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석궁에 내린 비(6)
- 여강 최재효
원효스님을 일컬어 신라사람들은 ‘원효(元曉)는 불기(不羈)다’라고 했다.
그는 해방자이며, 동시에 자유인이 분명했다. 불교와 승려라는 형색으로부터
지식과 명예로부터도 그리고 계율로부터 스님은 늘 자유로웠다. 결코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스님은 일정한 범위나 틀 속에 안주를 거부하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상에는 수많은 경계(境界)가 있다. 여기서 계(界)란
영역이나 범위를 말한다. 너와 나, 이쪽과 저쪽을 막는 장벽이다. 방(方)도 역
시 일정한 영역을 의미하고 있다. 아울러 애(礙)는 서로 다른 계를 가로막는
장벽을 말한다. 결국 무애란 장벽들의 완전한 제거를 말함이다.
원효스님이 주장하는 방외(方外)는 일정한 범위를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일정한 범위를 벗어난다는 것이 ‘유방외’이며, ‘초출방외’라 한다. 무애에서
애(礙)란 방해 또는 정체시키는 것이어서 무애란 경계의 타파를 의미한다. 벽
의 제거가 우리를 무애의 세계로 인도한다. 또한 무애는 집착을 제거하지 않
고서 가까이 할 수 없다. 불교의 연기법상의 모든 존재들이 서로 하나로 융합
하고 있는 것인데 이를 무애용융(無碍鎔融)이라고 부른다.
원효스님이 요석공주를 만남은 스님이 세간으로 돌아오는 몸짓이기도 하다.
원효스님이 ‘출세법(出世法)은 세간법(世間法)을 치유하는 법이고, 출출세법
(出出世法)은 출세법을 치료하는 법이다’라고 하였다. 스님은 출가와 재가의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아야 하며, 재가 혹은 도속(道俗)에 치우치지 않는
다는 생각은 세간과 출세간, 세속적인 삶과 종교적인 삶, 성(聖)과 속(俗) 그
어느 쪽에 치우쳐도 안 된다는 뜻이다.
창천을 나는 대붕(大鵬) 기상을 지니고도 나무에 서식하는 새들의 만족을 생
각하였다. 스님은 하늘을 찌를 듯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하늘을
떠받칠 탄탄한 하늘 기둥(天柱)로 자처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원효 스님은 교만하지 않고 스스로 몸을 굽힐 줄 알았다.
대륙에서 일어난 수(隨)와 당(唐)의 팽창 물결은 고구려와 백제로 밀려들었
다. 해동의 삼국도 각자의 이득을 위하여 서로 물어뜯어야 했다. 갈수록 삼국
간의 싸움은 치열했다.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를,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백
제는 고구려와 신라를 공격해야 했다. 신라와 백제가 연합했는가 하면, 고구려
와 백제가 손을 잡고 신라를 고립시키기도 했다. 어제의 동맹국도 이해관계가
다르다고 판단되면 원수가 되었다.
김춘추는 마음이 급했다. 그는 분명히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것을 자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삼국 통일 후가 걱정되었다. 김춘추는 백제와 고구
려의 유민도 모두 신라의 백성으로 흡수하여 정신적 통일을 이루어야 완벽한
통일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서로 강한 적대 의식으로 대립하고 있던 삼국
의 백성들은 통일을 계기로 하나의 민족 구성원으로 융합되어 한민족 형성
의 토대를 이룩해내야 했다.
신라에서는 오래전부터 화랑들이 명산대천 등 자연신에 대한 제사를 지내
왔었고, 이와 같은 토착신앙은 고구려나 백제에서도 비슷했다. 김춘추는 통
일 이후 그 제사의 대상을 전국으로 확대시킬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고구려, 백제 유민들에 대한 정신적, 종교적 융합이라는 점에 김춘추는 무게
를 두었다. 비록 지금은 서로 전쟁을 하고 있었지만 삼국 백성들의 공통된
종교는 불교였다. 불교는 고구려, 신라, 백제의 백성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김춘추는 통일 전쟁이 끝난 뒤에 고구려, 백제 유민들의 마음의 상처를 치
유하는데 불교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였다. 김춘추와 신라의 대소신료들
역시 삼국통일이 불교의 공덕에 힘입어 이룩되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었다.
