요 없다.'
 실성왕은 고구려에 있을 때 알게 된 고구려 출신 검객 을지선(乙支

仙)을 초빙하였다. 그는 고구려 말객(末客) 출신으로 일당백의 무공

을 소유하고 있는 자였으나, 대의를 좇고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성격

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실성왕은 그를 궁궐로 불러들이고 주연(酒筵)

을 베풀었다.


 “을지공, 그동안 무탈하시었소?”
 “대왕의 염려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실성왕은 은자(銀子) 한 상자와 눌지의 초상화 한 장을 내밀고 을

지선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살거렸다.


 '자는 선대왕의 장자 김눌지라는 자로 각종 비리를 저지르며, 신라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그자를 조속히 처단하지 않으면 큰 분란

이 발발하여 사직이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을지공께서 그자의 숨

통을 끊어 놓으면 신라 조정은 을지공의 은혜잊지 않을 것입니다. '


 실성왕은 을지선에게 손수 술을 따르며, 일이 성공하면 더 많은 상을

내리겠다고 유혹하였다. 을지선은 영문도 모르고 서라벌에 왔다가 실

성왕의 부탁을 받고 자객이 되어야 했다.


 을지선은 다음날 서라벌 저자거리를 누비며, 실성왕이 살해를 의

뢰한 눌지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였다. 초저녁에 그는 서라벌에서

제법 잘 나간다고 소문난 기루(妓樓)에 들었다. 을지선은 비싼 술과

안주를 시켜 놓고 작부(酌婦) 한명을 불렀다.  

 
 “그분은 선대왕의 장자로 서라벌 사람들이 존경하는 분입니다.

지금의 실성왕이 그만 실성하여 그분의 자리를 빼앗은 거나 같아

요. 눌지님은 우리 기루 단골손님이세요. 그제 다녀가셨으니 오늘쯤

우리 기루에 들리실 텐데요.”


 “그분이 오시면 나에게 소개해 주시오.”
 을지선은 은자 두 개를 기녀의 손에 쥐어 주었다. 실성왕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던 을지선은 서라벌에 와서 두 사람의 실체와 

갈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을지선은 실성왕이 고구려에 인질로 있을 때에는 착하고 의리 있

는 장부로만 알고 있었으나, 옳지 않은 방법으로 왕의 자리에 오른

사실과 선대왕의 자식들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도 알아냈다.


 또한 눌지가 왕의 사위 이며, 강력한 정치적 경쟁자이기도 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서라벌에는 담덕왕 때부터 고구려 막하라수지

(莫何邏繡支)와 비장이 파견 나와 있었다. 고구려 담덕왕은 신라가

백제와 왜 그리고 가야의 협공을 받고 풍전등화의 처지에 있을 때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구원해 주었다. 그 뒤부터 신라 막하라

수지는 서라벌에 머물면서 신라 내정에 간섭하고 있었다.


 ‘내가 괜히 신라에 왔나? 사람을 죽이기기 위해서 온 게 아니었는

데, 일이 좀 이상하게 되었구나.’


 “장부님, 눌지 공자님을 모시고 왔어요.”
 을지선이 술 한병을 다 비울 무렵 작부가 눌지를 데리고 들어왔다.


 을지선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눌지에게 고개를 숙

였다. 을지선의 입장에서 보면 눌지는 신라의 왕이 될 뻔한 사람이었

으며, 실력만 갖추면 언제든 신라왕이 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반면에 자신은 고구려의 일개 무부(武夫)에 지나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공자의 고명은 진작부터 듣고 있었습니다. 소인은

고구려에서 신라에 유람차 온 을지선이라 합니다.”
 “처음 뵙습니다. 김눌지라 합니다.”


 눌지는 기루에서 자신을 찾는 사람이 있다는 말에 호기심과 두려

움이 일었다. 눌지는 자신과 자신의 동생들을 죽이지 못해 혈안이

되어 있는 장인 실성왕을 권좌에서 쫓아내기 위하여 뜻을 함께할

동지들을 모으는 중이었다. 반정(反正)의 성공을 위해 단 한사람의

힘이 절실한 때라 눌지는 매일같이 수많은 사람을 만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한눈에 봐도 품격과 풍신이 범인과 확연히 다르고 연부역강(年富

力强)하며, 군계일학의 빼어난 군자로다. 신라에 이 같은 자가 있었

다니. 과연 왕재(王才)가 틀림없구나.’
 을지선은 눌지의 외양에 그만 넋이 나가고 말았다. 을지선은 눌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백하였다.


