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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망초(2)

* 창작공간/단편 - 물망초

by 여강 최재효 2011. 2. 2.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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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망초(2)

 

 

 


                                                                                                                                                     - 여강 최재효

 

 

  

 

 “계세요? 계세요?”

 주희의 딸 지연이 남자친구인 기훈과 경상북도 깊은 산골 내륙

에 위치한 B군에 도착한 것은 한 여름의 태양이 서산에 걸쳐 앉아 있을 때였다. 서울

서 점심을 먹고 기훈은 자가용에 지연을 태우고 출발하였는데 6시간이 걸리는 먼 길

이었다. 지연과 기훈은 주희가 알려준 주소를 물어 물어 찾아왔다.


 B읍내에서 차편으로 1시간 가량 더 깊은 산골로 들어가야 하는 곳이어서 사람의 왕

래도 별로 없었다. 기훈의 자가용이 흙먼지를 내며 10분을 더 달리자 아늑한 산 중턱

에 십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전형적인 산촌이 나타났다. 오수에 빠진 마을은

너무 조용해 마치 절에 들어 온 느낌이 었다.  


 집들은 대개 슬레이트로 된 지붕이며 어떤 집은 기와로 된 지붕도 있었는데 집들은

지은 지 꽤 되어 보였다. 동네 어귀에 누렁이 두 마리와 염소들이 풀을 뜯고 있고 동

네 아이들은 개울에서 미역을 감고 있다가 기훈의 자동차를 보고 달려 나왔다. 동네

에 차가 들어오는 경우는 명절 때 외지에 나가있는 동네 청년들이 차를 가지고 오는

경우를 빼곤 거의 없었다. 

 

 아이들이 신기한지 빨간색 기훈의 애마를 보더니 만져보기도 하고 바퀴를 발로 톡

톡 차보기도 하였다. 차에서 내린 기훈과 지연은 허름해 보이는 구멍가게로 향했다.

아이들은 두 사람 뒤를 졸졸 따르며 두 사람의 행동을 눈 여겨 보았다.


 “기훈씨, 안에 아무도 없나 봐.”
 “계세요? 아무도 안 계세요?”

  이번에는 기훈이 가게 문을 두드렸다. 기훈이 두서너 번 더 문을 두드리고 나서야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어서오시구랴.”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여인이 눈을 비비며 하품을 하였다.


 “저어, 아주머니, 말씀 좀 물을게요. 이 동네에 이천호라는 분이 어디 사시는 지 아

세요?”

 여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좌우로 갸우뚱거렸다.


 “내가 이 동네 산지 10년이 조금 넘었는데 이천호란 사람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

데? 내가 보기에 이 동네 사는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여자는 말끝을 흐렸다.


 “아주머니 주소는 이 동네가 맞지요?”


 “맞기는 한데 그런 분은 이 동네 안 살아요. 혹시 모르니 이장님 댁에 가보세요.

이장님은 이 동네 토박이시니 알 수도 있을 거에요.”

 여자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안

으로 들어가 버렸다.


 기훈과 지연은 자동차를 세워두고 걸어서 동네 아이들과 이장집을 방문하였다.

이장은 마침 집에 없었다. 이장 부인되는 사람이 외지인을 경계하는 빛으로 대하며

지연이 묻는 말에 마지못해 대답해 주었다.


 “아주머니, 그럼 이 분이 이 동네 분이 맞긴 맞네요?”
 “그분 소식을 알고 싶으면 저 산 너머에 있는 벌곡이란 데를 가면 그분 친척들이 살

고 있을 거에요.”


 이장 부인이 가리키는 산은 방금 해가 넘어가버린 큰 산이었다. 차편으로 가도 30

여분은 족히 달려야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기훈은 지연을 차에 태우고 벌곡이란 마

을로 향했다. 산골 도로 위로 뽀얗게 흙먼지를 내며 두 사람을 태운 자동차가 서쪽

으로 질주하였다.


 “그 사람은 속세인이 아니오. 찾으려 하지 마시오.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다니는 사

람이오.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오만 그 사람 찾으려면 고생 좀 해야 할거요.”