법흥왕(法興王) 때 이차돈의 순교에 의한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었고 불력
(佛力)으로 삼한이 한 나라가 되고 삼한의 온 백성이 어울려 한 집안이 되
기를 진정으로 원하고 있었다.
“구룡대사(丘龍大師)님, 오늘밤은 정말로 용으로 화하여 저를 신비하고 현
묘한 세상으로 이끌어 주시길 기원합니다.”
“소승은 평범한 인간입니다. 둔갑술(遁甲術)을 써서 용이 되거나 호랑이가
되는 도술을 부릴 줄 모르니 이일을 어찌해야 하나요?”
“스님, 어찌하다니요? 이 여리디 여린 여인 하나를 두고 그리 섭섭한 말씀하
시면 저의 실망이 너무 큰걸요.”
“나무아미-.”
원효스님은 합장을 하다말고 요석공주가 건넨 잔을 들었다. 잔에서 향긋한
냄새가 솔솔 피어오르고 있었다.
“스님은 웬만한 고승대덕보다 훨씬 법력이 세다고 들었습니다. 스님은 ‘만인
지적(萬人之敵)’이라하지 않습니까? 전장에서 만 명의 적을 능히 당해 낼 수 있
는 위대한 장수가 아니신지요?”
“아미타불-. 소승이 화랑도 시절 백제 군사를 맞아 혈투를 벌인적이 있었지요.
그때부터 그 같은 호칭을 들었다면 지금 김유신 장군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합
니다.”
“스님, 저는 한때 김흠운에게 하가한 적이 있는 몸입니다. 지금은 넓고 적
적한 요석궁 하나를 꿰차고 세월이 무정하게 흘러가는 것을 한탄하는 별 볼
일 없는 연약한 여인이랍니다. 저는 스님이 궁궐에서 불법을 설하실 때나
가람에서 많은 불제자들을 모아놓고 법문하실 때 자주 스님의 말씀을 경청
하여 왔습니다.
부처님 말씀이 다 옳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살생을 하지 않고는 아버님께서
삼한을 통일하실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저는 자주 스님의 말씀을 되새겨
보기도 하고 혼자 고민도 많이 하였습니다.”
“아미타불-. 그러셨군요.”
원효스님은 요석공주의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하고 있었다.
“스님, 저는 오늘 스님을 파계시키고자 단단히 벼르고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스님, 각오하셔야 해요.”
“나무관세음보살-.”
요석공주는 다리를 꼬고 요염하게 앉아 빨간 입술을 열고 연신 술잔을 입술
에 가까이 댔다. 속살이 훤히 비치는 치맛자락 사이로 드러난 요석공주의 미
끈한 종아리가 원효스님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제가 스님을 파계시키고자 함은 조국을 위한 저만의 헌신이랍니다. 머지
않아 부왕께서 삼한을 일통하시면 요동치는 삼한의 불쌍한 백성들의 등을 스
님께서 따뜻한 말씀으로 다독거려 주셔야 합니다. 저의 지아비는 일찍이 조천
성 전투에서 백제 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타소 언니
도 형부 김품석과 함께 대야성에서 백제군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였습
니다.
백제는 우리 신라의 원수라고 하지만 백제를 다스리는 백제왕과 대소신료들
그리고 일부 군관들이 원수일 뿐 순진하고 착한 백제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
겠습니까. 저는 지아비를 잃고 많은 밤을 전전반측하며 보내야했습니다. 스
님은 이 불쌍한 여인 먼저 위로해 주셔야 해요. 스님께 아버님과 제가 일방적
으로 통혼(通婚)을 하여 송구하였습니다. 용서하시어요.