?연부역강 - 나이가 젊고 기운이 왕성함.


 “나는 신라왕의 부탁을 받고 공을 죽이려고 왔습니다. 그러나 공을

뵈니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 것 같습니다. 잠시나마 흉측한 마음

을 먹었던 저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을지선의 고백에 눌지는 깜짝 놀랐다. 


 장인인 설성왕이 자신을 죽이려한다는 근거없는 풍문은 있었으나,

자객까지 동원하여 실행에 옮기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을지공, 일어나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간밤에 아버님께서 몽조(夢

兆)하시어 오늘 귀인을 만날 것이라 하셨는데, 과연 아버님 말씀이

는가 봅니다.”


 눌지는 칠척장신에 얼굴이 하얗고 붉은 입술에 짙은 일자 눈썹으

로 보기 드문 옥골선풍의 미남자로 서라벌 여인들 대개가 그에게

연정(戀情)을 품고 있었다.


 을지선은 늘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찬 실성왕을 대하다 눌지를 대

하니 마치 신선을 보는 듯 하였다. 을지선은 자신의 의무를 포기하

고 도리어 눌지의 동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하마터면 큰 실

수를 저지를 뻔하였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을지공이 속내를 터놓고 말하니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입니다.”
 “신라에 머무는 동안 성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오늘부로 그대는 나의 형제나 다름없습니다.”
 눌지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을지선이 진심

으로 사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오랜 벗처럼 대하기로 하였

다.


 그리고 자신의 거사계획을 알려주고 도움을 부탁하였다. 눌지는

을지선에게 박제상을 소개하고 좋은 관계를 맺도록 주선하기도

했다. 눌지와 을지선 그리고 박제상이 의형제처럼 지내는 사이가

되었지만 실성왕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또한 을지선은 눌지를

서라벌에 파견 나와 있는 고구려의 막하라수지(莫何邏繡支)와 인

연을 맺을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반정 준비가 끝나자 417년 눌지는 정변을 일으켰다. 박제상과

서라벌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 군의 지원을 받아 눌지는 실성왕

을 축출하는데 성공하였다.


 고구려 측에서도 실성왕을 지지하는 것 보다 눌지를 응원하는

것이 자국에 더 이익이 된다고 판단하였다. 실성왕이 고구려에

기인으로 10년 간 볼모로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는 그가 신라왕

이 되면 국익에 큰 보탬이 되리라 예상했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예상은 빗나가기 시작하였고 이에 고구려 조정은 크게 실망

하였다.


 눌지의 바로 아래 동생 복호가 고구려에 새로운 볼모로 와 있기

때문에 고구려 조정은 실성왕보다 눌지를 조정하기가 더 수월하

다고 보았다. 눌지는 고구려의 전폭적인 지지아래 신라의 새로운

왕에 등극하였다.


 왕이 된 기쁨도 잠시였다. 실성왕 때 그의 둘째 동생 복호가 고구

려에, 막내 동생 미사흔이 왜의 대화국에 인질로 보내졌기 때문이

었다. 눌지왕은 자나 깨나 늘 두 동생들 생각뿐이었다.


 왕의 얼굴이 늘 수심에 차 있자 신하들 심기도 편치 않았다. 하루

는 눌지왕이 나라에서 가장 명석하고 꾀가 많기로 소문난 수주촌

(水酒村)의 간(干) 벌보말(伐寶靺), 일리촌(一利村)의 간 구리내

(仇里내), 이리촌(伊利村)의 간 파로(波老)를 불러 자신의 속내를

말하였다.


 “경들도 알다시피 과인의 두 동생들이 고구려와 대화국에 볼모로

가 있습니다. 미사흔은 왜에 간지 십칠 년이나 되었고, 복호는 고

구려에 칠년간이나 머물고 있습니다. 그들을 방치하는 것은 윤상

(倫常)의 도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또한 척령지회(鶺鴒之懷)라

했습니다. 과인이 어떻게 해야 삼상(參商)의 고통을 덜 방법이 있

는지 말씀해보세요.”


