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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봉동(최종회)

* 창작공간/중편 - 가리봉동

by 여강 최재효 2011. 6. 4.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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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리봉동(최종회)


 


                                                                                                                                                                                               -  여강 최재효

 

 

 

 

 “햐-, 드디어 최 과장이 화연씨를 만나는 감동의 순간이 다가오는군. 자네가 그때

무작위로 뽑은 가리봉동 주소는 정말로 존재하는 주소였을 거야. 자네가 무작정 보

낸 편지로 인하여 몇 명의 애꿎은 집안 아가씨들이 큰 곤욕을 치렀는지도 모겠군.

.” 
 박 과장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주점이 떠나가라
웃었다.


 “그런가?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때 20대 전,후반의 딸을 가진 부모들은 자네가 보낸 편지를 보고 자기 딸을

의심하지 않았겠나? 나 같아도 내 딸을 의심했을 거야. 요것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연애질이나 하고 다니는구나 하고 엉뚱한 상상도 했겠지. 아무튼 자네의

엉뚱한 면은 알아줘야 한다고..” 


 “그때 발신인 주소를 정확하게 쓸걸 그랬어. 과연 몇 통의 편지가 나에게 반송이

되나 궁금하기도 했었는데.”
 “최 과장, 발신인 주소를 엉터리로 쓰길 잘했어. 만약 자네가 반송된 편지를 받으

면 더욱 더 괴로웠을 거야.”


 “아마도 자네 말이 맞을 걸세. 자자, 우리 건배하자고. 이제 내 사랑 이야기는 거

다 끝나가고 있어. 20분 정도 분량이 남았다고.”


 “최 과장, 그 이야기를 조금 더 부풀려서 잘 각색해봐. 너무 빨리 끝맺지 말고. 너무

빨리 끝내버리면 아쉬움이 너무 커. 자네가 과연 화연씨를 만나서 무슨 말을 했는지

난 그게 벌써부터 기대가 돼.”

 박 과장의 너털 웃음에 카운터에 앉

아 졸던 주점 여주인이 깜짝 놀라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아침부터 가슴이 콩닥거렸다. 평상심의 상태가 아닌 게 분명했다. 군복을

입은 내가 왜 이렇게 원인도 모르는 채 몸이 붕 뜬 것 같기도 하고 가슴이 울렁거려

어머니가 무슨 심부름을 시켜도 대답만하고 엉뚱한 짓을 하고 있었다. 몽롱한 상태

에서 조상님들께 추석 차례상을 올리고 나자 점심 때가 다되었다. 오랜 전통처럼

해주 최씨네는 세 집을 다니며 조상들에게 예를 올렸다. 할머니께서 3남6녀를 둔

덕분이었다.


 그 중 아버지가 막내라 제일 마지막에 우리 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나면 늘 점심 시

이 다 돼서 끝났다. 차례를 모두 마치면 나는 사촌들과 차량 서너 대로 청마루와

방굴, 모둘기 고개에 산재 해 있는 조상님들 산소를 찾아 성묘를 해야 했다. 나는

음이 급했다. 며칠 전, 기복이와 추석 날 화연네 집을 가기로 했었다.

 

 아침에 차례를 지내고 나서 신산말과 능현리 큰집에서 너무 과식을 해서 배탈이

난 것 같다고 꾀병을 부렸다. 나는 어머니에게만 급한 일로 친구를 만나야 한다

고 말하고 집을 나섰다.


 주막거리에서 기복이를 만나 버스를 타고 읍내로 향했다. 기복이는 이미 술에

취해 혀가 약간 꼬부라진 상태였다. 읍내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화연이 살고

있는 마을로 향했다. 나는 버스를 타고 화연네 집으로 가는 도중에 속으로 수도

없이 기도를 하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은 화연이를 꼭 만나게 해달라고 천

지신명에게 빌고 또 빌었다. 40여분 만에 나와 기복이는 화연네 집이 있는 동네

에 도착하였다.


 “재성아, 내가 왜 아침부터 술에 취했는지 아니?”
 “……”


 “오늘 아침 일찍 차례를 지내고 나서 아버지에게 작은집에 가자고 했지. 그랬

더니 아버지는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작은집이란 소리를 한번만 더 하면 나를

혼내주겠다고 하는 거야. 나는 그런 우리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어. 동생 몫의

재산을 팔아버렸으면 나중에 그 만큼의 재산을 돈이나 땅으로 돌려줘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냐? 어떻게 남도 아닌 친 동생의 재산을 꿀꺽 삼키고 모르쇠로 일

관하는지 난 우리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어.


