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는 또 아비를 낳고
- 여강 최재효
아버님 가라사대, '사람이 출필고(出必告)하고
입필고(入必告)하면 만사(萬事)가 여여할지니
혈육이라도 늦은 밤 소리 없이 드나들면
이미 귀신이니라' 하신 그 말씀 내 여생에 독약이라
당신께서 세상의 자식을 낳으시고
행여, 그 자식이 세상에서 이름값도 못할까
근심 걱정으로 한 오백년 지나셨는데
불초(不肖)는 아비가 되었어도 무명(無名)이라네
봄에는 꽃이 늦도록 피고 지고
여름, 가을에는 꽃이 무시로 피었다가 지니
겨울 흰 꽃이 한 세월 아우르는 걸 구경만했는데
어느날 내가 꽃이었다는 걸 알고 가슴을 치네
뼈가 든든한 아비는 자식을 낳고
아비를 이은 자식은 또 다른 아비를 만들었으나
이 것이 그 것이고, 저 것도 이 것으로 혼돈스러운데
조용히 첫눈 내리니 천지가 텅 비었어라
나의 남은 날에 백화(百花)가 난만할까
서천에 걸린 반월(半月)은 무심히 웃고
정처 없는 낙엽들 눈보라에 사방으로 흩날리는데
안타까워라, 아무도 눈물 흘리지 않네
- 창작일 : 2015.11.25. 23: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