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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망초(6)

* 창작공간/단편 - 물망초

by 여강 최재효 2011. 2. 17.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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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망초(6)

 

 

                                                                                                                                                                                  - 여강 최재효

 

 

 

 

                                              6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부인께서 급격히 체온이 떨어지고 맥박

도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삼일을 넘기기 힘들 듯 합니다.

상태가 위중해 혹시 부작용이 있을까 싶어 진통제 투여 양을 약간 줄였습니다.

계속해서 간호사들이 시시각각 변하는 부인의 상태를 체크하고 있습니다.”

 주희의 주치의는 영인과 지연을 별도로 불러 주희의 상태를 알렸다.


 “안 돼요 선생님. 우리 엄마를 저렇게 가시게 할 수 없어요. 우리 엄마를 살려주

세요. 현대의학이 눈부시게 발전하였다고 하는데 우리 엄마를 못 살려낸다는 건

말이 안 돼요. 선생님, 우리, 우리엄마를 살려주세요. 네에 선생님. 제발요.

” 지연은 의사에게 매달렸다.


 “아가씨, 미안해요. 어머니 양쪽 폐가 딱딱하게 굳어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입니다. 현재의 의술로는 한계가 있어요. 죄송합니다.”
 “선생님, 만일 아내가 의식을 잃거나 혼수상태가 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영인이 벌써 부터 아내 주희의 상태가 걱정스러운 듯 의사에게 물었다.


 “아빠......”
 “선생님, 저희들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죠?”

 영인은 마음이 조급해지자 재차

의사에게 물었다. 영인은 숨이 차고 가슴 속에 물이 가득 찬 느낌이었다.


 “의식을 잃었다는 것은 가사(假死) 상태에 돌입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리되면 호

스피스병동으로 옮기게 됩니다. 호스피스 병동은 환자들이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안

식을 취할 수 있는 시설입니다.”


 지연은 언젠가 친구의 아버지가 암으로 세상을 뜰 때 마지막을 호스피스 병동에서 보내다가 숨을 거둔 것을 본적이 있었다. 영인과 지연은 의사면담을 끝내고 주희의

병실로 가기 전에 잠시 휴게소에 들렸다. 지연이 주희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아버지

에게 할 말이 있는 듯 했다.


 “너, 아빠에게 할 말이 있는가보구나?”
 “아빠, 엄마가 저렇게 돌아가시게 할 수 없어요. 아빠, 엄마가 평안함을 갖도록

해주세요. 부탁이에요. 엄마가 어떠한 요구를 하시더라도 꼭 들어주세요. 아빠,

엄막 너무 불쌍해요.”

 지연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아빠가 어떻게 하면 엄마가 평안을 얻을 수 있겠니?”


 “아빠,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말씀도 하시면서 이 순간부터는 엄마 곁에서 떨어지

지 마세요. 저도 엄마 곁에 있을게요. 엄마가 어떠한 말씀을 하시던 아빠가 긍정적

으로 생각하시고 다 들어 주세요. 부탁드려요 아빠.”

 지연은 어제 주희가 유언처럼 한 말에 대하여 영인에게 물어보고 싶었으나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네 엄마가 아빠 때문에 마음고생을 참 많이 하였단다. 아빠가 결혼할 당시에 너

희 엄마는 천사였지. 하얀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장으로 들어서는 네 엄마의 아름다

운 모습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거야. 잠시 아빠의 불찰로 집안이 잠시 시끄럽게

했었지. 그점에 대하여 아빠는 엄마에게 늘 미안해 하고 있어. 참으로 세월이는

빠르구나. 네가 아장아장 걸을 때가 그게 엊그제 같은데 네가 벌써 대학생이 되었

구나. 참으로 세월이 무섭게 흐르는구나.”

 영인은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면서 옛일을 회상하고 있었다.


 “아빠.”
 “응? 아빠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 있으면 해보거라. 아무 이야기도 상관없어.”

 영인

은 머뭇거리는 딸에게 부드라운 미소로 지연을 안심시켰다.


 “이건 만약에 말인데요. 엄마가 돌아가시게 되면 아빠는 어떻게 하실 건데요?”
 “어떻게 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니?”


 “아빠가 아직 40대 중반이시니......”

