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에 3
- 여강 최재효
천만번 뒤돌아보아도 인정할 수 없어서 한잔
내가 어제의 내가 아니어서 또 한잔
금쪽같던 임의 허언虛言에 몸부림치며 석잔
봄은 분명 봄인데 진정 봄 같지 않아 넉 잔
그때는 하룻밤에 빙인氷人이 무수히 다녀가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도 발병은 없었는데
믿었던 춘월春月의 등을 보고 할 수 없이
내가 나를 어쩌지 못하는 딱한 신세라는 걸 알았지
아, 임이여, 내일도 또 내일도
그대 작은 손으로 맑은 하늘을 가린다면
해맑은 춘지春枝에 백설이 늘 천 길로 쌓여
이승에 남긴 무수한 발자국 역시 여유롭지 못하리
빈 잔은 늘어만 가는 데 북풍은 가시지 않아
초저녁에 사그라진 취기醉氣에 또 취하지만
허공에 널린 붉은 미소는 낯설기만 하여
은빛머리 소년 울먹이며 두 손 모으네
만성질환이 되어버린 노을 같은 상사相思
한 순간 금빛에 눈이 먼 신기루 같은 인연
먼 뒤안길에 뿌려질 마르지 않는 혈루血淚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눈부처
용서를 모르면서 용서를 떠올리는 억지
눈물의 씨앗을 파종한 요부妖婦가 된 옛님
족쇄가 채워진 채 밤마다 전전반측하는 운명
아아, 봄이 오기도 전에 떠나가고 있네
- 창작일 : 2012.3.1. 00:30
[주] 빙인 - 본래 월하빙인(月下氷人)의 약자로 남.녀의
정분을 맺어주어 부부가 되게 하는 신(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