 “대왕이시여, 신 벌보말 아뢰옵니다. 삽량주(揷良州)의 간 박

제상(朴堤上)이 지모(智謀)가 뛰어나고 용맹하기가 범과 같다하

옵니다.”


 ‘박제상? 나의 큰동서를 말함인가?’
 “오오, 박제상이 그리 뛰어난 재주가 있었구려.”
 눌지왕은 보위에 오르자 예상치 못한 정적이 나타났다.


 바로 큰동서인 박제상이었다. 눌지는 박제상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왕위에 등극하였지만, 반정의 성공으로 정치적 입지가 강

대해진 박제상을 중앙 정치 무대로 부르지 않았다. 박제상 역시 눌

지와 마찬가지로 실성왕의 사위였다. 신라에서 왕이 후사(後嗣)를

두지 못했을 경우에 사위가 대권을 이어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

었다.


 서기 184년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 이후 233년간 박씨의

왕통이 끊겨있는 상태였다. 신라는 박혁거세 이후 석탈해를 제외

하고 아달라왕까지 일곱명이 박씨 성을 가진 왕이 통치하였었다.


 그 같은 가문의 지난 이력은 박제상에게 원대한 꿈을 갖게 하였다.

왕손의 한 사람으로서 아들이 없는 실성왕의 사위라는 입지는 박제

상에게 가문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눌지보다 조정내에서 정치적 입지가 크지 못했던 박제상은

잠룡으로 만족해야 했다.


 눌지왕은 바로 큰동서인 박제상을 왕궁으로 불러 올렸다. 박제상

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의

6세손이며, 할아버지는 갈문왕(葛文王) 아도(阿道)고, 아버지는

파진찬 물품(勿品)이다. 박제상의 자는 중운(中雲)이며, 호는 설

당(雪堂) 또는 관설당(觀雪堂)이다.


?간 - 신라시대 지방에 파견된 현령으로 군수나 태수. / 윤상 - 사람의 도리. / 척령지회 - 형제

들이 다급하고 어려울 때 서로 도움. / 삼상 - 삼성(參星)과 상성(商星)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음,

곧 ‘이별’을 뜻하는 말. / 삽량주 - 경상도 양산의 옛 지명.


  ‘차라리 숨막히는 신라에 있는 것 보다 외국에 나가 바람이라도

쐬고 오는 게 좋겠다. 좋아 다녀오자.’
 왕궁을 향하는 박제상의 마음이 무거웠다. 그는 눌지왕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눈치채고 있었다.


 “삽량주의 간 박제상, 대왕을 뵙습니다.”
 “어서 오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눌지왕은 큰동서인 박제상을 보자마자 반가워 그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선대왕 실성과 의견이 맞지 않아 삽량주의 간으로 내려간 박제

상이었다. 작은 동서인 눌지가 왕이 되었어도 여전히 지방의 수

령직을 맡고 있는 박제상이었다. 눌지는 박제상의 대의(大義)를

어느 정도 눈치 챘는지 모르지만 여전히 평범한 동서로 대하였다.

아무리 동서지간이지만 왕이 일개 지방관리를 후대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신라에는 조정에서 지방에 파견한 여러 명의 간(干)들이 있었지

만 왕실의 피를 받은 자가 지방에 간으로 있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박제상은 키가 칠척 반이고 무예에도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있었

으며, 한번 옳다고 단정내린 일에 대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는 인물

이었다. 박제상은 왕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 숙여 아뢰었다.


 “신이 어찌 대왕의 고충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나이까. 즉시

고구려로 달려가 왕제(王弟) 복호를 모시고 돌아오겠나이다.”


 “과연, 과연 충신이로다. 경만 믿겠습니다.”
 박제상은 시자(侍者) 두 명을 데리고 다음날 고구려의 국도(國都)

인 국내성으로 향했다. 서라벌에서 국도까지는 걸어서 한 달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박제상이 고구려로 떠나기 전에 눌지왕은 을지선

과 서라벌에 있는 고구려의 막하라수지에게 박제상이 고구려에

가는 일을 미리 귀띔해 주었다.







                                                                                                                                       - 계속 -



 



 




 

 

 

 

 

 

 

 

 

 











 





'* 창작공간 > 단편 - 모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말(최종)  (0) 2018.08.06
모말(3)  (0) 2018.08.05
모말(2)  (0) 2018.08.03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