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망초(5)
- 여강 최재효
5
“이놈, 네놈에게 딸을 맡겼더니 룸살롱 마담하고 놀아나? 내, 네 아버지하고 죽마
고우(竹馬故友)면서 종교적 믿음이 같아 네놈을 믿고서 시집을 보냈더니 우리 가문
을 욕되게 해? 이놈, 당장 때려 죽여도 시원찮을 놈.”
주희 아버지는 가슴을 치면서 영인에게 호통을 쳤다. 영인 곁에 앉아 있던 여인은
훌쩍거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서 경찰이 묻는 말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
신히 대답하였다. 여인은 영인의 장인을 힐끔거리며 쳐다 보았다.
“아가씨, 이름 하고 주소를 대요. 어서요. 아가씨는 간통 현장에서 잡힌 범인입니
다.”
경찰관이 아무리 물어도 여인이 응답이 없자 경찰관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저어, 경찰관님,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제 남편이 알면 저는 죽어요.”
여인은 경찰관에게 사정하였지만 경찰관을 피식피식 웃기만 하였다.
록 할게요.” 장에서 간통죄 현행범으로 체포되었고요. 그리고 외제차까지 몰면서 왜 간통을 하
“말 못하시겠다면 신분증 이리 내세요. 어서요.”
“경찰관님, 잘 못했어요. 한번만 용서해주세요. 앞으로는 절대 잘못하는 일 없도
“허참, 저기 두 분이 아가씨와 저 아저씨를 간통죄로 고소했습니다. 두 분은 현
고 다녀요?”
경찰관이 주희와 주희의 아버지를 가리켰다.
“장인어른, 잘못 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이렇게 빕니다. 정말로 죽을
죄를 졌습니다. 이번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영인은 부모님과 장인, 장모가 있는 자리에서 눈물까지 흘려가며 싹싹 빌었다.
사돈의 전화를 받고 부리나케 경찰서로 달려온 영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수갑 을 차고 앉아있는 아
“이눔아, 내가 너를 그렇게 안 키웠는데, 계집질이 다 뭐여?”
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영인의 어머니는 아들의 등짝을 후려치면서 나무랬다.
주희의 시아버지는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있었지만 얼
굴은 차마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고향 친구사이인 주희의 아버
지에게 영인의 아버지는 미안하여 어쩔줄 모르고 연신 담배만 피워댔다. 아들 교
육을 잘못시킨 죄에 대하여 친구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지만 주희의 아버지는 친
구의 용서를 구하는 소리에 기침만 하고 있었다.
영인은 '붉은 장미' 살롱 마담과 남산의 한 호텔에서 주희에게 꼬리가 밟혀 현장에
서 체포되어 경찰서로 이송되었다. 30중반으로 보이는 사롱 마담은 얼굴이 하얗게
변해 벌벌 떨었다. 주희가 영인을 미행한 지 두 달 만에 발생한 일이었다. 주희는 남
편이 식당 앞에서 묘령의 여인이 운전하는 외제차에 올라타는 것을 목격하고 뒤를
추격하였다. 다혈질의 친정아버지에게 연락을 취하고 즉시 구원요청을 취했다. 외
제차가 습관처럼 남산의 한 호텔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주희는 친정아버지와 경찰
관을 대동하고 호텔로 들어갔다.
영인이 호텔에 든 1시간 후 쯤 종업원이 영인이 든 객실에 노크를 하자 문이 열렸
다. 문이 열리는 동시에 경찰관과 영인의 장인 그리고 아내 주희가 객실 안으로 순
식간에 밀고 들어왔다. 방금 중요한 일을 막 끝낸 뒤였는지 여인은 발가벗은 채 땀
에 젖어 침대 위에 알몸으로 누워 있었다. 영인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말도 못하고
멀거니 서있었다. 주희는 준비해간 카메라로 여인과 영인 그리고 객실 안을 촬영하
였다. 경찰은 휴지통을 뒤져 하얀 이물질이 묻은 휴지조각과 두 사람의 팬티를 증
거물로 수집하였다.
