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나비(최종회)
- 여강 최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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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 혹시 뉴스 들었어?”
“무슨 뉴스인데요?”
“아, 못 들었구나. 오늘 아침에 회사에 출근하면서 차안에서 KBN 라디오
뉴스를 들었는데 사십대 남자 시신이 오늘 새벽에 한강을 걷던 사람에게
발견되었대. 인상착의가 연지 남편과 비슷한 거 같아서 전화 한 거야. 연
지가 그 남자에게 전화를 해도 안 받고, 집에 찾아가도 없었다면서?”
올렸다. 몸서리가 처져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일주일 만에 병원서 퇴원 하고 용기를 내어 연지는 태성을 찾아갔지만 만날 수 없었다. 아파트 우 편함에는 각종 우편물들로 가득한 것으로 미루어 태성이 집을 오래 비운 듯 했다. 하루 빨리 태성과 인연을 정리하고 싶었지만 태성은 전화도 받지 않았고, 문자에 답변도 없었다. 있다고 생각했다. 태주는 매일 저녁 퇴근하고 연지를 만났지만 태성이 없는 상태에서 이혼소송을 진행시킬 수 없었다. 물론 변호사를 선임하여 일방적으로 소송을 제기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연지는 두 아이들을 생각 하여 태성을 만나 좋게 합의해서 이혼하려고 하였다. 었다. 연지는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회사에 출근하여 업무를 보고 있었 다. 병원에 입원해 있느라 밀린 일로 연지는 눈 코 뜰 새가 없었다. 연지 는 이혼소송과 관련한 소송 건을 처리하면서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날이 갈수록 연지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당장 태주와 결혼식을 올리고 싶지만 이혼이 말끔히 처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두 아이와 주변의 시선이 두려웠다. 그런 와중에 태주의 전화는 연지를 불안하게 하였다. 데.” 어요. 키도 비슷하고요. 그리고 더 없어요? 그 시신에 대한 정보 말이에요?” 시신이 임시 안치된 곳에 갖다올게.” 면 어쩌죠?” 든지 있어. 이 서울에만 해도 수천 명은 더 될 거야. 걱정하지 말고 있어 봐. 내가 알보고 전화할 게.” 태주에게 전화를 받고난 연지는 뛰는 가슴을 진정할 수 없었다. 동료 에게 몸이 좋지 않아 잠시 병원에 다녀오겠다고 하고 회사 밖으로 나왔 다. 약국에 들러 청심환을 복용하여도 가슴 떨리는 증상은 진정되지 않았다. 달려들어 목을 조일 것 같아서 뒤에 누가 있으면 사람이 없는 편으로 이동해 걸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간밤에도 눈이 내려 서울시 내가 백색 세상이 된 터라 도로에 자동차들이 엉금엉금 기다 시피 했다. 하늘이 빙빙 도는 것 같고 속이 울렁거려 견디기 어려웠다. 호텔사우 나에 들어가 찜질을 해보아도 남편의 얼굴이 아른 거렸다. 연지는 두세 시간 정도 선잠을 자고 나왔다. 태주가 알아봐 준다고 하였지만 자신이 직접 가보고 싶었다. 휘날리는 하얀 꽃송이를 손으로 쥐려고 하였지만 잡히지 않았다. 수억 마리의 흰나비들이 자신을 향해 돌진하였지만 한 마리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하얀 나비들은 분명히 흰 색깔인데 연지의 눈에는 검은 나비 로 보였다. 연지는 하늘이 돌고 땅이 도는 것 같아 머리를 푹 숙였다. 머리를 숙 이자 속에서 내용물들이 올라오려고 하였다. 연지는 간신히 배를 움켜 쥐고 자세를 바로하고 눈을 떴다. 검었던 나비들이 하얗게 보이기 시작 하면서 속이 차차 편안해졌다. 나 또한 어떤 남자의 나비였던 게 분명해. 세상 그 어떤 시시한 남자들 은 나를 잡을 수 없을 거야. 나비가 사람 손에 잡히면 그건 나비가 아니 야. 그건 나방이나 병든 나비일거야. 