 이천호의 먼 친척 뻘 되는 남자는 지연에게 이천호의 행방에 대하여 아리송한 말만

하였다.


 “아저씨, 그럼 그분이 스님이 되셨다는 건가요?”

 지연이는 어렵게 찾아온 보람도

없이 그냥 서울로 올라갈 수 없었다.


 “한 이십 년쯤 되었나? 세상 살기 싫다면서 절에 들어가겠다는 말을 하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어요. 참으로 아까운 사람이야. 이 근동에서 서울서 대학 나온 사람은

그 사람 뿐이었지요."

 남자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분 부모님이나 형제 분들은 없어요?”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시고, 형이 한 분 계신데 그 분도 바람처럼 세상을 떠돌아다

니는 사람이라 우리도 천호네 가족 소식을 알 수가 없다오.”

 남자는 담배 연기를 호

호 뿜어대면서 하기 싫은 이야기를 하는 듯 간신히 말을 이어나갔다.


 ‘아아, 어쩌나. 그분을 만나서 엄마의 편지를 꼭 전해드려야 하는데.’

 지연이 발을 동동 굴렀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아저씨, 그럼 이천호라는 분을 찾는 방법이 없을까요? 지금 어떤 사람이 죽어가고

있어요. 죽어가는 사람이 이천호라는 분에게 건네는 편지를 가지고 있거든요. 그분

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 편지를 전해야 해요.”

 지연이 간절한 시선으로 남자를 바라보면서 자비를 구하듯 두 손을 꼭 잡고 비볐

다.


 “저런, 쯧쯧쯧……, 들리는 소문에는 그 사람이 스님이 되긴 되었다는데 지금 어느

절에 있는지는 모르겠어. 몇 해 전에 저 산속에 있는 S사에서 보았다는 사람도 있기

는 해.”

 남자는 어둠 속에 희미하게 보이는 산을 가리켰다. 이미 날이 저물어 사방을 분간

하기 어려웠다.


 “아저씨, 그럼 그분이 스님이 된 게 틀림없네요. 그 절에 가면 그분을 찾을 수 있겠

네요?”

 지연은 어떻게 해서라도 이천호에 대한 정보를 더 얻고 싶어했다.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 절에 가서 스님들에게 잘 물어보면 알려줄지도 모르지. 그

사람에 대하여 아는 게 이게 전부요.”

 사내는 담배 꽁초를 바닥에 버리고 발로 비벼 껐다.


 “지연아, 우리 어디가서 잘 데를 알아보자.”

 “뭐? 잘데? 그럼 오늘밤 내가 기훈씨하고 같이 자야 하는 거야?”


 지연이 기훈의 엉큼한 속내를 알고 있었다. 친구라는 일정한 경계를 설정해 놓기

는 했지만 대학 생활 2년 내내 붙어 다니다 시피하면서 연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이상한 관계가 되어 버렸다.


 “뭐 꼭 같이 잔다기보다 함께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 이렇게 어두운데 어디 가서 그

분을 찾아? 우선 오늘은 서울서 내려오느라 피곤하니까 일찍 잠자고 내일 다시 찾

아보자는 거지.”
 “피이-, 기훈씨 속을 누가 모를 까봐.”


 “우린 오래 같이 동고동락한 사이니 마음은 이미 통했잖아. 지연이는 내 여자고.”
 “어머? 누가 기훈씨 여자?”


 지연이 운전하는 기훈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두 사람이

탄 빨간색 승용차는 남자가 가리키던 S사가 있다는 곳으로 달리며 흙먼지를 날렸다.