 지연은 말끝을 흐렸다.
 “......”

 영인은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 생각하는 듯 했다. 딸이 벌써 자신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퍽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언젠가 재혼을 할 자신에게

불안을 느끼고 있음을 알자 우울해졌다. 영인이 입을 다물고 있자 지연이 다시 영

인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뜻을 전하려 하였다. 

 
 “아빠, 전 그냥 아빠가 정신적 육체적으로 한창 왕성한 연세라서요. 엄마가 아직

살아 계신데 이런 이야기 한다는 게 큰 불효라는 거 알아요. 하지만......”

 지연은

차마 영인의 과거 전력을 입에 담지 못하고 말을 빙빙 돌렸다.


 “지연아, 아빠는 너희 자매를 시집갈 때까지 책임진다. 엄마 돌아가시고 아빠가

금방 다른 여자를 맞이할까봐 걱정되나 보구나.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지혜는 대학

에 들어가야 하고 너는 아직 학업을 마치려면 2년은 더 있어야 하잖니? 졸업하고

장을 가지던지 아니면 결혼을 해야할텐데. 아빠는 여자한테 눈이 먼 남자가 아

니란다.”


 영인은 딸에게 주희 사후(死後)에 대한 입장을 피력하였다. 지연은 다행

히 영인이 묻고 싶은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하자 마음 한편이 홀가분하였지만 주희

의 재산지분 이전 문제에 대해서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빠, 고마워요. 저 하고 지혜는 만약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면 아빠를 의지하며

살게요. 그러니 아빠는 저희 자매를 믿으세요. 저희도 아빠를 믿을게요.”


 영인은 담배 한가치를 태우고 딸과 함께 주희의 병실을 찾았다. 병실에는 이미

기훈이 와

서 주희 곁에 앉아 잠든 주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어찌된 일이기에 아가씨가 전화를 받지 않을까?”

 혜목스님은 수십 차례 지연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지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

연이 집에서 나오면서 그만 휴대전화를 두고 나왔다. 지연이 전화를 받지 않자 답

답해진 혜목스님은 양 쪽 눈이 퉁퉁 부어 종무소 보살에게 달려와 물었다.


 “보살님, 이 편지를 전해준 아가씨 전화번호로 아무리 전화를 해보아도 받지를

않습니다. 이 번호가 맞아요?”


 “네에, 그 전화번호는 그 아가씨가 직접 적어준 거예요. 본인이 전화번호를 잘못

적어줄 리가 없을 텐데…….”


 “혹시, 이 편지를 전해주면서 그 아가씨 어머니가 어느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이야

기는 듣지 못했어요?”


 “그 아가씨 어머니가 지금 죽어가고 있다면서 서울 H병원인가 J병원인가에 입원해

있다는 말을 얼핏 들은 거 같아요. 아마 H병원이 맞을 거예요. 이상하네. 그 아가씨

스님을 애타게 찾으면서 왜 전화를 안 받을까?”


 “H병원이면 K그룹에서 운영하는 그 유명한 H병원을 말하나요?”
 “아마 그럴거에요. 저는 그 이상은 모르겠어요.”

 여인은 눈동자가 빨갛게 충혈된

혜목스님을 보고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기사님, H병원으로 가주세요.”

 혜목스님이 택시를 잡아타고 H병원으로 향했다.


밀짚모자를 쓰고 바랑을 등에 짊어진 혜목스님은 무엇에 쫓기듯 반쯤 넋이 나간 상

태였다. 택시 기사는 백밀러로 어떤 여인의 이름을 부르며 중얼거리는 혜목스님을

이상한 눈초리로 살폈다.


 "아, 주희야, 주희야, 기다려 다오. 혜목이, 아니 이천호가 너를 찾아가고 있단다.

조금만 기다려 다오. 내 속세와 인연을 끊고 20여년을 수도를 하였지만 너의 편지를

보는 순간 나는 파계를 하였다고 말하고 싶다. 오오, 부처님, 주희에게 자비를 베푸]

소서.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혜목 스님은 알사탕 같은 염주 알을 굴리며 조용히 염불을 하였다.