그러나 스님께서 먼저 신라 왕실에 청혼을 하셨으니 크게 송구해 할 것도 없
겠지요. 저는 스님께서 신라를 떠받칠 천주(天柱)를 만들어주시겠다고 저자
거리를 누비며, 노래를 부르고 다니실 때부터 스님의 깊은 뜻을 알았습니다.
일부 세상 사람들은 단지 스님께서 색욕(色慾)이 동하여 그런 노래를 부르고
다닌다고 비난하지만 아버님과 왕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답니다.
신라 왕실에서는 스님께서 나라를 걱정하시어 미래를 훤히 내다보시고 삼
한일통 후에 나라의 기틀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하여 큰 인재(人材)를 왕실
에 선물해 주시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답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그리
생각하였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오랜 세월 이 신라라는 나라를 위험에 빠
트린 각종 악습과 적폐(積弊)를 일소하시고자 하는 듯이 있음도 어느 정도
짐작하게 되었답니다.
스님, 오늘밤에는 스님이 아니라 저에게 낭군님이세요. 타인들의 눈을 속이
기 위하여 일부러 문천교에서 떨어지셨어요. 참으로 잘 오셨습니다. 제가 풋
풋한 사과가 아니고 농익은 홍시(紅柿)라서 실망하신 것은 아니시겠죠. 이 방
에 들어오신 이상 오로지 저에게 모든 걸 주셔야 해요. 오늘 같은 밤은 저와
이 신라에 천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하는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봅니다.
이 방에서는 부처님도 보살님도 통하지 않는 답니다. 욕정에 사로잡힌 벌거
벗은 남녀가 있을 뿐이에요. 아셨죠? 이제부터 스님이라는 호칭 대신에 출가
하기 전의 이름인 서당(誓幢)이라고 부르겠어요. 설서당(薛誓幢). 신라의 자
랑스러운 화랑(花郞) 설서당이 이 밤에 신라왕실의 여인이 머무는 요석궁에
드셨습니다. 이 요석궁은 미로 속에 있어서 그 누구도 쉽게 빠져나갈 수 없
답니다.”
“아미타불-.”
원효스님은 번개에 맞은 것처럼 정신이 반쯤 나간 듯 하였다. 지금 앞에
앉아 있는 요염하고 색기가 자르르 흘러넘치는 아름다운 여인이 이전에 보
아왔던 요석공주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부왕의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을
확신하고 통일 후를 걱정하는 효성이 지극한 신라왕실의 딸로 다가왔다.
자신을 스스로 불살라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경지에 이른 똑똑하고 당찬
여인이라고 생각하게 하였다.
‘음-. 비록 왕실에서 화초처럼 자란 여인이기는 하나 세상을 제대로 내다
보는 눈이 있구나. 세상물정을 전혀 모르는 철딱서니가 없는 공주인 줄 알았
는데 그게 아니었어. 당돌하고 맹랑하며, 지혜도 겸비한 왕실에서 보기 드문
여인이야. 그동안 불제자와 신도의 관계를 우리 서로가 설정한 채 지나가는
소를 바라보듯 했지만 오늘 가까이 대하고 보니 그게 아니었어. 이 정도 여
인이라면 내 혼신을 기울여 하늘을 떠받칠 든든한 하늘기둥을 깎아도 될 것
같군. 아미타불-.’
“아이. 스님, 아니 서당랑. 뭐하세요. 요석궁에 괜히 오셨다고 후회하고 계
시는 건 아니죠?”
“공주님,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소승은 한번 결심한 일은 뒤로 물리거나 빼
지 않습니다. 출가인의 몸으로 공주님 혼자 기거하는 방에 들어왔으니 흔적
이라도 남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당랑, 잘 생각하셨습니다. 제가 김흠운에게 하가하던 첫날밤이 생각나
네요. 그 사람은 밤새 술에 절어 초야(初夜)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답니다.