 ‘아아, 이 얘들이 천호씨를 찾아냈을까? 아니면 산속에서 헤매고 다니는 건 아닌

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내 생명의 끈을 놓기 전에 그 사람과 잠시라도 함께 했으

면 좋으련만. 아버지가 반대만 하지 않았다면 나는 천호씨 아내가 되었을 텐데. 내

가 그 사람의 아내가 되었다면 지금의 나는 어찌 하고 있을까? 불쌍한 사람, 지금 

이 하늘가 어디서 잘 살고 있겠지. 나는 이승에서 명을 다하기 전에 그 사람에게

진 빚을 갚아야해. 아버지가 진 빚이지. 그 빚을 딸인 내가 대신 갚아야 해. ’

 

 주희는 무통주사액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주사액이 섞여 투명한 호수를 타고 혈관

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생명의 존엄성을 생각하면서 잠시 추

억 속으로 여행을 하였다. 통증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였다. 조

금전 남편이 왔다가 저녁을 먹고 오겠다고 난간 뒤라 병실에는 TV와 주희만 썰렁

하게 병실을 지켜야 했다.


 “안 된다. 절대로 난 그런 집안 자식에게 너를 맡길 수 없어. 너는 나의 외동딸이

고 너는 우리집안과 비슷한 집안 사람과 사귀어야 해. 내 자주 너에게 말했지만 이

아빠의 고향 친구들 중에 너와 비슷한 나이의 아들을 둔 친구가 있다. 그 친구와는

아주 막역한 사이란다.

 

 그 집안 재력도 우리 집안과 비슷하다. 네가 최소한 그런 집안에 들어가야 너도

고생을 안 하고 잘 살수 있어. 시골서 올라온 그 천호라는 총각은 안 된다. 너 그

사람하고 결혼하면 고생만 해. 정신 차려 이것아.”


 주희는 이천호와 학교에서 캠퍼스 커플로 소문이 자자했다. 단지 이천호가 가난한

집안 자식이라는 이유로 자신과 더 이상 사귈 수 없다는 것이 주희의 가슴을 찢어

놓았다. 이천호는 다행히 졸업 전에 K그룹에 합격하여 득의양양하고 있었다. 천호

는 졸업하면 곧 주희와 결혼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졸업하면서 이천호는 주희의

부모님을 찾아 뵈었다. 주희 어머니는 훤칠하고 침착해 보이는 이천호에게 호감을

가지는 반면 주희 아버지는 이천호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천호씨, 미안해요. 난 우리 아빠가 그렇게 나올 줄 몰랐어요. 정말로 미안해요.

그러나 다음에 다시 들리면 내가 아빠 마음을 돌려 놓을게요. 아빠는 당신 친구 중

에 나와 나이가 비슷한 아들이 있는 사람과 사돈을 맺으려 해요. 나는 어른들이 정

해주는 인연을 싫어요. 천호씨, 걱정하지 말아요.” 충격을 받고 도망치듯 주희네

집에서 나온 천호는 주희네 집 근처 포장 마차에 들어가자 마자 소주 두 병을 안주

도 없이 마셔버렸다.


 “주희야, 미안해. 내가 주희 아버지 마음에도 들지 못하는 바보같은 사내라고 생각

하니 비참해서 그래. 눈물을 보여서 미안해.”


 “천호씨, 울지 말아요. 약속할게요. 다음에 우리 집에 다시 오면 우리 아빠 마음을

꼭 돌려 놓을게요. 아빠도 곧 천호씨를 좋아하게 될 거에요.”

 주희는 쓴 소주를 천호와 나눠 마시면서 천호를 달랬다.


 “만약에 내가 주희를 놓치거나 함께 하지 못하는 경우가 오면 나는 이 세상을 버

릴 거야. 머리 깎고 산에 들어가 중이 될 거라고. 사랑하는 여자를 곁에 두고도 사

랑하지 못하는 것은 차라리 이 세상에 없는 것만 못하다고. 난, 난 주희를 누구에게

도 빼앗길 수 없어.”

 천호는 금방 술에 취해 애인의 아버지에게 냉대를 받은 비참한 자신의 처지를 탓

했다.


 “천호씨, 자책하지 마세요. 결혼은 우리 두 사람이 하는 거에요. 부모들이 일방적

으로 짝지어주는 일은 조선시대에나 가능한 일이었다고요. 난, 난 천호씨 아니면 누

구에게도 시집가지 않아요. 사랑해요 천호씨.”

 두 사람은 늦은 밤까지 함께 술잔을 부딪히면서 눈물의 잔을 마시고 있었다.