 “죄송합니다만, 우리 병원에는 그런 환자분이 없는데요. 잘못 아시고 계신 듯 하네

요. 다시 한 번 이름과 생년월일을 정확하게 알아보세요.”

 병원 여직원은 혜목스님에게 여러차례 이야기 했지만 혜목 스님은 믿을 수 없다

며 다시 한번 찾아봐 달라고 하였다. 


 “아닙니다. 이름은 정확합니다. 생년월일은 잘 모르지만요. 나무관세음보살.”
 “스님, 죄송해요. 아무리 조회해 봐도 그런 분은 안 계세요.”
 “허허, 이상하구나. 내가 여우에 홀린 기분이로다.”

 혜목스님이 공중전화로 지연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역시 받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서울에 여기 말고 H병원이 또 있나요?”

 혜목스님이 병원 안내직원에게 물었다.


 “스님, 서울에는 H병원만 해도 열 군데가 넘어요. 그 중에 큰 병원만 해도 서너 개

는 됩니다.”

 낙심한 혜목 스님은 안내 직원의 도움으로 H자가 이니셜로 들어가는 큰원 다섯

곳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입수하였다.


 “아,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럴 줄 알았다면 내 진작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는

건데.”

 혜목스님은 하루 종일 H자가 이니셜로 된 병원들을 찾아 다녔다. 


 “스님, 죄송합니다. 우리 병원에는 그런 환자가 없어요.”
 “나무관세음보살. 다시 한 번만 확인해 주세요. 부탁입니다.”

 혜목 스님의 부탁에 원무과 직원은 몇 번을 입원환자 명단을 확인하였지만 주희

의 이름은 없었다.


 “스님, 없어요. 우리 병원에는 그런 분이 없어요. 잘못 아시고 오신 거 같네요. 죄

송합니다.”


 “아아,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지 않은

탓이로다. 주희야, 어디 있는 거야. 도대체 서울 어디에 있기에 이리 속을 태우는 거

야? 흑-.”

 혜목스님은 주희를 찾다가 지처 길가에 주저앉았다. 그만 눈물이 떨어지

며 가사를 적셨다.


 지연이 저녁에 집에 잠시 들려 옷을 갈아입으면서 서울시내 여러 곳에서 걸려온 전

화번호를 확인하고 발신지에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혜목스님이 휴전

전화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벌써 지연과 연락이 닿았겠지만 지연의 휴대전화에 찍힌

발신지는 모두 서울 각지에 흩어져 있는 공중전화였다. 지연은 지연대로 하필이면

중요한 때 휴대전화를 집에 두고 간 것에 대하여 크게 후회하였다.


 ‘아아, 분명히 혜목스님이 나에게 전화를 수십 번도 더 걸은 게 분명해. 내가 바보

같이 이런 실수를 하다니. 하필이면 이때. 그렇다면 혜목스님에게 엄마의 편지가 전

해진 게 틀림없어. 그러나 편지를 전할 때 내 휴대전화 번호만 알려주었으니 참으로

나는 바보야. 기훈씨 휴대전화 번호도 함께 알려 줬어야 하는 건데. 이런 실수를 하다

니.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빨리 엄마한테 가봐야 해. 스님이 또 전화를 걸어

오실지 모르지.’

 지연은 옷을 갈아입자마자 택시를 탔고 주희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달렸다.


 “얘, 너 어디 갔던 거야? 엄마가 방금 전 너를 찾던데?”

 병원에 막 들어섰을 때 지연이 영인과 마주쳤다.


 “아빠, 집에 옷 갈아입으러 갔다 왔어요. 엄마가 많이 아파요?”
 “얼른 가보거라. 엄마가 무슨 할 말이 있는 모양이야.”

 지연이 주희의 병실에 들어섰을 때 주희는 비스듬히 앉아서 거울을 보고 있었다.


 “얘, 너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엄마가 우리 딸 보고 싶어서 얼마나 기다렸다고? 너

기훈이 만나고 오는 거야?”

 주희는 오랜만에 환하게 웃으며 딸에게 농담도 걸었다.


 “엄마, 그냥 누워있지 않고?"

 " 아냐. 오늘밤은 하늘이 너무 맑아 달도 밝고 별들도 오랜만에 볼 수 있어 좋구나.