호호호호......, 나는 하얀 나비가 분명해. 보통 손에 잡히지 않는 나비 말이야. 호호호호......“ 택시 기사는 정신 나간 여자처럼 울다 웃다가 혼자말로 중얼거리는 연지가 걱정되었다. 연지가 KBN 뉴스보도본부를 찾아가 아침 뉴스기사 의 출처를 확인하고 다시 택시를 잡아탔다. 다 왔을 때 병원서 걸어 나오는 태성을 보았다. 눈을 흠뻑 맞고 뛰어가 다가 연지가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추운데......” 서 오늘 일어났던 일들을 떠 올렸다. 연지에게 전화를 걸고 태주는 바 로 회사를 나와 방송국으로 향했다. 방송국에서 뉴스 내용을 확인하고 곧 바로 엔젤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관계자와 경찰관으로 부터 어렵게 시신의 인적 사항을 들을 수 있었다. 태성의 시신이 틀림없었다. 태주는 시신의 주인공이 태성이라는 말에 반가움 보다 가슴이 아팠다. 때문에 불행하게 될 저 남자의 핏줄들에게 뭐라고 변명을 한단 말인가?’ 부패가 되었지만 외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동사(凍死)하여 결빙된 상태로 있었던 듯 합니다. 자세한 것은 검시를 해봐야 알 수 있습니다. 친구는 안 됩니다. 가족이나 법적 자격이 되는 분에게 시신을 공개할 수 있습니 다.” 판단한 태주는 친하게 지내는 사법기관의 고위층에게 부탁하여 냉동 보관된 태성의 시신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추운 날씨로 인하여 얼굴 은 검게 그을렸으나 다른 신체는 얼어있어서 다행히 부패는 진행되지 않았다. 태주의 판단에도 시신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다. 태주는 태성의 시신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받고 연지와 자신의 관계에 대하여 심사숙고 해 보기로 하였다. 부부 사이도 아닌 상태에서 부부나 마찬가지로 살고 있는 자신의 행동이 아무래도 당당해 보이지 않을 뿐 더러 이제까지 심 각하게 고민해 보지 않은 연지의 아이들도 다시 한 번 돌아 보기로 했다. 어차피 연지의 아이들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전말을 알게 될 경우 아무리 공을 들여 키운다 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연지의 아 이들이 어쩌면 훗날 자신을 향해 칼을 들이댈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자 태주의 등에서 식을 땀이 흘렀다. 편의 문제보다 태주의 건강을 염려했다. 남편, 박태성씨 맞아.” 뭐라고 해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남편을 죽게 한 년이라고 욕할 텐데요.” 하지 말고 평소처럼 행동하면 되는 거야.” 연지는 정신 나간 여자처럼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아이들이 나를 뭐라고 할까? 부정한 엄마, 나쁜 엄마, 바람피우다 아버지를 죽인 엄마, 욕심쟁이 엄마, 아아, 이일을 어 떻게 마무리해야 하나? 예상치도 않은 일로 인하여 한 동안 마음고생을 하게 생겼구나. 그런데 그 이가 죽으면 홀가분해야 하는데 왜 우울하지? 나와 태주씨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무엇 때문에 내 가슴이 무겁고 착잡한 거야? 왜지? 무엇 때문일까? 걸림돌이 사라졌는데......’ 좋겠어. 이대로 있다가 곧 쓰러질 것 같아. 연지, 내말 대로해.” 연지는 택시를 타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손가락 하나 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연지의 몸 마디마디가 이완 된 듯 했다. 연지가 막 잠이 들 무렵 현관 인터폰이 울렸다. 연지는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을 열었다. 