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속에 눕다
- 여강 최재효
해 넘어가면 미혹(迷惑)하여 뒤로 달려가네
글 쓰는 일은 보잘 것 없는 재주라서
이 몸이 단정하지 못하고 부족하여
하룻밤에 혈필(血筆)을 수백 번 들었다 놓는구나
만산은 단풍으로 새색시처럼 치장하고
먼 들녘 무명의 갈꽃들 남몰래 시들어 가는데
어제 오늘이 곧 옛날 같은 요즘에는
이유도 없이 무시로 한루(寒淚)가 흐르네
고인(古人)들 나를 보고 꽃같다 칭찬하더니
이제는 쓸쓸히 환영(幻影)만 남았다네
초당(草塘)을 돌고 또 돌아보는데
물에 비친 이인(異人)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라
뜰 앞에 싱싱하던 초화(草花)는 사라지고
보이는 것은 바싹 마른 바람꽃 부스러기 뿐
남산(南山)은 남의 일인 양 애써 모르쇠하고
석양(夕陽)에는 흰 구름 몇 조각만 무심하네
아침저녁 풍문(風聞)에 어두운 소식만 실려 오고
한나절 낙엽지는 소리만 가득하네
창가에 흔들리는 나무는 춘지(春枝)가 아니라서
어찌 원앙(鴛鴦)이 깃들기를 바랄 수 있을까
타관 땅 나그네 낮부터 취하여 졸고
창공에 기러기 한 쌍 길게 여운(餘韻)을 남기는데
술 깨면 옛일 생각날까 두려워
텅 빈 잔에 불 같은 독주(毒酒)를 따르네
어두운 창밖에 바람소리 거칠어지면
새털 보다 가벼운 이몸 괜히 마음 바빠지고
밤새 지루한 세월의 그림자에 짓눌려
옆 사람에게 아무 말 못하고 뒤척일 테지
- 창작일 : 2015.11.10. 2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