무슨 좋은 일이 있을 거 같아.”

 주희는 소녀가 되어 있었다.


 ‘혹시, 오늘밤에라도 혜목스님과 연락이 닿으면 좋으련만.’ 지연은 주희가 혜목스

님의 소식을 묻고 싶으면서도 억지로 참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엄마, 내가 엄마 화장해줄게.”
 “아이 얘두. 환자가 무슨 화장이야. 화장이.”


 “혹시 모르잖아 엄마 첫사랑이 오늘밤에 찾아올지.”

 “어머? 우리 딸이 엄마를 다 놀리는구나.”

 주희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지연이 주희의 머리를 곱게 빗기고 곱게 화장을 해

주었다. 머리를 빗는 중간에도 주희는 주기적으로 전해지는 통증으로 몸을 움찔거

렸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오늘밤 분명히 혜목스님이 엄마를 찾아오실 거야. 스님이 오

실 걸 대비해서 엄마를 곱게 단장해드려야지. 그런데 벌써 밤 9시가 다되어 가는데

전화가 왜 없을까? 낮에 내 휴대전화로 걸려온 전화들은 모두 잘못 걸려온 걸까?

아니야, 분명히 혜목스님이 걸어온 게 틀림없을 거야.’


 “얘, 너 뭘 그리 골똘하게 생각하니?”
 “응? 아, 아무것도 아니야 엄마.”


 “너, 기훈이 하고 싸웠니?”
 “아니. 내가 왜 기훈씨랑 싸워? 오늘 낮에도 엄마한테 다녀갔잖아. 기훈씬 나를

예뻐해 주고 있어."

 지연이 씩 웃으며 주희를 안심시켰다.


 "너희들 선을 넘은 건 아니지?“

 주희가 대학생 시절 이천호와 한창 연애하던 장면들을 그려보았다.


 “어머? 엄마는 별 상상을 다하우. 내가 그리 불량한 딸인 줄 알면 큰 오산이우.”
 “아냐, 그냥 해본 소리야. 우리 딸이 얼마나 앙팡진데.”


 “자아, 엄마, 거울 좀 봐. 립스틱을 연한 핑크색으로 칠했어. 볼연지도 약간 밝

으면서 은은한 복숭아색으로 하였고 아이샤도우도 그리 어둡지 않게 했어.”

 지연이 거울을 들어 주희에게 내밀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던 주희는 갑자기 눈물

이 핑 돌면서 목이 멨다.


 ‘아아, 어찌하다가 내 모습이 이렇게 변했을꼬. 예전에 달덩이 같던 내 얼굴은 어디

가고 뼈만 앙상한 마귀할멈 얼굴이라니.’

 주희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속으로 흐느꼈다.


 “엄마, 어때?”

 “응? 마, 마음에 들어. 그럼, 누가해준 화장인데.”
 “엄마, 나 좀 봐봐.”

 지연이 어쩌면 이승에서의 마지막이 될 화장을 주희에게 해주고 디지털 카메라를

꺼냈다.


 “얘, 창피하게 무슨 사진이야?”

 주희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려고 하자 지연이 간신히 주희를 달래 사진을

여러 장 찍을 수 있었다. 지연이 주희의 사진을 찍고 났을 때 지연이 휴대폰이 울

렸다.


 “앗, 전화다. 혜목스님일거야.”
 ‘천호씨가?’ 주희는 마른침을 삼켰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여보세요? 혹시 혜목스님 아니신가요?”


 “맞습니다. 빈도(貧道)는 혜목이라고 합니다. 지금 전화 받으신 분은 뉘신지요?”

 순간 지연은 주희를 보면서 눈을 깜빡이며 신호를 보냈다.


 “스님, 저희 엄마 아시지요? 저희 엄마 편지 받으셨지요?”

 지연은 그만 목이 메어 울먹이면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여보세요? 그럼 주희씨 따님이신가요?”


 “네에-, 제가 큰 딸, 지연이라고 합니다. 스님을 찾아 경상도에서 강원도 설악산

그리고 북한산과 서울 시내 모든 사찰을 뒤지고 다닌 사람입니다. 엄마가 지금 병원

계세요. 스님, 지금 어디세요? 제가 모시러 가겠습니다.”