어떻게 연지가 사는 아파트 주소를 알아냈는지 경찰관 두 명이 연지의 인적 사항을 물었다. 확인 좀 해주셔야 합니다.” 연지는 타의에 의해 병원으로 가야했다. 피부가 검게 변해 막 부패가 시작되기 시작하던 태성의 얼굴을 본 순간 연지는 실 신하고 말았다. 한 시간 정도 응급처치를 받은 뒤 깨어난 연지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통곡하였다. 태성을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최근 자신의 회사 옥상에서 인질 극을 벌이던 장면들이 영상으로 스쳐지나 갔다. 태성의 시신은 연지가 법적 으로 태성의 부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인수하여 장례 절차를 밟아야 했다. 아빠의 사망 소식을 알리고 가까운 친지들과 시댁에도 태성의 사망 소식 을 알렸다. 태성의 노모(老母)는 장례식장에서 연지의 머리채를 잡고 연지 에게 ‘남편 잡아먹은 년’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태성의 형제 들 역시 연지를 잡아먹을 듯 한 기세로 연지에게 아내로써 부덕한 행위를 노골적으로 질타하였다. 로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연지는 장례식장을 나와 인근 병원에 들러 잠시 휴식을 취했다. 다음날 서울 근교 화장장에서 가족들만 모인 간소한 장례식으로 태성은 이승과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연지는 태성의 유골을 아이들과 함께 가까운 사찰에 안치하고 돌아와 바로 병원에 입원하였다. 3일간의 길고도 힘든 날이 마치 100년이 지난 것 같았다. 두 아이들은 아빠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아빠를 잘 따르던 둘째 아이는 말이 없어졌다. 보았지만 무슨 이유인지 둘째 아이는 학교 가는 것조차 거부하려 들었다. 지금의 힘든 상황에서 의지할 사람은 태주 밖에 없었다. 그러나 태성의 죽음으로 심한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졌던 연지로서는 이상하게 태주 에게 다가가는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연지는 태성을 보내고 일주일 후쯤 지나 이삿짐센터의 의뢰해 태성이 살던 아파트의 문을 강제로 따고 들어가 정리를 하기로 하였다. 가구는 내다 버리고, 옷가지는 헌옷을 수거해 가는 사람들에게 줄 계획이었다. 머니가 장롱을 정리하다가 하얀 봉투를 연지에게 건넸다. 운 봉투에 무엇인지 가득 담겨 있었다. 연지가 봉투를 열자 통장과 서류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두 아이와 연지 의 명의로 된 통장이 각각 한개, 두 아이들과 연지 명의 보험증서와 태성 자신의 명의로 된 보험증서도 있었다. 그런데 태성의 보험증서의 계약자 및 보험금 수령인은 연지로 되어 있었다. 가 벼락 맞은 듯 깜짝 놀랐다. 큰 아이 통장에 8천만 원, 둘째 아이 통장에도 8천만 원, 연지 명의 통장에는 무려 5억 원이 입금되어 있 었다. 또한 연지와 두 아이들 명의로 보험증서에는 10년 전부터 보험금을 붓고 있었는데 네 사람 보험금으로 매달 200만원이 넘게 불입되고 있 었다. 연지는 갑자기 태성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지방에 내려가 있어서 가정과 아이들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줄 알았던 남편이 10년 전부터 자신과 두 아이들의 장래를 위하여 억대가 넘는 저축과 보험금을 들어 놓고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연지의 마음이 점점 무거워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 다. 연지가 나머지 서류를 뒤적이다 편지 한통을 발견하였다. 핑크빛 편지지에 빨간색 볼펜으로 정성스럽게 쓴 편지였다. 연지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펼쳤다.