어서. 이 거추장스러운 옷 좀 벗겨주세요. 옷을 겹겹이 껴입었더니 땀이 나서
불편해 죽겠어요.”
“아미타불. 알겠습니다.”
원효스님은 일어나 손수 요석공주의 저고리며, 치마 등 공주가 옷 벗는 것을
도와주었다. 당나라 풍의 옷을 좋아하는 요석공주는 여러 겹의 옷을 입고 있
었다. 끈을 풀자 요석공주가 입고 있던 흰색과 분홍색 비단 저고리 두 벌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요석공주의 풍만한 젖가슴이 붉은 사(紗)로 된 투명한
속옷을 투과하여 스님의 시야에 들어왔다.
요석공주는 눈을 내리 깔며 스님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공주가 치마끈을
풀자 검정색 바탕에 금박으로 원앙이 수놓아진 비단 치마가 사르르 벗겨졌다.
이번에는 엷은 하늘색의 보드라운 비단 속치마가 하늘거리며 매달린 듯 보였
다. 공주가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잡아당기자 하늘색 치마가 물결처럼
벗겨져 내렸다.
마지막 속곳은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비단으로 된 것인데 속살이 다 보였
다. 스님은 고개를 돌리고 자리에 앉았다. 원숙한 여인의 육덕이 꿈틀거리는
속곳 안에서 화산 열기보다 더 뜨거운 불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공주
가 황촛불 하나를 입으로 불어 껐다. 화려하게 장식된 큰 방에 촛불이 움직
일 때마다 남녀의 그림자가 춤을 추었다.
“서당랑, 우리 건배해요. 그대가 든 술잔에는 술 대신 당나라에서 수입한 차
로 우려낸 차가 담겨 있어요. 출가인의 신분이라 격에 맞게 준비하였답니다.
저는 신선들이 마신다는 유하주(流霞酒)를 마실 거예요. 오늘밤 우리 두 사람
은 천상에 올라가 선남선녀가 되는 겁니다.
옛날에 서왕모(西王母)가 신궁(神弓)인 예(羿)에게 선물한 복숭아를 예의 처
항아가 몰래 훔쳐 먹고 달나라 섬궁(蟾宮)으로 도망을 갔다지요. 저는 오늘
항아(姮娥)가 된 기분으로 서당님을 모시려 합니다.”
요석공주는 술이 오르는지 양쪽 볼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불자가 선랑(仙郞)이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 합니다.”
“서당님, 이 요석궁이 서왕모가 살고 있는 곤륜산(崑崙山)의 요지(瑤池)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서왕모의 딸 운화부인(雲華夫人) 요희(瑤姬)랍니다.”
요석공주는 평소에 당나라에서 수입된 도교에 관한 서적들을 자주 접하여
도교에도 상당한 관심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소승은 오늘은 부처님을 잠시 잊고 도교의 지존인 태상노군(太上
老君)의 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소승이 달포 전에 꿈속에서
서왕모가 보내온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어머나. 그래요. 스님은 서왕모와 친하신가 봐요.”
“가끔 몽중(夢中)에서 만나곤 하지요.”
원효스님은 유쾌하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얼마나 크던 지 밖에서 안을 몰래 훔
쳐 보던 간전이의 애간장을 녹였다.
“서당랑은 정말로 모르시는 게 없네요. 유교, 불교, 도교에 달통하셨어요.”
“유불선儒彿禪)은 다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만든 종교이니 통하지 않는
다면 이상한 거지요. 오늘은 이 서당랑이 신선이 되어 공주님을 데리고 곤륜산(崑
崙山) 곳곳을 누비며 새로운 경험을 해볼까 합니다.”
“어머나. 서당랑, 말로만 듣던 꿈속의 산이며, 서왕모께서 거주하신다는 그 산을
정말로 구경시켜주신다는 거예요?”