 지연은 뛰는 가슴을 억

하지 못하고 흥분하였다.


 “아닙니다. 지금 주희씨가 있는 병원으로 가겠습니다. 거기 위치를 알려 주세요.”
 “스님, 여긴 00동에 있는 J 병원입니다.”


 “아, 그럼 여기가 영등포니까 택시를 타면 30분 내로 도착할 수 있을겁니다. 지금

녁 9시인데 면회가 가능하지요?”
 “원래 9시까지인데 9시 넘어도 상관없어요. 스님, 지금 오실 거죠?”


 “네에.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엄마, 내가 스님과 통화하는 거 들었지? 혜목스님이셔. 혜목 스님이 이리로 오신

대. 어쩐지 엄마가 거울을 보고 있을 때 무슨 좋은 일이 있을 거 같은 예감이 들었어.

그런데 엄마, 아빠가 곧 오실 텐데. 아빠한테는 뭐라고 말씀드리지? 스님이 병실 안

으로 들어오시면 아빠가 무척 놀라실텐데.”


 “아빠한테는 엄마가 말할 게. 아빠도 그 사람에 대하여 대충은 알고 있어. 엄마가 

그 사람하고 결혼 할 뻔 한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뭐라고 안 할 거야.”


 모녀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영인이 병실로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극한 상황을

아 어찌될지 모르는 아내가 곱게 화장한 모습을 보자 영인은 의아한 시선으로

희를 쳐다보았다.


 “지연아빠, 나 어때요?”
 “......”
 “아빠, 엄마 예쁘죠? 엄마 오랜만에 화장한 건대.”


 “그, 그래. 엄마는 원래 예뻤잖니.”

영인이 무표정한 얼굴로 마지못해 딸의 물음에 대답하였다.


 “엄마, 나 잠깐 밖에 나갔다 올게.”

지연이 밖으로 나가자 잠시 긴장감이 병실

안을 휘감았다.


 “지연아빠, 나 부탁 한 가지만 들어줘요. 어쩌면 이승에서 내가 당신한테 하는

마지막 부탁이에요.”

주희가 앙상한 팔을 들자 진통제가  들어있는 링거병이 흔들거렸다. 주희가 거친

숨을 토했다.

 
 “부, 부탁이라니?”

 순간 영인의 양미간이 좁혀지면서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당신, 이천호라고 아시지요?”
 “이천호? 그 사람이 누군데?”


 “당신 만나기전에 나와 결혼하려고 했던 사람.”

 영인은 이천호라는 이름을 어렴풋하게 기억해냈다.


 영인의 부친과 주희의 아버지는 죽마고우로 일찍부터 서로 사돈이 될 것을 약속했

었다. 두 사람이 서울에 올라와 자수성가하여 비슷하게 부를 축적한 상태에서 자녀

들이 부부가 될 경우 자신들의 미래도 보장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주희가

예상 밖에 가난한 집안의 자식과 결혼을 하겠다고 하자 주희의 아버지는 주희와 이

천호를 강제로 떼어 놓고 영인과 결혼 시켰다.

 

 영인은 뒤늦게 아내가 이미 다른 남자의연인(戀人)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주희와 백

년가약 맺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아버지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주희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결혼한 이후에도 영인은 아내의 첫 남자를 생각하면 화가

치밀었다. 영인이 신앙생활에 열성을 보이면서 어느 정도 마음의 평화를 얻는 듯 하

였으나 가슴 한 구석에는 늘 아내의 첫 남자에 대한 증오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올인(All In)하지 못하는 아내를 볼 때마다 영인은 신앙에 더욱 몰입하는

듯 하였다. 영인은  어느 때 부터인지 모르지만 술과 다른 여인에게 관심을 가지면

서 주희와 영인은 갈등을 겪기 시작하였다. 영인은 자신이 룸살롱 마담과 바람을

피우다 장인과 아내에게 현장에서 경찰에 검거된 사건도 아내 주희에게 그 원인이

있다고 자신에게 변명하고 있었다. 주희가 늘 가슴속에 이천호라는 남자를 담고 있

었기 때문에 자신은 아내의 마음을 얻을 수 없었고 늘 외로웠다고 자기변명에 급급

해 했다.