주희는 당장 남편과 사롱 마담을 간통죄로 감옥에 넣고 싶었지만 시부모 부탁과
친정아버지의 용서로 남편을 한번만 용서해 주기로 하였다. 또한 두 딸들이 입을
마음의 상처와 방황 등 여러 사정으로 주희는 입술을 깨물며 눈감아 주기로 마음
먹었다. 대신 주희는 각방을 쓰면서 남편 명의의 모든 부동산 지분의 1/2을 자신의
지분으로 하는 조건으로 등기 절차를 마쳤다. 영인은 이전의 남편으로 돌아간 듯
했지만 주희는 늘 불안해했다. 주희는 매일 독주(毒酒)로 아픈 상처를 달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폭풍우가 치고 난 주희의 가정은 고요했다. 두 딸들은 그런대로 말썽 피우지 않
고 공부를 열심히 하여 주희를 안심시켰다. 남편의 귀가 시간은 빨라졌지만 늘 입
에서 술 냄새가 났다. 주희가 계속 영인의 주변을 감시하였지만 특이한 사항은 발
견되지 않았다. 주희는 시댁을 찾지 않았고 영인도 처가를 방문하지 않으면서 두
집안 사이에 냉기류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주희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사망
하면서 영인은 긴장했던 마음이 다소 풀어지면서 다시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
었다. 주희에게는 잘 하는 것처럼 행동하였지만 간통현장을 들 킨 것에 대하여 몹
시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주희가 수영을 배우러 다미면서 친구도 사귀고 밖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많아지자
모습도 밝아졌다. 늘 우울했던 분위기에서 활발하고 발랄한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또래의 친구들이 생기면서 등산이나 볼링 골프를 배우기도 하였다. 두 딸들
은 주희의 달라진 모습에 정서적 안정을 되찾으면서 위안을 삼기도 했다. 아버지의
행동에 실망을 느낀 딸들은 주희와 대화를 하면서 영인은 서서히 고립되어 가고 있
었다. 영인은 잃어버린 신뢰를 만회하기 위하여 겉으로는 주희와 두 딸들에게 최선
을 다하는 것처럼 보였다. 주희의 큰딸 지연이 대학생이 되면서부터 주희는 자주
힘들어했다.
주희는 자신이 큰 병에 걸린 사실을 모르고 독주(毒酒)를 마시면서 남편에 대한 배
신감에 치를 떨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등산이나 수영을 마치면 으레 술을 입에 댔다.
주희의 친구들도 주희의 입장을 눈치 채고 주희의 음주를 말리지 않았다. 주희가 자
주 가슴의 통증을 느끼면서 영인은 주희와 함께 병원을 찾았다.
정밀 검사 결과 주희는 폐암말기를 넘어 치유 불가능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영인
은 주희의 병명을 숨기고 그냥 폐병이 생겨서 치료만 잘 하면 완치될 수 있다고만
하였다. 아내가 얼마 살지 못할 거란 사실을 안 영인은 아내에게 미안해하면서 살
아 있는 동안이라도 최선을 다하기로 하였다.
“아아, 이일을 어쩌나? 도봉산과 북한산 일대 모든 암자와 사찰을 이 잡듯 뒤져도
혜목스님을 만날 수 없으니......”
지연은 한숨을 쉬었다. 얼마 남지 않은 엄마의 첫사랑을 꼭 찾아 주희의 연서(戀
書)를 전해주고 싶었다.
뢰하여 스님을 찾는 방송을 내보내도록 해볼게. 아니면 신문지상에 사람 찾는 광고
“지연아, 너무 걱정하지마. 끝까지 혜목 스님을 찾을 수 없으면 내가 방송국에 의
도 내보고.”
기훈이 낙심하고 있는 지연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나는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이 도봉산과 북한산 자락에 혜목 스님이 안 계시니
까 서울 시내 모든 사찰을 다 뒤져 볼 거야. 혹시 모르잖아 스님이 이 산 자락이 아
닌 서울 시내 모 사찰에 계실지.”
지연이 눈물을 훔치고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기훈이 난감한 얼굴을 하였다. 지연이 삐친 듯하자 기훈이
“서울 시내 사찰이 꽤 될 텐데......”
“기훈씨 귀찮으면 그만둬. 나 혼자 뒤져볼 테니......”
얼른 얼굴색을 바꿨다.
“아, 아니야. 장모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기꺼이 내가 앞장서야지. 서울 시내 절이
수천 개가 되겠어, 수만 개가 되겠어. 좋아 혜목 스님을 찾아보자고.”
기훈은 지연의 눈치를 살폈다.
“우리 먼저 가까운 PC방에 가서 서울시내 유명 사찰을 알아보자. 조계사, 봉은사,
국녕사 등등 내가 알고 있는 절도 꽤 되거든.”