 “주희야, 나를 사랑하는 거 맞지?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는 거지?”

 천호는 주희의

입에서 확실한 답변이 듣고 싶었다.


 “난, 이미 모든 걸 천호씨에게 주었잖아요. 만약에 아빠가 계속해서 우리의 결혼을

반대한다면 난, 집을 나갈 거에요.”


 “집까지 나가면 안돼. 집에 있으면서 해결책을 찾아봐야지. 주희가 집을 나간다면

지금까지 주희를 키워준 주희 부모님은 어떻게 하라고. 절대로 집을 나가면 안 돼.”
 “부모는 단지 나를 낳고 키워줬을 뿐이에요. 자식을 낳았으면 부모로써 키워주는 건

당연한 거 잖아요. 난 아이가 아니에요. 내 배우자는 내가 선택할거라고요.”

 주희는

울면서 말하고 있었다.


 ‘아아, 나로 인하여 부녀(父女) 지간이 깨지면 안 되는데…….’

 천호는 울고 있는 주희의 등을 다독거렸다. 천호는 자신의 배경과 주희의 가정배

경을 비교해 보았다. 경제적으로 월등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주희와 일생을 함께

한다면 살아가는 데 큰 위안이 될 거라고 판단은 하였지만 장인에게서 경제적 도움

을 받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주희는 전공 공부를 더하겠다면 같은 대학원을 진학하였고 천호가 K그룹에

니면서 두 사람은 부모들의 반대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사랑을 키워가고 있었다.


 “주희야, 우리 언제 결혼하니?”
 “아빠가 마음을 돌리지 않으니 어쩌지?”


 “우리 멀리 도망가서 살까?”

 방금 치른 사랑의 향연이 두 사람 이마와 등에 촉촉하게 배어 나왔다. 주희는 사

랑의 희열을 만끽하느라 숨을 고르면서 천호의 팔을 베고 가슴을 파고 들었다.  


 “도망가면 천호씨 직장은 어떻게 하고?”
 “해외 지사로 발령 내달라고 하지 뭐.”

 천호는 주희를 꼭 안으며 진한 키스를 퍼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두 사람은 사랑

을 불태우며 서로를 확인하였다. 둘이 떨어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되

고 말았다.


 “주희야, 넌 이 아빠가 소중하니 아니면 그 이천혼가 뭔가 하는 도둑놈 같은 녀석

이 소중하니.”

 주희의 아버지는 딸이 자신의 뜻에 반하여 계속 이천호를 만나고 다니자 딸에게

확답을 듣고 싶었다.


 “아빠, 저에게는 아빠도 소중하고 그 사람도 소중해요.”
 “이 녀석아, 하나만 선택해. 네가 정 그 녀석하고 떨어질 수 없다면 이 아빠와 부녀

지간의 연을 끊자. 난, 아무래도 그 녀석이 마음에 안 든다.”


 “아빠, 어떻게 사람을 배경만 보시고 선택하시려고 해요?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

다가도 있는 거에요. 전, 그 사람 아니면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던지 수녀가 될

거에요. 아빠, 제발, 제발 그 사람을 반대하지 마세요. 그 사람 착하고 예의 바르고

건전한 사람이에요.”

 주희는 울면서 아버지에게 사정해 보았지만 아버지의 결심은 흔들림이 없는 듯

했다.


 “넌 아직 사회에 대하여 잘 몰라서 그런 말을 한다만 결혼 해서 살다 보며 그 남자

그 남자고 그 여자가 그 여자다. 단지 경제력이 갖춰지면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고 사랑도 그만큼 윤택해질 수 있단다.”


 “아빠, 그 사람은 어엿한 대기업 사원이고 저도 조만간 회사에 다니면 우리는 독립

할 수 있어요. 금방 일어날 수 있다고요.”

 주희의 주장에 대하여 주희 아버지는 속으로 수긍하면서도 자신의 딸이 친구의 아

들과 정략 결혼으로 자신에게 주어질 혜택

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난, 자네를 사위로 생각하지 않아. 그리고 앞으로는 내 집에 발 들여 놓을 생각하지

말게. 어서 이 물건 가지고 나가게. 어서.”