“태주씨, 그 시신의 인상착의가 어떤데요?” 연지는 태성의 인질극을 떠
연지는 태성이 자신과의 이혼을 차일피일 미루기 위하여 고의로 피하고
태성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지 한 달이 훨씬 지난 추운 겨울 아침이
“응, 키가 175센티 정도고, 짙은 군청색 계통의 정장 차림이라고 하던
“태주씨, 그 사람 나에게 마지막으로 찾아왔을 때 군청색 정장을 입었었
“응, 라디오 뉴스라 자세히는 듣지 못했어. 그럼 내가 방송국에 알아보고
“태주씨가 그, 그래 줄래요? 나 무서워요. 만일 그 시신이 애들 아빠
“연지, 겁내지마. 아닐 수도 있어. 대한민국에 그 정도 인상착의는 얼마
태성의 일그러진 얼굴이 떠올랐다. 뒤를 돌아다보았다. 마치 남편이
“태, 택시, KBN 방송국으로 가주세요.” 연주는 차창을 열어 밖으로
‘아아, 그래, 저 무수한 하얀 나비들은 결코 내 손에 잡히지 않을 테지.
“기사님, 엔젤병원으로 가주세요.” 연주가 눈 속을 뚫고 병원에 거의
“아, 연지. 여기까지 웬일이야? 내가 알아보고 전화해준다고 했잖아.
“벌써 온 거에요? 난, 이제 막 도착했는데. 태주씨, 알아보셨어요?”
“연지, 우리 저 카페로 들어가지. 여긴 너무 추운데.” 태주는 걸어가면
‘아아, 나로 인하여 한 생명이 꺼졌구나. 이일을 어찌하나? 나의 욕심
“오후에 시신을 검시(檢屍)하려고합니다만, 지금 상태로 비록 약간의
완강하게 원칙을 말하는 경찰관에게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겠다고
“태주씨, 어디 아파요?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응? 그, 그래. 요즘 좀 무리를 했나봐.” 커피를 주문하고 나서 연지는 남
“태주씨, 알아봤어요?” 연지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연지.......” 태주는 연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
“놀라지 말고 내말 잘 들어. 아침에 라디오 뉴스에 나왔던 그 남자 연지
“정말이에요? 아아, 이런 일이 있으면 안 되는데......”
“연지, 내가 시신까지 확인했어. 그 남자가 틀림없었어.”
“태, 태주씨, 내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두려워요. 아이들한테는
“연지, 너무 걱정하지 마. 그 남자의 죽음과 연지는 무관해. 아무 걱정
‘아이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지금은 어려서 그냥 넘어간다지만
“연지도 몸이 안 좋아 보여. 회사로 가지 말고 그냥 집으로 가서 쉬는 게
“그래야 할 것 같아요.”
“부군께서 오늘 아침 한강변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병원에 가서
갑작스러운 일이라 연지는 혼자서 감당할 수 없었다. 두 아이들에게
장례예식장에 계속 있다가 친정 식구들의 견딜 수 없는 모욕감으로 스스
연지가 아무리 달래고 아빠의 죽음에 대하여 이해를 시키려고 노력해
“사모님, 여기 중요한 서류 봉투가 있어요.” 이삿짐센터에서 나온 아주
‘응? 봉투. 그이가 나에게 무슨 남길 게 있단 말인가?’ 크고 고급스러
‘아아, 이이가......’ 연지는 아이들 명의로 된 은행 통장을 살펴보다
여보, 사랑하오.
어쩌다 내가 당신에게 이승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를 쓰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구려. 당신을 만나 그동안 속만 썩였소. 세상을 너무 믿은 내가
어리석었소. 천사 같은 당신을 만나 한 세상 잘 살아보려고 했는데 그만
일이 어긋나 버렸소. 내가 누명을 쓰고 감옥생활을 할 때 면회 와서 나에
게 용기를 잃지 않도록 따뜻한 말을 해주던 당신의 미소는 저승에 들더라
도 잊지 않을 것이오. 또한 서울역에서 노숙자 생활을 할 때 나에게 용기
를 주던 당신은 분명 하늘에서 내려온 착한 천사가 틀림없었소.