“신라의 사내들은 일구이언하지 않는답니다.”
원효스님은 부처님 명호를 부르지 않고 합장만 하였다.
“아, 그렇군요. 그럼 어서 술은 마시고 몽롱한 상태에서 꿈길을 달려보고 싶어
요. 서당랑, 오늘밤 저는 죽었다고 생각할게요.”
“저는 원래 오늘밤 서당랑과 곤륜산의 요지로 날아가 요지경 속을 두루 다니
며, 이전에 맛보지 못한 지극한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습니다.”
요석공주는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는지 말이 약간 어눌했다.
“수미산을 오르든 혹은 곤륜산을 오르든 극락은 매한가지랍니다.”
“어머나, 그래요. 그럼, 오늘밤에는 곤륜산을 다녀오고 내일은 수미산에 가면
되겠네요.”
“공주님, 상상의 산을 가려면 역시 상상력이 풍부해야 하겠지요.”
원효스님은 요석공주를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했다.
“걱정하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공주님은 소승이 시키는 대로 따라하시기만
됩니다. 아직은 이르니 좀 더 여흥을 즐긴 후에 시작하여도 늦지 않습니다.”
“어머. 그래요? 전 무조건 서당랑이 시키는 대로 할게요.”
요석공주는 이미 이성을 잃은 듯 원효스님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에는 소승이 잔을 올리지요.”
원효스님이 금빛이 찬란한 술병을 들었다.
“제가 스님, 아니지 서당랑이 따르는 술잔을 다 받아보네요. 제 잔에 술이 넘
치고 서당랑의 정이 듬뿍 담겨야 이 나라가 편안합니다.”
“그렇습니다. 공주님 잔이 미주(美酒)로 차고 넘쳐나야 신라에 평화가 찾아옵
니다.”
원효스님은 즉답으로 요석공주의 환심을 샀다.
“서당랑은 제 속내를 손바닥 보듯 보시고 계시네요. 신라의 지존께서 자루 빠진
도끼를 서당님에게 하사하셨으니 단단한 자루를 끼워주셔야 해요. 장작을 두세
번 패다가 부러지면 부왕께서 얼마나 실망하시겠어요.”
“그 일도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단단한 걸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오늘밤은 저의 모든 상태가 아주 양호하답니다. 낭군님과 꿈길을 걷는 일만 남
았답니다.”
두 사람이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에 별들도 졸고 새들고 가지에 앉아 졸
고 있었다.
“폐하, 원효스님이 이 시각 요석궁에 들어 옷을 말리고 있다고 하옵니다.”
자시(子時)가 넘은 시각 내관이 김춘추에게 요석궁의 동태를 알렸다.
“저런, 저런. 스님을 요석궁에 들게 한 것은 옷을 말리라고 한 게 아니야. 옷도
말리고 여인네 애간장도 타게 해야 하거늘.”
김춘추는 문명왕후와 침전(寢殿)에 들어 있었지만 요석궁의 일이 무척이나 궁
금하였다.
“폐하, 원숙한 남,녀가 깊은 밤 한방에 있으면 무슨 사단이 나도 나게 되어 있
답니다.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지요? 짐이 처음 왕후를 만났을 때를 생각하니 그런 것 같습니다. 왕후,
그런데 말입니다. 원효가 공주를 그냥 놔두고 혼자 잠이 들면 어찌해야 합니
까?”
김춘추는 정말로 걱정이 되는 표정이었다.
“폐하, 스님이 지은 몰가부(沒柯斧)란 노랫말을 잊으신 것은 아니시죠?”
문명왕후 김문희가 어찌나 박장대소하는 지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밖에서 번
을 서며, 졸던 시녀들까지 왕후의 웃음소리에 놀라 정신이 번쩍 들 정도였다.