 "어르신......,"

 천호는 어찌할 줄 모르고 현관에서 멍청하니 서 있었다.


 “아빠, 왜 이러세요. 어떻게 집에 온 손님을 이렇게 내쫓을 수가 있어요."

 이천호가 두 달 만에 다시 선물을 사 들고 주희 부모를 찾아 뵙기 위하여 주희네

집에 들렀을 때 주희 아버지는 냉정했다. 주희는 울면서 아버지의 무정을 탓해보

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천호가 주희 아버지에게 쫓겨나듯 냉대를 받은 다음 날 주희는 집을 나갔다. 주희

가 집을 나가자 주희 아버지는 펄펄 뛰며 이천호를 지목하며 가만두지 않겠다고 별렀

다. 일주일이 되어도 딸이 집에 들어오지 않자 주희 아버지는 경찰서에 딸의 가출신

고를 하면서 아울러 이천호를 딸을 강제로 납치하여 가출하게 한 범인으로 몰았다.


 경찰은 주희 아버지와 이천호가 근무하는 K본사 기획실로 들이 닥쳐 이천호 손에

수갑을 채웠다. 회사동료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회사 내에서는 이천호가 납치범이란

소문이 급속히 퍼져 나갔다. 유치장에 갇힌 이천호의 정신적 충격은 말할 수 없을 정

도였다.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주희가 경찰서로 달려왔다. 경찰서에서 주희는 아

버지와 맞닥뜨렸다.


 “아빠, 저는 저 사람이 납치하지 않았어요. 저는 제 발로 스스로 집을 나간 거라고

요. 신림동의 친구네 집에 있었어요. 아빠, 저 사람을 풀어 주세요. 제발요 아빠.”


 주희 아빠는 이 참에 아예 자신의 딸과 이천호가 접촉을 할 수 없도록 할 결심이었

다. 물론 이천호가 자신의 딸을 납치했다는 구체적인 물증은 없었지만 극단의 방법

만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주희 아버지는 판단하고 있었다.


 “넌, 이 아빠 딸이야 이것아. 어디 남자가 없어서 저런 가난한 집 자식하고 평생을

함께 하려는 거야? 이 아빠는 절대 저 녀석을 풀어줄 수 없다. 네가 저 녀석을 풀어

주고 싶으면 이 아빠하고 약속하거라. 네가 당장 집으로 들어오고 앞으로는 저 녀석

을 만나지 않겠다고 말이다.”


 “아빠……, 어찌 그리 매정하실 수 있어요. 착한 사람을 경찰서에 가두다니요? 아

빠, 제발 그 사람을 풀어주세요. 오늘 당장 짐 싸 들고 집으로 들어갈게요."

 

 주희는 주위 사람들의 측은한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경찰서 민원실에서 큰소리로 울었다. 그런 딸을 바라보는 주희 아버지도 마음이

아프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주희 아버지는 딸의 장래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경찰서에서 무혐의로 풀려난 이천호는 즉시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잠적해 버

렸다. 집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던 주희는 전화로 이천호가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희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앞

으로는 이천호를 절대로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아버지에게 한 터라 어찌할 수 없

는 자신이 얄밉기 조차 하였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 뭣해. 차라리 죽어 버릴 거야.'

 주희는 인근 약국을 돌아다니며 수면제를 사들였다. 주희 아버지는 딸이 이천호와

아주 인연을 끝냈다고 생각하면서 딸을 한 달쯤 집에서 푹 쉬게 할 참이었다. 모두

잠든 새벽 주희는 부모와 이천호에게 유서를 써 놓았다. 유서를 쓰는 내내 주희는

울기고 하고 웃기도 하면서 지나간 세월들을 반추해 보았다.


 “아빠, 엄마, 미안해요. 전, 전, 천호씨, 당신 아니면 이 세상을 살아갈 명분이 없어

요. 설령 살아간다 하여도 무의미한 나날들일 거에요. 먼저 게요. 용서하세요. 용

서하세요.”

 주희는 수면제 한 주먹을 입안에 털어 넣고 물을 마셨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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