당신에게 못된 짓을 하기도 했소. 이 못난 남편을 용서해 주기 바라오. 내 명의 아파트는 당신이 알아서 처분하고 당신과 두 아이들 명의로 약간의 돈과 보험증서를 전하오. 남편이면서 아빠인 내가 남겨줄 수 있는 게 이것이 전부라오. 지방에 내려가 돈을 모으기 위하여 하루 두 끼 혹은 한 끼로 허기 진 배를 채우고 모은 돈이라오. 큰돈은 아니지만 당신과 두 아이들이 살아 가는데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소. 우리를 갈라놓은 것이지 우리가 갈라놓은 것이 아니라고 믿고 싶어요. 나는 한번 맺은 인연의 끈을 쉽게 놓고 싶지 않았소. 당신은 하늘이 맺어준 나의 귀중하고 사랑스러운 배필이 틀림없소. 그러나 이제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 소. 두 아이들 잘 부탁하오. 내 먼저 가리다. 사랑하오. 저승에 들어도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절대 변함이 없을 거요. 당신 이 편지를 읽는 시간이면 나는 이미 저승에 들어 있을 거요. 사랑하오. 사랑하오. 장연지 내 사랑, 사랑하오.
돌아올 수 없는 강은 건넌 당신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아
누가 어떤 말을 하던 당신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은 변함이 없어요. 세상이
2009년 12월 어느 날
“으흐흐 흐흐흐......, 바보, 바보......” 연지는 남편의 속내를 모르고
함부로 대했던 지난날이 부끄러웠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
다. 연지 마음속에 그동안 굳어 있던 남편 태성에 대한 악감정이 눈 녹듯
사라지면서 연지는 자성(自省)하는 시간을 갖기로 하였다.
회사에 일주일 휴가를 내고 집에서 쉬면서 두문불출 하였다. 집 전화나
휴대전화도 받지 않기로 하였다. 태주가 전화를 하여도 연지는 받지 않았다.
연지가 전화를 받지 않자 태주는 연지에게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문자를
넣었다.
[연지, 사랑해. 무슨 일 있어? 전화를 받지 않으니까 불안하네. 이 문자
받거든 전화 좀 줘요. 사랑해요. - 태주] 연지는 태주의 문자를 보고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태주는 다시 문자를 보냈다.
[연지, 왜 그래? 정말로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내가 지금 집으로 갈게.
불안해서 못 견디겠어. 사랑해 - 태주] 다시 태주의 문자가 도착하자 연지
는 답신을 보냈다.
[태주씨, 저에게 일주일만 시간을 주세요. 생각할 게 많아요. 죄송해요.
일주일 후에 전화할게요. - 연지]
‘일주일씩이나? 연지가 갑자기 왜 그러지? 참으로 이상한 일이네. 예전
의 연지가 아니야. 뭔가가 연지의 마음을 흔들고 있는 게 분명해. 태성이
죽었는데 무엇이 연지의 마음을 흔들고 있을까? 연지 시댁 식구들이 연지
에게 협박이라도 하나? 아닐 거야.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나에게
도움을 청했을 거야. 그럼 도대체 왜 연지가 흔들리고 있는 걸까? 집으로
찾아가 볼까? 그래, 일주일만 기다려 보자.’ 태주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연지의 얼굴을 떠 올렸다.
일주일의 시간은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연지는 아침저녁
으로 두 아이들 등. 하교 시간에 맞춰 식사를 챙겨주는 일 말고는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서 지난 일들을 회고(回顧)해 보았다. 다행히 아이들은
연지의 보살핌 덕에 차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일은 홀로된 여자에게 있어 힘든 일이었다.
아침에 코냑을 서너 잔 마시고 잠을 청하기도 하고, 러닝머신 위에서
땀을 흘려 보기도 하였다. 지우려고 할수록 태성의 얼굴은 자꾸만 크게
클로즈업 되어 연지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법적으로 당당한 남편이면서 자신이 남편을 크게 오해한 점에 대하여
연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남편이 남긴 유서와 통장, 보험증서는
연지의 마음을 심하게 흔들어 놓았다. 연지는 10년 후를 생각해 보았다.