“험-. 짐이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요석궁 주인이 누구입니까? 요석공주가 비록 과부의 몸이기는 하나 그애 남
성 편력은 서라벌이 다 알고 있답니다. 오늘밤 원효스님은 요석조카가 쳐놓은
그물에 단단히 걸렸습니다. 그 그물에 한번 걸려들면 바람도 빠져나가지 못할
거예요. 폐하, 내일 요석궁에 가보시면 두 사람의 상태를 아실 겁니다. 두 사람
얼굴이 푸석푸석하면 밤새 큰일을 치른 증좌가 아니겠어요.”
신라 왕실에서는 친인척간에 사통(私通)이 비일비재하였다. 왕실의 사람들
은 신분이 낮은 사람들과 접촉하기를 꺼려하였다.
‘음-. 그 아이가 지아비를 잃고 방황하니 짐이 그 아이의 웬만한 허물은 모르
는 체 했지. 그러나 이제는 신라를 위하여 아주 중요한 임무를 맡은 이상 아이인
짐을 크게 실망시키지 않겠지. 짐의 딸이지만 그 아이 미색(美色)이라면 신라
의 그 어느 사내라도 마다하지 못할 게야. 오늘밤 요석궁에 비가 흠뻑 내려야
하는데…’
김춘추는 곁에 명문왕후가 있다는 사실도 잊고 깊이 사색에 잠겼다.
“폐하, 뭘 그리 골몰하셔요?”
“어험-.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이 오지 않으시면 약주 한잔 올릴까요?”
“그럴까요. 그럼. 어제 마시던 술이 참으로 맛이 좋더이다.”
“그 술은 바다건너 왜나라에서 사신이 가져온 술인데 합궁하기 전에 부부가 마
시면 좋다고 합니다. 폐하, 오늘밤 소첩하고 잘 생긴 왕자나 절세가인 공주를 만
들어 보실까요.”
“좋지요. 짐은 사내보다 딸이 더 좋습니다. 어서, 술잔을 비우고 자리에 드십시
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두 누이동생과 부부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자매가 서로 돕고
위해주는 사이라 잡음은 없었다. 김춘추는 잔을 들면서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김문
희와 첫 만남을 생각하였다.
“간전 언니, 이제 그만 훔쳐보세요. 우리들도 구경 좀 하자고요.”
“쉿! 조금만, 조금만 더 보고 비켜줄게. 잠시만 기다려 보렴.”
“스님과 공주님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 죽겠다고요. 언니, 이제 그
만 보시고 자리 좀 내주세요.”
“알았어. 알았다고. 잠시만 기다려주렴. 제발-.”
“언니는 집에 가시면 낭군님과 그런 일을 실컷 하실 텐데, 남들이 정분 나누는
일에 뭘 그리 관심이 많으실까.”
요석궁에 원효스님이 들었다는 소식이 왕궁 안에 파다하게 퍼지자 호기심 많은
궁녀들이 몰래 요석궁으로 몰려들었다.
요석궁을 지키고 있는 군사들과 안면이 있는지라 수비병들은 궁녀들을 요석궁
안으로 들게 하였다. 원효스님과 요석공주가 들어 있는 내실에 문이 좌우측으로
두 개 나있는데 문 앞에 수십 명의 궁인들이 문틈으로 내실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훔쳐보느라 난리였다.
“어머, 어머. 저를 어째. 공주님께서 드디어 일어나셨어. 춤을 추시려나 보네.
어머나, 옷을 입기는 입으셨는데 황촛불에 아롱거리는 아름다운 공주님 육신을
보니 나도 속이 울렁거려 죽겠다. 몸매는 아직도 처녀 몸매야. 어떻게 해야 저
런 몸매를 유지할 수 있는 걸까.”
“간전 언니, 그만 보고 빨리 자리 좀 내줘요.”
“알았다. 알았어. 조금만 더 보고 있으면 기가 막힌 장면들이 펼쳐질 텐데.