 정말로 작은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와 피를 나눈 형제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

야. 차례 끝나고 웅골에 있는 할아버지 산소로 성묘 가자고 하는 걸 동생들만 보

내고 나는 내 방에 틀어박혀 술을 마셨지. 2홉들이 소주 네 병을 안주도 없이 마

셨더니 정신이 없다.

 

 이게 다 임마, 너 대문이야. 너하고 추석 날 화연네 집에 가기로 약속만 안 했어

도 나 이리 취하지 않았을 거야. 맨 정신으로 어떻게 화연네 집엘 가니? 작은 엄

만 나를 보면 아는 체도 안 할 텐데.


 그러나 작은 엄마가 우리 아버지하고 아무리 사이가 안 좋다고 하여도 나를 어찌

겠어? 우리 집하고 불구대천원수 지간이 되기 전에는 작은엄마는 나를 무척 귀

여워했지. 우리 아버지 욕심이 두 집안간의 악감정으로 번지고 서로 교류도 없게

만들었지.

 

 난,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작은 아버지 재산을 작은 엄마에게 돌려줄 거야.

우리 아버지는 근동에서 알아주는 알부자 아니니? 그 많은 논과 밭 그리고 임야를

다 어디다 쓸려고 하는지 모르겠어.” 기복이는 나와 화연네 집을 향해 걸어가면서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재성아, 저기가 화연네 집이다.”

 기복이가 가리키는 방향에 아담한 기와집이 한 채 있었다. 파란색 기와 지붕이 무

척 인상적이었다. 나는 화연이가 태어나 자란 집을 보는 순간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마치 이전부터 늘 보아왔집처럼 느껴졌다. 점점 화연네 집

이 가까워 올수록 나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떨렸다.


 “기복아, 나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너만 화연네 집에 들어가. 나는 저기 화

네 집 뒤편에 있는 야트막한 구릉에 있을 테니.”
 “짜식-, 왜? 그렇게 화연이를 죽고 싶도록 보고 싶다고 하더니……”


 “생각해봐라. 내가 사전에 아무 연락도 없이 불쑥 화연이 앞에 나타나면 화연이가

얼마나 놀라겠니? 그러니 네가 들어가서 너희 작은어머니에게 인사 올리고 화연이

살며시 데리고 나와 저 구릉으로 말이야.”


 “넌, 남을 배려하는 신사도를 발휘할 줄 아는 녀석이구나. 그래, 알았다. 네 말대로

내가 들어가서 화연이를 데리고 나오마. 한 삼십 분 정도는 걸릴 거 같은데. 가능하

더 빨리 데리고 나올 수 있도록 해보마.”


 “난, 삼 년을 기다렸어. 그까짓 삼십 분은 아무것도 아니야. 어서 가서 화연이를 데리

고 와. 너무 오래 있지 말고.”
 “알았어. 알았다고. 작은 엄마가 술상을 차려줘도 안 마시고 얼른 화연이를 데리고 나오마.”

 기복이는 비틀거리며 화연네 집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화연네 집 뒤편에 있는

구릉으로 올라갔다.


 ‘화연이가 어떻게 변했을까? 아마 그때 보다 많이 예뻐졌겠지? 그런데 화연이가

내가 왔다고 하면 정말로 나올까? 나를 만나지 않겠다고 하면 어쩌지? 아무튼

기복이 녀석이 말을 잘 해야 할 텐데……”

 기복이가 화연네 집안으로 들어가고 한 시간이 되고 두 시간이 흘러도 나오지 않

았다. 나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 녀석이 삼십 분 있으면 나온다고 하더니 어찌된 일이야. 이 녀석이 화연

어머니가 주는 술을 마시고 잠든 거 아녀?’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화연네 집 가까이 다가가 집안 동태를 살피기도 하였지만

집 안 마당에 아무도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서너 번이나 화연네 집안 가까이 갔다 오도록 기복이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복이를 기다리다 지쳐갈 즈음 기복이 드디어 몸을 휘청거리며 집안에서 나왔다.