사람의 마음은 간사한 것이어서 지금은 자신이 태주를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철석같지만 예기치 못한 일로 인하여 애정에 금이 가는 일이 생
긴다면 연지는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을 것이며, 자신의 입지가 좋
지 않을 경우 세상을 비관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또한 태주와 제2의 인생을 시작할 경우 지금의 두 아이들이 태주의 성
을 따르고 태주를 믿고 의지할지 의심스러웠다. 지금은 아이들이 태주에
대한 적개심이 없거나 잘 모르기 때문에 그냥 넘어간다고 하여도 언젠가
는 자기 아빠를 죽게 한 사람이 태주라는 것을 알게 될 경우 걷잡을 수
없는 비극이 초래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울러 태주와 부부가 되어 살아갈 경우 두 집안 아이들 간에 벌어질
예상치 못한 일들과 만일 태주의 마음이 변하여 태주의 아이들을 태주
가 직접 건사한다면 일면식도 없는 태주의 아이들을 건사하며 어미 노릇
을 해야 하는 복잡한 일들이 큰 부담이 될 것이 뻔했다.
‘아아, 내가 잘못 생각한 거야. 태주씨와 결혼하더라도 내가 바라던
이상(理想)적인 생활은 거리가 멀어. 혹을 달고 어딜 간단 말인가? 태주
씨도 혹이 있고 나도 혹이 있는 상황에서 만나 무슨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나의 운명이고 태주씨가 그리된 것은 태주씨의 운명
이야. 그냥 나는 나대로 태주씨는 태주씨 대로 지금처럼 사는 게 현명할
거야.
그것이 가장 현명한 처사가 분명해. 나 하나의 욕망을 채우자고 어린
아이들에게 상처를 줄 수 없어. 지금처럼 태주씨와는 연인 같은 친구로
지내는 것이 좋아. 그런 방법이 서로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평생 유지되
면서 서로를 그리워 할 거야. 그러나 태주씨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변덕쟁이? 갈대 같은 여자? 아니면 못 믿을 여자? 용기를 내야해. 부부
로 사느니 차라리 다정다감한 연인으로 사는 방법도 괜찮아. 그래, 그렇
게 하자. 태주씨는 나를 이해해줄 거야. 태주씨는 고고하고 순결한 한 마리
나비로 살아가려는 나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해 줄 거야.‘ 마음의 정리를
끝낸 연지는 바로 태주를 만났다.
“연지가 정 그렇게 하겠다면 나도 말리지는 않겠어. 나도 지난 일주일간
심사숙고를 해보았어. 나로 인하여 연지와 연지의 두 아이들이 불행해지
는 것 같아 괴로웠어. 지금처럼 영원히 우리는 부부가 아닌 부부보다 더
행복한 한 쌍의 나비가 되는 거야. 충분히 연지의 마음을 받아들일게.
고마워 연지.” 연지는 태주에게서 예상외의 반응이 나오자 섭섭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었다.
“태주씨, 우리 예전의 연인(戀人)으도 돌아간 거죠?”
“그럼, 예전의 연인보다 더 사랑하는 연인이 된 거야. 영원히 연지를 사랑
할거야.”
“아니에요. 이승에 있을 때만 사랑해주세요.”
“이승에 있을 때만?”
“......” 태주는 묘한 표정으로 연지와 잔을 마주하며 ‘이승에 있을 때만
사랑해 달라’는 말의 의미를 곱씹어 보았다. 은은하고 아늑한 공간에 둘만
의 시간이 정지된 듯 했고 새해의 먼동이 터오는 호텔 객실 창밖에 조용히
서설(瑞雪)이 내리고 있었다.
- 끝 -
_()_ 끝까지 함께해 주신 임에게 머리숙여 고마움을 표합니다.
곧 다른 작품으로 다시 인사올리겠습니다. 여여하소서.