아쉽다. 아쉬워.”
궁녀들은 숨을 죽여 가며 요석공주와 원효스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훔쳐보면서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탄성을 지르기도 하였다. 요석궁을 지키던
경비병들까지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런데 갑자기 마른하늘에 번개가 치더니 곧 이어 비가 내리기 시작
하였다.
“허-, 마른하늘에서 비가 내리다니. 이거야 원. 이것도 원효가 부리는 도술인
가? 빌어먹을 놈의 세상. 어떤 놈은 꽃내음 가득한 궁 안에서 천하일색인 공주의
풍만한 육신을 끌어안고 희희낙락하는데 나는 밤새 저 년놈들 잘 놀고 있으라고
보초나 서야 하니 원. 에이 퉤. 퉤. 더럽다. 더러워. 땡중 놈이 공주와 합방을
하다니.”
“그 사람. 눈꼴신 모습 처음 보남.”
“말세야. 말세-.”
“이 사람아. 그러게 자네도 왕후장상의 씨앗으로 태어났으면 이 시각에 경국
지색(傾國之色)을 끌어안고 극락을 오락가락 할 거 아닌가. 우리 같은 놈들은
그저 자라고 하면 자고 먹으라고 하면 먹고 시키는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 것
이여. 괜히 딴맘 먹지 마시게나.”
“에잇. 빌어먹을 세상.”
요석궁을 보초서는 병사 한명이 씩씩거리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래도 저승 보다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 법이여.”
“그런데, 저 빌어먹을 년들은 잠도 안 자빠져 자나. 남 오입질하는 거 처음 보
나. 젠장.”
“저년들은 궁내 사내들과 눈이 맞으면 아무 때나 치마를 훌렁 벗어 던지지.
나도 젊었을 적에는 시녀(侍女) 서너 년을 건드려 봤었지. 나이 먹으니 이젠 그
냥 준다고 하여도 거들떠보기도 싫어. 그저 펑퍼짐하지만 내 마음을 알아주
는마누라가 제일이여. 험-.”
“행님은 좋겠시다. 저년들하고 좋은 경험 많이 해서리.”
“저년들 중에 얼굴 좀 삼삼하고 허리 야들야들해 보이는 년을 눈여겨 봐뒀다
가 은근히 접근해봐. 백 냥 정도만 있으면 저년들 한번 후려 볼 수 있다고.”
“행님, 백 냥이면 두 달 치 녹봉이구먼 유. 저년들 아랫도리가 어째서 그리도
비싼가유?”
두 초병들은 밤이 새도록 이야기꽃을 피워가며 보초를 섰다. 비가 더욱 세차게
내렸다. 축시(丑時)가 될 무렵 원효스님과 요석공주가 들어 있는 내실은 정말로
곤륜산의 요지(瑤池)처럼 변해갔다.
“비가 내리나 봅니다. 하늘이 우리 두 사람의 합방을 축하하나 봅니다. 우리
두 사람은 이미 전생과 현생 그리고 미래세를 경험을 했습니다. 이제 부터는
전혀 다른 세상을 두루 구경을 하십시다. 공주께서 요지(瑤池)를 가고 싶어 하
시니 소승이 인도하겠습니다. 이제부터 소승의 두손을 꼭 잡고 절대로 놓치
마십시오.”
스님은 공주를 마치 악기(樂器) 다루듯 하며 공주를 열락의 세상으로 인도하
고 있었다. 공주를 무릎에 앉히고 접문(接吻)하며 무슨 주문(呪文)을 외고 있는
듯 했다.
“아-, 서방님, 무척 가슴이 설레고 기대가 된답니다. 지금 이 곳은 서라벌 요
석궁이 아니라 곤륜산 자락 요지가 맞는 거죠?”
“그럼요. 벌써 요지 가까이 들어왔습니다. 소승의 이끄는 대로 따라하셔야 합
니다.”