 ‘이 사람이 다 죽어가는 판에 갑자기 그 남자를 왜 들먹이는 거야?’
 “갑자기 그 사람은 왜?”


 “그 사람이 불제자가 되었는데 지금 내 소식을 듣고 이리 오고 있어요.”
 “그 사람이 당신이 병원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으며, 왜 이리 온다는 거야?

그것도 스님이 말이야. 그리고 당신 마지막 부탁이라는 게 뭔데?”

 영인은 불쾌한 심사를 억지로 감추고 있었다.


 “지연 아빠, 나 당신한테 인간적으로 부탁하는 거 에요. 다른 건 알려고 하지 마

세요.”
 “글쎄, 그 부탁이라는 게 뭔데?”


 “나, 나 말이에요. 그 사람과 하루 정도 같이 있도록 해주세요.”
 “뭐? 하루?”

 영인은 순간 뼈만 앙상하게 남아 바람이 불면 금방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아내가

불제자가 된 이천호가 성관계를 맺는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당신, 그렇게 해줄 수 있지요?”
 “이 병실에서 스님과 하룻밤을 보내겠다는 거야?”

 영인은 아내의 화장한 앙상한 얼

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질투심을 느꼈다.


 “아니요. 그 사람과 바다를 보고 싶어요. 강원도 강릉이나 정동진에 가서요.”
 “아니, 당신은 환자야. 환자가 어딜 간다는 거야? 그리고 당신은 지금 중환자라 병

원에서 당신의 외출은 허락해주지 않을 거라고.”

 영인은 아내에게 화를 내고 싶었으나 차마 그러지 못하고 속으로 삭히고 있었다.


 “그러니까 당신한테 부탁하잖아요. 당신이 병원 측에 잘 이야기해서 앰뷸런스를

하루 대여해서 내가 그 사람과 바다를 볼 수 있게 해줘요. 아니면 당신이 직접 차를

운전하시든 지요. 당신 경제력이면 얼마든지 가능하잖아요.”


 영인은 아내의 이승에서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 줄 수도 거절할 수도 없었다. 영

인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면서 뜻 밖의 아내의 부탁을 어찌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

해 보았다. 깊은 침묵이 두 사

사이에 흐르면서 병실은 숨이 막힐 듯 했다.


 “좋아. 내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당신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면 내 두고 두고 후

회가 될 것 같군.”

 한참 만에 영인이 무거운 침묵을 깼다.


 “지연아빠, 고마워요.”
 “내 당신한테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오?”

 영인이 주희 곁에 바싹 다가앉았다. 늘 물보고 싶었지만 아내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망설였다.


 “무엇인데요?” 주희가 영인의 두 눈과 시선을 맞추었다.
 “당신, 당신, 나의 아내로서 나를 얼마나 사랑했었소?”


  영인이 묻는  말에 주희는 눈을 감았다. 다시 무거운 고요가 병실 안을 가득 채

웠다. 주희의 두 눈에에서 맑은

액체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아니요. 난 당신을 단 한순간도 사랑한 적이 없었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오로지 이천호 한 사람 뿐이에요. 지금 이 순간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어요. 미안해요.”

주희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면서 입을 꼭 다물었다. 주희의 답변에 영인은 큰 충격

을 받았다.
 

 “다, 당신, 그 말이 정말이오?”

 “네에.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한 사람은 오로지 이천호

사람 뿐이에요.”

 주희는 단호한 어조로 자신의 속내를 분명히 했다.


 ‘아아,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지난 20년 세월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이 여자에게 허깨비였단 말인가?’
 “여보, 지연엄마. 내가 그렇게 미웠소?”


 “......”
 “여보, 지연엄마.”

 영인 재차 주희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아니요. 난 당신을 잠시 미워한 적은 있지만 지금은 미워하지 않아요. 당신과

나는 억지 인연이었어요. 당신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의 말도 않되는 억지에 의

해 당신과 나는 그림자처럼 살면서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어요. 나와

당신이 함께한 지난 20년 세월은 큰 의미가 없었어요.”

 

 한마디 한마디 이어가는 주희의 말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영인은 빈말이라

도 아내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영인과 주희가 진지한 대화를

마치고 서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때 병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

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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