 “기복아, 어찌된 거야? 두 시간 삼십 분 만에 나오다니. 금방 나온다고 해놓고?”
 “……”
 “무슨 말 좀 해봐라.”


 “……”
 “아, 답답해. 너는 사람 애간장 녹이는데 재주가 있더라. 화연이는 왜 안 데리고 나

온 거야?”

 나는 사정하며 기복이한테 매달리다 시피했다.


 “재성아, 미안하다. 작은엄마와 이야기 하느라 좀 늦었어. 작은 엄마는 아직도 우리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해. 앞으로 어떻게 우리집안과 작은집 사이의 얽히고 설

악감정들을 정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 생각에는 지금이라도 우리 아버지가 작은

아버지 재산을 돌려주는 길 밖에 없어.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우리 집안과 작은집 사

이는 대화 통로가 단절될 거야.”

 기복이는 혼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기복아, 왜 너 혼자 나온 거야?”
 “우리 아버지를 설득해서 작은아버지 재산을 돌려드리라고 해야겠어. 그 길만이 두

집안이 서로 왕래를 다시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빨리 우리 작은엄마 가슴에

켜켜이 쌓인 한을 녹여줘야 하는데. 우리 아버지는 어째서 그리 욕심이 많은 걸까?

 그까짓 재산이 다 뭔데 여러 사람을 이리 힘들게 한단 말인가? 그까짓 재산이 다 뭔

데……”

 기복이는 내가 묻는 말에 엉뚱한 말만 하며 마치 연극 무대에선 배우처럼 독백을

웅얼거렸다.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이 녀석이 이렇게 넋 나간 사람처

럼 중얼거리지 않을 텐데……’
 “재성아, 미안하다.”


 “……”
 “화연이가 없어. 화연이가 집에 없어.”

 조금 정신이 든 듯 기복이 굳은 얼굴로 나를

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자세하게 말해봐.”


 “화연이가, 화연이가 내일 온대고 연락이 왔대. 화연이 언니는 어제 추석명절 쇠러 왔

는데 화연이는 내일 가족하고 온다고 했대.”
 ‘가족? 가족이라니? 화연네 친척들하고 내일 온다는 말인가?’


 “기복아, 가족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나도 몰라. 화연이 언니가 그렇게 말했어. 화연이가 내일 가족하고 온다고.”


 “그럼, 우리 내일 다시 오자. 기복아, 부탁한다.”
 “너, 화연이가 그렇게 좋니?”

 기복이는 담배 연기를 도넛처럼 동그랗게 만들어 허공에 뿜어댔다.


 “너, 내 마음을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나는 10년이 흐르고 100년이 흘러도

화연이를 기다릴 거야. 하루만 더 기다리면 화연이를 만날 수 있다는데 내가 어찌

하루를 못 기다리겠니?”


 “그래, 너 참으로 장하다. 나 같으면 벌써 그런 계집애를 잊어버렸겠다. 너처럼 키

도 크고 훤칠하고 서울서 대학교에 다니는 사람에게 화연이는 아닌 거 같아서 그래.

네가 군대 제대하고 대학교에 복학하면 발에 채이는 게 여자일 텐데. 그까짓 별 볼일

없는 고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한 촌년 하나 때문에 속을 태울 까닭이 없잖아. 내가

보면 너도 참 답답한 남자다.”

 기복이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기복아, 별 볼일 없다니? 화연이는 나의 전부야.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가슴

깊은 곳에 화연이가 자리하고 있어. 그러니 화연이를 그렇게 하찮은 여자로 폄하하

지마. 그런 말 또 하면 나 정말로 화낸다.”


 “알았다 알았어. 다시는 그런 말 안 할게. 너 정말 무섭다 무서워.”

 “기복아, 화연이와 너는 사촌간이잖아. 화연이을 예쁘게 봐줘라.”


 “허-, 나와 너는 이십 년 지기(知己)야. 너 예전에는 안 그랬어. 그런데 화연이를

나면서부터 너의 예전 모습은 온데 간데 없어졌어. 제발 정신 좀 차려라. 동네에

서 너에게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 잘 알잖니.”