기훈과 지연이 대충 40여 곳의 크고 작은 시내 사찰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하나
하나 방문하기로 하였다.
“나무석가모니불. 저희 도량에는 그 스님이 오지 않으셨습니다. 지난해 한번 다녀
가신 적이 있기는 하지만 요 근자에는 발길이 없으셨지요.”
B사 종무소에 들린 지연은 총무 일을 보는 스님에게서도 희망적인 소식을 듣지 못
했다.
목 스님이 가실만한 곳이나 혜목스님을 잘 아시는 다른 스님들께 연락을 해주세요.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꼭 한번 뵙고 싶어 하세요.” 지연이 울면서 사정을 말하
“저어, 스님, 제 어머니께서 이승에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스님, 혹시 혜
자 젊은 비구승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무관세음보살. 알겠습니다. 힘닿는데 까지 알아보겠습니다.”
“스님, 고마워요. 꼭, 꼭 어머니가 혜목 스님을 뵐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네에.”
“나무아미타불.”
벌써 스무 곳이 넘는 대소 사찰을 방문하였지만 혜목 스님의 행방을 묘연했다.
서울 강북지역 사찰을 모두 방문한 두 사람은 강남 지역에 있는 사찰들을 뒤지기
시작하였다.
“아 -, 저런 혜목 스님, 조금 전에 떠나셨는데요.”
“네에? 정말이요? 어디로 가셨어요?”
지연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글쎄요. 그 스님은 바람과 같아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 수가 없어요.”
“보살님, 빨리 그 스님을 찾아야 해요. 저희 어머니가 지금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
고 있단 말이에요. 좀 알려 주세요. 혜목 스님, 휴대전화나 잘 가시는 사찰이 어디
인지 알려 주세요. 네에? 이렇게 사정합니다.”
지연이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금방이라도 큰소리를 내고 울 것 같았다.
“그 스님은 휴대전화 같은 거는 없어요. 당신께서 가시고 싶은 데를 자유롭게 다
니시는 분이시라 휴대전화 같은 거는 거추장스럽게 여기시거든요.”
“보살님, 어떻게 하면 혜목 스님을 만나 뵐 수 있을까요? 무슨 방법 없어요?”
“죄송해요. 저도 도와드리고 싶지만 뾰족한 수가 없어요. 어떻게 하죠?”
보살이 두 손을 비비며 미안해 하였다.
인가? 이러다가는 백년이 걸려도 그 스님 못 찾겠는데......” 기훈이 보살을 보고
“햐-, 정말로 그 스님 생쥐 같네. 어떻게 우리 보다 늘 한 발짝 앞서서 간단 말
투덜거렸다. 지연이 보살의 눈치를 보며 투덜거리는 기훈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지연과 기훈이 강남의 크고 작은 사찰을 뒤지고 다녔지만 혜목 스님은 끝내 만날
수 없었다. 지연은 혜목 스님을 포기 할 수 없었다. 금방이라고 혜목 스님이 나타
날 것 만 같았다. 늦은 밤 병원을 찾은 지연과 기훈을 풀이 죽어 있었다. 지연은 꺼
져가는 불꽃이 된 엄마에게 기쁜 소식을 주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지만 그렇지
못한 자신의 능력을 탓했다. 기훈은 지연의 등을 두드려 주며 힘을 내라고 하였지
만 지연은 우울한 심정을 달랠 수 없었다.
“지연아, 혜목 스님을 찾지 말거라. 엄마하고 인연이 다했나보다. 이제 그 분 찾지
말고 너희들 공부해. 근 십 여 일 동안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구나. 이제는 나도 포
기해야겠구나.” 주희의 양 볼 위로 맑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엄마, 아니야. 포기하기에는 너무 일러. 내일 그리고 또 내일도 스님을 찾아 볼게.
반드시 그 스님을 찾아낼 테니 엄만 희망을 버리지 마. 알았지?”
“어이쿠, 내 딸.”
주희는 딸의 손을 잡아주었다.
“엄마, 냉장고에 있는 것들을 왜 하나도 안 먹었어? 저걸 누가 다 먹으라고?”
지연이 냉장고 안에 가득한 음료수, 과일 등 먹을거리를 보면서 투정을 부렸다.