이번에는 원효스님이 뒤에서 공주의 상체를 꼭 끌어안았다. 공주는 숨이 막힐
지경까지 되자 숨을 헐떡거렸다. 그러나 원효스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큰소리로
주문을 외쳤다. 주문은 어느 나라 말인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스, 스님, 숨이 막힐 것 같아요.”
“참아야 합니다. 극락은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니 참아야 합니다. 두 몸이
일심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자-, 준비 되었지요. 이제부터 오색구름으로 만든
운거(雲車)를 타고 전광석화보다 빠른 속도로 곤륜산을 향해 날아가겠습니다.
두 눈을 절대로 뜨시면 안 됩니다.”
“네에. 잘 알겠어요. 어서 빨리 요지에 들어 극락의 맛을 보고 싶어요. 스님,
아니 서방님.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나 봐요. 그리고 그리고 잠이 와요. 정신이
없네요.”
약간 거리를 두고 두 남녀의 율동을 보면 움직이는 것인지 아니면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이진 분간할 수 없었다. 그 같은 상태로 두 사람은 한 식경 쯤 가량
석상(石像)처럼 있었다. 원효스님은 쉬지않고 주문을 외며, 공주에게 최면을 거
는 듯 하였다. 이윽고 공주가 가수면(假睡眠) 상태가 되자 공주를 덥석 안아 침
상으로 올라 비단요 위에 눕혔다. 스님의 명령에 공주는 마치 꼭두각시처럼 움
직였다.
“어머, 어머. 스, 스님이- 어떻게 저런 자세를-.”
“언니, 왜 그래? 스님이 무얼 어쨌는데? 나도 좀 보자.”
“조금만. 조금만 더 보고. 이제부터 두 분이 본격적인 행동에 돌입하나봐. 아아,
요석공주님이 너무 부럽다아-.”
문틈으로 내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훔쳐보고 있는 궁녀들은 침을 삼켰다. 처음
보는 환상적인 행위가 이어질 때마다 궁녀들은 신음을 토해내기도 하였다. 그녀
들은 내실에서 두 사람이 벌이는 요지경 속 같은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바라보
았다. 금방이라도 요석궁은 억수처럼 퍼붓는 빗물에 떠내려 갈 것만 같았다.
우르릉, 꽈쾅-.
시퍼런 불빛을 뿜어내며 하늘이 서라벌을 집어 삼킬 듯 폭우를 쏟아 부었다.
“어머, 어머. 저를 어째. 두 분이 완전히 벌거숭이가 되셨어. 그리고 저런 희한
한 자세를 스님이 어디서 터득하신 걸까.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네.”
“아-. 스님, 이 년도, 이 년도 그리해주셔요.”
어떤 궁녀는 비에 젖은 생쥐모양으로 내실을 훔쳐보며, 몸을 비비 꼬기도 하고
작은 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궁녀들은 비에도 아
랑곳하지 않고 더욱 더 몸이 달아 빨리 자리를 비켜달라고 재촉하였다.
“아-, 스님이, 한 평생 도만 닦는 줄 알았는데 속세를 떠나 있는 스님이 어떻
게 저리 능수능란하게 방사를 치룰 수 있단 말인가?”
“오마나. 정말로 죽여주시네. 내가 이제까지 봐온 수많은 사내들 영물은 영물
축에도 끼지 못할 거야. 저리 우뚝한 영물이니 하늘을 떠바칠 기둥을 깎을 수 있
을 테지. 상구보리 하화중생하느라 눈코 뜰새없을 스님이 언제 방술(房術)을
터득하셨을까. 정말로 기가 막히구나.”
“얘, 너희들은 몰랐니? 고승들은 불법(佛法)뿐만 아니라 황제(黃帝)의 소녀경
(素女經)도 터득한다잖아.”
두 사람의 변화무쌍한 체위에 궁녀들은 자신의 은밀한 부위를 자위하며
탄식소리를 토해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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