 

 나와 기복이는 동네 어귀에 있는 구멍가게 들러 소주와 오징어 포를 사가지고 다

시 화연네 집 뒤 야트막한 구릉 올라갔다. 나는 소주잔을 비우면서 화연네 집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다음날, 늦은 오후 나는 기복이와 다시 화연네 집이 있는 마을을 찾았다. 오늘은

정말로 화연이를 만날 수 있다는 확신에 가슴이 떨렸다. 어제 들렀던 동네 어귀 구

가게에 들러 나는 소주 두 병과 오징어 포를 샀다. 화연네 집 앞 마당에 어제 보

못한 승용차 한대가 서있었다.

 

 멀리서 보아도 차량 번호판이 서울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승용차가

화연이가 타고 온 차라는 것을 확신했다. 기복이 화연네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화연네 집 뒤 구릉으로 올라갔다.


 ‘화연이를 만나면 뭐라고 첫마디를 하지? 잘 있었니? 아니야 그 말은 좀 평범해.

화연아, 나, 너를 잊지 않고 있었어. 나의 사랑은 변함없어. 이 말은 신파극 대사

같고……’

 는 두 묘지 사이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기복이가 어서 화연이를 데리고 나

오기만을 학수고대 하였다.

 

 기복이가 집안으로 들어가고 30여분 정도 흘렀다. 나는 소주 한 병을 모두 마셔버

리고 초초한 상태에서 두 묘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서성거렸다. 그때 였다. 기복

이가 얼굴이 하얗게 되어 헐레벌떡거리며 나에게로 뛰어 왔다.


 “왜 혼자 왔어?”

 나의 물음에 기복이는 가슴을 치며 한 숨만 푹푹 내쉬었다.


 “화연이가 오긴 왔어. 난 화장실 간다고 잠시 나왔어.”

 기복이 숨을 고르면서 간신히 말앴다.


 “화연이가 오긴 왔는데? 오긴 왔는데 뭐가 어찌되었다는 거야?”

 “……”
 “기복아, 어서 말 좀 해봐. 화연이가 오긴 왔는데?”

나는 기복이에게 자세히 말하라고 재촉하였다.


 “재성아, 내가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 화연이 데리고 나올 게, 그런데 한 가지 조건

있어. 화연이를 대문 앞에 까지 밖에 못 데리고 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나 간다.”

 기복이는 내가 소주 한 병을 나발 불 듯 마셔버리고 화연네 집을 향해

뛰어갔다.


 ‘대문 앞에 까지만 데리고 나온다니? 도통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네. 그렇다면 화

이를 만나기 위하여 내가 화연네 집 대문 앞까지 내려갈까? 아니지 화연이가 집

밖으로 나오면 소리쳐 불러야지. 그게 좋겠어.’

 기복이가 집안으로 들어가고 5분 후쯤 정말로 화연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3년 만

에 보는 화연이었다.

 

 3년 전 학생티는 찾아 볼 수 없고 원숙한 숙녀가 되어 있었다. 머리를 길러 어깨

까지흘러내리는데 약간은 낯설어 보였다. 나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

하고 빈잔만 들었다 놨다 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화연이는 어린 아이를 안고 있

었다. 나는 그 아이가 친척들 아이나 혹은 화연네 집에 명절이라 인사차 온 다른 사

람의 아이 일거라고 생각하였다.


 ‘화연아, 화연아-.’

 나는 가슴 속으로부터 올라오는 소리를 질러댔으나 화연이는 듣지 못한 듯 기복이

와 무슨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갑자기 목이 메이고 콧등이 시큰거리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화연이를 불러보았으나 목이

메여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기복이는 나를 의식해서인지 화연이에게 나있는 쪽으로 얼굴을 향하도록 유도하

였다. 나는 다시 화연이를 불러보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화연이

는 집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기복이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나를 향해 걸

어왔다.


 “너 똑똑히 봤니?”
 “응, 봤어. 나, 화연네 집에 갈 거야. 화연이 어머니에게 정식으로 인사하고 화연

이를 만나 볼 거야. 기복아 네가 앞장 좀 서라. 나하고 화연네 집에 가자.”

 내가 일어나 화연네 집을 향하려고 하자 기복이 깜작 놀라며 내 손을 잡았다.


 “안 돼, 안 돼, 임마.”
 “왜 안 된다는 거야?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라고. 눈 앞에서 화연이가 집에 온 것

을 확인했는데 내가 화연이를 못 만날 까닭이 없잖아.”