“엄마가 입맛이 당기지 않아서 그래. 있다가 집에 갈 때 가져가서 지혜하고 먹
어라. 지혜는 요즘 어떠니? 대입반인데 내가 이렇게 병원에 누워 있으니 누가
우리 둘째딸을 돌봐주나? 아이고, 내가 어미 노릇을 못하는구나.”
주희는 고등학교 3학년인 둘째딸을 생각하곤 눈물을 흘렸다.
“엄마, 지혜가 다 알아서 해. 아빠도 신경 많이 쓰고 계시고. 너무 걱정하지
마. 잘 하고 있으니까. 엄마나 빨리 병이나 낳을 생각해.”
“그래, 고맙다. 엄마가 빨리 일어나야 하는데......”
병원복에 감추어진 주희의 앙상한 팔과 다리를 본 지연은 속에서 울컥 치밀어 올
라오는 설음에 그만 잠시 흐느꼈다. 기훈이 지연이 옆에서 헛기침만 하며 지연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지연아,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라.”
“응, 엄마. 무슨 말인데?”
“아무래도 나는 며칠 못갈 거 같구나.”
“엄마, 그게 무슨 소리야. 며칠 못 가다니. 빨리 몸이 좋아져서 퇴원해야지 그
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바보 같은 소리야?”
지연이 주희의 양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듣고, 아빠의 뜻을 존중해드려야 해. 그리고 내가 죽으면, 죽으면......” 주희는
“지연아, 내가 죽거든, 너희 자매는 서로 의지하고 잘 살아야 해. 아빠 말씀 잘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다시 흐느꼈다.
“엄마, 엄마, 그만, 그만해. 죽기 왜 죽는다는 거야. 바보같이.”
“어머님,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예전의 건강을 되찾으셔야지요. 두 딸들이 간
절하게 어머님의 건강을 바라고 있는데요.”
기훈이 주희의 손을 잡았다. 주희의 가냘픈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전해졌다.
기훈도 가슴이 뭉클해져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지연아, 미안하구나. 어미가 되어서 네 가슴에 못을 박다니.......”
“엄마, 안 돼. 그런 생각하면 안 돼. 죽기 누가 죽어. 엄만 금방 좋아질 거야. 다
시는 그런 말 하지 마.”
지연이 주희가 누워있는 침대에 기대어 흐느꼈다.
“지연아, 어쩌면 엄마의 마지막 부탁이 될 수도 있겠구나. 나는 내 병을 잘 안다.
내가 이승에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알아. 그러니 마음 가다듬고 엄
마말 잘 들어보거라.”
지연이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자 주희도 딸의 등을 다독거리며 함께 울었다. 갑자 기 병실 안은 울음바다가
“안 돼, 엄마. 그런 말 하지 마.”
되고 말았다. 머쓱해진 기훈도 병실을 나왔으나 울적한 심기를 달래지 못했다.
“내가 죽거든 화장해서 경상도 B군에 있는 S사 주변에 뿌려다오. 그리고 만약에
나중에라도 혜목 스님이 나타나거든 C사에 맞긴 편지를 찾아다가 그간의 사정을
말씀드리고 꼭 전해드리렴. 아빠의 모든 재산 지분의 반을 엄마의 명의로 해놨어.
엄마의 명의로 각각 너희 두 자매 명으로 해놓거라. 알겠니? 꼭 그렇게 해야 돼.
아빠는 아직 나이가 있어서 혼자 살지 않을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내가 아
빠한테 꼭 그리하라고 말씀드릴게.” 주희는 마치 유언을 하듯 딸에게 말하였다.
숨이 가쁜 듯 주희가 힘들어 하자 지연이 얼른 주희의 팔다리를 주물렀다.
“엄마, 힘들어 보여. 그만, 그만해.”
“아빠 오시면 엄마가 방금 한 이야기를 상의해 볼게.”
지연은 이미 주희가 자신의 병세를 모두 알고 있으며 주변 정리를 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더 이상 감출 수도 없고 응석을 부려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엄마의
이야기를 차분히 듣기로 했다. 엄마의 정신이 맑을 때 엄마의 말을 명심하고 메모
할 것을 메모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지연아, 아빠는 반만 믿어야 한다.”
“......”
지연이 주희의 말뜻을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빠는 한때 엄마를 배신하고 다른 여인과 바람을 피운 적이 있어. 너희들도 잘
알지?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잘못하면 아빠의 전 재산이 엉뚱한 여자의 손에
넘어갈 수 있어. 내가 죽으면 제일 먼저 아빠 재산 중 엄마의 지분을 너희 자매에
게 넘겨 달라고 해야 해. 알았지. 명심하거라.”
주희는 한마디 할 때마다 기침을 하였다. 하얀 휴지에 선혈이 묻어 나왔지만 주희
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스님, 혜목스님, 잠깐만요.”
혜목스님이 어느 초가을 점심때, 일 년 만에 도봉산 C사에 나타났다. 종무소에서
일을 보는 보살이 혜목스님을 보더니 소리쳤다.
“나무아미타불. 보살님, 그동안 여여하셨는지요?”
혜목스님이 합장하며 보살에게 인사를 하자마자 여인을 혜목스님에게 편지봉투
를 내밀었다.
“스님, 이 편지는 일주일전에 어떤 아가씨가 와서 스님께 꼭 전해달라고 저에
게 맡겨놓고 간거 에요.”
“어떤 아가씨라니요?”
혜목스님은 금방 얼굴이 굳어졌다.
“네에, 아주 예쁘게 생긴 아가씨인데 그 아가씨가 경상도 B사에서부터 스님 뒤를
쫓았나봐요. 설악산 S사와 이 도봉산 자락에 있는 모든 암자와 절들을 모두 뒤지
고 다녔다고해요.”
혜목스님은 발신자가 없는 하얀 편지 봉투를 받아 들고 잠시 눈을 감고 속으로 부
처님을 찾았다.
직도 남아있나 봅니다. 부디 가슴 아픈 사연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혜목 스님이 편지를 품에 넣고 요사채로 향했다. 편지 봉투를 뜯는 혜목스님의 손 이 부르르 떨렸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부처님, 이 몸이 사바에 뿌린 인연의 뿌리가 아
내 사랑, 천호씨.....!
먼저 저와 저희 아버지의 행동에 용서를 빌어요. 지난 세월은 가시밭길의 연속이
었어요. 당신이 어느 날 홀연히 서울에서 사라진 뒤 수년 동안 당신을 찾아 다녔지
만 모두 헛수고 였어요. 저는 지금 죽어가고 있어요. 아마 당신이 이 편지를 손에
넣었을 때 어쩌면 저는 이승에 없을 수도 있어요. 이승을 떠나기 전에 당신에게
지은 죄를 용서받고 싶어요.
동혈을 꿈꾸었어요.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일로 당신이 제곁을 떠나갔을 때 저는 죽으려고 음독(飮毒)까지 했지만 죽지 못했어요. 당신이 바람처럼 떠난 뒤 지금까 지 제 인생은 무의미했어요. 봄이 와도 제 가슴에는 꽃이 피지 않고 찬바람만 몰 아쳤어요. 비록 다른 남자의 부인이 되어 지난 20년 세월을 살았지만 저는 그림자 로 살았답니다. 승에 있을 때 뵐 수 있다면 좋겠어요. 혹 제가 저승에 든 뒤라도 뵐 수 있으면 좋겠 어요. 천호씨, 보고 싶어요. 어디서 어떻게 살고 계시는지 모르지만 저는 잠시도 당신 을 잊은 적이 없어요. 제가 살아 있을 때 당신의 따뜻한 손이라도 잡아 볼 수 있을까요? 어젯밤에도 당신과 캠퍼스에서 밤새 노래하는 꿈을 꾸었어요. 당신은 기타를 치고 저는 노래를 했답니다. 록 도와주세요. 저 창밖에 자유롭게 날아가는 새들이 부러워요. 저승에 들더라도 저는 천호씨를 잊지 않을 거예요. 비록 이승에서 잇지 못했지만 당신과 나의 청실 홍실은 언젠가 이을 거예요. 내 사랑, 이-천-호. 보고 싶어요.
당신과 평생을 반려자로 살기로 새끼손가락 걸고 맹서했을 때 저는 당신과 해로
천호씨, 제가 저승에 들기 전에 천호씨를 뵙고싶어요. 이 편지를 보시고 제가 이
천호씨, 사랑해요.
하나님, 부처님, 이 편지가 제 심장이 멈추기 전에 내 사랑하는 임 손에 전달되도
- 당신의 여인 주희가 -
“주희야, 주희야, 나,무,관,세,음,보,살.나,무,관,세,음,보,살......”
갑자기 혜목스님이 든 요사채에서 울음소리가 흘러나오자 신도들과 비구승들이
몰려들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