 “안돼, 우리 집에 가자. 나 취한다. 재성아, 부탁이야. 우리 빨리 집에 가자.”

 “싫어. 화연이가 집에 내려온 것을 확인하였는데 그냥 가자니? 그게 말이 되니?

나, 화연이 만나기 전에는 오늘 집에 안 간다. 가고 싶으면 너나 가.”


 “재성아, 글쎄 그냥 가자니까.”

 내가 화연네 집을 향해 가려고 하자 기복이는 필

사적으로 내 팔을 잡았다.


 “재성아, 다 말할게. 앉아봐. 다 말해준다고.”

 나는 마지못해 묘지 앞에 앉았다. 기복이가 마시다 남은 소주를 컵에 따라 나에게

내밀었다.


 “너, 조금 전에 화연이가 안고 있던 아이 봤지?”
 “그 아이는 화연이 조카나 친척 아이들이겠지. 그 아이가 뭐 어때서?”


 “그 아이, 그 아이는 화연이가 낳은 아이야. 집안에 그 아이 아빠도 와 있어.”

 “뭐? 너 지금 뭐라고 했니? 화연이가 낳은 아이라고? 너 지금 나하고 농담하니?

화연이가 어떻게 아이를 낳아? 결혼도 안 했는데?”


 “재성아, 너 지금부터 마음 단단히 먹고 내 말 잘 들어야 해.”

 “허-, 무슨 말을 하려는데 그래?”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이건 화연이와 네 인생이 걸린 문제야. 그리고

절대로 경거망동하면 안돼. 약속할 수 있지?” 기복이는 마른 침을 넘기는 듯 꼴깍

거리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화연이는 아버지를 졸지에 잃자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가리봉동에 방을 얻어놓

고 회사에 다니고 있는 언니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화연이 역시 언니가 다니는 회

사에 취직을 하였다. 화연이 하는 일은 경리부에서 사원들 급여를 취급하는 업무였

다. 고향, 친구, 대학을 모두 잊고 오로지 회사 일에 전념하며 자신에게 찾아온 불

행한 기억을 지우고 싶어했다. 그 기억에는 재성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경리부에 미스터 윤이라는 총각 사원이 있었는데 화연이 입사하는 날부터 화연

이를 눈 여겨 보며 상당한 호기심을 보였다. 미스터 윤은 일부러 일을 만들어 화연

과 야간업무를 자주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미스터 윤은 화연의 일거수일투족

에 세심한 배려를 하며 화연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정성을 다했다. 잦은 야간업무,

남자의 세심한 배려, 관심, 청춘 남녀, 외로움, 술…… 화연은 미스터 윤의 호의에

차차 굳게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은 회사동료에서 연인으로 발전하였고 화연은 재성의 존재를 까맣게 잊

었다. 화연은 일부러 재성을 잊기 위하여 미스터 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화연이

언니도 미스터 윤이 싫지 않았다. 연인 사이가 되면 심신(心身)의 접촉은 자연스러

운 것이라 화연은 원치도 않은 임신을 하게 되었다. 미스터 윤의 집안에서는 장남

인 아들이 자식을 만들었으니 화연이와의 결혼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두 사람

은 가족들만 초대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아니야. 아니야. 너, 너 지금 나를 놀리려고 하는 말이야. 아니야. 화연이그럴

여자가 아니란 말이야. 내가 화연이 만나서 직접 확인해봐야겠어.”

 재성이 기복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재성이 일어나려 하자

기복이는 재성의 다리를 잡았다.


  “재성아, 이성을 잃으면 안돼. 네가 정말로 화연이를 사랑한다면 이런 행동하면

안돼. 내 말은 모두 사실이야. 이제 화연이를 놔줘.”
 “아니야. 이건 네가 화연이와 짜고 나를 놀려주려고 하는 말

이야.”

 재성은 눈물 콧물에 범벅이 되어 서럽게 울었다.


 “미안하다. 나도 화연이가 결혼한 줄 까맣게 몰랐어. 계집애, 나한테는 말해줬어

야지.”

기복이는 빈 소주병을 집어 멀리 던지고 담배 한 개비를 빼물었다.


 “자, 피워. 마음을 진정시키는데 담배가 최고야. 그리고 이제 화연이를 놔줘.

내가 아까 화연이에게 슬쩍 네 이야기를 하였더니 화연이도 눈물을 보이며 훌쩍

거리더라. 너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전해달래.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꼭 너에게

전해달라고 하더라.”

기복은 가급적 재성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말하였다. 자칫 재성이 격해

심정으로 화연이를 찾아간다면 곤란한 일이 벌어질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믿을 수 없어. 난, 난 정말로 믿을 수 없어. 어떻게 이런 일이 있단 말이야. 지금

나는 악몽을 꾸고 있는 거야. 화연이가 정말로 결혼을 하였더라나는, 나는 화연

이를 잊을 수 없어. 죽는 그날까지 나는 화연이에 대한 내 사랑을 지울 수 없어.”

재성은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계속 흐느꼈다. 


 “휴우-, 최 과장, 자네 지금 울고 있나? 사람, 옛날 일을 가지고 새삼스럽게 왜 그

러나? 나도 눈물이 나오네. 내 지금까지 남의 이야기 듣고 눈물 흘리기는 처음일세.

그때 자네가 화연씨를 찾아가지 않기를 참 잘했네. 찾아갔더라면 정말로 화연씨 인

생이 곤란하게 되었을 거야.

 

 자, 나머지 잔을 비우고 우리 일어나세. 새벽 3시가 다되었네. 오늘 정말 고마

우이. 이야기 하느라 고생했네. 장장 일곱 시간 동안 말이야. 이젠 허리도 아프고

술도 적당히 취했어. 집에 들어가면 마누라가 다그칠 텐데. 뭐라고 핑계를 대지?


 “박 과장 고마워. 내 지나간 사랑이야기를 들어주느라 고생했어.”
 “최 과장, 자네 사랑은 끝난 게 아니야. 지금 이 순간에도 자네와 화연씨는 사랑

을 이어가고 있는 거야. 몸이 아닌 마음속 사랑을 이어가고 있는 거라고. 사람은

사랑했던 사람을 쉽게 잊지 못해. 특히 여자들은 이승을 떠날 때까지 사랑했던 남

자를 절대 잊지 못하는 법이야.

 

 그녀는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나 눈이 내리면 분명 자네 생각을 하고 있을 거

야. 혹시 모르니 기복이란 친구에게 화연씨 소식을 물어보시게, 혹시 알아? 그녀

가 자네를 몹시 그리워하고 있는지.”

박 과장은 마지막 남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니야, 화연이는 잘 살고 있을 거야. 자네 말처럼 화연이와 나는 지금 이 순간

에도 사랑의 역사를 쓰고 있는지 모르지. 나, 참으로 바보 같지? 옛 사랑이야기 하

면서 자네에게 눈물을 다 보였으니.”


 “허-, 그 사람, 오히려 눈물 없는 사람은 인간으로서 자격을 상실한 거야.”
 “그리 말해주니 고마우이.”


 “그만큼 자네 마음이 순수해서 그런 거야. 난 자네의 그 착한 심성을 잘 알아. 언

젠가는 자네가 화연씨를 만나서 옛 추억을 이야기 하며 미소 지을 날이 꼭 올 거

야. 기대해 보라고. 사람은 무엇을 갈구하면 그 소원이 꼭 이루어지게 되어있어.

천지신명님이 자네를 굽어보며 화연씨와의 만남을 주선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요즘도 자네 가끔 가리봉동에 가지? 자네 추억 속에 가리봉동은 자네 사랑의 징

표일 거야. 그리고 자네 머리에 있는 그 상처는 화연씨와 자네의 뜨거웠던 사랑의

이정표라고 할 수 있지. 가리봉동, 가리봉동, 나도 시간나면 가리봉동에 한번 가봐

야겠어. 그래야 자네 이야기가 더 실감나게 느낄 수 있을테니까.

 두 남자가 주점에서 막 나가려고 하자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

다.

 

 

 

 

 

                                                                                                                                                      - 끝 -

 

 

 

 

 

 

 

 

 

 

 

 

 

                  _()_  긴 이야기 감상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곧 다른 이야기로 임을 찾아 뵐게요. 항상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마다 형통하소서.

 

                                                     2011.6.4. 오후

                                                 인천 소래포구에서  여강 최재효 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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